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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용서하라
누가복음 17:1-4
남아프리카에 남아공화국이란 나라에 원주민 흑인들과 개척자 백인들과의 갈등으로 350여년간 싸웠습니다. 백인들이 흑인들을 인간이하로 학대하고 죽였습니다. 물론 흑인들은 원시생활을 하기 때문이였습니다. 지금도 많은 흑인들은 광야에서 토굴이나 움막집에 살고 있습니다. 원주민 중에 만델라가 인종차별 정책에 대항해 인권운동에 투신하다가 27년간 감옥에 갇혀 죄수로 살았습니다. 출옥한 후 ‘아프리카민족회의’를 창설해 백인정부와 원만한 협상을 이끌어냄으로써 350년간의 인종 차별을 하지 않기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최초로 흑인으로 대통령에 당선 되었습니다. 만델라는 자신을 반평생을 감옥에 가두고 고문하고 억울하게 괴롭혔던 그들을 대통령 취임식 귀빈석으로 모셨습니다.
그 후에 미국을 방문하였을 때 당시 클린턴 대통령이 만델라 대통령에게 ‘어떻게 당신을 괴롭힌 자들을 그렇게 초청할 수 있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만델라는 유명한 대답을 하였습니다. ‘내가 그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나는 여전히 감옥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저들을 용서하므로 나는 자유인이 되는 것입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용서하지 않고 미워하며 사는 것은 창살 없는 감옥에 사는 것 입니다. 용서 없이는 절대로 자유가 없는 것입니다. 자유의 뿌리는 용서입니다.
미워하는 마음을 품고 용서하지 않으면 내가 더 고통을 당한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깨끗이 용서하면 내 마음이 편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용서를 잘 하지 않습니다. 미운 감정으로 독을 품고 사는 것은 자신을 매우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라는 사실을 잘 모릅니다. 미운 감정을 품고 있다는 것은 자신을 더 불행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미운 감정을 품고 사는 것은 창살없는 감옥에 사는 것입니다. 용서 할 때 자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을 내가 용서할 때 내 자신이 용서 받는 것입니다. 용서 받아야 할 존재가 누굽니까? 저가 아니라 바로 나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용서는 성경적 진리입니다. 성경 말씀 전체가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한 마디로 ‘용서’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용서하셨다는 말씀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성경에서 ‘용서’를 뺀다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 것입니다. 기독교에서 용서를 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성도가 용서할 줄 모르면 불신자보다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용서에 대한 교훈을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마18:22)고 말씀하셨습니다.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란 말씀은 무한정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용서 할 줄 모르는 종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주인한데 일만 달란트 빚진 자가 있는데 갚을 것이 없어 주인이 그에게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고 하니까 종이 엎드려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고 했지만 주인이 불쌍히 여겨 그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당시 빚을 갚지 못하면 자신의 몸을 팔아서라도 갚아야 했고, 그래도 갚지 못하면 아내나 자식들까지도 종으로 팔아서 갚아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했을 때 그 가족들은 다 종으로 팔려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인이 그를 불쌍히 여겨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종은 곧 바로 집으로 가다가 자신에게 일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만나 목을 잡고 ‘빚을 갚으라’고 졸랐습니다.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며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라고 했지만 허락지 아니하고 옥에 가두었습니다. 이를 본 다른 동료가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다 알렸습니다. 주인이 종을 불러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해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 하냐’고 하며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에게 넘겼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종이 주인으로부터 탕감 받은 것은 일만 달라트였습니다. 그러나 동료가 종에게 진 빚은 일백 데나리온입니다. 일만 달란트와 일백 데나리온은 50만분의 1밖에 되지 않습니다. 일만 달란트라는 어마어마한 것을 탕감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일백 데나리온을 갚지 않는다고 옥에 가둔 것은 용서할 줄 모르는 자라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시고 결론적으로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18:35)는 말씀으로 용서의 진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죄를 용서 받고서도 조그만 것도 용서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용서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용서는 돈이 들지 않는 공짜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용서는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다. 용서는 누구나 다 할 수 있습니다. 어떤 특별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너는 용서하라”는 말씀에 중요한 것은 ‘너는’입니다. ‘너는’ 누구입니까? 제자들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죄사함을 받은 오늘의 성도들입니다. 죄 용서 받은 너는 마땅히 용서해야 할 사람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죄 용서 받지 않은 불신자들을 보고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불신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죄 용서함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야 용서할 줄 모른다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러나 죄 용서 받은 성도는 마땅이 용서해야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성경 인물 중에 ‘용서의 사람’ 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요셉을 생각하게 됩니다. 요셉은 형들 때문에 애굽으로 팔려가 13년 동안을 종으로, 죄수로 고생을 했습니다. 요셉이 형들에게 잘못한 일이 있어서 팔려 고생을 했다면 잘못한 댓가라고 할 수 있겠지만, 잘못한 일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고생했을 때 형들을 복수를 하고야 말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적인 소설이나 이야기는 대부분이 복수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요셉이 형들을 미워하였다거나 복수 하겠다는 말이 없습니다.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었을 때 마침 형들이 양식을 구하려 왔습니다. 