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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공부하는 선생님이 정리한 건데 조금 더하고 고쳤습니다.
제2강 국어교육철학 김수업 교수님 2006.08.01 1. 철학의 두 질문 가. 무엇이냐? 나. 왜냐? 2. 물음의 중요성 가. 위의 두 질문에 대해 바닥이 보일 때까지 찾아들어가는 것이 철학이다. 철학( 필로소피)이란 ‘아는 것을 좋아한다’라는 뜻이다. 이것이 인간 힘의 원천이다. 아이들은 계속 묻는다. 대답을 다 하지 못할 정도로~. 인간은 얼마나 알고 싶어 하는가? 이와 같이 알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어야, 끊이없이 물어야, 근본적인 것에 대해 궁금함을 가져야 인간의 본모습을 찾을 수 있다. 나. 우리 문화에서는 특히 이런 태도가 중요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묻는 것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사람답게 살지 않았다. 그 역사는 길다. 기원 어름부터 중국의 책을 가지고 와서 중국의 글을 읽으면서, 그것으로 다스리려고 하면서 점점 그렇게 된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 안에 있는 것이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니 다른 사람이 물을 수 없었다. 무엇이 들었는지 알 수 없으니 물을 수 없었다. 위에 있는 사람은 아래 있는 사람에게 대거리를 하고 싶지도 않았다. 다. 신라 시대 화백 제도 때만 하더라도 다 같이 묻고, 다 같이 생각하고, 다 같이 대답했다. 그 때만 하더라도 동아시아에서 우리를 따라올 자가 없었다. 청동기가 끝나기 전까지 최소한 2000년이 넘게 중국이 우리의 문화를 받아서 살았다. 일본은 말할 것도 없다. 그 때만 하더라도 우리에게는 힘이 있었다. 라. 그런데 중국이 글자를 만들고, 우리가 그것을 받아쓰면서, 물음이 사라지면서, 우리 민족의 힘이 떨어지게 된 것이다. 마. 왕조가 끝나고 물음을 시작할 수 있었지만, 일본에 나라를 빼앗겼다. 그래서 더욱 물을 수 없었다. 물으면 잡혀가는 때였다. 바. 일본이 물러가고 반세기가 지났고 민주화 운동으로 왜냐, 무엇이냐 물어볼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편하게 물을 수 없다. 너무 오래도록 물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남한은 그나마 물을 수 있는 세상이다. 북한은 그 정도의 물음도 없다. 60년대만 하더라도 김일성이 많은 것을 해 주었고, 백성들이 그것을 믿었다. 그런데 70년대에 들어서 김일성이 신 비슥하게 되고 그것이 힘들어지면서 ‘묻지 마 세상’이 되었다. 불쌍하게 바뀌었다. 자꾸 묻는 세상으로 바뀌어야 한다. ※ 오늘 이 자리는 ‘국어 교육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묻는 자리이다. 3. 이오덕 선생님을 생각하며~ 김수업 : 당신은 대단한 사람이다. 나는 국어교사를 길러내는 사람이니 국어를 공부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당신은 초등학교에 있으면서 모든 교과를 가르쳐야 하는데, 그러면서도 이렇게 우리말에 대해서 공부를 하는 것은 대단하다. 이오덕 : 아이들을 보면서 살면 그렇게 되는가 봅니다. 가. 이오덕 선생님이 우리글 바로쓰기를 쓴 것이 나이 60(1925년생)이 넘어서 64,65세이다. 예순이 넘어 40년 넘게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말에 대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아이들을 진지하게 바라보면서,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우리글 바로쓰기'이다. 나. 나(김수업)는 대학 2학년 때(58년 6월) 말에 대해서 눈을 떴다. ‘이다’가 품사냐, 아니냐? 한글 전용을 해야한다,<최현배,정인섭> 하지 말아야 한다.<이숭녕,이희승> 하는 문제에 대해서 이틀 동안 논쟁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 이후에 친구들도 그 문제에 대해서 논쟁을 하고, 파가 갈리게 되었다. 김종택(전 경북대 교수)이라는 친구는 ‘한글 전용론을 박함’이라는 글을 학보에 실었다. 윤승근(전 계명대 교수)이는 ‘한글 전용론을 옹호함’이라는 글을 대구매일신보에 싣기도 했다. 나와 김종택이가 대학원에 가서도 논쟁을 해서 김종택이가 굴복을 하고 한글 전용론자가 되었다. 그래서 1963년에 학위 논문 중에서 한글 로만 된 논문은 김종택과 내가 쓴 논문이 처음이다.. 다. 