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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
박옥자 동기님!
우리들의 핏줄의 역사인 족보를 들쳐보면, 어느 가문이나 훌륭한 조상들이 있기 마련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국사를 배우고, 세계사를 배우고, 이스라엘의 역사를 듣고, 베드로와 아브라함의 행적을 공부하고 들으면서도 정작 나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고 키워주신 부모나 할아버지나 가까운 조상 들의 이야기를 모르고 자손들이 자란다고 하면, 이 얼마나 허황하고 안타까운 일이겠습니까?
비록 내 핏줄이 왕족의 핏줄이 아니더라도, 내 스스로 내 핏줄에 자부심의 뿌리를 박고 밝은 태양을 향해 줄기차게 뻗어가야 깡다구 있는 자손들이 되지 않겠습니까? 처음에 저는 저 자신과 집사람, 아들, 며느리, 손주들을 위하여 이 이야기를 적었는데, 바라기는 이 글이 인간이 되어가는 과정 중에 있는 후손들이 자기 정체성을 찾는데 도움을 주는 글이 되었으면 하고 있습니다.
제주 목사였던 이약동 할아버지 이야기는 박옥자 동기님께서도 관심이 있을 만한 이야기 일 것으로 생각되나 마지막 이 이야기는 이 글을 써서 억지로 읽게 한 이 이학원이의 본심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고 보내드립니다.
전에 제가 이 이야기를 강원대학교 총장에게 자랑삼아 했더니 제주대학으로 가고자 하면 보내주겠다고 하여 큰 일 날 뻔했습니다. 요즘 같으면 가겠다고 했을 것 입니다.
자식들에게 조상을 알린다는 것이 쉽지 않는 일인 것 같습니다. 요즘 장마와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지만, 바람 많은 제주도라 아열대의 온화한 자연 풍광에 젖으셔서 멋지게 지내시기 바랍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감사합니다.
춘천에서 이학원 배.
어느 청백리 후손의 단상(4)
이학원/강원대학교 명예교수
우리 벽진이씨 가문의 정체성(正體性: identity)을 유감없이 발휘한 기라성 같은 조상들이 밤하늘의 별들처럼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 고려조의 청백리(淸白吏)였던 이극송(李克松)할아버지는 1236년(고려 고종 23년) 명경문과(明經文科)에 장원급제, 청렴 강직한 청백리로 판삼사사(判三司事)의 벼슬에 올랐고, 맑고 깨끗하여 아무 티가 없는 정신을 지녔다고 하여, 고종은 친히 할아버지께 「빙옥(氷玉)」이라는 호를 내렸다. 고려조에서도 우리 가문에 청백리가 있었다. 이와 같은 자랑스런 뿌리를 가지고 있었던 우리 가문이기 때문에 조선조의 이약동 할아버지께서도 청백리의 맥을 이어 온 것이 아니겠는가.
10세손 이옹(李雍) 할아버지의 장남 이셨던 이견간(李堅幹) 할아버지는 고려조의 충렬•충선•충숙왕의 3왕조에 걸쳐 벼슬이 진현관대제학(進賢館大提學)에 이르렀고, 말년에는 산화선생(山花先生)으로 불리면서 행고학박(行高學博)한 문장가로서 벽진이문을 화려하게 빛냈다. 같은 시대의 서거정(徐居正)은 그의 저서 「동시선(東詩選)」에서 할아버지가 지은 시구(詩句)를 뽑아 설명하면서 “동방에 두견을 읊은 시(詩) 사절(四絶) 중에서 가장 으뜸간다”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조선조의 경은(耕隱) 이맹전(李孟專: 1393~1481)) 할아버지는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의를 지킨 생육신(生六臣)의 한분이시다. 병조판서 이심지(李審之) 할아버지의 아드님으로 경북 선산 구미 형곡에서 태어나셨다. 1427년(세종 9년) 친시문과(親試文科)에 급제하여 승문원의 정자(正字), 정언(正言)과 소격서령(昭格署令), 경상도 거창현감(居昌縣監)을 지내셨다. 거창현감으로 지내실 때 청백리로 소문이 크게 났다. 1453년 수양대군이 계유정난(癸庾政亂)을 일으켜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집권하자 거창현감 벼슬을 버리고 물러났다. 고향 선산(善山)으로 내려가 도의지교(道義之交)를 맺었던 김숙자(金淑滋) 등과 학문을 교유하며 지내셨으나 눈멀고 귀 먹었다 지칭하며 두문불출의 은둔생활을 계속하셨다. 그리고 세조가 있는 대궐 방향으로는 앉지도 않으셨다. 89세의 세수로 돌아가시기 직전에야 가족들도 할아버지의 귀와 눈이 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크게 놀랐다.
