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평범한 산민에 불과하다. 그러나 코카서스의 산은 우리에게 러시아에 대적할 힘을 주었다.
- 이맘 샤밀
거칠고 호전적인 산민들을 체계적인 군으로 편성한 샤밀은 거침없는 기세로 러시아군의 요새를 함락시켜 나갔다. 1840년 말 아훌고 탈환을 시작으로, 코카서스 평야 지대의 러시아군 요새를 하나하나 함락시켰다. 러시아군의 점령 하에서 '경작할 시간이 없을 정도로' 요새 건설과 도로 확장의 노역에 시달리며 혹독한 세금에 신음하던 산민들은 샤밀의 항쟁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 샤밀의 군세는 1만에 달했으며, 그 하나하나가 사격과 검술 - 산민들은 킨잘(kinzhal)이라는 단검을 즐겨 쓴다. - 의 전문가이자, 승마술에 있어서 궁극으로 단련된 기병이었다.
산민들은 우리의 정예병과 코사크인들에 비해 월등히 뛰어난 기병이었다. 말 등에서 나고 자란 그들의 승마술은 그야말로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다. 그들 산민들에게 있어서 군사적 자질은 필수불가결의 요소였다. 왜냐하면 그런 자질이 없는 한 그는 동료들 사이에서 어떠한 친분도 가질 수 없었고, 웃음거리가 됬으며, 심지어 여자들에게도 비웃음을 사는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코카서스 전쟁을 지휘했던 러시아군 사령관 중 한명인 벨리야미노프의 회고다.
이 탁월한 기병들이 평야지대에 쏟아지는 것을 막기 위해, 러시아군은 뭔가 대책을 세워야만 했다. 1841년, 플로 장군의 원정대가 테레크강가의 체첸 평야지대를 휩쓸었다. 하지만 이는 역효과를 낳았고 평야 지대의 산민들이 자신들의 보호를 위해 샤밀에게 더욱 적극적으로 협조하게 만들었을 뿐이다. 샤밀은 러시아군의 위협에 대처하였고 폴로는 전투에서 패하여 전사하였다. 결국 1842년, 골로빈 백작은 사태악화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나게 된다.
이후 새로 코카서스 지역 러시아군 사령관으로 부임한 알렉산더 네이드가르드 (Aleksander Neidgart)는 샤밀을 잡아오면 그의 목의 무게 만큼의 황금을 주겠다고 공언하였다. 그러나 효과는 없었고, 산민들은 계속해서 평야지대의 요새를 하나하나 함락시켰다. 당시 1만의 샤밀의 부대는 한 곳의 요새를 공격하고 불과 24시간 만에 80킬로 떨어진 다른 러시아군 요새를 공격할 수 있었다. 탁월한 승마술에 지형 정보까지 숙지하고 있는 산민들의 기습을 러시아군은 감당하기 어려웠다. 결국 1843년, 러시아군은 체첸 전역과 다게스탄 대부분의 지역에서 병력을 후퇴하는 수 밖에 없었다. 네이드가르드 백작 역시 이듬해 전임자와 똑같이 물러나게된다.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1세는 격노하였다. 코카서스 지방이 평정되었다는 휘하 사령관들의 보고를 받는 데 익숙했던 그에게 샤밀의 신정국가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즉시 산민들의 소굴을 함락시키고 불태울 것을 명했다. 이리하여 1845년 7월 18일, 보론쪼프 백작은 샤밀의 신정국가 수도인 다르고를 함락시키기 위해 1만 1천의 러시아군을 이끌고 출발하였다.
미하일 보론쪼프 백작
샤밀은 러시아군의 공격하에 있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이미 김리와 아훌고에서 살아남은 자였다. 그래서 수도를 지키기 위해 러시아군의 포위를 기다릴 생각이 없었다. 대신에 샤밀은 다르고를 모두 불태워버리고 노약자들을 피난시켰다.
보론쪼프 백작은 거의 저항없이 다르고까지 쉽게 진군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그가 발견한 것은 불타고 재만 남은 마을이었지만, 어쨌든 산민들의 수도를 점령하였다. 수도에 있는 황제에게 그렇게 전갈을 보냈고, 니콜라이 1세는 '성공적인 원정'에 대하여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아직까지는 러시아군에게 모든 것이 잘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샤밀이 불태우고 간 다르고 마을에는 식량이 없었고, 러시아군은 점차 보급이 떨어져 갔다. 보론쪼프는 식량 공급을 요청하였고, 수송대를 보호하기 위해 분견대를 보냈다. 다르고 주변의 울창한 산림에서 망원경으로 러시아군을 주시하고 있던 샤밀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가 기다린 순간이 온 것이다.
