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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 서언 / 6 1."지금부터" 장벽의 개방 _ 15 2. 서독에 있는 풋내기가 민주주의에 익숙해지다 _ 50 3. 동독에서의 경력은 어느 정도 순조로웠는가 _ 75 4. 독일 점령지에서 일어난 구테타 - 동독의 생성 _ 96 5. 독실한 믿음 - 반란의 이데올로기 _ 122 6. 숨겨진 죄의 동아리 - 환각제를 흡입해서 혼미해진 비밀경찰 _ 166 7. 애국자들은 몽상가들이 아니었다 - 1953년 6월 17일의 효력 _ 184 8. 소비에트 권에서 일어났던 불화 - 모스크바 - 베를린의 관계 _ 215 9. 환심 사기를 한다고 해서 변화가 일어납니까 - 서독 동독의 상호관계들 _ 251 10. 정치국에 있는 츠비박 - 이익이 없는 계획경제 _ 272 11. 가장 강력한 유도무기들 - 배아(胚芽)가 없는 국영 대중매체들 _ 294 12. 성급한 개명(改名) - 독일 사회주의 통일당이 사회민주당/좌파당연합으로 변화 _ 317 ● 부록 1. 법정에서 한 첫 번째 진술 _343 - 베를린 지방법원, 1996년 2월 22일 2. 법정에서 발표되었던 확정적인 성명 _360 - 베를린 지방법원, 1997년 8월 18일 3. 지은이 소개 및 이력 _367 4. 인명 색인 _368 ● 서 언 ● 대부분의 20대는 세월이 흘러가면 귄터 샤보프스키라는 이름을 기억하지 못할지 모른다. 기껏해야 1989년 기자회견장에서 메모를 들고, "이 순간부터 우리는 장벽을 개방합니다."라고 말했던 한 남자가 있었다는 사실만을 기억할 뿐일 것이다. 또한 그들은 이 장벽너머에서 공산주의자들이 통치를 했고, 비밀경찰 직원이 가장 나쁜 공산주의자였다는 것을 아마 그래도 알고는 있을 것이며, 대부분의 동독 인민들이 서방세계로 여행하는 것을 금지 당했고, 동독에서보다 서방세계에서 구매할 것이 훨씬 더 많았다는 것을 학교에서 배워 알게 되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당시 대부분 동독 인민들은 서방세계의 텔레비전을 통해서 그 사실을 매일 알 수 있었고, 장벽의 다른 쪽에 살고 있는 친척들로부터 들어서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동독 인민들의 인내심은 극에 달했기에 결국 거리로 뛰쳐나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또한 시위운동 가담자들의 압박이 너무나도 커졌기 때문에 동독의 지도부는 장벽을 개방하지 않을 수 없었고, 결국 평화적 재통일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 결과로 더욱 더 많은 것이 유연해지게 되었다. 귄터 샤보프스키는 바로 그때 메모를 들고 있었던 남자다. 1989년 말까지는 그는 공산당 정치국, 즉 동독의 거대한 지도부의 일원이었다. 70년대부터 그 지도부에 있는 최고의 지위를 국가 원수이며, 당의장인 에리히 호네커(Eric Honecker)가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샤보프스키는 그때 사회주의 국가의 그림책에서나 나올 법한 성공을 이미 성취하였다. 그는 포폼머쉬에 있는 소도시 안클람에서 출생했던 함석장이의 아들로 언론분야의 학위를 받았고, 모스크바에 있는 소련공산당의 당원대학을 졸업했다. 텔레비전을 제외하고 동독 지도부가 가장 중요시했던 선전기관인 독일 사회주의 통일당의 대중지인「새로운 독일(Neues Deutschland)」의 경영을 그는 1978년 3월에 인계받았다. 뿐만 아니라, 6년도 채 지나지 않아 그는 공산당 정치국의 정회원이 되었고, 바로 뒤이어 독일 사회주의 통일당의 베를린 지역 간부의 리더가 되었기에 편집장의 지위를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아무튼 오늘날 통일된 베를린의 현직 시장인 보베라이트와 유사하게 당시 그는 당의 베를린 지역의 리더로서 동 베를린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리고 샤보프스키는 모스크바에 있는 고르바초프(Gorbatschows)의 개혁모임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던 충성스러운 고르바초프의 추종자였기에 1989년 가을에 호네커의 실각을 계획했을 뿐만 아니라, 관철시켰던 자들 중의 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체제를 무너뜨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호네커의 실각이 동독을 더욱 유연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샤보프스키는 개혁을 통해서 독제체제를 안정시키려고 끝까지 애를 썼던 것이나, 독제체제가 삶의 현실에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붕괴되고 말았다. 1989년 12월과 1990년 1월 사이에 그는 모든 직위를 잃어버렸고, 동독에서 출세를 하고자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가입해야만 하는 독일 사회주의 통일당에서 제명당하고 말았다. 