1782년(정조2년) 나라에서 할아버지께 정간(靖簡)이란 시호를 내리고, 이조판서로 추증하였다. 경은 할아버지는 인간의 중요 덕목인 절의를 지키고 실천하는 것이 벼슬 생활을 계속하는 것 보다 더 가치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행동으로 실행하셨다. 후손인 우리들 누가 할아버지의 흉내라도 낼 수 있겠는가.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다. 후손들과 백성들에게 큰 가르침을 주었다. 또한 모든 관료들에게도 신하와 충신이 무엇이 다른지를 알렸고, 한 가정의 아버지로서, 부모를 모신 자식으로서, 생명을 귀하게 여겨야 할 한 인간으로서 행동해야 할 옳은 길이 무엇인지를 깊게 생각해 보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1786년(정조6년) 왕명으로 할아버지의 학문과 충의를 추모하기 위하여 토곡동(土谷洞)에 용계서원(龍溪書院)을 건립하였다. 후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노항동으로 옮겨 서당으로 사용하다가 1976년 영천댐 건설로 다시 경북 영천시 자양면 용산리의 현재 위치로 옮겨왔다. 현재 경북 유형문화재 제55호로 지정되어 보호를 받고 있다.
노촌 이약동(老村 李約東)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앞에서 했다. 할아버지께서 건립한 산천단은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아라1동 제주대학교 뒤 언덕 위에 있다. 꽤 넓은 제단 언저리에는 수령이 500~600여년 이상 된 늙은 거대 곰솔 8그루가 서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곰솔이라 천년기념물 제160호로 지정되어 보호를 받고 있다. 제단 터나 부근 지형을 보아서는 제단 터를 만들 당시에 곰솔을 심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나라 서해안이나 남해안•동해안 바닷가에는 방풍림(防風林)으로 또는 방사림(防沙林) 목적으로 곰솔을 많이 심어 조림한다. 곰솔은 다른 어떤 나무보다 해풍과 해수에 강하고 잘 견딘다. 그리고 해충에도 강하다. 산천단에서는 산신제만 지냈던 것이 아니고, 농사의 재해 예방을 기원하는 포신제와 가뭄 때 비를 내려줄 것을 비는 기우제도 지내던 곳이라고 하였다.
겨울철에 세차게 불어오는 북서계절풍이나 농사철의 해충을 막기에는 8그루의 곰솔 나무는 너무나 적다. 제주도의 모든 재앙을 막아주는 상징적인 나무로서 곰솔을 제단 주위에 심었을 것이나,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죽거나 훼손되어 현재 까지 남아 있는 곰솔이 8그루 밖에 안 되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제단 터를 만들었던 할아버지가 방풍•방설•방재•방액(防厄)의 상징으로 곰솔을 심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산천단 인근이나 근방에 다른 어떤 곰솔 군락이나 오래된 거대 곰솔을 찾아볼 수 없는 것도 이러한 짐작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산천단 안에는 할아버지께서 직접 건립한 이끼 끼고 글씨가 거의 마멸된 한라산신고선비와 작은 규모의 제단이 이 있는데, 옛 것을 그 자리에 둔 채로 제주도와 벽진이씨 문중이 힘을 모아서 규모가 큰 새로운 비와 제단을 건립하였다. 새로 세운 비문에는 「목사이약동선생 한라산신단기적비(牧使李約東先生 漢拏山神壇紀蹟碑)」라 적혀있다. 산천단 곰솔공원은 제주도민들과 외래 관광객이 많이 찾는 유원지로 개발되어 있다. 제주시 이도1동에는 귤림서원(橘林書院)이 있다.