보론쪼프를 위한 식량을 전달받기 위해 분견대는 마을 외곽의 산림지대를 지나야 했다. 하지만 숲 속에서 체첸인 저격수들이 러시아군을 하나하나 저격하였다. 러시아군이 저격수를 격퇴하기 위해 진격하면, 다른 쪽의 숲에서 체첸인들이 배후를 공격했다. 어느 새 사방에서 체첸인들이 공격을 가했다. 러시아군은 점차 당황하게 되었고, 곳곳에서 체첸인들이 검을 들고 달려와 베어넘겼다.
견디다 못해 러시아군이 다르고에 있는 본대와 합류해야 했다. 샤밀의 기습에 의해 러시아군은 556명의 전사자와 858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더욱 심각한 상황은 식량이 떨어졋고 보급도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보론쪼프는 그제서야 샤밀의 덫에 걸렸다는 것을 깨닫고 7월 25일, 그로즈니 요새로 철수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코카서스의 숲속을 가로질러 철수한다는 것은 러시아군에게는 지옥같은 일이었다. 이제 그들의 눈에는 숲의 나무 하나하나가 살아 움직이는 적으로 보였다. 체첸인들의 러시아군 행렬의 전후좌우 어디든지 마음대로 기습하였고, 밤에는 사방에서 노래를 불렀다. 러시아군은 규모도 알 수 없는 산민들에게 둘러쌓인 채 공포에 떨어야 했다. 매일 수십명이 죽었으며, 부대는 와해된 채 수많은 군수물자가 산민들에게 노획되었고, 심지어 대포까지 뺐겼다. 마침내는 장군들까지 손에 검을 쥐고 산민들과 싸워야 했다.
러시아군은 필사적으로 활로를 찾았지만, 산민들이 매복한 험한 산길을 대부대가 빠져나가는 것은 무리였다. 그들은 그로즈니의 프라이타그 (Freitag) 장군에게 구조대를 요청하였다. 어느새 개인당 총알이 60발 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었고, 구조대가 오지 않는 한 1만여명의 러시아군은 산민들에게 전멸할 위기였다.
코카서스 전쟁의 러시아군
이 절체절명의 순간, 샤밀은 급보를 받았다. 자신의 아내인 파티마가 죽어간다는 것이었다. 자신의 나이브 들에게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말라고 신신당부한 뒤, 샤밀은 아내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자기 아내가 죽어가는 것을 지켜본 뒤, 다시 전선으로 달려왔다. 불과 하루 만의 일이었다.
프라이타그의 구조대가 바로 그 시점에 보론쪼프의 본대와 합류하였고, 산민들은 새로운 러시아군 대병력이 몰려오자 물러서고 말았다. 샤밀은 분노를 참지 못한 채 그의 부하들에게 일갈하였다. 눈 앞에 다가온 승리도 잡지 못한 겁쟁이라는 것이었다. 샤밀은 러시아군을 파괴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친 것을 못내 아쉬워하였다.
그러나 러시아군에게 그것은 충분히 심각한 패배였다. 보론쪼프 백작이 그로즈니에 간신히 돌아오고, 자신의 1만여명의 병력 중에 사상자가 4천명에 달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 중에는 3명의 장군과 200여명의 장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것이 러시아가 코카서스 지방에서 겪은 가장 처참한 패배인 다르고 전투다.
이 무렵 샤밀의 신정국가는 최정점을 달렸다. 그의 광신적인 무리드들의 열의와, 그에 대한 산민들의 확고한 지지와, 러시아군의 뚜렷한 사기 저하가 이를 가능하게 해줬다. 이 시점에서 샤밀은 전장을 확대하고자 하였다. 바로 산맥 서쪽에서 이슬람교의 깃발아래 러시아에 강력하게 저항하던 또다른 산민들인 체르케스인과의 연대였다.
출처 : http://en.wikipedia.org/wiki/Imam_Shamil
http://en.wikipedia.org/wiki/Caucasian_War
http://en.wikipedia.org/wiki/Viceroyalty_of_the_Caucasus
http://www.amina.com/article/br_hist.html
http://www.amina.com/article/jihad_imamshamyl.html
http://www.chechnyafree.ru/en/article.php?IBLOCK_ID=352&SECTION_ID=0&ELEMENT_ID=42384
http://www.chechnyafree.ru/en/article.php?IBLOCK_ID=352&SECTION_ID=697&ELEMENT_ID=67729
http://www.truth-and-justice.info/chechnat.html
첫댓글 체르케스인이라..
흥미진진해지는군요, 잘 봤습니다.
이게 먼 옛날 이야기도 아니고 19세기 중반의 이야기라니.
전투민족 체첸인의 기상은 여전하죠..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