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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러스와 세균의 공격으로 병에 걸리는 것일까요?
각종 화학 물질과 중금속들로 몸의 생명력이 단축되고 있는 것일까요?
공기중에는 200여종의 감기를 일으키는 바이러스들이 떠돌고 있습니다.
하지만 누구는 감기에 걸리고, 누구는 그렇지 않습니다.
신종플루도 그러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갔지만
누구에게는 위협적이었고 누구는 감염조차 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인간의 욕심으로 인해 파헤쳐진 자연과 환경의 오염으로
인간의 건강이 위협받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연이 파괴되고 환경이 오염되고
불필요한 각종 화학 물질들이 증가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인간이 건강을 위협받고 질병에 걸린다고 만은 말할 수 없습니다.
이미 하늘이 인간을 낳으실 때 그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는 힘, 생명력 또한 주셨다면
그 생명력은 스스로 변화하고 성장하는 힘 뿐만 아니라
스스로 회복하고 복구하는 힘,
어떤 외적인 요소나 환경의 자극 조차도
스스로 해독하고 복구할 수 있는 힘까지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인간은 완벽하게 창조된 것입니다.
우리의 피폐한 삶은
늘 남탓, 환경탓을 하며 외적인 것에서 원인을 찾도록 길들여져 있습니다.
병이 걸려도 외적인 원인 때문에 그렇다 생각하여
그 세균과 바이러스를 죽이려 병원에 가서 약을 먹습니다.
또 환경의 파괴가 심각하다 하여 강력한 환경론자가 되고
스스로 자연 지킴이의 삶을 사는 것을 큰 자랑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남 탓입니다. 환경 탓입니다. 모두의 원인을 밖에서 찾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렇게 불안하고 초조하고 두려워하며 공포에 떨고
소리질러 분노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들의 분노는 두려움에서 비롯됩니다.
두려움은 생존을 위협받았을 때 생기는 감정입니다.
생존의 위협을 느끼고 있는 셈입니다.
갓 태어난 아기가 부모에게 젖을 제 때 받아 먹고 기저귀 제 때 갈아 입혀 주며
지독한 관심과 사랑속에서
자신이 태어난 이곳이 안전한 곳이다, 살만한 곳이다 느껴진다면
두려움에, 공포에 떨 일이 아니었습니다. 울거나 보챌 일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어른들조차도 두려움에 사로잡혀 아이처럼 울고 보채고 삽니다.
먹을것, 입을 것 걱정 없었던 뱃속에서 아이는 생존에 대한 걱정이 없었지만
세상 밖으로 나온 아이는 온통 세상이 나를 반기고 보살펴 줄 것인가에
모든 감각이 곤두서 있습니다.
그것이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성장하는 과정에서도 부모는 바빳고 선생님과 친구들은 내 마음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나는 한번도 사랑과 안전과 평화를 느껴본 경험이 없었던 것이죠.
그렇게 성장한 아이가 세상에 던져 졌을 때
야생의 정글처럼 느껴졌던 그 곳은 너무나 두렵고 무섭게 느껴집니다.
집에서와 마찬가지로, 어린 아이 때와 마찬가지로
밖에 나와서도, 어른이 되어서도 두렵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비로소 하늘 마저도 이런 삶을 살아가고 있게,
나를 버리셨다는 원망과 버림 받았다고 느끼는 자아는
삶의 좌절과 사랑의 결핍과 게으름과 용기의 부족과... 이런 모든 것들을 나열하며
급기야 자신은 하늘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생각에 빠져 들곤 합니다.
부모에게서, 하늘에게서 버림받았다는 생각은,
부모가, 하늘이 나를 지독히 사랑으로 키우셨다고 생각하지 못함은
드디어 온갖 생존에 대한 위협,두려움을 야기하고
그 두려움은 때로는 허무의식과 좌절감으로,
때로는 우월감과 극도의 자존감을 거쳐
세상에 대한 분노와 피해의식과 방어기제, 공격성, 적대감으로 커가게 됩니다.
두려움 자체는 생명 자체를 유지할 수 없다는 스스로의 판단속에 드러나는 감정입니다.
나는 죽었습니다. 나는 죽게 될 것입니다. 라고 판단한 나의 마음은
비로소 나를 죽게 합니다.
