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기획 - 잊혀져가는 우리 사찰음식을 찾아서>는 자연 재료들로 빚어내는 사찰음식을 통해 우리 전통 음식 문화의 원형을 되짚어보고자 마련했다. 이를 위해 깊은 산골 암자 등을 찾아 아직도 오롯하게 지켜지고 있는 절집의 숨은 맛을 발굴하고, 사찰음식 전문가 스님들의 자문을 받아 복원, 소개함으로써 우리 사찰 공양의 무화적 의미를 되짚어 보고자 한다. 이 기획은 격월로 실린다. _편집자
비자가 절집 과자가 된 사연주목과의 상록교목 비자나무는 우리나라에서 예부터 매우 귀한 대접을 받아온 식물이다. 고려시대 때부터 이미 나무의 분포 지역과 조정에 바치는 세공(歲功) 등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로 유서가 깊은 명목(名木)이다. 비자나무는 목질이 단단하면서도 신축성이 있고, 독특한 향과 아름답고 조밀한 무늬에 촉감이 매끄러우며 마찰음은 깊고 맑게 울린다. 더하여 열매는 구충과 통변의 효능으로 왕실에까지 진상되던 약재였다. 목재는 건축과 가구, 바둑판의 최상급 재료로 쓰이고, 열매는 백성의 구충제로 쓰이니 국가적으로 애지중지 관리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비자나무는 단독으로 있든 숲으로 있든 거의 모두 천연기념물 아니면 신목(神木)으로 등재되었을 정도로 특별한 보호를 받고 있다. 그중에 제주 비자림과 해남의 해남 윤씨 종림을 제외한 대부분의 비자숲이 남도권의 천년고찰 경내에 조성된 사찰림이다. 짐작컨대 비자나무는 이 땅에 전래된 초기부터 우리 불교와 깊은 인연을 맺어왔음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조선왕조의 억불정책이 횡행하던 시절, 관으로부터 학승들까지 강정 만들기를 종용받던 핍진한 내막 속에 그 쌉싸래한 열매가 어렵사리 ‘절집 과자’로 자리매김하게 된 사연이 숨었음직도 하다.
군음식을 피하는 수행승들이 여법한 사찰에서 한과류를 만들게 된 계기가 바로 불교의 위상을 깔아뭉개고 스님들을 욕보이기 위해 짜낸 조선왕조의 억불정책에서 비롯되었음이니, 구충제로 널리 보급하고도 남은 비자열매를 대안 식품으로 활용할 연구를 하던 중에 자연스레 ‘비자강정’이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미루어 짐작이 된다는 말이다.
녹우당에서 대물림되어온 가문 음식
비자강정을 찾아볼 생각이 난 것은 설 명절이 가까워서만은 아니었다. 고소한 것만도 아니고 쌉싸래한 것만도 아니고 달콤한 것만도 아닌 비자강정의 깊고 오묘한 맛과 향을 소개하는 사람들마다 그것이 해남의 녹우당(해남 윤씨 종가)에서만 대물림되어오는 ‘가문 음식’임을 강조하는 것이 진작부터 마음을 흔들던 터였다. 장성 백암산의 백양사 비자숲, 화순 개천산의 개천사 비자숲, 나주 덕룡산 불회사의 비자숲, 고흥 천등산 금탑사의 비자숲이 모두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사찰림이고, 백양사 한 곳에서만도 한 해 거두는 열매의 양이 20석을 웃돌 정도로 사찰림의 규모들이 크다.
양약 구충제가 일반화되기 전인 60년대까지만 해도 이들 절과 사하촌 주민들이 사찰림의 ‘비자열매로 먹고살았다’는 말이 회자될 정도다. 구충제로 팔면 돈이 되고, 가루로 빻아 죽과 떡을 만들면 양식이 되고, 강정을 만들면 아이들 간식이 되고, 그러고도 남는 것은 기름을 짜 식용도 하고 등잔불로도 쓰고…, 두루 유익이 큰 비자열매였다. 다만 양식으로 쓸 경우 호두처럼 과육을 제거하고 나서 딱딱한 씨의 껍질을 깨고 알맹이를 꺼낸 다음 또 한 겹의 속껍질을 벗겨내는, 삼중의 손품을 들여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긴 하다. 먹고사는 것이 풍족해진 이후 비자나무에 둘러싸인 남도의 절집에서조차 그 열매로 만든 음식을 만나기가 쉽지 않은 까닭이기도 하다.
비자열매 두어 됫박을 챙겨 들고
꽤 오랫동안 수소문을 한 끝에 지금도 해마다 비자강정을 만들어 신도들과 나누고 있다는 고흥의 금탑사를 찾았다. 9년 장좌불와에 맨손으로 오늘의 금탑사를 이뤄낸 서림 큰스님의 미디어 종사자 물리치는 서슬을 익히 알고 있었지만 강행(?)을 했다. 절집과자 비자강정을 만들고 있다는 곳이 금탑사 말고는 달리 없었으므로.
