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군주에 충성을 다한 적들은, 나의 우애를 받을 자격이 있다. 그러나 자신의 신성한 의무를 어기고 자신의 군주를 저버린 적들은, 나의 가장 모멸적인 증오를 받게 될 것이다."
- 티무르의 '법령' 중에서
차가타이 한국의 귀족의 후예, 티무르는 투르크계의 중앙아시아 유목민이었다. 처음에는 서 차가타이 한국의 일개 부족의 귀족 한명에 불과했던 그는 처음에는 자기 부족 비를라스의 수장으로, 그 다음은 사마르칸트의 총독, 차가타이 한국의 지배자가 되었고, 마침내는 대제국 티무르의 창시자가 되었다.
그의 군대의 파괴력은 그 스스로가 후예를 자처하는 칭기즈칸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것이었다. 그는 킵차크 한국을 약탈하고, 차가타이 한국을 지배하고, 인도 델리를 파괴하였고, 다마스쿠스를 함락시켰고. 오스만 제국의 술탄 바야지트를 포로로 삼았다. 그들이 가는 노상에 있는 모든 민족들은 그에게 저항하다가 처참하게 도륙되거나, 그의 발아래 굴복하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었다.
이 공포의 정복자가 코카서스에 발을 디딘 때는 1395년 4월, 킵차크 한국의 토흐타마시를 공격하기 위해서였다. 과거 서로 손을 잡고 싸우기도 했던 토흐토마시는 킵차크 한국의 칸으로서, 티무르의 강력한 라이벌이었다. 토흐토마시는 아제르바이잔 일대의 티무르 군대를 선공하였고, 티무르는 북쪽의 영역을 위협하는 그와 일전을 벌이게 되었다.
토흐토마시의 대군과 티무르의 대군은 북 코카서스의 테레크 강 일대에서 회전을 하였다. 전투는 몽골의 우세로 시작하여, 토흐토마시의 기병대는 티무르의 우익을 격파하고 중앙의 배후를 위협하였다. 그러나 티무르 군대의 풍부한 예비대와, 몇몇 몽골군 이민족들이 자신의 왕이 티무르와 함께 싸우는 것을 보고 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등을 돌리는 행운에 힘입어 승리는 티무르에게 돌아갔다.
티무르의 기병대
이 승리로 몽골군에 대한 결정적 우위를 점한 티무르는 북 코카서스 지방의 산민들을 제압할 것을 결정하였다. 장차 이들이 자신과 대적하여 토흐토마시와 손을 잡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 티무르는, 북쪽으로 진격하여 킵차크 한국을 잿더미로 만들기 전에 자신의 후방을 다질 필요가 있었다.
티무르는 항상 그랬듯이 신속하고 철저하게 자신의 일을 수행하였다. 티무르 군대의 재난을 처음으로 맞은 곳은 현 잉구세티아 수도 마가스였다. 지난 번 몽골군에 이어 이번에도 티무르의 군에 의해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다음에 티무르의 군이 향한 곳은 현 체첸의 수도 그로즈니였다. 이 지점에서 티무르 군은 순자 강을 건너기 위한 다리를 건설하였다. 그래서 지금도 이 지점은 'Timaran gecho (티무르 여울목)'라고 불린다.
티무르는 자신의 대군을 현 체첸 북서쪽의 두다 유르트 지역에 주둔했었는 데, 이 지역은 현재도 'Timar sezna metting (티무르 병영)'으로 불린다. 평야지대를 재패한 티무르는 산악지대로 도피한 산민들을 토벌할 것을 계획한다. 그의 대군은 현 체첸 지역을 통해 코카서스 산악지대로 들어선다.
산민들은 티무르의 군대에 대항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심지어 보병조차도 오르기 힘든 험준한 계곡과 고개를 지키면서 그들은 침략자에게 상당한 피해를 안겼다. 티무르는 자신이 직접 지휘하여 이 산악지대를 계속 진격하였고, 산민들의 저항을 제압하면서 산악지대의 수많은 마을들을 파괴하였다. 전투에 승리하면 티무르는 포로들을 모아서 계곡에 집어 던졌다.
