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에는 3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문자文字반야가 있고 둘째 실상實相반야가 있으며 셋째 관조觀照반야가 있습니다 앞서 나는 반문했지요 반야가 문자 속에 있느냐고요 반야가 문자에 갇히지 않을 뿐이지 문자 속에 반야가 없다는 게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반야는 중성미자中性微子와 같습니다 중성미자는 원자물리로서 원자핵 속에 들어있는 극히 작은 미립자微粒子입니다 영어로는 뉴트리노Neutrino며 양성자처럼 양성도 아니고 전자처럼 음성도 아닌 중성이기에 중성미자입니다 뉴트Neut가 중성을 뜻하니까요
나는 생각합니다 반야는 중도中道라고 말입니다 양성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음성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뉴트리노처럼 자유로운 까닭에 질량을 거의 지니지 않고 어디든 자유자재로 갈 수 있지요 뉴트리노는 거침이 없습니다
가령 지구 7억4천만 개를 일렬로 늘어놓더라도 빛의 속도로 그냥 통과합니다 실제로는 1광년 두께의 무쇠를 광속으로 거침없이 통과한다 하는데 이해를 돕기 위해 지구를 끌어왔지요 왜냐하면 1광년은 약 10조km며 이는 지름 13,500km의 지구를 7억4천만 개 늘어놓은 두께이니까요
반야는 거침이 없습니다 거침이 있다면 반야가 아닙니다 그러기에 문자 속에도 들어가고 종이책이든 컴퓨터 속에든 전자책Electron-Books이든 자기책Magnetism-Chips이든 어디든 할 것 없이 다 들어갑니다 따라서 옛 선인들이 문자반야를 이야기한 것은 선견지명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둘째는 실상반야지요 실상이란 리얼리티Reality입니다 사실대로요, 있는 그대로지요 실상무루實相無漏가 있습니다 실상은 무루라니요? 도대체 무슨 말이며 어떠한 뜻이 담겨 있을까요
실상의 실은 열매실實자며 다다르다 할 때는 이를지實지요 이름씨名詞로는 열매 씨 종자 공물貢物 재물 재화 내용 바탕 본질 녹봉 월급 자취 행적 참됨 실다움 진실 마음 솔직 정성 따위가 있습니다
움직씨動詞로는 영글다 굳다 자라다 튼튼하다 실제로 행하다 책임을 다하다 넣다 채우다 적용하다 밝히다 등이 있습니다 어찌씨副詞로는 참으로 진실로 드디어 마침내 따위가 있습니다
이르다 다다르다 도달하다 등이라 할 때는 이를<지>로 발음을 달리합니다 옛날 우리글이 없던 우리나라에서는 한자를 빌려서 의사를 표시했고 그러다보니 같은 글자가 사용처에 따라 발음을 달리했지요 오늘날 중국어에서도 같은 글자를 놓고 발음을 달리하는 경우는 있지만 일반적으로 성조聲調를 달리하지요
그런데 이 실實이라는 한자에는 불교에서 설명하고자 하는 반야의 다른 고유명사 실상반야의 뜻이 담기지 않습니다 그게 말이 된다고 보는지요 상相은 드러난 모습이고 이미 실實속에 들어있어야 하는데요
문자반야 입장에서 보면 실이라는 단 한 글자 속에도 반야가 담겨 있어야 하고 반야를 표현할 수 있어야 하는데 아쉽게도 그렇지 못합니다 따라서 실實과 상相이 묶여 있어야 바야흐로 어느 정도 반야세계를 표현할 수 있습니다
실상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모양상相자를 뒤에 붙이고는 있지만 실상은 있다와 없다를 꼬집어 표현하고 설명할 수 없지요 마찬가지로 뉴트리노도 있다 없다를 표현할 수 없습니다
반야를 얘기하면서 뉴트리노를 비유로 든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비유는 어디까지나 그저 비유일 뿐 물리의 세계 뉴트리노와 정신세계의 총아인 반야를 어떤 경우든 하나로 볼 수는 없습니다
요즘은 중성미자 가속기로써 뉴트리노를 충돌시켜 정체를 밝혀내었다고는 하지만 그러나 뉴트리노가 바로 이것이라며 자신있게 설명할 물리학자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독일의 물리학자인 베르너 하이젠베르크(1901~1976)의 불확정성의 원리 때문입니다
셋째는 관조반야입니다 한 학인이 물었습니다 "스님, 불교사전에서는 첫째가 실상반야고 둘째가 관조반야며 셋째가 문자반야 순으로 되어있던데 스님께서는 맨 뒤에 있는 문자반야를 왜 맨 앞으로 가져오셨어요?" 그래서 내가 대답했습니다 "그건 내 맘일세."
학인이 따지듯 다시 물었습니다 "스님. 그래도 그렇지요 스님 맘대로 바꾸시면 되나요?" 그러니 또 내가 답을 할 수밖에 "허! 이 사람 그건 내 맘이라니까 반야가 순서 좀 바뀌었다고 그래 뭐, 푸념이라도 하던가?" "아! 네 큰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