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묵대사 어머님 제문과 진묵대사 이야기
(대사는 1562년 명종 17년에 김제군 만경읍 화포리에서 태어나 1633년 인조 11년 72세에 입적하였다)
조선시대 부처님의 후신이라고 까지 칭송받았던 큰 스님이 계셨습니다.
바로 진묵대사로 큰스님에게는 여동생이 있었으니 남매뿐이었나 봅니다.
스님께서는 모친을 절에서 모시고 살았었고 극진히 모셨는데 어머님께서 돌아가시어 49재를 지내고 그날 어머님 영전에 올린 시가 명문으로 유명한 시라서 오늘 까지 전해져 오고 있기도 합니다.
옮겨 온 글
새만금의 허리쯤에 해당하는 김제시 만경읍 화포리에는 조앙사와 성모암이라는 자그마한 절이 있다. 조앙사는 조선 인조 때의 고승으로, 부처의 소화신(小化身)으로 불렸던 진묵대사(1562~1633)를 기려 창건된 사찰이다.
조앙사의 가장 안쪽, 저만치 만경강이 바라다보이는 곳에 진묵조사전이 있는데, 여기에는 진묵대사의 영정뿐 아니라 그의 모친인 조의씨(調意氏)와 누이의 영정까지 모셔져 있다.
조앙사 옆에 위치한 성모암은 진묵조사의 모친 조의씨를 모시기 위해 1917년에 지어졌다.
진묵대사는 효심이 남달라 출가 후에도 평생 모친을 모시고 효도를 다했다고 한다. 여름날 모기떼의 극성에 고통 받는 노모를 위해, 산신을 불러 모기떼가 나타나지 않게 하라는 명령을 내린 일화는 아주 유명하다.
진묵대사는 모친께 생전에 약속을 했다..자신은 출가하였으니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라도 천년동안 향불이 피워지는 곳에 모친의 묘를 모시겠다고...모친이 세상을 떠났을 때는 생전에 약속했던 대로 천하의 명당인 ‘무자손천년향화지지(無子孫千年香火之地)’에 안장했다.
무자손천년향화지지란 자손이 없어도 천년만년 제사(향불)를 받으며..영원한 복락을 누릴 곳이라는 뜻이다. 진묵대사는 출가사문이기 때문에 후손이 이어질 수 없었다. 그래서 자신이 죽어도 돌아가신 어머니를 향한 제사가 이어질 수 있도록 발원한 것이다.
당시 진묵대사가 노모의 왕생극락을 빌며 영전에 바친 49재 제문은 지금까지도 그 애틋한 효성을 짐작케 하는 명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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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문
진묵대사(震默大師) 제사 축문(祝文)
胎中十月之恩 을 何以報也 리요
태중시월지은 하이보야
膝下三年之養 을 未能忘矣 로 소이다
슬하삼년지양 미능망의
萬歲上 에 更加萬歲 라도 子之心은 猶爲嫌焉 이온데
만세상 갱가만세 자지심 유위혐언
百年內 에 未萬百年 이오니 母之壽 가 何其短也 오리까
백년내 미만백년 모지수 하기단야
單瓢路上 에 行乞一僧 은 旣云已矣 거니와
단표로상 행걸일승 기운기의
橫釵閨中 에 未婚小妹 가 寧不哀哉오니까
횡차규중 미혼소매 영불애재
上壇了 下壇罷 하니 僧尋各房 이옵고
상단료 하단파 승심각방
前山 疊 하고 後山 重 한데 魂歸何處 오니까
전산 첩 후산 중 혼귀하처
嗚呼哀哉 로다
오호애재
해 설
열달동안 태중에서 길러주신 은혜를 어찌 갚사오리까.
슬하에서 3년을 키워주신 은혜를 잊을 수가 없나이다.
만세를 사시고 다시 만세를 더 사신다 해도
자식의 마음은 오히려 만족치 못 할 일이온데,
백년도 채우지 못하시니,
어머니 수명은 어찌 그리도 짧으시옵니까.
표주박 한 개로 노상에서 걸식으로 사는 이 중은 이미 그러 하거니와,
귀밑머리도 풀지 못하고 규중에 있어 시집 못 간 어린 누이는 얼마나 슬프리요.
상단 불공도 마치고 하단제사도 마치고 스님들은 제각기 방으로 돌아갔고,
앞산은 첩첩하고 뒷산도 겹겹이온데 어머니의 혼신은 어디로 갔습니까..
아! 슬프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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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겨 온글..
이 제문을 읽은 스님들은 떠나온 어머니를 생각하고, 효도를 하지 못한 자책감에 대성통곡하는 이가 부지기수였다고 한다.
해탈을 위해 절속(絶俗)을 중시하는 불가의 관점에서 본다면, 진묵대사의 이런 인간적인 면모는 수행의 부족과 결의의 굳지 못함으로 비칠 수도 있을 것이다.
오죽하면 저 중국의 유명한 황벽 희운선사가 의지할 곳 없어 찾아온 노모를 문전박대하여 굶어 죽게 한 고사가 출가수행인의 용맹정진 사례로 회자되랴.
