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전쟁 나면 조국위해 자진해서 싸우겠냐/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① 전우야 잘자라(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유호 작사, 박시춘 작곡, 현인 노래
서울수복과 함께 국방부 정훈국 소속으로 문예중대가 창설되어 많은 가요인들이 문관으로 종군하였다. 이 문예중대에 입대한 작사가 유호와 가요작가 박시춘은 북진하는 아군의 사기를 돋우는 노래로 「전우야 잘자라」를 만들었다.
이 노래 가사를 살펴보면
1절에는 6.25 전쟁 초기 낙동강 방어선까지 밀렸던 국군이, 인천상륙 작전의 성공으로 북으로 진격하는 모습을 생생히 그리고 있고 그래서 전쟁 가요로서 일명 북진의 노래로 불리고 있다.
2절에서는 꽃다운 청춘의 나이에 조국을 위해 싸우다가 연기처럼 산화한 전우를 뒤로하고 북으로 진격하는 용사들의 모습을 표현한 노랫말이 그 시절의 참담한 전쟁 상황을 잘 묘사하고 있다.
3절에서는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서울까지 밀려나는 국군의 모습을
4절에는 삼팔선을 중심으로 조금의 영토라도 더 회복하려는 전쟁 말기의 치열한 전투의 모습이 보여지고 있다.
6.25 전쟁의 대략을 4절의 가사를 통해서 모두 엿볼 수 있을 만큼 잘 묘사되어 있고 아름다운 노래말과 곡조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았다. 이 노래가 정식 군가로 채택되지 못한 이유는 지나치게 감상적인 노래말 때문이었다고 한다. 군가는 아니지만 이 노래는 딱딱한 군가보다 많이 불리웠고 또 6·25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노래가 되었다.
① 전우야 잘자라(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1)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낙동강아 잘 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
원한이야 피에 맺힌 적군을 무찌르고서
꽃잎처럼 떨어져간 전우야 잘자라
2)
우거진 수풀을 헤치면서 앞으로 앞으로
추풍령아 잘 있거라 우리는 돌진한다
달빛 어린 고개에서 마지막 나누어 먹던
화랑담배 연기 속에 사라진 전우야
3)
고개를 넘어서 물을 건너 앞으로 앞으로
한강수야 잘 있구나 우리는 돌아왔다
들국화도 송이송이 피어나 반기어주던
노들강변 언덕 위에 잠들은 전우야
4)
터지는 포탄을 무릅쓰고 앞으로 앞으로
우리들이 가는 곳에 삼팔선 무너진다
흙이 묻은 철갑모를 손으로 어루만지니
떠오른다 네 얼굴이 꽃같이 별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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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전선야곡(戰線夜曲)
유호 작사, 박시춘 작곡
2011년 영화 "고지전" 에서 신입병사가 애절하게 불러 다시 유명세를 타게 된 노래다.
이 노래는 전쟁 당시 우리 군 중대 및 에릭고지를 두고 다툼을 벌이던 북한군에까지 유행하게 되었다고 한다.
전쟁에서 죽은 사람들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아들이나 남편을 잃은 후방의 사람들의 고통도 그에 못지 않았다.
‘정한수 떠 놓고서 아들의 공을 비는 어머님의 심정’을 어찌 말로써 헤아릴 수 있을까. 영국인들에게 있어서 전시에 자전거를 타고 전보를 배달하는 소년이 찾아오는 것은 공포 그 자체였다고 한다. 전사 통지서가 전보를 통해 배달되었기 때문이다.
1950년 6월 25일부터 휴전협정이 이뤄진 1953년 7월 27일까지 6·25전쟁에 참전한 만 18세 미만 소년병 수는 29,603명이었다. 이 가운데 2,573명이 전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참전 소년병 중 약 7,500명은 생존해 있다고 한다.
3년 1개월간의 6·25전쟁에선 국군 전사자와 실종자 17만여 명, 부상 45만여 명, 민간인 사상자와 행방불명자 100만 명의 희생자를 냈다. 전쟁 미망인 20만여 명과 고아 10만여 명의 상처도 깊다.
그러나 한반도는 전쟁이 언제, 왜 일어났는지도 모르는 안보 무지(無知)의 세대가 대세를 이루고 있으니, 전선야곡(戰線夜曲)은 더욱 슬픈 노래로 들릴 뿐이다.