이 서원 안에 충암 김정(沖菴 金淨)의 사당이 있었는데, 노촌 이약동 할아버지를 함께 배향하였다. 그러다가 1675년(숙종 1년)에 충암의 사당 옆에 향사(鄕祠)를 별도로 지어 영혜사(永惠祠)라 이름하고 할아버지 위패를 이 곳에 봉안하였다. 또한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김천 유림들이 할아버지의 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감천면 원동 마을에 청백사(淸白祠)란 향사를 지어 위패를 모시고 제향 하였다. 김천시 양천동에도 후손들만으로 건립한 하로서원(賀老書院)이 있다. 이 곳에서도 할아버지의 위패를 모시고 매년 음력 3월 상정일(上丁日)에 유림 향사를 지낸다.
동천(東川) 이상길(李尙吉: 1556~1637년) 할아버지는 공조판서로 봉직하시던 1636년(인조 14년)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종묘사직의 위패를 모시고 먼저 강화도에 들어갔으나 이듬해 강화도가 청나라 적에게 함락되자 아드님 이셨던 이경(李坰)의 후퇴 청을 듣지 않으시고 “종묘와 사직이 망하려 하는데 어찌 구차하게 살 수 있겠느냐” 하시면서 스스로 목매 자결을 하셨다.
이 때 할아버지의 춘추가 81세 이셨고, 이미 관직에서 물러나셔서 보통 사람 같으면 무거운 책임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형편이었는데도 할아버지께서는 사직의 운명과 명을 같이 하신 것이다. 후에 조정에서는 좌의정(左議政)의 증직과 충숙(忠肅)이란 시호를 내려 할아버지의 충절을 높이 기렸다. 뒤에 강화도에 충열사를 세워 우의정을 지내다 할아버지와 같이 자결한 문충공 김상용(金尙容) 충신과 함께 제향하였다.
•1576년(나이 21세): 별시문과(別試文科) 초시(初試)에 합 격.
•1578년(23세): 진사시 초시(進士試 初試)에 합격.
•1585년(30세, 선조18년)): 식년문과 갑과(式年文科 甲科) 에 차석급
제, 풍저창 직장(豊儲倉 直長).
•1592년(선조25년,37세): 예조정랑(禮曺正郞), 선조를 모 시고 평안도에
피난(임진왜란).
•1594년(선조27년,39세): 병조정랑(兵曺正郞), 익산군수
(益山郡守).
•1598년(43세): 광주목사(光州牧使), 당상관(堂上官).
•1602년(47세): 2월에 모함을 받아 황해도 풍천으로 귀
양, 1607년 5월, 52세에 사면됨.
•1604년(49셰): 유배 중에도 호성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
으로 녹훈.
•1608년(53세): 강원도 회양부사(淮陽府使).
•1611년(56세): 평안도 안주목사(安州牧使).
•615년(60세): 호조참의(戶曹參議).
•1617년(62세): 병조참의(兵曹參議).
•1623년(68세): 동부승지(同副承旨),병조참의(兵曹參議).
•1624년: 가선대부(嘉善大夫), 공조판서(工曹判書), 평안도 관찰사(平安
道觀察使) 겸 병마수군절도사(兵馬水 軍節度使).
•1625년(70세): 호조참판(戶曹參判) 겸 도총부부총관(都摠 府副摠管).
•1628년(73세): 예조참판(禮曺參判), 전주부윤(全州府尹).
•1632년~1634년(77세~79세): 병조참판(兵曹參判) 대사간 (大司諫), 대
사헌(大司憲), 한성 좌•우윤(漢城左• 右尹),예조참판(禮曺參判).
