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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하마드 알리 - 권투선수 - 76세 귀천
성명: Ali, Muhammad 남자
생년월일: 1942년 1월 17일 18:35
출생장소: 미국 켄터키 주
출처: 출생증명서, Louisville, 38n15, 85w46
시간대: CST h6w (표준시간)
시간보정: 중앙이 90도, 5도 동쪽, 酉시의 시작은 17시-20분=16시 40분, 술시의 시작은 18시 40분,
양 력: 1942년 1월 17일 18:35
음/평: 1941년 12월 1일 18:35 남자
시 일 월 년
乙 庚 辛 辛
酉 午 丑 巳
壬 癸 甲 乙 丙 丁 戊 己 庚 대운: 역행
辰 巳 午 未 申 酉 戌 亥 子
83 73 63 53 43 33 23 13 3.11
사망일자: 2016년(76세, 癸巳대운 丙申년) 6월 3일 파킨슨병의 합병증인 호흡기 질환으로 사망함.
링 안팎에서 모두 치열했던 ‘전설의 복서’ 무하마드 알리의 인생
서울신문 / 입력 : 2016-06-04
무하마드 알리는 그가 남긴 명언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쏜다”처럼 화려했지만 굴곡진 인생을 살다간 인물이다. 링 위에서는 세계 챔피언을 석권하며 복싱계를 호령했고, 링 밖에서는 인종차별과 전쟁 반대 등 다양한 사회활동을 하며 조명을 받았다.
1942년 1월 17일 미국 켄터키주 루이빌에서 태어난 알리의 본명은 캐시어스 마셀러스 클레이 주니어였다. 알리가 살던 곳은 인종차별이 심한 곳이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더 많은 무시를 당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12세 때 우연처럼 복싱에 입문했다. 자전거 분실 신고를 하며 분을 이기지 못했던 알리에게 한 형사가 “복싱을 배워봐라”라고 농담을 던진 것이 계기였다. 알리는 당시 세계 헤비급 챔피언 로키 마르시아노의 라디오 중계방송을 들으며 본격적으로 복싱에 투신했다.
알리는 18세였던 1960년 아마추어 복서로서 로마올림픽 라이트헤비급에 출전해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하지만 이후 그의 삶은 크게 바뀌었다. 그는 고향인 켄터키 주 루이빌로 의기양양하게 돌아왔지만, 여전히 극심한 인종차별을 받았다.
패스트푸드점에서 햄버거 사려다 거절당했고, 백인 갱들로부터 위협까지 받았다. 환멸을 느낀 알리는 금메달을 오하이오 강물에 던져 버린 뒤 곧바로 프로 무대에 뛰어들었다.
알리는 훗날 “미국을 대표해 금메달을 따냈다고 생각했던 환상이 그때 사라졌다”라고 말했다. 현란한 스텝과 반사신경, 정확한 펀치로 무장한 알리는 프로 무대에서 승승장구했다.
그는 1964년 2월 25일 복싱 역사상 두 번째로 어린 나이에 헤비급 챔피언에 등극했다. 알리는 당시 챔피언 소니 리스턴을 상대로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쏘겠다”라는 명언을 남기고 링 위에 올라섰고, 7라운드 TKO승을 거두며 WBA 챔피언 벨트를 거머쥐었다.
그리고 곧바로 무하마드 알리로 개명했다. 그는 한창 인기를 구사하던 당시, 본격적으로 삶의 철학을 인생에 투영하기 시작했다. 흑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기 위해 이슬람으로 개종한 뒤 개명했다.
알리는 당시 개명 사실을 알리며 “나는 백인 동네로 이사할 생각이 없고, 백인과 결혼할 생각도 없다. 난 당신들이 원하는 챔피언이 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알리는 링 안에서는 화려한 복싱으로 팬들을 열광케 했고, 링 밖에서는 거침없는 독설과 사회활동으로 언론에 본인의 이름을 도배했다.
그러나 알리는 1967년 본인의 인생에 큰 전환점을 맞게 된다. 그는 당시 베트남전에 반대해 징병을 거부했다가 챔피언 자리와 프로복서 자격을 박탈당해 3년 5개월간 경기를 치르지 못했다.
알리는 당시 법정에서 “난 흑인이라는 이유로 이 나라에서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데, 남의 자유를 위해 싸울 순 없다”고 외쳤다. 우여곡절 끝에 무죄 판결을 받고 3년 만에 링에 돌아왔지만, 알리는 많은 것이 변해있었다.
전성기가 지난 32세의 알리는 주특기였던 스텝이 느려지면서 움직임이 둔해졌다. 결국 그는 반사신경만으로 상대 공격을 피하던 노 가드 전술을 버리게 됐다
알리는 당시 세계 헤비급 1위 제리 쿼리와 3년 만에 경기를 치러 3회 TKO승을 거두며 재기에 성공했지만 1971년 조 프레이저에게 생애 첫 패배를 기록했다.
