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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성결교회의 사부(師父) 이명직 목사
한국 성결교회사를 논하면서 이명직 목사를 빼놓을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된 기독교를 체계화한 인물이 바울이라면, 1907년 김상준과 정빈 목사의 복음전도로부터 태동된 한국 성결교회를 건축한 인물이 이명직 목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성결교단의 사부, 교부, 그리고 성결의 기수로 추앙받고 있다.
이명직 목사는 흔히 성결교단의 사부(師父)로 불려왔는데 하얀 수염과 하얀 두루마기 차림을 한 이명직 목사는 경성성서학원(현 서울신대)에서 50년간 교수생활을 통해 1,500명이 넘는 제자들을 배출했으며, 그들에게 영원한 스승으로 각인되었다. 따라서 성결교 목회자 전체가 그의 제자였던 지난 시대에 사부란 명칭은 자연스런 칭호였다. 한편 이명직 목사는 한국 성결교회의 교부라고도 불리는데 그 이유는 한국 성결교회의 초석을 놓고 교단을 성장·발전시켰으며, 그의 성결한 삶과 학문에 대한 열정으로 기독교인의 귀감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성결의 기수인 이명직 목사의 생애와 사역을 조명하는 것은 한국 성결교회의 이해에 크게 유익하리라 본다.
이명직은 1890년 12월 2일 서울에서 전통적인 유교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9세부터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던 이명직은 19세 때에 부친의 뜻에 따라 정치학이나 법학을 공부하기 위해 일본 유학의 길을 떠났다. 그러나 일본의 긴자 거리에서 나팔 불고 북 치면서 노방전도하던 구세군 전도단과의 만남을 통해 예수를 믿게 된 후 그의 생의 목표는 완전히 바뀌어 일본 동경성서학원에 입학을 하게 되었고, 재학중 두 번의 뜨거운 성령체험을 통하여 구원의 확신과 뜨거운 소명감을 가지게 되었다. 첫번째 성령 체험은 사사오 교수의 성서주석 시간에 공부하던 중 일어났는데 학업 중 교실 안에 성령의 뜨거운 불길이 일면서 신학생 이명직 또한 성령을 체험하였다. 이 일이 있은지 얼마 후 미국인 슐 함머 목사가 인도하는 부흥회에 참석했던 이명직은 말씀 가운데 평소 확실한 중생의 체험이 없는 자신의 모습을 안타까워하며 학교에 결석계를 제출하고 골방에 들어가 금식하며 여러 날 철야기도를 하던 중 중생의 체험을 하게 되면서 구령의 뜨거운 열정을 갖게 되었다.
이명직은 한국이 일본에 강제로 합방되던 다음 해인 1911년에 동경성서학원을 졸업하고 전도사의 자격을 취득하여 선교의 임무를 띠고 그의 나이 22세에 귀국하게 되었다. 귀국 후 경기도와 개성 등지를 순회하며 전도하였으며, 개성교회를 목회하여 교회를 부흥시켰다. 1914년 4월 12일에는 한국 성결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안수식이 거행되었는데 이명직은 이명헌, 강태은, 김상준, 이장하 등과 함께 성결교단 처음으로 목사가 되었으며, 충청도 부여에 내려가 규암교회를 3년간 목회하였다. 1916년에는 서울 아현교회의 담임목사로 목회하면서 경성성서학원 교수와 기숙사 사감을 겸하였다.
목회자로서 열심을 다하던 이명직 목사의 사역은 1916년 경성 성서학원의 교수가 됨을 계기로 교육자로서 더욱 빛이 나기 시작하였다. 1920년에는 아현교회 담임과 사감직을 사임하고 교수로만 봉직하였으며 또한 경성성서학원의 규칙을 기초하였다. 특히 1921년 9월에는 경성성서학원이 중심이 되어 큰 부흥운동이 일어났는데 이명직 목사의 회개는 바로 그 부흥운동의 중심이었다. 1935년에는 경성성서학원 원장이 되었고, 1940년 경성신학교로 승격하면서 교장이 되었으며, 1951년 서울신학교 교장에 취임하였으며, 1958년에는 미국 아주사 대학으로부터 한국의 신학 발전과 목회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명예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59년 2월에는 서울신학대학 인가와 함께 초대 학장으로 취임하여 시무하였으나 1961년 문교부 규정이 60세 이상의 학장은 사퇴하여야 한다는 정년제가 실시됨으로 말미암아 부득이 정년 퇴직하였으며, 1965년에 명예학장으로 추대되었다. 그야말로 그는 반 세기가 넘는 기간을 신학교와 동고동락하면서 한국 성결교회를 위한 수많은 교역자를 양성하는 중임을 수행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명직 목사를 가리켜 성결교단의 사부, 교부, 성결의 기수라고 칭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이명직 목사는 교수로서의 사역 가운데 많은 책을 저술하였다. 특히 그는 성결교회 신학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사중복음과 성결론을 체계적으로 깊이 연구하여 발전시켰다. 그의 저서 중에는 성서 강의에 대한 부분이 단연 많고 대작으로는 ‘구약 4천년사’를 비롯하여 기독교 신학개론인 ‘신학대강’, ‘기독교 4대복음’ 등이 있으며, 기독교 교육에 사용된 ‘주일학교 독본 1-5권’이 저술되었으며, 그밖에 수양서로는 ‘길 찾는 친구에게’, ‘인생과 종교’, ‘기독교의 인생관’, ‘성경에서 본 인생관’ 등이 있고, 인생철학을 비롯하여 성결교회 신조, 헌장, 교회사 등 여러 방면의 책들이 있을 뿐 아니라 기타 교단의 중요한 문헌이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이명직은 교회의 행정가로서도 명망이 높았다. 1933년 제1회 총회장, 1934년에 제2회 총회장으로 당선된 것을 비롯하여 1938년 제6회 및 제7회 총회장을 연임하는 등 4차에 걸쳐 교단의 총회장을 역임한 것과, 1941년에 한국인 최초로 동양선교회 재단이사장으로 선임된 것은 실로 그의 행정적인 지도력을 짐작하기에 충분하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목회자, 교육자, 신학자 및 행정가로서 이명직 목사가 한국 성결교회와 한국교회에 끼친 영향은 정말 지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사역이 항상 평안한 것만은 아니었다. 일제 치하에 복음 사역은 그에게 많은 어려움을 주었는데, 특히 대동아 전쟁이 치열하던 일제 말기에 우상숭배인 신사참배를 적극적으로 강요하는 일본의 노골적인 기독교 탄압은 당시 한국 성결교회의 최고 책임자였던 이명직 목사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주었다. 혹자는 당시에 이명직 목사가 일본의 신사참배에 적극 가담하였다고 비난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성결교단의 책임자로서 약 8개월간의 혹독한 고문을 받으며 옥고를 치른 것이나, 성결교단이 재림 교리의 준수로 인해 결국에는 다른 교단에서 볼 수 없었던 교단 해체의 상황까지 맞이한 것을 볼 때에, 성결교단의 대표자로서 이명직 목사는 언제나 기독교의 복음과 교단을 수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할 수 있다.
한국 성결교회를 이룩한 성결의 기수요, 교역자를 무수히 배출한 사부요, 한국 성결교회의 속죄양과 같은 제물이며, 한국교회의 지도자인 이명직 목사는 1973년 3월 30일 오전 7시 30분 “조금도 고통이나 염려없이 손가락으로 위의 세계를 가리키며 극히 평화로운 자세”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임운규 목사(호주성산성결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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