•1635년(80세): 자헌대부(資憲大夫), 상호군(上護軍), 중추
부지사(中樞府知事), 공조판서(工曺判書).
•1636년(인조14년): 공조판서로서 종묘사직 위패를 모시
고 병자호란의 난을 피해 강화도로 이동하시다.
•1637년 정월: 강화도에서 순절하시다.
22세손이신 동천 이상길 할아버지는 전라북도 남원에서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지내셨던 아버지 이희선(李喜善) 할아버님의 아드님으로 1556년(명종11년) 병진 12월 3일, 한양 주자방에서 태어나셨다. 서울특별시 노원구 하계동에 위치한 충숙근린공원에는 할아버지의 충절을 기리는 동천재(東川齋)와 충숙이공신도비(忠肅李公神道卑: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70호)가 있고, 충영각 안에는 할아버지 연세 80에 김명국이 그린 충숙이공영정(忠肅李公影幀: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69호)이 봉안되어 있다.
그리고 동천재 옆 언덕에는 할아버지의 묘소와 아버님 되시는 찬성공 이희선 할아버지 묘소, 백씨 되시는 편사공 이상철 할아버지의 묘소 등이 위치하고 있다. 이 동천재 앞뜰에서는 해마다 서울을 비롯한 경기도•강원도 지방에 사는 후손들의 모임인 서울화수회가 열리며, 후손들을 위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난세를 만났던 나라에 출사한 동천 이상길(東川 李尙吉) 할아버지께서는 수많은 어려움과 고통을 당하셨지만 나라를 위한 충절 하나로 모든 고통을 이겨내시고 나라와 우리 벽진가문을 크게 빛내셨다.
근세 19세기 중엽에 우리 벽진가문을 크게 빛낸 할아버지가 화서 이항로(華西 李恒老: 1792~1868년) 할아버지다. 할아버지는 경기도 서종면 노문리 벽계마을에서 아버지 우록헌(友鹿軒) 이회장(李晦章) 할아버지의 아드님으로 태어나셨다. 할아버지는 조선 말기의 성리학자로 화서학파(華西學派)의 태두이시다. 할아버지는 스승 없이 독학으로 학문의 일가를 이룬 재야 선비이셨다. 할아버지는 전통적 문화의식과 정치제도를 계승하면서 서구열강의 도전을 제국주의적 침략이라 규정하고, 그들의 문명 일체를 배격함으로써 민족보존의 길을 찾으려는 척사위정사상(斥邪衛正思想) 형성에 크나큰 공을 세운 대표적인 대학자이셨다.
이 척사위정사상은 당시 사회의 시대적 현실에 대응하려는 논리로써 개항기 서세동점의 동아시아 정세변화에 대처하기 위한 현실대응론 이었으며, 실천운동으로 행동화한 사상이었다. 특히 민족주의 사상과 실천운동인 항일민족운동은 화서학파 제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화서학파 유생들은 국권수호를 위한 이론을 체계화 하고, 우국충절을 위한 적극적인 실천 방법을 모색하였다.
당시 항일운동에 몸을 바친 많은 학자와 애국지사들 중에는 화서학파 출신들이 많았다. 을사보호조약 이후 1906년 항일의병운동을 전개하다가 일본군에 잡혀 대마도에서 순절한 면암 최익현(勉庵 崔益鉉)선생을 비롯하여, 조선 13도 의병도총제를 지낸 의암 유인석(懿庵 柳麟錫)선생, 위정척사파(衛正斥邪派) 학자로서 척양척왜(斥洋斥倭)의 기치를 높이 든 중암 김평묵(重庵 金平黙)선생과 성재 유중교(省齋 柳重敎)선생, 외세 배척의 상소를 올렸다가 처형을 당한 홍재학(洪在鶴)선생, 병인양요 때 강화도에서 프랑스군을 대파한 양헌수(梁憲洙) 장군, 독립운동가 백범 김구(白凡 金九)선생 등이 모두 화서 이항로 할아버지의 대표적인 제자들이다.