그러나 알리는 1974년 자이르 (콩고민주공화국의 옛 국명) 킨샤사에서 무적의 챔피언 조지 포먼을 8회 KO로 누르고 세계챔피언에 복귀했고, 1975년 10월 타이틀 방어전에서 조 프레이저에게 14회 TKO승을 거두고 설욕에 성공했다.
그의 기량은 1978년 2월 레온 스핑크스에게 패하면서 저물기 시작했다. 그는 39세였던 1981년 트레버 버빅과 논타이틀 경기에서 판정패한 것을 마지막으로 통산전적 56승(37KO)5패를 남기고 21년 간의 프로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그는 은퇴 기자회견에서 “자유와 정의, 평등을 위해 싸운 사람으로 기억되길 바란다”라고 말했다. 선수 이후의 삶은 안타까웠다. 은퇴 후 선수 시절 얻어맞아 생긴 충격으로 파킨슨병에 걸려 불우한 노후를 보냈다.
그는 54세였던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성화 최종 주자로 나와 오른손을 떨면서 성화대에 점화해 많은 사람에게 회자됐다. 그는 남자 농구 결승전 하프타임 때 당시 국제올림픽위원회(IOC)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위원장으로부터 금메달을 받았다.
지난 1960년 인종차별에 항거하며 강물에 던져버렸던 금메달을 36년 만에 다시 받은 것이다. 이후 알리는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 올스타전(2003년)에 시구자로 나섰고 2005년 미국 백악관에서 자유훈장을 받는 등 대중 앞에 간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2012년 런던올림픽 개회식에도 등장해 관중들로부터 기립박수를 받기도 했다. 파란만장한 삶을 산 그는 2016년 6월 4일 파킨슨병의 합병증인 호흡기 질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무하마드 알리(Muhammad Ali, 1942년 1월 17일 ~ 2016년 6월 3일)는 미국의 전직 권투 선수다. 켄터키 주 루이빌에서 태어났으며, 1964년 맬컴 엑스 등이 이끄는 이슬람운동에 가담하기 전까지 이름은 캐시어스 마셀러스 클레이 주니어(Cassius Marcellus Clay, Jr.)였다. 알리는 1975년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2016년 6월 3일 , 그는 결국 세상을 떠났고, 전 세계의 많은 유명인사들이 애도를 표했다.[1]
경력[편집]
키 190.5cm, 팔길이 200cm. 아마추어 복서로서 복싱을 시작해, 로마 올림픽 라이트헤비급 금메달을 땄다. 프로복서로 전향한 뒤에도 패배 전적이 없는 경기로 헤비급 타이틀을 획득했고, 그 후 3차례에 걸쳐 타이틀 획득을 하여 통산 19차례 방어에 성공하는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1964년 2월 25일 소니 리스턴과 대결에 앞서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겠다’는 호언장담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또한 베트남 전쟁당시 징집영장이 발부되자 ‘베트콩과 싸우느니, 흑인을 억압하는 세상과 싸우겠다’는 말을 남기며 양심적 병역거부를 실천했고, 인종차별 반대투쟁인 흑인 민권운동에 활발히 참여하기도 했다.
소니 리스턴과 두 차례 대결에서 KO승으로 확실한 헤비급 챔피언으로의 발판을 다졌으며, 그 이후로 플로이드 패터슨, 조 프레이저, 조지 포먼, 켄 노턴 등과 승부를 겨뤘다. 무하마드 알리는 1999년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지와 BBC가 선정한 ‘세기의 스포츠맨’으로 선정되었으며, 복싱 역사상 위대한 챔피언 중 한 명으로 불리고 있다.
실제로 그의 프로복싱 통산전적은 56승(37KO)5패이다. 1980년대 초부터 파킨슨병을 앓기 시작해 2016년 6월 3일 합병증인 호흡기 질환을 앓다가 사망하였다. 딸 라일라 알리도 권투 선수로 활동하고 있다.[2] 일생동안 4번 결혼, 7명의 딸과 2명의 아들을 생산함.
약력[편집]
1960년 : 로마 올림픽에서 금메달 획득. 같은해 10월 29일에 프로 데뷔.
1962년 11월 15일 : 전 세계 라이트헤비급 챔피언 아치 무어와 대결. 경기 전에 대기실 칠판에 "무어를 4회에 KO시킨다"고 쓴 뒤 링 위에 올라갔고, 그 예언대로 4회 KO승을 거둠. 경기 전에 KO 라운드를 예고하는 `떠벌이 클레이' 전설이 시작됨.
1964년 2월 25일 : 미국 플로리다주 마이애미 비치 컨벤션홀에서 열린 세계 헤비급 타이틀전에서 소니 리스턴을 7회 TKO로 물리치고 챔피언이 됨. 링지 선정 `1964년 올해의 대결'로 선정. 이 경기후 이름을 무하마드 X와 무하마드 알리로 바꿈. 이후 9차례 방어.