그러면서부터 말이 무엇이고 말과 글을 어떻게 하느냐가 모든 세상의 열쇠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오덕 선생도 그것을 깨닫고 훨씬 행복한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나도 그것을 깨달아서 훨씬 행복한 사람이 되었다. 여러분도 그것을 깨달으면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보장한다. 여러분도 여러분 스스로의 철학을 가져야 한다. 라. 이오덕 선생이 89년에 『우리글 바로쓰기 1』로 시작해서, 95년에 『우리글 바로쓰기 3』을 내면서 손을 툴툴 털었다. 그러면서 쓴 서문을 보자. 이런 경지가 되어야 국어 교사를 할 수 있는 것이다. 국어 교사로서 신명을 걸고 살 수 있는 것이다. 마. 이오덕 선생의 제안으로 ‘왜 IMF(1997.11.)를 당했느냐?’에 대해서 9명이 모여서 토론을 한 적이 있다. 지식산업사에서 했다. 그때 얘기가 IMF는 우연히 일어난 경제적 실정의 결과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말을 제대로 똑똑히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확히 알지도 못하는 말을 대충 쓰고 어름어름 넘어가다보니 이렇게 될 수밖에 없다. 대충 얼버무리다 보니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찾아낼 수가 없었다. 잘못을 모르니 고칠 수도 없었다. 이것을 근원적으로 치유하기 위해서는 누구나 알 수 있는 말로 정확하게 써서, 무엇이 잘못되고 무엇이 잘 되었는지를 누구나 정확히 알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우리말 살리는 겨레 모임」이다. 바. 나는 이오덕 선생처럼 몸으로 겪고 깨달아 뼈에 사무쳐 있는 것이 아니라, 책을 보면서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이오덕 선생처럼 절실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나름대로 깨달은 것이 있고, 그것을 통해서 행복해졌다. 선생님들도 선생님들의 깨달음을 찾고, 그것을 통해 행복해지면 좋겠다. 사. 처음 경상대에서 교육과정을 짤 때의 일이다. 우리나라에서 서양의 문학 이론을 가르치는데 겉껍데기만 얘기하는 것이다. 그 뿌리를 얘기하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국어 선생을 하려면 이것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그래서 내가 그 강좌를 맡아서 몇 년 동안 수업을 한 적이 있다. 그것을 위해 서양의 문학 책을 많이 읽었고, 문학만으로 해결이 되지 않아 문화에 대한 책을 찾아 읽게 되었다. 특히 『서양의 세계문화사(을유문화사)』 3권(일본역사학자이고 하버드대 교수였던 라이샤가 슨)을 몇 차례에 걸쳐서 정독을 했다. 그 책을 읽으면서 말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되었다. 말이 서양의 문명을 어떻게 바꾸었는가 알게 되었다. 4. 라틴말이 세상의 중심이 된 사연 가. 그리스의 문명부터 살펴보자. 에게해는 서양 문명의 원산지이다. 그곳은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문명과 이집트 문명이 만나는 곳이다. 그러한 문명들이 크레타 고유의 문화와 만나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냈다. 나. 그리스 문명이 지중해 전체 문명을 몇 세기 동안 전반적으로 지배했다. 로마의 라떼나 들판에 모여서 살았던 사람들이 라틴족인데, 이 사람들은 농사를 지으면서 살았는데 군사에 대한 재능이 뛰어나고, 길을 닦는 데 재능이 뛰어났다. 기원 전 2세기 경에 점점 강성해 지면서 그리스(아테네)를 점점 밀어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그리스를 몰아내고 희랍을 지배하면서, 지중해 문명의 새로운 종주국으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가 등장하면서 로마는 공화정에서 제국으로 바뀌었다. 다. 이처럼 그리스를 지배하면서도 문학이나 학문은 그리스어로 했다. 지배층도 그리스어를 알아야 문학을 하고 철학을 할 수 있다고 생각을 했다. 200년이 넘도록 이런 지경이었다. 굉장히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아우구스티누스가 황제가 되고, 그리스의 고전들을 자기 말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이때 처음으로 라틴말로 시를 쓰기 시작했다. 어떤 시인이 그 일을 처음으로 시작을 했는데, 그러나 그 수준은 그리스의 시를 모방한 수준이었다. 말년에는 「에네이드」라는 대 서사시를 썼는데, 로마의 건국 신화를 대 서사시로 재구성한 것이었다. 