화서 이항로 할아버지께서는 스승 없이 독학으로 학문을 이룬 선비이셨으나 할아버지의 학문과 인품을 흠모하는 전국의 선비들이 문하에 많이 모여들었다. 할아버지의 학문이 점차 조정에 까지 알려지면서 여러 차례 부름을 받아 벼슬길에 나갈 수 있던 기회가 많았지만, 그 때마다 완곡하게 사양하고 사서삼경(四書三經)과 주자대전(朱子大全) 등 성리학 연구와 후진 양성에만 전념하셨다.
•1808년(순조8년): 과거에 합격하시다.
과거시험에 부정이 있고, 관리로 진출하는데도 권 모술수가 있
음을 알고 벼슬길에 나가는 것을 단념 하신다.
•1840년: 장사랑(將士郞) 벼슬을 사양하시다.
•1850년: 휘경원 참봉(徽慶園 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사양 하시다.
•1864년(고종1년): 지평(持平), 장령(將令), 당하관, 통훈대 부 등의 벼슬
도 모두 사양하시다.
•1866년: 동부승지(同副承旨), 공조참판(工曺參判)을 내림. 병인양요가
일어나다. 할아버지는 분연히 일어나 흥선대원군에게 달려가 주전
론(主戰論)을 주장하시다.
대원군의 경복궁 중건과 조세제도의 실정을 비판 하고, 만동묘(萬
東廟)의 재건을 주장하시다.
•1902년(광무9년): 자헌대부(資憲大夫), 내무대신 증직(할아 버지가 돌아
가신 후 34년이 지남).
•1905년(광무9년): 황제 칙령으로 문경(文敬)이란 시호를 내리다.
화서 이항로 할아버지께서는 벽진 이문이 배출한 조선조의 거목이셨으며, 위정척사사상과 우국애민의 실천교육으로 근대 민족운동사의 정신적 토대를 이룬 위대한 대학자 이셨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할아버지의 일생을 지배한 주제도 결국 충절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노문리에 가면 할아버지의 생가와 사당이 있는 노산사와 화서기념관, 벽계강당, 할아버지께서 그렇게 좋아하셨던 벽계구곡(蘗溪九曲)이 펼쳐지는 푸른 강이 흐르고 있다.
고려조의 이극송(李克松)•이견간(李堅幹) 할아버지, 조선시대의 이맹전(李孟專)•이약동(李約東)•이상길(李尙吉)•이항로(李恒老) 할아버지들께서는 우리 벽진 이문을 찬란하게 빛낸 거목들이시고, 후손들에게는 불멸의 자원이 되시는 조상님이시다.
이렇게 찬란한 우리 가문의 역사는 후손인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조상의 위대한 행적과 사상은 나에게는 영원히 메마르지 않는 청정 재생 에너지자원이라고 생각한다. 이 풍요로운 자원을 바탕으로 내가 무엇을 어떻게 만들지는 순전히 우리 후손들인 각 개인의 역량에 달려있다고 본다. 지금 살아있는 우리 후손들 가운데서도 각계각층에 훌륭한 분들이 많이 계신다. 이와 같이 훌륭한 조상들의 투철한 청렴•충절•절의 정신을 스스로 자기 인격화하여 일생동안 자긍심과 자존심을 지키며 살아가는 후손이 되도록 노력하는 것만이 바로 나 자신의 발전을 위하고 조상을 기리는 길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랑스러운 조상들의 행적과 역사의 뒤안길에는 항상 인내와 절제와 참기 어려운 고통이 뒤따랐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겠다. 나는 내 혈
관에 우리 벽진 이씨 피가 흐르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어린 조손인 나에게 청백리 자손이라고 가르치시며, 자긍심과 자존심을 심어주시려고 애쓰셨던 내 증조모님을 늘 존경하고 사랑하며 살아간다. -지리학 박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