왜냐하면 독일의 민주 사회당의 전신인 독일 사회주의 통일당을 서방세계에 유용하도록 변화시키고자 했던 이들에게는 때늦은 개혁자인 샤보프스키는 단지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는 안전판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샤보프스키는 독일 역사의 쓰레기더미에서 다시 모습을 나타내게 되니, 그때까지 그가 이룩해 놓았던 성공적인 삶은 바로 1989년 말에 폐허더미로 바뀌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몇 주 전만 하더라도 그는 그 사실을 도저히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아무튼 그는 더 이상 성공적으로 출세한 사람이 아니라, 인민들이 부당한 정권에 저항해서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에 그 부당한 정권에 대해 책임을 져야하는 죄인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다시 말해, 통일된 독일에서 샤보프스키는 우선 독일 사회주의 통일당의 보스였기 때문에 동독 정권과 관련된 범인으로 간주되고 있었다. 그때, 나는 그를 개인적으로 알게 되었다. 그와 인터뷰를 하기 위해서 나의 훌륭한 친구인 루드비히 코에네(Ludwig Koehne)와 포츠담 광장과 브란덴부르크 문 사이의 가로수 길가에 있는 그의 현대식 베를린 집으로 그를 찾아갔다. 우리가 그의 집 초인종을 눌렸을 때, 아마 그가 자신의 스케줄을 조정하고 우리와 같이 부담이 되는 기자들을 뿌리치는 대인 경호원들과 개인비서를 아직도 두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샤보프스키가 직접 문을 열었다. 그의 안색은 슬픔에 젖어있었고, 게다가 살은 몇 키로나 빠져있었으며, 청색 진(Jeans)과 청색 속옷을 입고,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그의 목에는 돋보기안경이 흔들거리며 드리워져 있었다. 그런데 우리가 그와 인터뷰를 하고자 했을 때, 그는거래를 능수능란하게 제안했다. 내가 새로 구입한 서방세계의 서가(書架)를 어떻게 조립하는가를 당신들이 나에게 설명을 해준다면, 수뇌부들이 동독에서 어떻게 살았는가를 당신들에게 설명해 주겠소.그래서 우리는 그가 서가를 조립하는 것을 도와주었고, 그는 우리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사전에 우리는 다른 정치국원들과도 대화를 나누었다. 물론 그때 샤보프스키가 동독의 엄청난 최고의 간부였다는 사실이 곧 밝혀졌다. 게다가 그의 웅변술에는 더욱 힘이 넘쳤고, 비유적 용법이 자주 사용되었다. 그러니까 그가 바로 베를린의 입이었던 셈이었다. 그래서 그는 더욱 의심을 받게 되었고, 이전의 동료들과는 달리 자신의 과거를 충분히 되돌아보고 싶은 소망이 컸었다. 다른 한편으로 샤보프스키는 동독이 붕괴되지 않을 거라는 높은 개연성을 믿었기 때문에, 10년 동안이나 정치국에 근무했는지도 모른다. 또한 그가 체제를 의심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고자 했다면, 그는 놀라서 우리를 빤히 응시했었을 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잠시 동안 호네커의 후계자였던 에곤 크렌츠(Egon Krenz)처럼 완강하지도 않으면서 옛날의 원칙을 충실히 이행하려는 모습이 그에게는 이젠 어울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많은 다른 사람들처럼 모든 이점을 이용하여 교묘하게 빠져나가려고 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는 자신이 실패한 근거를 규명하고자 했다. 그래서 우리는 보스이자 동시에 속죄하는 사람이었던 샤보프스키와 수개월간 대화를 할 수 있었다. 이 인터뷰는 1990년 가을에 책의 형태로 출간되었다. 책 제목은 당시에《문의(Eine Befragung)》였다. 그와 동시에 샤보프스키의 자서전도《추락(Der Absturz)》이라는 책 제목으로 출간되었다는 사실을 우리가 출판사에게 이야기하지 말았으면 좋았을 것이다. 다음 해에도 그 자신에 대한 불쾌한 일에 맞서고자 하는 욕구, 즉 자신의 전기(傳記)와 동독의 체제에 대해 비판적인 검사를 받고 싶은 욕구를 그는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훨씬 후에 독일 사법기관이 그를 고발해서 그는 1997년에 징역 3년형을 언도받았다. 