그래서 두려움은 질병과 죽음의 가장 큰 원인입니다.
두려움이라는 생존 반응이 일어나면 피는 모두 머리와 심장과 근육으로 몰리게 됩니다.
도망치기 위해 머리를 굴려야 하고
살아남기 위해 심장의 박동수를 높혀야 하고
끝까지 달리기 위해 근육으로 피가 몰려 듭니다.
머리는 갈수록 영악해지고 심장은 늘 활기 있고 근육은 생기 넘치는 그 모든 것들은
이미 생존의 위협을 크게 느끼고 있다는 것이고, 이미 그것을 은폐하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생존의 위협을 느낄때 분비되는 스트레스 호르몬은
피를 머리와 심장과 근육으로 몰려 들게 할 뿐만 아니라
손가락, 발가락의 피를 거둬 들여 손발을 차갑게 만들고
소화기의 피를 거둬 들여 소화 불량 상태에 빠지게 하고
생식기의 피를 거둬 들여 종족 번식의 기능을 차단합니다.
현대인들이 가장 많이 앓고 있는 수족 냉증과 위장 기능 저하와 생식기능 저하는
모두 야생의 정글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는
현대인들의 생존 반응이고 두려움의 자취들입니다.
두려움과 분노, 피해의식과 방어심리속에 분비되는 아드레날린은
면역 세포들을 꼼짝도 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들은 이제 죽었다 생각하는 주인을 위해 충성할 필요를 느끼지 못합니다.
암 환자들은 암세포 때문에 죽지 않습니다.
지금 누구나 어떤 사람들의 몸에서도 암 세포는 만들어 집니다.
하지만 그것을 제거하고 청소하는 면역 세포들이
수시로 잘 작동하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되질 않습니다.
암을 진단 받은 환자들은 난 죽었구나! 하는 그 생각 때문에 죽습니다.
둘째는 항암치료를 받다가 증식 속도가 가장 빠른 점막들과 세포들을 공격당해
위점막이 손상되고 호흡기가 손상되고 면역 세포들의 기능이 떨여져
못 먹어서 죽고 폐렴과 감기와 같은 사소한 감염에 죽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바이러스, 세균, 암세포, 화학 물질, 중금속등을
죽이고 미워하고 내쫒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내가 어떻게 바라 볼 것인가에 관한 문제입니다.
그것은 과거에도 그러했고 현재에도 그러했고 미래에도 그러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내것으로 만들고 그것에 사로잡혀 감정을 만들어 내고
스스로 면역 기능을 죽여가는 것은 오로지 자신 때문입니다.
외적인 요소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면 그것은 이미 내 안에 없습니다.
두려움이 아니면 내 생명력은 잘 작동하고 있을 테니까요.
모든 감정의 파동은 비슷한 파동을 불러 들입니다.
슬픔의 파동은 슬픔과 관련한 바이러스를 불러 들이고
외로움의 파동은 외로움과 관련한 바이러스들을 불러 옵니다.
그래서 슬픔은 기침을 나게 하고 폐 질환을 앓게하고,
외로움은 콧물을 흘리게 하고 호흡기 질환을 앓게 하고,
두려움은 소변의 배설을 방해하고 신장 질환을 앓게 하고,
근심 걱정은 소화 기능을 멈추어 위장 질환을 앓게 하고,
분노와 적개심은 온 몸의 물질 대사를 교란하고 간장 질환을 가져 옵니다.
우리 몸은 200조가 넘는 타 생명체들과 공존하고 있습니다.
늘 우리는 타 생명체와 공존해 왔습니다. 똥의 1/3은 세균의 시체입니다.
질 점막에는 늘 곰팡이가 있지만
우울증에 걸리면 하얀 냉이 나오게 하는 칸디다에 걸리게 하고
분노와 적개심에 사로 잡혀 있으면 노랗고 냄새 나는 냉이 나오게 하는 트리코모나스에 걸리게 합니다.
또 대장에는 늘 장내에서 섬유질을 분해하고 영양소를 만들어내는 유익균과
육고기를 분해하고 유해가스를 만들어내어 병을 초래하는 유해균이 균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위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위궤양을 일으키는 헬리코 박테리아가 늘 우리를 공격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그것을 필요로 할 때 그렇습니다.