그동안 요셉이 형들에 대한 복수를 생각하지 않았더라도 형들을 보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미운 감정이 일어나 복수를 할 수도 있었겠지만 전혀 그런 말씀도 없습니다. 형들을 보자 반가워서 울었습니다. 그리고 형들이 요셉이라는 것을 알고 엎드려 용서를 빌었지만 요셉은 형들이 자신을 팔아 애굽으로 오게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만약 요셉이 형들을 옥에 가두고 고생을 시켰다면 인간적으로 당연한 일이라고 할 것입니다. 자신을 괴롭힌 자를 복수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요셉은 형들을 보았을 때 용서한 것이 아닙니다. 이미 오래전에 용서했습니다. 만약 요셉이 형들을 용서하지 않고 형들을 미워하고 있었다면 그동안 매우 불행하였을 것입니다. 미운 감정으로 자신이 더 많은 고통을 당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애굽의 총리도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보디발의 집에 종으로 팔려갔을 때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자가 되어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를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창39:2,3)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셉이 미운 감정을 품고 있었더라면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지도 않을 뿐 아니라 형통할 수도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형통하였다’는 말씀을 보아 요셉은 이미 형들을 용서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미운 감정을 품고 있었다면 불평으로 가득찼을 것입니다. 그래서 불평과 불만으로 복수심이 그 마음속에 가득찼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셉은 조금도 형통함을 느끼지 못했을 것입니다. 미운 감정을 품고 있는 것은 그만큼 자신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용서해야 마음이 가볍고 즐거워지는 것입니다. 용서하면 내가 행복해 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오해하기 쉬운 말씀이 있습니다.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4)는 말씀입니다. 네게 돌아와 회개하면 용서하라고 했습니다. 내게 찾아와 죄를 회개하라는 말씀으로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회개는 사람에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는 하나님께만 하는 것입니다. 주의해야 할 것은 내가 죄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물론 그가 내게 죄를 지었지만 그렇다고 내가 그의 죄를 내가 용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죄는 하나님만이 용서할 수 있는 것이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를 할 수 있습니까? 죄는 하나님께 회개하고 나는 회개한 그 사람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가 죄를 회개하지 않으면 나는 그를 불쌍히 여기며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죄는 미워하고 죄인은 사랑해야 합니다. 그 사람의 죄는 나와의 관계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실 일이 있고 내가 할 일은 따로 있습니다. 그를 용서하는 것은 내가 할 일입니다. 그래서 “너는 용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레오나드 다빈치가 ‘최후의 성만찬’, 그림을 그릴 때 베드로를 비롯하여 둘러선 제자들의 얼굴을 그리고 가룟 유다도 그렸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얼굴을 그리려고 하는데 인상이 도무지 떠 오르지 않아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어딘가 음성이 들려오기를 ‘누군가 미워하는 사람이 있느냐 가서 용서를 빌어라’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미워하는 사람을 찾아가서 용서를 빌고 와서 예수님을 얼굴을 그렸다고 합니다. 미워하는 마음으로는 평화가 있을 수 없습니다. 미워하는 마음을 품고 사는 것은 지옥을 사는 것입니다.
아직도 누군가를 미워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미운 그 사람보다 내가 더 불행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미운 감정을 품으니까 내가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미운 마음을 품으니까 속병이 생깁니다. 용서를 하세요. 그러면 내 마음이 평안해 집니다.
용서하는 것은 예수님을 닮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용서의 사람이였습니다. 자신에게 침을 뱉고 돌을 던지는 사람들과 십자가에 못박는 자들을 위해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자들도 용서하셨는데 예수를 닮기 원하는 성도가 누구를 용서 못하겠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를 살펴보면 별로 문제가 되지도 않은 것들입니다. 사소한 것 때문에 용서하지 못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것입니다.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용서를 하지 못합니다. 약간의 손해를 보게 했다고 용서를 하지 못합니다. 거짓말을 하고 속였다고 용서를 못합니다. 미워하기 때문에 용서를 못합니다. 따지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을 용서하지 못하므로 자신을 불행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미워하는 것’은 살인의 시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을 죽일 때 처음부터 죽이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미워하는 마음이 차츰 커지면 죽이고자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미워하였습니다. 그러다 아무도 없는 들에서 요셉을 보았을 때 죽이고자 한 것입니다. 처음부터 요셉을 죽이고자 한 것이 아닙니다. 요셉의 꿈 이야기를 듣고 미워하였기 때문입니다.
미워하는 것은 이미 살인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요일 3:15에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있습니까? 살인자와 같은 무서운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미워하지 마시고 용서하십시오. 용서하면 여호와로부터 평강의 복을 받을 것입니다.
사랑의 원자탄이라고 하는 손양원 목사님은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사람을 용서할 뿐 아니라 양자로 삼았습니다. 이 사실이 온 세계에 알려지므로 한국 기독교가 더욱 빛을 발하게 되었습니다. 만약 두 아들을 죽인 자를 용서하지 않고 재판에 넘겨 죽도록 했다면 기독교도 별것도 아닌 것으로, 목사도 별 수 없는 사람이라고 하였을 것입니다.
용서를 받았으니 우리도 용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에도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라고 하셨습니다. 기독교는 용서받았으니 용서하는 종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고 ‘너는 용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은 성도 여러분! 용서하는 자가 되십시요. 용서하면 자유하게 됩니다. 용서하면 마음이 평안해 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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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미운 감정을 품고 사는 것은 창살없는 감옥'
귀한말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설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