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 밖에 서서 두드리는 예수님
요한계시록 3 : 14 - 22
라오디게아는 소아시아의 내륙과 바다로 나아가는 관문인 에베소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였기 때문에 무역이 성행한데다, 양질의 양모를 생산하고 금융업이 발달하여 모든 시민들이 매우 부유하게 살았던 곳 이였습니다. 자유분방한 사회적 분위기를 가지고 있어, 라오디게아 교회 교인들은 다른 교회들처럼 외부로부터 핍박을 받지도 않았고, 경제적인 어려움도 겪지도 않은, 한 마디로 매우 좋은 환경 조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2000여년이 지난 오늘의 라오디게아는 허허벌판에 지난 날에 부유했던 흔적들만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은 사람이 살지 못하는 불모지가 되어 나무도 한 그루 자라지 않고 땅가시덩굴로 넓은 지대를 덮고 있는 곳에 지난 날에 부유했던 유적지로 남아 있습니다. 화려했던 도시가 지진으로 다 무너지고 당시 건물들의 대리석들이 여기 저기 딩굴고 있을 뿐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당도 웅장한 대리석으로 지었던 조각들이 널부러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깨어진 대리석에 성화가 그려진 조각들을 보아서 여기기 라오디게아 교회당이였구나를 알 수 있었습니다.
라오디게아에서 약 16Km 정도 떨어진 곳에 히에라볼리스라고 유명한 온천이 있습니다. 세계 각국에서 온 성지 순례자들이 하루에도 수백 명씩 호텔에서 묵고 노상 온천에서 즐깁니다. 라오디게아서 보면 멀리 히에라볼리스가 보입니다. 당시 라오디게아 사람들은 그 온천수를 지하로 관을 묻어 끌어다 온천을 했다는 큰 목욕탕의 일부가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뜨거운 온천수가 약 16Km 정도의 지하 토관을 통해서 끌어오는 동안 식어서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않았고 합니다. 당시 라오디게아 교회 교인들의 신앙 상태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다는 말씀은(15,16) 바로 이 온천을 배경으로 하신 것입니다.
최적의 조건에도 불구하고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오히려 아시아 일곱 교회 중 최악의 상태에 빠져 가장 저급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부와 자유를 영성 성장의 발판으로 삼지 않고 오히려 육신의 향락을 위한 기회로 삼았으며, 육신의 즐거움과 부요함을 영적 충만과 부요함으로 착각하였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진실하신 창조주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주님께로부터 무서운 책망을 듣게 되었습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 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15)는 책망을 들었습니다. 왜 이렇게 무서운 책망을 듣게 되었는가하면 라오디게아 교회 교인들이 하나님과 세상이라는 두 주인을 섬기는 어정쩡한 신앙을 소요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의 부유함을 영적 축복으로 착각하고 있었던 것 입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17)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기회주의적이고 교만한 죄로 충만했던 것입니다. 주님은 이러한 라오디게아 교인들의 착각과 오류에 대하여 시정 명령을 내렸습니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18,19)고 권고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16)고 하시므로 버림받을 것이라는 경고를 하셨습니다. 당시 라오디게아 교회 교인들의 신앙상태는 한 마디로 차지도 뜨겁지도 아니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 다니면서 세상을 좋아하였던 것입니다. 경제적으로 별 어려움도 없고 신앙적으로 별 시련이 없어 걱정 될 것이나 근심하는 일들이 없었던 것입니다.
차지도 뜨겁지도 않다는 것은 완전히 세상적이지도 않고 완전히 영적이지도 않은, 즉 하나님을 싫어하지도, 사랑하지도 않는 어정쩡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 교인들은 세상의 향락을 다 누리면서 아울러 천국에도 가고자 하는 무사 안일주의 및 기회주의의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러한 야비한 태도를 용인하지 않았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든가 아니면 세상을 사랑하든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단호하게 명령하셨습니다. 두 주인을 동시에 섬기려는 기회주의적 태도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죄악만큼이나 가증스러운 태도라는 것입니다. 신앙의 중간 지대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주께서는 라오디게아 교회 교인들의 신앙 상태가 어떠했던가를 한 마리로 말씀하셨습니다.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주께서는 라오디게아 교회 교인들을 매우 불행하게 보셨습니다. 그럼에도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우리는 부자라,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면서 자신들의 가련한 모습들을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곤고한’이란 ‘비참한’, ‘불쌍한’이란 전쟁으로 인해 모든 것이 파괴되고 약탈당했기 때문에 겪는 생활의 어려움을 연상시켜 주는 말입니다. 마치 전쟁에서 패한 패잔병 같이 영적 전쟁에 패한 성도와 같이 보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판단은 라오디게아 교인들의 생각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부요하고 부족한 것이 없다고 했으나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곤고했으며, 영혼과 인격적인 면에서 빈곤했으며, 참 진리를 보지 못하는 영적인 맹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이 오히려 더 가련한 인생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들의 가련한 것을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벌거벗은 수치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된 것은 라오디게아 교인들이 마음을 닫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음 문을 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20)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라오디게아 교인들에게 문제가 무엇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마음 속에 영접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다니면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관계없는 삶을 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교인이면서 예수님과 상관없는 교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주께서 라오디게아 교인들에게 하신 이 말씀을 우리는 세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라는 말씀이고 두 번째가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입니다. 여기 ‘문’이란 ‘마음 문’을 의미합니다.