② 전선야곡(戰線夜曲)
1절)
가랑잎이 휘날리는 전선의 달밤
소리 없이 내리는 이슬도 차거운데
단잠을 못 이루고 돌아눕는 귓가에
장부의 길 일러 주신 어머님의 목소리
아~ 그 목소리 그리워
2절)
들려오는 총소리를 자장가 삼아
꿈길 속에 달려간 내 고향 내 집에는
정안수 떠 놓고서 이 아들의 공 비는
어머님의 흰 머리가 눈부시여 울었소
아~ 쓸어안고 싶었소
3절)
방아쇠를 잡은 손에 쌓이는 눈물
손등으로 씻으며 적진을 노려보니
총소리 멎어버린 고지 위에 꽂히여
마음대로 나부끼는 태극기는 찬란해
아~ 다시 한번 보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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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눈물 젖은 두만강
현명철, 김용호 작사 이시우 작곡
우리 조상들은 독립투사가 되어 두만강을 건너 집을 떠난 남편과 아들의 생사를 확인 할 길 없어 피눈물을 흘리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두만강 나루는 사랑하는 남편, 아들과 이별하는 여인들의 오열이 그칠 새가 없었다. 이때의 민족 애환을 담은 노래가 바로 일제 시대를 배경으로 1930년대에 발표된 ‘눈물 젖은 두만강’ 이다.
1930년대는 일제의 탄압이 날로 극심해져, 노래 가사를 짓는데 은유법을 쓰지 않으면 안 되었다. ‘눈물 젖은 두만강’ 노랫말 속에, ‘님’ 역시 사랑하는 연인이 아닌 우리 겨레, 조국과 독립투사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 노래를 창작하게 된 데는 다음과 같은 눈물겨운 사연이 담겨 있다. 일제의 억압이 극심했던 1935년 일제시대 유랑극단 ‘예원좌’라는 악단 일행이 중국 용정에서 부터 시작하여 순회공연을 다니던 중 두만강 하구에 위치한 작은 도시인 ‘도문’에서 조선인이 운영하는 한 여관에 여장을 풀었을 때였다. 그런데 이날 밤, 난데없이 여인의 비통한 울음 소리가 너무도 처절하여 일행 모두가 잠에서 깼다.
이시우 씨는 다음날 여관집 주인에게 그 여인의 사연을 물어보았다. 여인의 남편은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고향을 떠나 두만강을 건넜는데, 얼마 후 일본 경찰에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도 두만강을 건너 남편이 끌려간 형무소를 찾아갔으나, 이미 총살당한 후였다는 것이다. 나라 잃은 슬픔에 남편까지 잃고 설움에 겨운 여인은 마침 그날이 남편의 생일이라 생일상 겸 제사상 술을 부어 놓고 그만 울음을 터뜨렸던 것이다.
작곡가 이시우 씨는 그 여인의 사연을 듣고 큰 충격을 받고, 두만강을 건너는 그들이 나라의 독립을 꿈꾸며 흘렸을 피눈물과 그들의 부모와 처자식이 겪어야 했던 말할 수 없는 고초를 두만강의 물줄기에 빗대어 작곡을 하였다.
현명천 시인이 1절 가사를 썼고, 2,3절은 김용호 시인이 지어, 1938년 김정구씨 에게 노래를 부르게 함으로써 공식적으로 발표되었다. 후렴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희생된 남편을 향한 그리움에 목메는 여인의 애절한 호곡 소리는 “그리운 내 님이여”로 승화되었고, 빼앗긴 조국에 대한 그리움으로 은유되었다.
나라 잃은 서러움 때문인지 이 노래는 세상에 나오자마자 큰 반응을 얻었다. 그래서 1943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조선인을 자극하는 민족성이 강한 노래’로 낙인찍혀, 발매 및 가창금지곡으로 지정되었다. 이로 인해 ‘눈물 젖은 두만강’은 6․5 동란 이후에야 널리 애창되었는데, 실은 1930년대 일제 학정이 극에 달했던 배경 속에서 나라 잃은 민족적 아픔과 비극, 그리고 속히 독립되기를(님이 오시기를) 열망했던 노래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③ 눈물 젖은 두만강
1절)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젓는 뱃사공
흘러간 그 옛날에 내 님을 싣고 떠나간 그 배는 어디로 갔고
그리운 내 님이여 그리운 내 님이여 언제나 오려나
2절)
강물도 달밤이면 목메어 우는데
님 잃은 이 사람도 한숨을 쉬니 추억에 목메인 애달픈 하소
그리운 내 님이여 그리운 내 님이여 언제나 오려나
3절)
임 가신 강 언덕에 단풍이 물들고
눈물진 두만강에 밤새가 울면 떠나간 그 님이 보고 싶구나
그리운 내 님이여 그리운 내 님이여 언제나 오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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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황성옛터
왕평 작사, 전수린 작곡
일제 강점기 36년은 우리나라의 유구한 역사 이래 최악의 수난기요, 수치의 역사였다. 일제의 식민지 노예로 전락한 우리 민족의 슬픔은 너무도 처절하였다. 당시 조선인이라면 1928년에 발표된 ‘황성옛터’를 듣고 망국의 설움에 울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황성옛터의 본 제목은 ‘황성(荒城)의 적(跡)'(황폐한 성읍의 발자취)이며, 일제 시대 항일 노래 작사가 왕평(본명: 이응호, 1908-1940년)씨가 작사하고, 작곡가이자 바이올리니스트인 전수린(1907-1984년)씨가 곡을 붙였다.
