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정원일기
고종 30년 계사(1893) 1월 29일(계축) 맑음
30-01-29[51] 조동익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 조동익(趙東翊)을 상서원 별제로, 임창호(任昌鎬)를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주사(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主事)로, 남세희(南世煕)를 전옥서 주부(典獄署主簿)로, 김종원(金鍾遠)을 적성 현감(積城縣監)으로, 윤두병(尹斗炳)을 사성으로 삼았다. 전적에 이병유(李丙逌)를 단부하였다. 문화 현령(文化縣令)에 서구순(徐九淳)을 단부하였는데, 특별히 잉임시키라는 전지를 받든 것이다. 서학순(徐學淳)을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주사로, 조정희(趙正煕)를 전설사 별제로, 김형집(金亨集)을 인의(引儀)로, 신승휴(申勝休)를 영원 군수(寧遠郡守)로, 오광수(吳光洙)를 전적으로, 이창선(李昌善)을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주사로, 심의홍(沈宜弘)을 삼척 부사(三陟府使)로, 오횡묵(吳宖默)을 고성 부사(固城府使)로, 이건수(李建壽)를 연일 현감(延日縣監)으로, 심계택(沈啓澤)을 서학 교수(西學敎授)로, 신현옥(申鉉玉)을 예빈시 주부(禮賓寺主簿)로, 이석우(李錫禹)를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주사로, 안준옥(安駿玉)을 양근 군수(楊根郡守)로, 이낙현(李洛鉉)을 연일 현감으로, 김각현(金珏鉉)을 응교로, 임기호(任起鎬)를 기기국 사사(機器局司事)로, 고영진(高永鎭)을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주사로, 정홍교(鄭鴻敎)를 함안 군수(咸安郡守)로, 유성표(柳聖杓)를 연일 현감으로, 이승수(李承壽)를 부응교로, 최상우(崔尙愚)를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주사로, 신찬희(申贊煕)를 연일 현감으로, 유흥필(柳興弼)을 영릉 영(寧陵令)으로, 강필로(姜弼魯)를 전설사 주부(典設司主簿)로, 박문교(朴文敎)를 병조 좌랑으로, 조유승(曺有承)을 기기국 사사로, 이건영(李建榮)을 상서원 주부로, 유상희(柳相煕)를 연일 현감으로, 김기룡(金基龍)을 감찰로, 이종익(李鍾益)을 명천 부사(明川府使)로, 김상우(金商愚)를 사직서 영(社稷署令)으로, 이재근(李載覲)을 간성 군수(杆城郡守)로, 정홍모(鄭鴻謨)를 감찰로, 김병흡(金炳翕)을 사복시 정으로, 김제용(金濟容)을 명천 부사로, 조병징(趙秉澄)을 영희전 영(永禧殿令)으로, 정인량(鄭寅亮)을 진위 현령(振威縣令)으로, 서상원(徐相元)을 선공감 주부로, 윤명섭(尹命燮)ㆍ이면상(李冕相)을 동지경연사로 삼았다. 