내가 죽고 싶을때, 내가 살고 싶지 않을때
이미 내 몸의 환경은 바뀌고
내 몸은 그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또는 비슷한 것끼리 공명하며 위로하기 위해서, 치료하기 위해서
비슷한 파장의 것들을 끌어 들입니다.
유유상종입니다.
비슷한 것끼리 공명하며 내안에 있는 모든 것들, 내 인생에 일어나는 그 모든 것들은
이미 내가 모두 불러온 것들입니다. 누구도 원망함은 가당치 않습니다.
초조함이 수은이라는 중금속을 불러 들여 세포의 수용체들을 마비시켜 모든 신체 기능을 떨어 뜨리고
몸도, 마음도 진중함 없는 안절 부절 상태를 만들어 버립니다.
분노와 적개심은 납이라는 중금속을 불러 들이고
그 납은 전두엽에 쌓여 인간을 정신 분열 상태로 만들어 버립니다.
슬픔과 외로움은 알루미늄을 끓어 들여
그것이 뇌에 침착하면 우울증, 치매와 같은 뇌질환을 일으킵니다.
근심과 걱정과 불안은 카드뮴을 끓어 들여 모든 면역 작용을 깨뜨려 버립니다.
아토피와 난치병을 앓고 잇는 아이들에게 납과 수은과 카드뮴이 많은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아이들의 마음이 상처가 아물지 않는한 병은 절대 치료되지 않습니다.
인간 관계에 깊은 상처를 받은 사람들은
그것이 죄의식으로 남을 때 구리를 끌어 들이고
그것이 분노와 피해의식으로 남을 때 아연을 끌어 들입니다.
이또한 모든 면역 기능을 파괴하고 외적인 모습까지 바꾸어 버립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얼굴과 말과 행동은 모두 그 사람을 설명해 줍니다.
또 무엇을 할까 말까, 용기를 내지 못하고, 생각하고 계산만하여 실천하지 않는 양심은
철분을 끌어 들여 신체의 노화 반응을 촉진시켜 흰머리를 만들고
나이 보다 늙어 보이게 하고 모든 근종과 물혹, 암 발생을 촉진 시킵니다.
이미 자신의 감정에 따라 물질을 끌어 들이고 그것으로 인해 죽어갑니다.
살자고 하는 짓이 죽자고 하는 짓이 되어 버립니다.
내가 외로워, 또는 내 마음이 버거워 친구 삼아 불러 들인 것들이
비로소 자신을 죽이는 행위들이 됩니다.
이미 내 감정을 바라보고 인정하고 수용하고
그 감정의 메시지를 알아차리고
그것을 놓아주고 보내주어 내가 진정으로 자유로워지지 않는한
몸은 한치도 거짓없이 자신을 감정의 노예, 삶의 노예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래서 첫 번째가 삶의 수용입니다.
모든 것은 모두 내가 불러 왔다가 되어야 합니다.
살고자 하는 짓이 죽으려고 한 짓임을 알아야 합니다.
모두가 내 탓이고 내 마음인줄 알아야 합니다.
한 때라도 사랑하지 않고 자식을 낳은 부모는 없고
사랑없이 하늘이 자식을 낳았을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 믿음이 깨지는 곳에 사랑이 없어지고 두려움이 꿈틀거립니다.
보이지 않아 믿을 수 없다면 믿지 못한 그것을 체험할 것이고
믿을 수 있어 볼 수 있었다면 믿음 만큼 체험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완전하게 세상에 나왔고 사랑으로 태어났으며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 필요한 그 모든 것들을 완벽하게 쥐어 주셨습니다.
그것을 믿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개개인의 자유의지와 선택일뿐입니다.
모든 것을 자기로부터라고 돌리지 않는 사람들은
자신이 생존을 위해 만들어 낸 온갖 감정과 신체의 위협 반응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습니다.
부모를 미워하고 하늘을 우러러 섬기지 않는 한 질병은 치료될 수 없습니다.
부모가 나를, 하늘이 나를 낳은 이유는 무조건 사랑이었습니다.