황성옛터의 ‘황성’은 왕의 성을 뜻하는 것으로, ‘황성옛터’로 널리 알려진 개성 만월대(滿月臺)는 고려의 옛 궁궐터이다.
이 노래가 창작된 배경은 1928년 악극단 취성좌(후에 조선연극사) 단원들이 만주 일대에서 신의주, 평양까지 공연을 마치고 비가 내려 공연을 할 수 없어 여관에 머물 때, 극단의 배경음악 연주자였던 바이올리니스트 전수린과 왕평이 만월대 옛터를 찾아갔으나 풀벌레 우는 소리만 쓸쓸하게 울려퍼질 뿐이었다.
전수린과 왕평은 권력의 무상함과 나라 잃은 사람들의 아픔을 생각하면서 그 초라한 옛터의 모습이 지금 일제 치하에 있는 민족의 서글픈 신세와 다를 바 없음을 떠올린 것이다. 여관으로 돌아와 만월대의 밤을 회상한 전수린은 바이올린을 들어 즉흥적으로 연주하여 오선지에 옮겼고, 그 멜로디에 왕평이 가사를 붙였다.
1928년, 악극단 취성좌가 순회공연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와 극장 단성사에서 연극 공연의 막간에 이애리수(당시 18세)가 이 노래를 불러 관객들의 심금을 울렸다. 이애리수는 일약 스타가 되어 첫 ‘국민가수’로 불리게 되었고, 사람들은 연극 공연보다 이애리수의 노래를 듣기 위해 극장에 모여들어 늘 초만원을 이루었다.
또한 이 노래는 망해버린 고려 왕조의 사적을 통해 역사적 비애를 떠올리게 하고, 곧 일제에 의해 짓밟혀 아무 소망 없는 황무지처럼 되어버린 식민지 현실을 자각하게 하였다.
민족정서가 강한 노래였기 때문에 일제 당국은 이 노래로 민족적 집단의식이 생길 것을 우려하여 주시하였고, 공연이 있을 때마다 이 노래로 눈물의 합창을 하자, 종로서의 임석 일본 경관이 무대 위로 올라가 공연을 중단시켰으며, 후에 금지곡 처분을 내려 강력히 탄압하였다.
이 노래의 작사가 왕평과 작곡가 전수린은 종로서에 끌려가 밤새 조사를 받고서야 풀려났으며, 대구의 한 보통학교에서 음악 시간에 이 노래를 가르친 교사는 파면을 당하기도 했다. 가수 진방남(작사가 반야월)이 신인가수 시절에 이 노래를 부르다가 일본 순사에게 끌려가서 혹독하게 문초를 받고 겨우 풀려나오기도 했다.
실로 황성옛터는 일제 형극(荊棘)의 36년 그 모진 세월 속에 함께 울고 몸부림치며 불렀던 우리 민족사에 길이 남을 옛노래이다.
④ 황성옛터
1절)
황성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서린 회포를 말하여 주노라
아- 가엾다 이 내 몸은 그 무엇 찾으려
덧없는 꿈의 거리를 헤매어 왔노라
2절)
성은 허물어져 빈 터인데 방초만 푸르러
세상이 허무한 것을 말하여 주노라
아- 외로운 저 나그네 홀로 잠 못 이뤄
구슬픈 벌레 소리에 말없이 눈물져요
3절)
나는 가리로다 끝이 없이 이 발길 닿는 곳
산을 넘고 물을 건너서 정처가 없이도
아- 한없는 이 심사를 가슴 속 깊이 품고
이 몸은 흘러서 가노니 옛터야 잘 있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