겸전적(兼典籍)에 김각현(金珏鉉)을 단부하였다. 김상희(金相煕)를 전적으로, 김택규(金宅圭)를 형조 좌랑으로, 김우근(金寓根)을 천안 군수(天安郡守)로, 정원하(鄭元夏)를 동지경연사로, 송병학(宋秉學)을 대사성으로, 서상락(徐相洛)을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주사로, 유찬(劉燦)을 빙고 주부(氷庫主簿)로, 손병호(孫秉浩)를 명천 부사로, 이택환(李宅煥)을 직강으로, 박교양(朴敎陽)을 형조 정랑으로, 이명헌(李命憲)을 갑산 부사(甲山府使)로, 이명응(李明應)을 판의금부사로, 심상훈(沈相薰)을 지의금부사로, 심규택(沈奎澤)을 부여 현감(扶餘縣監)으로, 황호석(黃浩錫)을 기기국 사사로, 이규풍(李圭豐)을 남해 현감(南海縣監)으로, 이명우(李明宇)를 단양 군수(丹陽郡守)로, 김석진(金奭鎭)을 지의금부사로, 강찬(姜)을 동지의금부사로, 이창익(李昌翼)을 사릉 영(思陵令)으로, 심형택(沈馨澤)을 명천 부사로, 심기택(沈琦澤)을 좌윤으로, 오정선(吳正善)을 우윤으로, 송병두(宋秉斗)를 청풍 부사(淸風府使)로 삼았다. 부호군 전재정(全在整)에게 지금 가선대부(嘉善大夫)를 가자하고, 부사과 천낙귀(千洛龜), 전 수봉관(守奉官) 어공우(魚公愚)에게 지금 통정대부(通政大夫)를 가자하였는데, 이상은 조관(朝官)으로서 나이가 80세 된 사람에게 법전에 따라 가자한 것이고, 부호군 이중학(李重學)에게 지금 가선대부를 가자하였는데, 조관으로서 나이가 90세 된 사람에게 법전에 따라 가자한 것이다. 오승로(吳升魯)를 서부 영(西部令)으로, 오태영(吳台泳)을 연일 현감으로, 권풍식(權豐植)을 장련 현감(長連縣監)으로, 남궁억(南宮檍)을 칠곡 부사(漆谷府使)로, 김원택(金元澤)을 동지돈녕부사로, 한진태(韓鎭泰)를 혜릉 영(惠陵令)으로, 노진혁(盧鎭奕)을 금교도 찰방(金郊道察訪)으로, 이일로(李一魯)를 연일 현감으로, 조관재(趙寬在)를 당진 현감(唐津縣監)으로, 전우현(全禹鉉)을 전적으로, 신태훈(申泰薰)을 태릉 영(泰陵令)으로, 박병서(朴秉胥)를 은계도 찰방(銀溪道察訪)으로, 홍일섭(洪馹燮)을 연일 현감으로, 이근춘(李根春)을 좌통례로, 이민규(李敏奎)를 제천 현감(堤川縣監)으로, 남세희(南世煕)를 감찰로, 김기수(金綺秀)를 대사헌으로, 윤영진(尹泳璡)을 연일 현감으로, 심상필(沈相弼)을 대사간으로, 박용진(朴用鎭)을 영춘 현감(永春縣監)으로, 홍두섭(洪斗燮)을 제중원 주사(濟衆院主事)로, 한찬은(韓纘殷)을 전옥서 주부로, 윤주섭(尹柱燮)을 연일 현감으로, 김종환(金鍾桓)을 강령 현감(康翎縣監)으로, 송인헌(宋仁憲)을 원릉 영(元陵令)으로, 김석룡(金錫龍)을 병조 정랑으로, 최국현(崔國鉉)을 교검(校檢)으로, 조광함(趙光涵)을 병조 좌랑으로, 강문영(姜文瑛)을 연일 현감으로, 심성택(沈聖澤)을 감찰로 삼았다. 부호군 권석규(權奭圭)에게 지금 가선대부를 가자하고, 부사과 심복영(沈復永)ㆍ유명식(柳明植), 전 감역관 이진구(李鎭九)에게 지금 통정대부를 가자하였는데, 조관으로서 나이가 80세 된 사람에게 법전에 따라 가자한 것이다.
