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n't cry for me Argentina- Madonna
전성기 시절의 에바 페론의 초상화
생의 마지막 순간 국민들에게 자신의 죽음을 슬퍼하지 말라는
명언을 남겨 지금까지 ‘에비타'의 타이틀곡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주인공 에바 페론이 사망한지도 금년으로 53년을 맞는다.
마리아 에바 두아르테 데 페론이라는 긴 이름을 가진
에비타(에바의 애칭)는 아르헨 북부 후닌이라는 도시에서
1919년5월7일 태어나 16세 때인 1935년 무작정 수도인
부에노스로 올라와 3류배우와 라디오 아나운서, 모델 등을 거치며
10여년 동안을 비참한 생활을 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아르헨티나 로스 톨도스의 어린 소녀 에바 두아르테
그러던 그녀의 삶이 극적으로 변화를 한 건 1944년
후안 도밍고 페론이라는 야심만만한 군인을 알게 되면서부터다.
페론의 집권으로 한 순간에 퍼스트레이디로 변한 에비타는
가난이 한이 되어서일까. 빈민노동자천국을 만들겠다는
야심찬 프로젝트를 구상, 국가정책의 최우선순위가 빈민구제였고
국가의 모든 재정을 노동자들을 위해 퍼부었다.
아나운서출신이었던 그녀는 명연설가로
아르헨티노들의 심금을 울렸는가 하면
파리 패션계의 여왕으로 군림하며 화려하고 열정적으로 살다가
33세의 나이로 요절한 에바의 생애는 가히
한편의 드라마 같은 삶이었다고 할 것이다.
시사주간지 타임이 표지인물로 선정할 정도로
에바는 세계적인 인물이었다
평소 영국의 의적 로빈훋의 열열한 신봉자였던 에바는
남편인 후안 도밍고 뻬론을 제치고 정권을 쥐고 흔들어
당시 세계최고의 권력을 가진 여성으로 회자 되기도 했다.
미국의 유명한 시사주간지 타임은 두 번이나
에비타를 표지의 인물로 선정할 정도였다.
에바는 "빠라 뻬론"(뻬론을 위하여) 라는 명분을 내세워
기업가들이나 부유층의 재산을 탈취 빈민노동자들에게
무상분배해 줌으로써 성녀라는 칭호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노동자 농민들의 천국을 만들겠다던 신념과는
달리 당시 전세계 상류사회 여성들의 유행을 이끄는
호화스런 사치와 낭비는 아르헨 식자들로부터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유럽패션을 주도한 에비타
심지어는 에바가 유럽여행을 할 때면 유럽의 패션가가
후끈 달아오를 만큼 자신의 몸치장에 최고만을 고집을 했고
유럽의 사교계는 ‘에바 패션’이 유행되는
추세까지 보였다는 것이다.
또한 무작정 국가재정을 끌어다 무주택 빈민들에게
아파트를 지어주어 서민들을 감동시켰고
구나가 무료혜택을 받을 수 있는 종합병원 등을 각
지역마다 세워 초일류 복지국가건설을 꿈꾸기도 했다.
남편 후안 도밍고 페론과 함께
Dead on Jul. 26. 1952
전 국민의 애도 속에 치러진 에바의 장례식 장면
그러나 이는 정부 공공지출을 눈덩이처럼 키워
아르헨티나가 오늘날 외채에 허덕이는 3류국가로
전락시켰다는 비난을 듣고 있다.
에비타로 부터 시작된 포퓰리즘이 아르헨 국민성을
망쳤다고 일부 역사학자들은 평가하기도 한다.
최근에는 그녀의 유언장 마져도 조작되었다는
의혹이 제기돼 그녀가 진정 아르헨티노들을 위한
'산타 에바'(거룩한 에바)였나를 놓고 열띤 논쟁이 일고 있다.
시내중심가 레꼴레타 지역의 그녀의 묘소에는
아직까지도 매일 추모 행열이 줄을 잇고 있는 가운데
일부에서는"아르헨티나가 옛 명성을 되찾기 위해서는
국민모두가 하루빨리 에비타의 망령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소리가 힘을 받고 있기도 하다.
부에노스시내 레콜레타 묘지에 있는 에비타 묘소.