우리는 20년이 지나서도 서로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니까 내가 이미 15년 전부터 베이징에 살고 있었지만, 우리는 서로 몇 번이고 대화를 나누었다. 그래서 20년이 지나서도 또 다시 대화의 기반을 함께 만들 수 있는 결심을 할 수 있었다. 샤보프스키는 통일된 독일에서 새로운 역할을 찾아냈다. 그는 행사에 초대를 받을 때마다 자주 이데올로기(Ideologie), 현혹의 술책을 경계하라고 주의를 주었다. 그는 돌아다니며 강연을 하였고, 신문에 기고문을 썼으며, 텔레비전 방송국의 게스트로 출연하였다. 동독뿐만 아니라 소련 전체의 체제도 조만간에 붕괴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결함, 그 비인간적인 구조결함 때문에 첫날부터 다수의 의지를 무시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을 경쟁시켜 이익을 취하지 않게끔 했다는 사실을, 그는 오늘날 인정하고 있다. 그때부터 욕심이 많았던 당시 소수의 동료들은 그를배반자로 간주하고 있다. 게다가 샤보프스키가 장벽을 개방함으로써 노동자 계급의 적인 독일 연방공화국의 손에 동독을 넘겨주었다고 억지를 부리고 있다. 뿐만 아니라 소수의 동료들은 오늘날까지도 승리자들에 의해서 좌우되는 사법기관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다고 느끼고 있다. 그렇지만 샤보프스키가 죄를 자백함으로써 적지 않은 희생자들이 극단적인 파국으로 치닫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그 희생자들은 샤보프스키와 같은 사람이 입장을 대체적으로 공공연하게 밝히는 것을 아직도 불쾌하게 생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샤보프스키 같은 그런 사람을 새로운 체제의 멜로디를 휘파람으로 불면서 유연하게 궁지를 벗어나는 기회주의자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런 사람들은 서독 사람들의 다음과 같은 날카로운 질문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국가로부터 등을 돌려야만 했던 사람들을 총살시켰던 정부가 법률적 죄와 도덕적 죄를 구별하는 권한이 있다고 믿는가? 독일인의 자유로운 세계가 엎어지면 코가 닿을 정도로 가까운 곳에 있는 것을 못 본 체 할 수가 있었겠는가? 그가 무엇을 정확히 알았겠는가? 장벽에서 생긴 희생자들에 대한 보고가 적혀있는 어떤 서류들을 그가 읽었는가는 여전히 전혀 다른 이야기인가? 명령에 동의를 했다면 법률적으로 유죄인가? 아무튼 동독 정부의 책임자들 중 어느 누구도 샤보프스키보다 자신의 죄에 더 깊숙이 파고드는 사람은 없었다고 확언할 수 있다. 그런데 이전의 전체 소련연방에 대해서 완전히 입을 다물고 있는동맹국들에서도 이와 같은 어려운 상황을 감수했던 자를 찾아볼 수 없다. 그렇지만 두 가지 변화들이 가장 빈번하게 나타나고 있는데, 하나는 체념을 하고 있지만 완고함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양심 없이 남의 눈을 속이는 것이다. 게다가 바로 옛날의 사회주의 소련연방공화국에 있었던 사람들이 나중에 장벽이 개방되게 되었던 그 빈틈을 이용했을 뿐만 아니라 동일한 운명체인 정치집단의 도움으로 돈을 신속하게 벌었던 사람들도 많았다. 샤보프스키는 자신이 타인의 지시를 받는 말단 당원이었기 때문에 동독에서 일어난 사실에 대해서 책임이 없었다는 그릇된 결론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행했던 일이 옳았었는지를 내적으로 여전히 의심하고 있고, 동독에서 일어났던 사실에 저항하기에는 자신이 너무 나약했다는 변명조차 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옛날 정신자세가 체제의 엄격함을 대변했던 것이라고, 그는 가식없이 해명하고 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은 그의 해명에 흡족해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의 해명이 자신의 죄를 세련되게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사이에 수백 번의 초대강연에서 그가 좋은 반응을 얻은 요인이 되었다. 그러나 샤보프스키 같은 사람은 100년 전이었다면 승리자에 의해서 목이 잘렸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생생하게 표현한다면, 부당한 체제에 있었던 고위 대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승리자의 경우에도 발전은 현저하게 이루어진 셈이다. 게다가 다음 세대들에게 이데올로기와 독제체제의 위험을 경고하기 위해서 최근 20년 동안에 학교, 단체와 기업이 샤보프스키를 되풀이해서 초대했다. 어느 한 쪽의 경우에는 서방세계가 초대한 자에게 있는 독선이 초대의 이유인지도 모른다. 