복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암, 낙상, 파킨슨 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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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자 요한 바오로 2세의 암, 낙상, 파킨슨병
그토록 담대하고 한때는 그토록 건장했던 요한 바오로가
1990년대 중반부터는 지팡이에 의지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천년대가 마감하여 마음은 급하기만 한데 그의 걸음걸이
는 갈수록 느려졌다. 운명의 역설이었다! 1994년 말 그의
이미지가 모두에게 '고통의 인간'으로 비칠 무렵 미국 타
임지는 그를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다!
카롤 보이티아는 저격에서 입은 상처에서는 회복되었지만
그때부터 고통의 조짐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결장에 암이 생겨 수술을 받은 해였다. 왼손이 떨리는 증
세가 처음으로 나타났다. 그때ㅜ터는 절기마다 줄곧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야 했다.
1993년 11월에는 군중 앞에서 처음으로 넘어졌다.
축복의홀이라는 장소에서였다. 1994년 4월 28일 두 번째로
넘어졌는데 훨씬 심각했다. 교황 사저 화장실에서 넘어진
것이다. 욕조에서 나오다 젖은 바닥에 발이 미끄러져 넘어
졌고 오른쪽 무릎이 골절되었다. 보철을 삽입했고 지팡이
사용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얼마 뒤 그가 넘어지는 사고가 파킨슨병에서 오는 운동신
경부전에서 기인한다는 것이 알려졌다. 하지만 한동안 그
런 경과가 설명 없이 이어졌기에 교황을 직접 보거나 텔
레비젼에서 바라보는 사람들한테 걱정이 늘어났다.
1995년 성탄절에는 토기(吐企) 또는 복통으로 인해 '로마
와 전 세계에 보내는 메시지' 낭독을 중단해야 했다. 당분
간은 알수 없는 병에서 야기된 복통이었다. 그래서 1996년
3월과 8월에는 어쩔 수 없이 여러 번 활동을 중단해야 했
다.
원인을 알 수 없는 그 병은 만성추우수염으로 판명되었고
10월 8일에 수술을 했다. 물론 언제나 로마의 제멜리 병
원(교황 전용병원)이었다. 그 병원에는 전부 116일간, 넉
달 가까이 입원했다. 거기에 2005년 2월과 3월의 두 차례
입원으로 25일을 보탰다. 이번에는 급성 호흡기 질환이었
는데 결국 사망에 이르고 만다.
1997년에는 신경 질환의 급속한 진행으로 경련과 보행과
언어 장애를 초래했고 얼굴을 마비시켰다. 대변인은 신경
조직의 '외추체골막(外推體骨膜)'으로 소급되는 증후군이
라고 밝혔다. 파킨슨병이 속하는 바로 그 골막이었다.
1998년 1월 11일에는 시스티나 경당의 에식 초반에 교황
이 조는 듯 현기증이 ㅇㄹ어난 듯 앞으로 넘어질 것처럼
보이던 순간, 의전관 마리니가 재빠른 동작으로 교황을
부축했다. 몸을 앞으로 내밀 적에다리를 경직시키는 파킨
슨병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러한 곤란이 그의 시대적 과업을 가로막지는 못
했다. 같은 달 쿠바 여행을 강행했고, 1998년 성 금요일에
는 바람이 불고 비가 쏟아져 젊은 사람들까지도 겁을 먹는
날씨임에도 콜로세움에서 십자가의 길을 집전했다. 그 절
룸발이 걸음으로, 경직돼 가는 얼굴로 요한 바오로는 대희
년의 축전을 개시하여 결연하게 3천년기를 맞이했다.
교회가 3천년기로 들어선 다음 더 심한 증세가 찾아왔다.
움직일 수가 없고 점점 말을 할 수 없었다. 1992년 암에
서 시작하여 요한 바오로 2세가 겪은 병원생활의 비아크
루치스(십자가의 길)가 띠는 특징 하나는 그가 자기 병
세에 대하여 스스로 세상에 밝히는 논평이었다. 입원에
대해서도 본인이 소식을 알리고 건강회복의 정도를 군중
에게 계속해서 전해 주며 가기 걸음걸이에 대해 농담을
하고 지팡이로 장난을 치고 기자들의 질문에는 정확하게
요점을 짚고 풍자를 섞어 답변했다.
"지금 여러분에게 비밀을 하나 털어놓겠습니다. 오늘 저
녁 나는 제멜리 병원(교황전용병원)에 갑니다. 몇 가지
진찰을 받으러 말입니다."