벼르고 벼르다가 신도들이 많이 모일 것으로 예상되는 동짓달 법회에 맞춰 절을 찾으니 동안거 중인 스님들은 선원에서 두문불출이고, 신도들은 달랑 2명만이 참례를 한 상황이다. 유자랑 김, 미역이랑, 고흥 땅에 겨울철 생산물이 특히 많아 갈수록 신도들 발길이 줄어든다는 큰스님의 설명에 속이 더 답답해진다. 무연한 척 비자를 들먹이니 “안 그래도 오늘 법회에 신도들이 좀 모이면 비자를 까기로 정했는데 해마다 비자강정을 주동해서 만들고 있는 신도는 팔을 다쳐 치료 중이고, 십 몇 년 전만 해
도 비자 숲 속이 빤질거릴 정도로 열매를 주워 금탑사 불사를 도와주던 동네 사람들도 요새는 수입 좋은 유자 공장으로 해산물 공장으로 뛰어다니느라 절집 걸음조차 뜸하다”며, 절 뒤란 비자숲으로 앞장을 선다. 취재는 허탕을 쳤지만 300년 고목 숲의 웅숭깊은 기운에 싸안기니 그것만으로 좋았다.
그런데 지천에 비자열매가 널려 있다. 봄에 꽃을 피워 다음 해 가을에 결실을 본다는 그 귀한 비자열매가 떨어진 그 자리에서 고스란 방치돼 있다니, 난생 처음 본 비자열매임에도 격세지감이 느껴졌다. 어떻게 하겠다는 요량도 없이 무작정 열매들을 주웠다. 중생의 속셈을 꿰뚫어보았는지 큰스님도 한 움큼을 주워 보태준다. ‘그래, 이 귀한 열매를 스님네는 공부에 바빠 돌아보지 않고, 속인들은 배가 불러 돌아보지 않으니 옛 시절 음식 그리워 찾아다니는 이 중생이 직접 만들어봄도 뜻 깊지 않겠는가!’ 불현듯 한 생각이 객기에 걸려들었다. 동행한 벗님을 채근하여 불과 몇 십 분 만에 비자열매 두어 됫박을 주워 챙겼다. 이것도 인연이라 여기면서 천연기념물을 품에 안고 돌아오는 기분이 온온했다.
윤씨 종부의 입전수를 받아
돌아와 금탑사 신도들과 해남 윤씨 종가의 종부에게 만드는 법을 ‘입전수’ 받아 직접 비자강정을 만들어보았다. 과육은 이미 말라붙어 한 품이 생략됐고, 딱딱한 중간 껍질도 가벼운 나무망치질로 쉽게 벗겨졌다. 다만 땅콩 크기의 열매를 한 개 한 개씩 따로 깨뜨려야 했으므로 그 시간이 매우 오래 걸렸다.
마지막 떫은맛이 강한 속껍질은 일단 물에 씻어 불린 다음 전통 방법대로라면 우둘투둘한 짚옹태기에 넣고 짚수세미로 박박 문질러 씻어야 하지만, 지혜로운 경험자들의 입전수 덕분에 프라이팬에 살살 볶아주니 껍질들이 얼추 일어나 부스러졌다. 입전수 받기로는 그것을 양파 망에 넣고 비벼서 남은 껍질을 흘려 없애는 것이었지만 해보니 구멍들이 너무 작아 신통치가 않았다. 그래 꾀를 내어 구멍이 좀 넓은 플라스틱 소쿠리에 옮겨 담고 마른 행주로 세게 비벼주면서 흔들었더니 금세 깨끗해졌다. 너무 오랫동안 말라붙어 끝까지 떨어지지 않는 것은 (맛을 보니 떫은맛이 많이 가셔진 상태라) 그냥 둔 채로 마지막 물행주로 알맹이에 묻은 잔부스러기를 닦아내니 노르스름한 갈색으로 볶인 열매의 속살이 드러났다. 오묘한 비자향도 가득하고.
그 향긋한 비자열매에 일반 강정 때 쓰는 것과 대동소이한 집청꿀을 만들어 뜨거울 때 묻힌 다음 볶은 콩가루나 검은 통깨, 흰 통깨 등에 굴려 고물을 입혀 먹는 것이 비자강정이다. 열매를 다듬어 장만하는 과정에 손품이 좀 들기는 하지만, 막상 먹어보니 그 번거로운 손품이 조금도 아깝지 않을 정도로 맛이 깊고 은은했다. 쌉싸래하고 고소하면서 달착지근한 세 가지 맛이 연하게 섞여 있어 씹는 맛과 뒷맛이 모두 담백하다. 그 오묘한 고소함이 서양의 아몬드와는 많이 다르면서도 한편으론 비견되는 맛이라고나 할까, 먹어도 물리지 않고 씹는 느낌도 좋다. 하기사 천연기념수의 영기가 서린 열매인데 중생이 그 맛에 어찌 촌평을 달랴. (문외한 주제가 감히) 도전해보기를 잘했다는 자평에 시식해본 지인들의 찬까지 들으니 올 비자철엔 좀 본격적으로 준비해서 비자나무숲이 있는 남도의 고찰들을 순례해볼 다짐마저 생겨난다.
첫댓글 그러군요^^ 먹어봤으면~~ *^^*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