1964년 8월 14일 칵테일 웨이트리스 Sonji Roi와 첫 번째 결혼함.
1966년 1월 10일 Sonji Roi와 이혼함.
1966년 8월 6일 : 브라이언 런던을 3회 KO시킴. 승부를 결정짓는 순간 카메라로 포착할 수 없을 정도로 고속 펀치를 퍼부으면서도 모든 펀치가 클린 힛트여서 보는 이들을 놀라게 했다.
1967년 : 양심적 병역거부 때문에 헤비급 타이틀을 빼앗김. 프로복서 라이센스도 박탈당해 3년간 복서 기간의 공백이 생김.
1967년 8월 17일 Belinda Boyd와 재혼함. 4명의 자식을 생산함.
1970년대에 바람을 피워서 혼외 자식으로 딸 둘을 둠.
1970년 10월 26일 : 세계 헤비급 1위 제리 쿼리와 3년만의 경기에서 3회 TKO승을 거두며 재기에 성공.
1971년 3월 8일 : 조 프레이저가 갖고 있던 WBC, WBA 헤비급 타이틀에 도전했다가 15회 레프트 훅을 얻어맞은 끝에 판정패. 생애 첫 패배.
1972년 4월 1일 : 일본 도쿄에서 열린 마크 포스터와 대결에서 15회 판정승.
1973년 3월 31일 : 켄 노턴에게 판정패로 생애 두 번째 패배.
1973년 9월 10일 : 켄 노턴에게 판정승하며 설욕.
1974년 10월 30일 : 자이르 킨샤사에서 벌어진 WBC, WBA 헤비급 타이틀전(럼블 인 더 정글)에서 조지 포먼을 8회 KO로 물리치고 챔피언 등극(킨샤사의 기적). 이후 10차 방어 성공.
1975년 3월 24일 : 무명의 척 웨프너와 1차 방어전에서 15회 KO승을 거두긴 했지만 경기 도중 다운을 당하기도 함. 이 경기를 본 실베스터 스탤론이 무명의 복서가 무적의 챔피언에 도전해 선전하는 스토리를 구상했고, 이는 후일 영화 록키의 시나리오가 된다.
1975년 여배우와 모델이었던 Veronica Porché와 연애를 시작함.
1975년 10월 1일 :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타이틀 방어전에서 조 프레이저에 14회 TKO승.(드릴러 인 더 마닐라)
1976년 6월 26일 : 일본 무도관에서 프로레슬러 안토니오 이노키와 격투기 대결을 벌였지만 결과는 무승부로 끝남.
1977년 여름에 Belinda Boyd와 이혼하고 Veronica Porché와 3혼함. 두 자식을 둠.
1978년 2월 15일 : 리언 스핑크스에 판정패해 타이틀 상실. 그 후 스핑크스는 지명 도전자였던 켄 노턴 대신 알리와 재대결을 선택했다는 이유로 세계복싱평의회(WBC) 타이틀을 박탈당하고 세계복싱협회(WBA) 타이틀만 보유하게 됨. WBC 타이틀은 켄 노턴에게 돌아감.
1978년 9월 15일 : 리언 스핑크스에게 판정승해 WBA 타이틀을 되찾으며 3번째 타이틀 획득에 성공.
1979년 9월 6일 : 알리 은퇴 선언. 타이틀 반납.
1980년 10월 2일 : 링 컴백. 과거 스파링 파트너였던 래리 홈즈가 갖고 있던 WBC 헤비급 타이틀에 도전했지만 10회 TKO패.
1981년 12월 11일 : 트레버 버빅에 10회 판정패한 뒤 현역 은퇴.
1980년대 초부터 파킨슨병을 앓기 시작함.
1986년 Veronica Porché와 이혼함.
1986년 11월 19일 Yolanda ("Lonnie") Williams와 4혼함. 그들은 1964년 이래로 친구였음. 둘 사이에 아들 하나를 입양함.
1990년 2월 8일 부친 사망. 부친 Cassius Marcellus Clay (1912년 11월 11일 출생 – 1990년 2월 8일 사망)
1994년 8월 20일 모친 사망, 모친 Odessa Lee Clay (née O'Grady; 1917년 2월 12일 출생 – 1994년 8월 20일 사망)
1996년 7월 19일 : 애틀랜타 올림픽 개막식에서 최종 성화 점화자로 등장, 오른손을 떨면서 성화대에 점화함. 금메달을 다시 받음.
2003년 : 메이저 리그(MLB) 올스타전에서 시구. 오랜만에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냄.
2005년 11월 9일 : 미국 백악관에서 민간인에게 주어지는 최고 훈장인 자유훈장을 받음.
2016년 6월 3일 : 앓고 있던 파킨슨병에 대한 합병증 호흡기 질환으로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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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