첫째가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라오디게아 교인들의 닫힌 마음 문을 열기를 바라고 하나님이 친히 찾아오셨습니다. 이것이 기독교가 세상 모든 종교와 다른 것입니다. 다른 종교는 사람들이 신을 찾습니다. 어떻게 하면 신을 찾을 수 있을까를 말해줍니다. 그래서 무엇을 어떻게 하라고 가르칩니다. 도를 닦아라, 돈을 바치라, 수양을 해라 이런 저런 것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하나님이 사람을 찾아오십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찾는 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감히 죄인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찾을 수가 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친히 죄인들을 찾아 오셨습니다. 잃어버린 자를 찾기 위해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지금 그 예수님께서 영으로 찾아 오셔서 우리 마음 문을 두드리고 마음 문을 열어주기를 바라십니다.
아가서에 술람미는 깊은 산중에 사는 처녀였습니다. 종일 포도원에서 햇볕에 끄슬린 술람미가 예루살렘 왕궁에 있는 왕중에 왕인 솔로몬을 감히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 왕이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술람미를 찾아 와서 술람미가 잠든 방문을 두드리며 ‘내 사랑하는 자야, 일어나 나와 함께 가자’라고 말했습니다. 지금도 주께서는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십니다. 우리 마음 속에 들어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내가 문 밖에 서서’란 마음을 굳게 닫고 있는 교인들에게 예수님이 친히 찾아오셔서 마음 문을 열어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어쩌면 오늘 우리의 모습이 마음을 굳게 닫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의 닫힌 마음 문을 열어 주기를 바라고 주님께서 오늘도 우리에게 찾아 오셔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노니’ 어서 문을 열어 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두 번째로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입니다. 마음 문을 여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합니다. 마음 문을 여는 것은 나와 여러분이 해야 할 일 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유명한 성화 한 장을 생각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는 성화의 특징은 밖에서 문을 열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밖에는 문고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안에서 열어야 열리는 문입니다.
내 마음 문은 내가 열지 않으면 아무도 열 수 없습니다. 그래서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내가 열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동물과 다른 자유 의지가 있습니다. 동물들에게는 자유 의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마음 문을 열고 열지 않는 것은 자유 의지에 의해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께서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문을 열어 달라는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주님은 극진하신 사랑으로 아직 회개하지 아니한 자기 백성들의 마음 문 앞에 인내하는 자세로 서서 문을 열 때까지 끈질기게 두드리신다는 것을 잘 말씀해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밖에 세워두는 결례를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닫힌 마음 문을 열 수가 있습니까? ‘마음 문을 연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내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어셨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내 마음 속에 들어오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 내 마음 속에 오시도록 해야 합니다. 허물과 죄를 고백하면 마음 문을 여는 것입니다. 마음 문을 연다는 것은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잘못된 허물들을 솔직히 고백하는 것입니다. 아직도 우리는 허물을 덮어두고 숨기고자 합니다. 우리의 더러운 죄를 보혈로 씻어야 합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더러운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예수님이 친히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절대적 권능으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그 과정이 우리가 주님을 영접하는 것처럼 진행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것은 결국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이지만, 우리 마음 문을 두드리시는 주님을 영접하는 것은 마치 우리의 자유 의지에 따라 결정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문을 열면 주와 함께 동행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자유 의지를 움직여 지금도 계속해서 우리의 문 앞에서 서서 계속해서 두드리시는 주님을 맞아 들여야 합니다.
이제 셋째로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마음 문을 열면 주님은 우리 마음 속에 들어와 함께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더불어 먹는다‘는 말씀은 기쁨의 잔치를 염두에 둔 것입니다. 회개하고 마음 문을 연 성도간의 친밀한 영적 교제를 의미합니다. 이 말은 궁극적으로 장차 죄사함 받은 자들이 하나님 나라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을 문 밖에 세워 두지 말고 마음 속에 영접하여 모시면 주님께서 내 마음 속에 들어와 나와 함께 하십니다. 주님을 모신 마음은 즐겁고 평안합니다.
이지선이라고 하는 이화여대생이 교통사고로 3도 화상을 입었습니다. 요즘 의술이 좋아 몇 번을 수술하고 살았습니다. 그 얼굴을 비롯한 온 몸이 말이 아닙니다. 사람이면서 사람의 모습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를 보는 사람들마다 ‘저러고도 살 수 있을까?’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을 때 마다 ‘예, 이러고도 살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을 한답니다. ‘몸은 일그러졌지만 마음만을 건강합니다. 예수님을 모신 마음이라 행복합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을 모신 마음이 바로 이렇습니다. 저러고도 살 수 있을까? 라고 말 할 정도로 불행 할 수밖에 없어 보이지만 예수님을 마음 속에 모시면 행복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지금도 여러분의 마음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마음을 열어 예수님을 마음 속에 모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시며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합시다.
|
첫댓글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늘 성령 하나님과 예수님을 가슴에 모시며 살도록 마음의 문을 열어 주시옵소서 굳어진 마음을 예수님의 보혈로 녹여주사 뜨거운 성령으로 임하여주옵소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늘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감사합니다, 샬롬
감사합니다.
좋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설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