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 158권, 선조 36년 1월 28일 을유 3번째기사 1603년 명 만력(萬曆) 31년
전유형이 전후에 올린 상소
전유형이 전후에 올린 세 통의 상소에 대해 계(啓) 자를 찍어 내렸다. 이에 앞서 올린 유형의 상소는 시사(時事)에 대해 극언한 것이었는데, 상이 유중(留中)하고 10여 일 동안 내리지 않았다. 이에 유형이 연달아 세 통의 상소를 올려 상이 빨리 살펴서 시행하는 바가 있기를 기대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내렸다.
그 상소의 내용은, 첫 번째는 금위(禁衛)를 엄하게 하여 뜻하지 않은 사고에 대비할 것, 두 번째는 여러 왕자(王子)들을 애호하여 부자간의 은혜를 온전히 할 것, 세 번째는 공구 수성(恐懼修省)하여 변이(變異)를 없앨 것, 네 번째는 친히 사람을 기용하는 권한을 잡고서 조정의 붕당을 제거할 것, 다섯 번째는 군주의 위엄을 높여 기강을 진작시킬 것, 여섯 번째는 날마다 경연에 나아가 상하의 정을 소통시킬 것, 일곱 번째는 지나온 자취를 돌아보아 앞으로 다가올 일을 징험할 것, 여덟 번째는 천리(天理)의 공정함을 따르고 인욕(人慾)의 사사로움을 버릴 것, 아홉 번째는 총명(聰明)을 넓힐 것, 열 번째는 수령을 잘 선택하여 인심을 수습할 것, 열한 번째는 성지(聖旨)를 반포함에 있어 부질없이 헛된 문구만 숭상해서는 안 된다는 것, 열두 번째는 문과(文科)를 많이 뽑아 어진이를 취택하는 길을 넓힐 것, 열세 번째는 사람을 뽑을 때는 마땅히 대책(對策)으로 할 것, 열네 번째는 상서(庠序)013) 의 옛 제도를 회복할 것, 열다섯 번째는 성경(聖經)을 읽고 성훈(聖訓)을 행할 것 등을 언급하였다. 또 세 군데에 첩황(貼黃)이 있었는데, 첫 번째 첩황에는,
"오늘날 붕당의 권력 다툼이 이와 같아서 기필코 죽을 각오로 승부를 결정지으려 합니다. 전하의 천추 만세(千秋萬世) 뒤에 부귀를 도모하는 자들이 각각 이론(異論)을 세워 다툼으로써 큰 혼란을 야기시킨다면 국가가 반드시 망하고야 말 것이니, 어떻게 조처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은 동군이 어질어서 전하의 성덕(盛德)을 계승하기에 충분하기 때문에 사방의 민심이 귀의할 바를 알지만, 만약 하루아침에 요동된다면 난망(亂亡)이 순식간에 닥칠 것입니다.
옛날 한 고제(漢高帝)가 태자를 바꾸려고 하자 장양(張良)이 상산 사호(商山四皓)를 초치하였는데, 고제가 이를 보고 드디어 태자를 바꾸지 않았다고 합니다. 신이 여기에서 고제의 지혜가 백왕(百王)보다 낫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는 고제가 ‘나는 사호를 초치할 수 없는데 태자가 능히 그들을 초치했으니 태자의 어짊이 나보다 낫다. 그러니 종묘와 사직을 맡겨도 반드시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여긴 것입니다. 고제의 뜻이 또 ‘사호는 금세의 백이(伯夷)나 태공(太公)과 같은 사람으로 이는 천하의 대로(大老)이다. 천하의 대로가 이미 귀의하였으니 천하의 백성들이 태자에게 마음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백성들이 이미 마음을 갖고 있다면 나라의 앞날은 자연히 반석보다도 단단해져서 만세토록 무궁할 것이다.’라고 여겨 조금도 의심치 않고 의연히 태자를 바꾸려던 마음을 고쳤습니다. 그러니 고제의 지혜가 어찌 백왕보다 뛰어났다고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대체로 천리는 지극히 공정한 것이어서 민심이 귀향하는 바가 곧 천리가 있는 데인 것입니다. 진실로 태자가 어질지 않아 위로는 어버이에게 효도하는 마음이 없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인애하는 마음이 있지 않다면 천하의 백성들이 어찌 귀의하려 하겠습니까. 자기 어버이에게 효도하는 것은 곧 자기 백성들을 인애하는 실상이며, 자기 백성들을 인애하는 것은 곧 자기 어버이에게 효도하는 마음을 미루어 나가는 것입니다. 대개 임금이 태자에게 민심이 귀의하는 것을 보면 태자가 나에게 효도를 잘하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호의 말에 ‘지금 듣건대 태자가 인효(仁孝)하여 천하 사람들이 목을 늘이고 태자를 위해 죽고자 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고 하기 때문에 신들이 온 것이다.’ 하였으니, 참으로 미더운 말입니다.