오늘도 에비타 추종자들의 추모행열이 줄을 잇는다
'산타 에비타'로 불리는 에바 페론 (1919-1952)
아르헨티나의 시골 가난한 농부의 사생아로 태어난 Maria Eva Duarte (에바 두아루떼), 설움을 참기 어려워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향한후 자신의 미모를 밑천으로 삼류 술집의 댄서로 일하다 자신의 나이보다 두배나 되는 후안 페론 육군 대령을 정략적으로 만나게 된다. 1946년 후안 페론의 민중혁명으로 대통령이 되자 에바 페론은 당당히 퍼스트 레이디가 된다.
빈민구제 복지재단등을 설립 지지기반 확보와 아르헨티나의 국민들의 사랑속에 승승장구하며 부통령자리를 탐하다 군부의 반대로 좌절되면서 아르헨티나의 국민들이 서서히 등을 돌리고 자신은 1952년 33세의 나이로 자궁암으로 세상을 타계한 입지전적인 인물 - 에바 페론의 일대기를 앤드류 로이드 웨버(사라 브라트만 전 남편)와 팀 라이스가 극화한 뮤지칼이 영화의 원작이다.
에바 페론을 평가하자면, 먼저 대중인기 영합주의인 페로니즘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후안 페론의 정치적 노선인 페로니즘은 사실상 부인인 에바 페론의 영향이 컸다.
노동조건 개선과 임금 인상으로 노동자 계층은 페론정권을 전폭적으로 지지했고, 자본주의도 공산주의도 아닌 소위 제3의 길을 추구했다. 특히 분배의 정의에 치중하여 연간 20 %를 넘게 임금인상을 시켰는데, 사실 이와 같은 포퓰리즘은 사실상 독재체제를 강화해 나가는 수단에 불과했다.
뮤지칼과 영화로 미화된 이면과는 달리 현실은 실제로 지금도 냉엄하다.
아르헨티나가 페론집권 이전에는 당시 세계 5대 부국중 하나였다. 그러나 페론 정권의 이와 같은 지나친 재정지출 확대, 무분별한 임금인상, 그리고 이어진 연이은 쿠테타 등으로 아르헨티나는 국가경쟁력을 잃고 1985년 남미 경제위기의 시발점이 되는 등 아직도 경제난이 심각하다.
이와 같이 객관적으로는 에바 페론과 이로 대표되는 페로니즘, 포퓰리즘은 부정 적인 평가를 받고 있지만, 아직도 아르헨티나의 많은 국민들은 그녀를 진정으로 노동자와 국민을 사랑한 지도자로, 성녀로 생각하며 추앙한다고 한다.
영화속에 나오는 체 게바라는(안토니오 반데라스) 실제는 에바와 서로 알지 못 하는 사이이다.
Academy Awards(1997)
거장 앤드류 로이드 웨버의 뮤지컬이 원작으로, 원작 자체가 워낙 정치적으로 논란의 대상이 된 것이라 영화 감독으로는 켄 러셀에서부터 올리버 스톤에 이르기까지, 주연 배우로는 메릴 스트립에서 미셀 파이퍼에 이르기까지, 근 20년 동안 수십 명의 이름들이 거론되며 기획과 포기가 반복되던 영화.
"Don't Cry for Me, Argentina"는 1978년에 초연된 뮤지칼 'Evita'(music by Andrew Lloyd Webber and lyrics by Tim Rice)의 가장 잘 알려진 곡으로 원제는 "It's Only Your Lover Returning" 이었으나 나중 이것으로 정착되었다.
1976년 studio version으로 Julie Covington에 의해 녹음된 것이 최초이며 Julie Covington의 노래는 다음해 1977년 2월 UK Singles Chart에서 1위를 기록하였다. 1978년 6월21일 런던의 프린스 에드워드 극장(Prince Edward Theatre)에서 뮤지칼이 무대에서 초연 될 때는 Elaine Paige에 의해 불려졌다.(이후 2900회 공연)
이곡은 뮤지칼외에 솔로로 Karen Carpenter(1977), Olivia Newton John (1977, album - 'Making a Good Thing Better')에 의해 불려지고, 이후 The Shadows (1978), Joan Baez (1980), Donna Summer (1981), The Dooleys(1981, album - 'Full House') 그리고 Sinéad O'Connor(1992, album - 'Am I Not Your Girl'), Sarah Brightman and Mike Flowers Pops(1996), 그외 수개국의 언어로 많은 다른 가수들에 의해 불려졌다.
Julie Covington
Sinéad O'Connor
Olivia Newton John
Sarah Brightman
The Dooleys
Video - Sinéad O'Connor
Eva Peron's portrai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