티무르의 군대에 대항하기 위해 산악지대에서는 점차 깎아지른 듯한 성채와 탑이 건설되었다. 높이가 수십미터에 달하기도 하는 그 요새는 침략자가 가장 다가가기 힘든 마을의 고지에 건설되었다. 오늘날에도 체첸의 각각의 씨족들은 유사시에 도피할 수 있는 이 피난처를 하나씩은 갖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티무르는 점차 산민들과 대처하면서, 단순히 모두 파괴하는 것이 능사가 아님을 깨달았다. 코카서스에는 여러 부족이 있었고, 그들은 제각각 몽골군과 손 잡고 티무르에 대항한 적도 있지만, 끝까지 몽골군에게 굴복하지 않은 부족들도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코카서스 산맥 북쪽의 몽골군 거점 도시를 파괴해야 했던 티무르는 그 곳에 오래 머물러 있을 수 없었고, 자신의 적과 적이라면, 설령 동맹은 아니라도 공존할 수는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대한 설화가 몇가지 전해진다. 어느 전투가 끝난 뒤, 티무르는 전장에서 전사한 산민들을 바라보며 자신의 지휘관에게 말한다.
"우리는 그들의 군을 파괴할 수는 있지만, 그들을 굴복시킬 수는 없다. 따라서 그들은 우리의 동맹이 되어야 한다. 그들의 확고한 신념에 대한 나의 경의와 그들의 교화를 위해, 나는 일찍이 누구에게도 준 적이 없는 나의 검을 하사한다."
이 말과 함께 티무르는 포로로 잡은 산민들을 석방하고, 그들에게 검을 하사한다. 실제 체첸에는 티무르가 줬다는 검이 1944년, 스탈린의 강제 이주로 모든 사유 재산과 유물들이 러시아에게 약탈되기 전까지 보관되어 있었다고 한다.
정말 지나간 자리에 풀한포기 남기지 않는 다는 그 티무르가 코카서스의 산민들에게 그토록 경의를 표했는 지 다른 자료가 없어서 판단하기 어렵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티무르가 제국의 다음 왕들을 위해 남긴 '법령'에는 이런 구절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군주에 충성을 다한 적들은, 나의 우애를 받을 자격이 있다. 그러나 자신의 신성한 의무를 어기고 자신의 군주를 저버린 적들은, 나의 가장 모멸적인 증오를 받게 될 것이다."
과연 코카서스 산민들이 티무르의 우애를 받을 자격이 있었는 지는, 불행히도 그들에게 구전되는 설화를 제외하고는 다른 자료를 찾을 수가 없다. 그러나 몽골에도 굴복하지 않았던 체첸과 잉구쉬인들은 티무르에게 그럴 자격이 충분했으리라 생각된다.
티무르는 코카서스 지역에서 잠재적인 적에 대한 조치가 끝났다고 생각하자, 북쪽으로 진격하여 킵차크 한국을 조각조각 격파하고 약탈하였다. 이 공격의 여파로 몇개의 국가로 쪼개졌으며, 과거의 번영을 잃고 동서를 연결하는 초원길도 끊어지게 되었으며, 점차로 킵차크 한국의 멸망을 초래하게 된다. 또한 티무르는 코카서스 남단의 그루지아를 몇 번에 걸쳐서 파괴하였고, 그루지아는 몽골군의 침입에 의해 티무르의 습격을 받아 심하게 황폐화되었다.
워낙 사방에 바쁘게 원정을 다녔던 티무르가 코카서스 산맥에 있었던 시간은 그렇게 많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존재로 인해 코카서스는 전례없이 파괴되었으며, 그의 기억은 체첸에 남아있는 몇몇 지명들처럼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은 그의 인정을 받았던 아니던, 그가 스쳐지나간 흔적은 너무도 파괴적이고 처참했기 때문이다.
출처 : http://www.chechnyafree.ru/en/article.php?IBLOCK_ID=352&SECTION_ID=0&ELEMENT_ID=63167
http://blog.naver.com/hyunjae0506?Redirect=Log&logNo=100032599835
http://blog.empas.com/tamerlane05/5706887
http://www.pbs.org/wnet/wideangle/printable/chechnya_timeline_print.html
http://en.wikipedia.org/wiki/Timur
http://www.truth-and-justice.info/chechnat.html
http://www.amina.com/article/br_hist.html
Osprey : The Age of Tamerlane (2000)
첫댓글 우왕 첫빠임ㅋㅋ// 재밌게 읽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건필해주세요
진정한 정ㅋ벅ㅋ자는 티무르이며 그의 후손들은 콩가루집안
혹시 밀군까페에 jagsjj님이십니까?
예 그렇습니다
워어;;; 엄청났었나 보네요;
톡타미시는 영어식 발음인가요 =ㅂ=?
번역체가 잠깐 느껴졌는데.. 잘 보고 있습니다.
잘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