1992년 7월 12일 주일 낮에 교황 사저 창문에서 성 베드
로 광장에 모인 군중에게 한 말이다.
결장에 생긴 암 때문에 받은 수술에서 회복되었는데 그때
부터 일 년 후기자들에게 이런 경과보고를 했다. 1993년
8월 9일 로마에서 킹스턴(자메이카)으로 가는 비행기에서
였다.
"지금까지는 내 발로 걷고 있소. 산에서도 말이오. 내 몸
을 추스르기 위해, 문제를 일으키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
하는 중이오."
덴버(미국)에서 청년들과 보낸 멋진 날을 절정으로 하는 그
여행을 앞두고 있었다. 여하튼 요한 바오로는 활동을 계속
하는데, 이제 병세가 그를 배반하기 시작했다. 그는 병세에
자기를 맞추면서 그 사실을 보도하기도 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지난 목요일 나는 잠시 병원에 머물지
않으면 안 되었어요. 그날 알현을 끝내고서 참석자들에게
가까이 가려고 강단에서 내려오다 계단에서 넘어졌단 말입
니다."(1993년 11월 14일, 주일 인사에서)
"(조직을 떼내어) 부족한 교황이 여러분에게 인사를 드립
니다. 그렇지만 아직 다 떼낸 것은 아닙니다."(1993년 11
월 21일. 이탈리아 사람들한테는 "정신이 더 떨어진 교황
이지만 아직 실권하지는 않았습니다." 라는 문장으로 들
렸을 것이다.-옮긴이)
그는 다시 쓰러졌고 이번엔 훨씬 중했다.
그래서 의사들은 그 기회를 이용해서 그의 신체 상태를 면
밀히 관찰했다.
"의사들이 나를 조직 깊숙한 데까지 검사하고 있습니다.
그처럼 조직 기관이 많고 여러 기능이 있는지 미처 몰랐
습니다."(1994년 5월 22일 제멜리 병원에서의 주일인사)
다시 회복햇고 보철도 몸에 익은 듯 했다. 다시 발을 끌
게 되었지만 이제 스스로 웃어넘기고 교황 재위 기간을
두고 농담도 하게 되었다.
"(교황을 뽑는)콘클라베를 열지 않고서도 바티칸에 추기경
들이 이렇게 많이 모였다는 것은 참 좋은 일이오" 1994년
6월 14일 추기경들과 식탁을 함께하면서 한 말이다.
세계 언론은 보이티아 이후에 대한 예측 기사를 내놓기
시작했다. 그는 일반 알현과 주일 인사에 끊임없이 모이는
군중도 가기가 어떠한지를 알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감지했
다.
"주일마다 여러분은 교황을 감시합니다. 잘 있는가, 좋아
지고 있는가 하고 말입니다. 우린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1994년 6월 19일, 사저 창문에서)
이 사람은 극히 자연스럽게 삶을 바꾸었고 조국도 바꾸었
으며 이름도 말도 바꾸었지만 걸음걸이를 바꾸는 데는 얼
마나 힘이 들었는지 모른다.
"지팡이를 짚고 걸어가면서 연극을 하라니 참 마음에 안
듭니다."1994년 7월 지팡이를 사용하라는 의사들에게 털
어놓은 말이었다. 그렇지만 다음 달에는 벌써 지팡이와
친숙해졌으며, 지팡이의 기능을 칭찬하는 의사한테 "내가
지팡이를 들고 다니지 지창이가 나를 들고 다니는 게 아
니란 말이오!"라고 대꾸했다.
그는 병세를 두고 대응하는 데 농담으로 일관했다.
"성하, 어떠십니까?" 산에서 사람들이 묻는다면 "가엾은
마귀 신세요!"(Come un povero divolo! "참 안됐소" 라는
의미의 이탈이 구어-옮긴이)라고 대답했다. 이런 대답은
르네상스 시대의 농담을 즐기는 로마인 교황들이라면 한
때 했음직한 것이지만 최근 몇십년의 근엄한 교황들이라
면 감히 입에 올리지 않을 말투였다.(1994년 8월 17일 아
오스타 인트로드에서)
"그래도 움직이긴 한다오!"(Eppure si muove!는 갈릴레오
가 했다는,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는 유명한 구절이다)
이것은 1994년 10월 6일 주교 시노드 회의장에서 의장석
에 이르는 20여 미터의 거리를 걸어가면서 시간이 하도
많이 걸리자 혼잣말로 했던 소리다.