필자는 속인인 탓에 희운선사의 무시무시한 냉정함에 소름은 돋았을 망정 가슴에 깨달음으로 와 닿지는 않는다. 오히려 진묵대사에게 사람다운 온정을 느낄 수 있어서 좋다.
진묵대사에게 어머니는 끊을 수 없는 애욕과 집착의 굴레라기보다 부단한 자기 수행의 채찍이지 않았을까? 그러기에 평생 사랑하고 의지하던 어머니의 죽음을 당해 남의 이목을 괘념 않고 대성통곡할 수 있었으리라. 안회를 잃은 공자가 하늘을 향해 절규했듯이 말이다.
진묵대사가 만경읍 화포리 유앙산에 어머니의 묘를 쓴 후,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이런 소문이 퍼졌다. 진묵대사 어머니 묘소의 풀을 깎고, 향화를 바치고, 공양을 올리고 기도하면, 한 가지 소원은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전국각지에서 성모(聖母)의 묘소를 친견하고 기도하기 위한 순례객들이 줄이 이었고, 성모의 묘소에는 쉼 없이 촛불이 밝혀지고 향화가 피워 올랐으며 기도소리가 끝이지 않았다고 한다.
무자손 천년 향화지지(無子孫 千年 香火之地)라 ....
바로 김제 만경에 있는 명당이 바로 그 곳이다.
당시 사람들이 질병에 걸리면 그곳에 가서 벌초를 하고 성묘를 하면 병이 꼭 나을 수 있고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 했는데, 지금도 앞 다투어 많은 사람들이 향이나 꽃을 올리며 이 묘를 보살핀다고 한다.
이 묘소가 퇴락될 즈음 丁巳年 (1917년) 5월에 고(故) 이순덕화의 현몽에 의하여 진묵대사 어머니의 묘소를 알게 되었다 한다,
그런 연유로 진묵대사와 그의 모친을 기리는 성모암이라는 암자가 지어졌고.. 오늘날은 크게 중창하는 등 번창하여 사찰이 되었으며..풍수공부를 하는 제 학도들이 한번쯤은 다 들러 가는 곳이기도 하다.
즉, 성모암(聖母庵)은 일제강점기에 무자손천년향화지지(無子孫千年香華之地)로 전해오는 전라북도 지역의 고승 진묵대사(震默大師) 모친의 묘소에 세워진 암자로 그 일화를 여기에 소개하고자 한다.
1927년 5월에 이순덕(李順德) 화부인(華夫人)이 계룡산 신도안에 있다가 고향인 임실로 가는 도중
지금의 성모암 인근 마을에 유숙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날 밤 꿈에 서쪽 하늘로부터 흰 가마가 내려오더니 한 스님이 나타나 이 가마를 타라고 하였단다.
그 가마를 타자 공중으로 날아올라 어느 묘소 앞에 내리더니 쉬었다 가자고 하는 것이었다.
깜짝 놀라 꿈에서 깨어나 신심이 일어 집주인에게 꿈 이야기를 들려주니..그 주인이 인근에 진묵대사 어머니의 묘소가 있다고 알려주었다. 그리고는 그곳이 영험한 곳으로 소문나 있으니 참배하고 소원을 빌어보라고 귀띔해 주었다는 것이다.
날이 밝아 묘소를 찾으니 봉분은 무너지고 잡초는 우거져 찾기조차 힘든 상태였다.
이에 바로 묘소를 사초(莎草)하고 시묘하면서 지방유지 신도들과 봉향계(奉香契)를 조직하여 정성스레 보살폈다.
그 후 사람들이 묘소 밑에 제각을 건립하고 고인이 된 이순덕 화부인의 공적비를 세운 것이 성모암의 시초가 되었다.
성모암은 근래 대웅전을 비롯하여 극락보전, 산신각, 고시례전, 종각 등의 건물을 조성하였다.
부인이 영험의 놀라움에 기의(己疑)하여 묘소에 정성껏 시묘를 하는 동안 지방 유지 및 인근의 신도들이 진묵대사의 약력과 이순덕 화부인의 공덕 비문을 세우고 묘 아래 재각을 건립하고 삼존불을 위시하여 진묵대사 모자 분의 영정을 봉안하고 己巳年 (1989년) 성모암으로 중창하였다.
이에 비로소 독경소리와 향불이 끊어지지 않게 되었으니... 묘를 쓴지 300여년만에 실제로 천년 향화지지가 발현된 것이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성모암에 와서 소원을 빌고 치성을 드린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자애(慈愛)의 성모라는 칭호를 얻고 예배의 대상이 되었듯이, 진묵대사의 어머니 역시 어느 결에 신앙의 대상으로 추존되어 있는 것이다.
필자가 성모암을 찾았던 때에도 성모암에는 ‘부처님전 소원성취 천일기도’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또 수능을 앞두고 있던 즈음이어서 수험생 자녀를 위해 기도 온 어머니들이 눈에 띠었다.
지난번 TV 프로그램에서 수능 명당으로 소개된 적도 있어서인지 평일 오후인데도 적잖은 보살들이 향을 사르고, 성모의 묘를 돌며 발원하고 있었다. ‘기도성취발복도량’이라는 이름이 무색치 않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