[原本]
승정원일기 3030책 (탈초본 138책) 고종 30년 1월 29일 계축 44/60 기사 1893년 光緖(淸/德宗) 19년
〈○〉 又以吏批言啓曰, 守令多窠, 今當差出, 而未準朔禁軍將及營將·邊將·虞候·中軍·守令·察訪竝擬, 何如? 傳曰, 允。 以趙東翊爲尙瑞別提, 任昌鎬爲交涉主事, 南世熙爲典獄主簿, 金鍾遠爲積城縣監, 尹斗炳爲司成。 典籍單李丙逌, 文化縣令徐九淳, 特爲仍任事承傳。 以徐學淳爲交涉主事, 趙正熙爲典設別提, 金亨集爲引儀, 申勝休爲寧遠郡守, 吳光洙爲典籍, 李昌善爲交涉主事, 沈宜弘爲三陟府使, 吳宖默爲固城府使, 李建壽爲延日縣監, 沈啓澤爲西學敎授, 申鉉玉爲禮賓主簿, 李錫禹爲交涉主事, 安駿玉爲楊根郡守, 李洛鉉爲延日縣監, 金珏鉉爲應敎, 任起鎬機器局司事, 高永鎭爲交涉主事, 鄭鴻敎爲咸安郡守, 柳聖杓爲延日縣監, 李承壽爲副應敎, 崔尙愚爲交涉主事, 申贊熙爲延日縣監, 柳興弼爲寧陵令, 姜弼魯爲典設主簿, 朴文敎爲兵曹佐郞, 曺有承爲機〈器〉局司事, 李建榮爲尙瑞主簿, 柳相熙爲延日縣監, 金基龍爲監察, 李鍾益爲明川府使, 金商愚爲社稷令, 李載覲爲杆城郡守, 鄭鴻謨爲監察, 金炳翕爲司僕正, 金濟容爲明川府使, 趙秉澄爲永禧殿令, 鄭寅亮爲振威縣令, 徐相元爲繕工主簿, 尹命燮·李冕相爲同經筵。 兼典籍單金珏鉉。 以金相熙爲典籍, 金宅圭爲刑曹佐郞, 金寓根爲天安郡守, 鄭元夏爲同經筵, 宋秉學爲大司成, 徐相洛爲交涉主事, 劉燦爲氷庫主簿, 孫秉浩爲明川府使, 李宅煥爲直講, 朴敎陽爲刑曹正郞, 李命憲爲甲山府使, 李明應爲判義禁, 沈相薰爲知義禁, 沈奎澤爲扶餘縣監, 黃浩錫爲機器局司事, 李圭豊爲南海縣監, 李明宇丹陽郡守, 金奭鎭爲知義禁, 姜爲同義禁, 李昌翼爲思陵令, 沈馨澤爲明川府使, 沈琦澤爲左尹, 吳正善爲右尹, 宋秉斗爲淸風府使。 副護軍全在整, 今加嘉善, 副司果千洛龜, 前守奉官魚公愚, 今加通政, 以上朝官年八十, 副護軍李重學, 今加嘉善, 朝官年九十, 依法典加資。 以吳升魯爲西部令, 吳台泳爲延日縣監, 權豊植爲長連縣監, 南宮檍爲柒谷府使, 金元澤爲同敦寧, 韓鎭泰爲惠陵令, 盧鎭奕爲金郊察訪, 李一魯爲延日縣監, 趙寬在爲唐津縣監, 全禹鉉爲典籍, 申泰薰爲泰陵令, 朴秉胥爲銀溪察訪, 洪馹燮爲延日縣監, 李根春爲左通禮, 李敏奎爲堤川縣監, 南世熙爲監察, 金綺秀爲大司憲, 尹泳璡爲延日縣監, 沈相弼爲大司諫, 朴用鎭爲永春縣監, 洪斗燮爲濟衆主事, 韓纘殷爲典獄主簿, 尹柱燮爲延日縣監, 金鍾桓爲康翎縣監, 宋仁憲爲元陵令, 金錫龍爲兵曹正郞, 崔國鉉爲校檢, 趙光涵爲兵曹佐郞, 姜文瑛爲延日縣監, 沈聖澤爲監察。 副護軍權奭圭, 今加嘉善, 副司果沈復永·柳明植, 前監役李鎭九, 今加通政, 朝官年八十, 依法典加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