광장에서 사람들이 외치고 있었다.
"교황 만세! 교황 만세!" 그가 한마디 덧붙였다.
"아직은 살아 있어"(만세를 뜻하는 이탈리아어 Viva!는
오래사십시오!<만수무강하십시오>라는 의미이지만 문법
상으로는 '죽지 말고 사십시오! 라거나 '살아나십시오!
라고 들린다.- 옮긴이 1994년 10월 8일)
손이 떨리는지, 다시 휘청이며 넘어지느지 보려고 망원
경으로 자기를 관찰하는 기자들은 이런 말로 그한테서 빈
축을 샀다.
"여러분도 봤지만 연설문이 한장도 떨어지지 않았소! 종
이가 다 손에 들려 있다구요!(1994년 11월 5일 시라쿠사
에서)
그의 이탈리어는 연이은 악운과 싸우는 데 보탬이 되었고
폴란드어로는 좀 더 상세한 현황을 간추리기도 했다.
"여러분은 이 교황이 어떻게 등장하는지 모고 싶어서 왔
을 텐데 오기를 잘했습니다. 사람들 말로는 교황이 늙어
가고 지팡이 없이는 걷지를 못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
느 모로는 아직도, 아직도, 아직도.....! 목소리를 내고
있어요. 머리 돌아가는 것도 그다지 나쁘지 않아요."
(1995년 1월 11일, 일단의 폴란드인들에게)
기자하들한테도 분명히 하고 싶었다.
"모든 게 잘 되고 있어요. 다만 다리가 아직 튼튼해지지
않았어요. 보다시피 지팡이로 이 다리를 지탱해야 하지
요. 이게 사실주의에 입각하고 의료 심리학에 의거한 상
황이올시다."(1995년 1월 11일, 로마 마닐라간 기내에서)
때로는 그의 병세가 직접 보도되고 월드비전으로 중계되
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병마의 갑작스런 공
격에 예고가 없는 중계였다. 다행인 것은 그런 메시지가
우리가 익숙해져 있었다는 점이다.
"죄송합니다. 중단해야겠습니다.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여러분에게 축복을 내리소서.'(1995년
성탄절, 로마와 전 세계에 보내는 메시지)
교황의 오랜 병원 입원에 대한 보도가 여러 번 나오는
바람ㅂ에 그는 짤막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기도하세
요. 그러나 안심하세요!" 1996년 10월 6일 제멜리 병원에
들어가면서 한 인사였다.
병고와 친숙해지다 보면 죽음에 대한 생각에 이른다.
처음에는 농담 섞인 어조였다. 사람들이 '교황 만세!"를
외치자 교황이 화답한다.
"이렇게 외쳐대면 죽기가 힘들어질 것입니다. 하지만 그
순간은 결국 오는 법입니다."(1994년 12월 26일, 카스텔
간돌프에서)
처음으로 진지하게 죽음을 언급한 것은 젊은이들과 함께
있던 자리였다. "여러분 모두는 이미 제3천년기에 속합니
다. 나는 모르겠습니다. 아마도..."(1995년 4월 30일 , 트
렌토에서)
자신이 제3천년기를 맞을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모세가
약속의 땅을 바라보았듯이 멀리서 바라보기만 해야 할 것
인가하는 의문을 자주 피력했다.
"혹시 주님께서 내가 이 2천 년대를 보게 허락하실지, 3천
년기의 시작을 보게 해주실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1995
년 11월 19일 로마 카스텔 디 데치마의 성 마르티노와 성
안토니오 아바테 본당에서)
그렇지만 요행스럽게 농담할 욕심이 없어지지 않았다. 사
람들이 백수(百壽)를 누리소서라는 노래를 불렀을 때였다.
교황이 한마디 거들었다.
"그렇다면 나한테는 22년, 아니 23년이 남았네?"(1997년
5월 18일, 로마 피에트랄라타의 성 아타나시오 본당에서)
"성하, 성하의 노년을 두고 감사드립니다!" 200년 1월 12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에르네스토 울리베로가 드린 인사였다.
보이티아는 "하지만 난 노인이 아니오!"라고 대꾸했다.
이 장을 이 농담으로 마치는 게 좋겠다. 요한 바오로 2세가
언제나 자기 고통에 대응하던 용기에 경의를 표하면서...
- 세상은 당신이 필요합니다. 중에서 -
◈◈알퐁소 성인의 사랑의 기쁨 중에서◈◈
침묵속의 외침 http://cafe.daum.net/jybnag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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