그와 같은 초대에서 우연한 기회에 공산주의자들만이 이념적 편견이 없다는 사실을 사려 깊은 사람은 곧 분명하게 알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 지구상에 있는 김정일과 무가베(Mugabes) 가족들은 운명적으로 이념적 편견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고 해도 자신의 생활방식에서 나타난 부정적인 측면들을 서서히 제거해 나가려는 일반적인 인간본성이 중요한 것이 아니겠는가. 다시 말해서, 그 인간본성이 때때로 가치가 있을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더욱 용이하게 보존될 수 있다. 그렇지만 인간본성을 더욱 용이하게 보존하는 방식이 다른 사람들에게 해가 된다면, 그것은 조심해야 되는 것이다. 이 부정적인 측면들이 얼마나 성공적으로 서서히 제거될 수 있는지는, 특히 그 부정적인 측면들에 저항하는 희생자들에게 얼마나 많은 활동 여부가 주어지느냐에 따라 좌우된다. 그런데 조지 부시 정부가 수입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지출했기 때문에, 또한 동시에 기대할 수 없는 안전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을 요동치게 하였기 때문에, 아마 조지 부시(George W. Bush) 정부는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위기에 빠뜨렸던 것에 대한 해명을 어느 날 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라크 전쟁 때문에 부시는 덴 하아그(Den Haag)에 있는 국제재판소에 소송을 제기하는 아주 좋은 기회를 갖게 된 것 같다. 리만 브라더스사의 최고경영자들이 샤보프스키와 아주 유사한 질문들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때의 최고경영자들이 사용했던 방법은 1년 전에는 여전히 상식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또한 최고경영자들이 2008년 여름까지도 본보기로 간주하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이와 같이 자칭 성공이라는 것이 이토록 빠르게 죄로 변화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처럼 그렇게 행동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러니까 개발도상국 사람들의 거의 90%가 저항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현재 세계인의 10% 이상에 해당되는 사람들의 이익을 가혹할 정도로 옹호하고 있는 서구 산업 국가들을 이끌어가는 정치가들에게도 샤보프스키와 같은 사람이 당한 유사한 일이 아마 그들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 게다가 서방 산업 국가들의 복지수준, 이념적 영공권, 그리고 세계 경제에서 최근에 나타나고 있는 서방 산업 국가들의 비민주적인 권한요구를 옹호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되면, 더욱이 서방 산업 국가들은 모든 사람의 위탁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서방 산업 국가들도 많은 사람들이 보기에는 이미 죄를 저질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대다수의 세상 사람들은 죄인들로 하여금 결론을 이끌어내도록 강요하는 것에 대해서 충분히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다. 물론 아직도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다수의 의견을 따르다보면, 언젠가는 국제 공공기관도 의견을 충분히 일치시킬 것이다. 다시 말해서, 민주주의 서방국가에서조차 죄에 대한 문제는 매우 상대적인 것이다. 비록 오늘은 정의의 편에 서있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라도, 내일이면 벌써 달라질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 사실이 정상의 정치인들과 지정학적 변동들에게 적용될 뿐만 아니라, 평상시에는 우리 모두에게 적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프랑크 지렌 2009년 봄, 북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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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