친구들과 선생님도 이웃들도 모두가 나를 사랑했습니다.
다만 그들은 바빳고 그들이 사랑하는 방식은 달랐고
어쩌면 그들조차도 나와 같은 문제에 봉착되어 있었을 뿐입니다.
용서라 할 것도 없고 화해라 할 것도 없고
그들은 다만 그러했을 뿐이고
그러한 그들에게 내가 다만 스스로 모든 부정적인 감정을 키워왔던 것입니다.
그들의 모습과 삶은 나였고 나의 삶과 같을 뿐입니다.
부모와 하늘과 이웃과 친구들과 선생님들의 보이지 않는 사랑을 깨닫는다면
그 커다란 사랑은 나의 생존의 안전감을 주고 현재에 대한 깊은 만족을 주며
미래에 대한 모든 근심과 걱정, 두려움과 공포로부터 나를 자유롭게 합니다.
가슴에 그 사랑 깊게 느끼지 못한다면
사람들은 늘 두려움이고 늘 외로움이고 늘 슬픔이고 늘 걱정이고 늘 분노입니다.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누구나 자신의 생명력을 지켜갈 수 없고
이미 나는 질병과 죽음으로 향하고 있는 자신의 걸음을 알아채지도 못한채
끝까지 남을 원망하며 죽어갈 것입니다.
사랑은 살맛 나게 하고 사랑은 나의 선천의 면역 기능을 깨워 줍니다.
그것은 사춘기가 되면서부터 차츰 퇴화되어 버린
가슴 한가운데 흉선이라는 장기가 하는 역할이고
그 피라미드 모양의 흉선은 사랑으로 가득 채워졌을 때
선천의 면역은 다시 깨어납니다.
우리가 지금 할 일은 사랑으로 흉선을 다시 깨우는 일입니다.
흉선은 내 몸이 될 것과 아닌 것을 구분하는 정확한 면역 기능을 구사해냅니다.
내 가슴에 꽉찬 사랑은 내가 가야할 이정표를 정확히 제시해 줍니다.
자신의 생명을 끝까지 지켜내고 삶을 보람있게 해주고 가야할 길을 안내해주는
그 선천의 면역을 깨워내지 않는 한
우리가 하고 있는 자연 요법들조차도 현대 의학 못지않게 임시 방편이며
건강과 행복으로 가기 위한 과정 중에 아기 걸음 일뿐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의 삶이
두려움에 떨고 있다고 외로움에 잠겨 있다고 슬픔에 겨워하고 있다고
위로 받으려 하지 마십시오.
언젠가 좋은 날 미래에 있을 거라고 꿈꾸지 마십시오.
중요한 것은 지금 온전하게 사랑을 깨닫고 온전하게 감사하는 것 뿐입니다.
사람과 세상을 향해 위안을 찾아 위로 받고자 떠난
그 삶의 무수한 편력들의 자취들을 지워내지 않는 한
여러분들은 무조건 남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에게서, 밖에서, 세상에서 찾지 마시고
내 안에서 찾아야 합니다.
언젠가 미래를 꿈꾸며 현재를 부정하는 짓을 이제는 멈춰야 합니다.
꿈을 꾸고 자신을 포장하고 그 가짜의 힘을 동원해서 힘을 내는 한
그 거짓의 행보는 반드시 자신의 생명을 지치게 할 것입니다.
그것은 오늘 현재 자신의 삶의 불행과 불만과 미움과 원망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나로부터 찾아 내 안에서 찾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진정으로 치유와 회복이 되는 길이며
사랑으로 온전해지는 길이며 길을 잃지 않는 길이며
내 생명의 성장과 함께 이루어지고 있는 영혼의 진화를 목도하는 길입니다.
우리 모두가 두려움없는 사랑으로, 진정으로 치유되는 그날까지
얼라된 어른 아이의 아기 걸음마 배우는 시절되어
가장 소탈한 모습으로 뚜벅이 되어 뚜벅 뚜벅 걷고 또 걸어 갑니다.
오늘도 감사합니다.()
출처 :밥상머리 행복찾기 < 하늘을 담은 밥상, 영혼을 깨우는 밥상 > 원문보기▶ 글쓴이 : 밥몸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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