그러므로 옛 임금은 정적(正嫡)이 없어서 서자(庶子)를 세워 적자(嫡子)로 삼았어도 이미 민심이 귀의함을 얻었으면 뒷날 정적이 정위(正位)에서 출산되더라도 바꾸지 않았습니다. 이는 이미 후사(後嗣)로 세웠으면 군신(君臣)의 분의가 예경(禮經)에 정해져 있기 때문에 참으로 바꿀 수가 없어서입니다. 따라서 민심이 귀의함을 얻었다면, 사직과 종묘를 위해 계획을 세우는 사람이 어떻게 바꿀수 있겠습니까. 공자가 ‘근심이 없는 분은 아마도 문왕(文王)일 것이다. 무왕(武王)으로 자식을 삼았으니…….’ 하였으니, 아, 천하에 근심 없는 사람은 태자가 어진 것보다 더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지금 전하께서 근심없는 것이 옛날 문왕과 더불어 전후 한결같으니, 만세토록 무궁한 아름다움을 지금부터 기약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붕당의 형세가 이와 같으니, 신은 실로 그 점을 근심하고 있습니다. 옛부터 국가의 근심은 항상 나이 어린 군주를 세우는 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동궁께서는 연세가 한창이신데다 도가 밝고 덕이 확립되었으니 붕당이 없다면 무슨 근심이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빨리 붕당을 제거하여 나타나기 전에 완전히 없애기를 도모하소서. 붕당을 없애지 못할 경우에는 반드시 큰 절개를 지녀 뜻을 빼앗을 수 없는 사람을 신중히 선택하여 미리 동궁을 돕는 보좌관으로 삼아서 온 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귀의할 바를 알게 하여 동요되지 않게 할 것은 물론, 동·서·남·북 골육의 당으로서 부귀를 도모하려고 하는 자들이 모략을 펴고 간교를 행할 곳이 없게 만든다면 국본(國本)이 견고하게 되어 만세토록 왕노릇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연전에 전하께서 정원군(定遠君)014) 의 일을 주선하고 조호(調護)하실 때 말을 꺼내는 자들은 죄를 받았으니, 부자간의 정의(情義)에는 이와 같은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단지 자식을 사랑하는 정만 있고 신이 말씀드린 것을 알지 못하신다면 뒷날 동기간에 상잔하는 화가 반드시 이루 다 말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하였고, 두 번째 첩황에는,
"임진년 5월의 당쟁(黨爭) 때 전하의 근심이 반드시 오늘보다 급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심이 흩어지지 않는다면 왜적이 1백 년을 살육하고 약탈하더라고 한 치의 땅, 한 명의 백성도 끝내 왜적의 소유가 되지는 않을 것이니, 실로 근심할 만한 것이 못 됩니다. 그러나 붕당의 화가 왜란만 못한 것 같지만 끝내는 반드시 나라를 망하게 하고야 말 것이니, 실은 왜적보다도 심한 것입니다.
대체로 현우(賢愚)·사정(邪正)은 국가의 흥폐 존망에 관계된 것이니, 반드시 온 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어진지 어리석은지 사악한지 정직한지를 분변하게 한 뒤에야 천하의 공론이 정해지는 것입니다. 진실로 천리(天理)의 공정함을 따르고 인욕(人慾)의 사사로움이 없는 사람이 아니면 누가 분변할 수 있겠습니까. 국가에 붕당이 생긴 뒤부터 군신 백료(群臣百僚)들이 각각 자기 당을 사사롭게 하여 서로 비호하면서 자기 당에 붙는 자는 기뻐하고 자기와 달리하는 자는 미워하였으므로 인욕의 사사로움이 극에 달했고 천리의 공정함이 인멸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오직 자기 당이 바른 줄만 알고 다른 당은 사악하다고 하여 서로 공격하여 원한을 쌓았으므로 현인 군자가 그 사이에서 나오더라도 양지(良知)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가 참으로 어진지 어리석은지 참으로 사악한지 정직한지를 분변치 못합니다. 그러니 천하의 공론이 무엇을 말미암아 정해지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과감하게 힘써 행하시어 한번 나아오게 하고 한번 물러가게 함을 모두 성충(聖衷)에서 결정하소서. 서서히 5∼6년을 기다려 사사로운 뜻이 점점 없어지고 공정한 도가 점점 행해져 원한이 저절로 풀리고 양지가 저절로 회복된 뒤에 어질고 재능 있는 사람에게 위임하여 그로 하여금 함께 화협하여 다스리게 하소서. 그리하여 한번 나아오게 하고 한번 물러가게 함을 모두 중의(衆議)에 따르고 자신의 사심에 따르지 않게 되면 태평 성대를 기약할 수 있으며 잘 다스려지는 정치를 회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전하께서 고립(孤立)되고 군당(群黨)이 횡행하게 되면 독단(獨斷)을 하고자 하시더라도 맡기어 부리는 사람들이 모두 편당(偏黨)의 사람들임을 벗어나지 못하게 될 것이므로 또한 끝내는 편당으로 돌아가고 맙니다.
대체로 지극히 공정한 일을 행하려고 하면 반드시 먼저 지극히 공정한 사람들로 하여금 지극히 공정한 의논을 제창하게 한 뒤에야 지극히 공정한 사람이 나의 지극히 공정한 정치에 추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계책은 반드시 중립을 지켜 편당하지 않는 인사를 먼저 얻어 성덕(聖德)을 외롭게 하지 않게 한 뒤에야 목적하는 바를 이룰 수가 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서한(西漢)의 제도에 따라 별도로 일과(一科)를 설치해 상규(常規)에 구애받지 말고 어필(御筆)로 대책(對策)을 내시어 특별히 붕당설(朋黨說)에 대해 물어 공정함을 따르고 사사로움이 없으며 군당(群黨)과 관계없는 인사 1백여 명을 뽑으소서. 이들이 반드시 적임자이기를 기대할 수는 없을지라도 오히려 붕당의 무리들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이 방법이 붕당을 제거하는 데 한 가지 도움이 충분히 될 것입니다."
하였고, 세 번째 첩황에는,
"어진이를 나아오게 하고 사악한 사람을 물러가게 하지 못하는 것은 어진 사람과 사악한 사람을 분별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어진 사람과 사악한 사람을 이미 분변하였다면 또 두렵고 어려운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누구를 비방하고 누구를 칭친하는 말들을 믿을 수는 없지만, 사적(事迹)이 분명히 드러난 경우에는 살려주어도 되고 죽여도 됩니다. 지난번 전하께서 사악하고 아첨하는 불충(不忠)한 사람을 통촉하시어 파직시키기도 하고 삭탈시키기도 한 자들이 한두 명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오래지 않아 전하께서 다시 청현직(淸顯職)에 임용하셨으니, 이는 망하기를 스스로 재촉하는 일인데 종묘와 사직을 어찌하시렵니까. 신은 삼가 의혹스럽습니다.
일월 같은 밝음으로도 엎어 놓은 동이 아래를 비출 수는 없는 것이니, 성인의 지혜도 이와 같습니다. 빈드시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인하여 밝힌다면 알 수 없는 것도 이로부터 밝아질 것입니다. 지금 전하께서 이미 사악하고 아첨하는 불충한 자임을 알고 계시면서도 주벌(誅罰)의 법을 행하지 않고 도리어 청현직에 제수하였으니, 이미 알고 있는 것에 대해서 이와 같이 한다면 알지 못하는 간사한 자들이 어찌 두려워하겠습니까. 반드시 멋대로 기탄없이 방자한 짓을 하여 전하의 나라를 뒤엎어 멸망시킨 뒤에야 그만둘 것입니다. 삼가 성명께서는 깊이 통찰하소서."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