사실은 오딧세이의 구조를 거의 모방한 것이었지만, 이것이 나오면서 그리스 문화에 대해 꿀릴 것이 없다는 자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리고 희랍어로 되어있던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제놈 성서)했다. 이것이 라틴 문명을 확립한 결정판이 되었고, 이때부터 그리스 문명을 능가할 수 있다는 자부심이 생겼다. 이렇게 하기까지 300년 이상 피나는 노력을 했다. 그러면서 라틴 문명이 꽃 피기 시작했고, 서양 문명의 새로운 줄기가 되었다. 라. 라틴 말은 사실은 지방의 사투리였다. 이탈리아에는 다양한 소수 민족(원주민)들이 있었고, 각 지방에는 나름대로의 사투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 중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라틴족이 세상을 지배하면서, 라틴 지방의 사투리가 유럽의 공용어가 되었다. 이것이 중세 시대에 라틴말이 세상을 지배한 이치이다. 5. 이탈리아 말이 되살아난 사연 가. 프란치스코(12세기 말에 태어나서 13세기에 죽음, 45세에 죽음)라는 분이 중세 문명을 끝내고 새로운 시대를 열기 시작한 사람이다. 이것을 프랑스 사람들이 르네상스(다시 태어남)라는 이름을 붙인 바로 그것이다. 라틴말을 쓰면서 눌려서 지냈던 사람들이 이제 자기 말을 쓰면서 다시 살아나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그가 활동했던 시기는 십자군 전쟁으로 서양 문명 전체가 흔들릴 때였다. 그 이전에는 로마 교황의 세상이었다. 그가 희다면 희고, 검다면 검은 것이었다. 그런데 십자군 전쟁으로 다른 세상을 보면서, 자기들의 세상을 보는 눈도 달라졌다. 그래서 사람들이 장사에 많이 뛰어들었고, 프란치스코의 아버지도 비단 장사를 하던 사람이었다. 엄청나게 돈을 벌었는데, 자기는 평민이나 아들을 잘 키워서 귀족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을 했다.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신부가 되거나, 기사가 되는 길이다. 그런데 사제를 만들 생각은 없었고, 기사를 만들려고 했다. 전쟁에 나가서 일 년만에 포로가 되고, 아버지가 돈을 써서 빼내왔다. 그러면서 삶을 돌아보았고, 그러면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다. 가난한 사람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보아하니 교회에서는 라틴말 성경을 보고, 라틴말로 미사를 보았다. 가난한 사람들은 아무 것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이탈리아 말로 미사를 보면서 가난한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녔다. 군중들 사이를 다니며 이탈리아 말로 노래를 만들어 기타를 치면서 사람들과 어울렸다(멸치 생각 : 원효도 그랬는데~). 태양의 노래, 피조물의 노래 등이 새로운 문학의 시작이다. 그것을 보면서 화가도 가난한 사람들을 그렸고, 음악을 하는 사람들도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노래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서구 전체의 문명이 바뀌기 시작했다. 나. 단테가 프란치스코의 글을 읽으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단테는 대귀족이다. 삼촌이 왕이고, 친척이 교황이고 그랬다. 40대에 이미 대단한 지위를 누렸다. 그런데 40대에 프란치스코를 만나면서 이제까지 했던 것은 헛된 것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자신의 재능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쓰겠다고 결심하고 이탈리아 말로 시를 쓰기 시작했다. 2년 동안 시를 써서 모은 ‘새로운 삶’이라는 시집이 그 출발이다. 그런 마음으로 10년 동안 공을 들여서 작업한 것이 [신곡]이다. 이것은 기독교의 교리를 다 담은 것이다. 천국, 지옥, 현세를 다 다루고 있으며, 천국에 들어가는 길이 나와 있다. 기독교 전체의 교리를 가난한 사람들도 다 알아들을 수 있는 이탈리아 말로, 노래로 풀어서 쓴 것이다. 이러한 자기의 생각을 귀족들에게 알리기 위해 ‘토박이말을 변호함’이라는 팜플렛을 만들었다. 라틴어로 쓴 글인데, 귀족부터 왕까지 다 돌렸다. 지금 번역을 맡겼는데, 단테의 언어에 대한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이처럼 신곡이 나오면서부터 이탈리아 사람들이 이탈리아어를 돌아보게 되었다. 다. 복카치오(같은 피렌체 사람)는 그에 영향을 받아서 이야기를 이탈리아 말로 풀어 쓴 것이다. 라. 페트라르카(위의 세 사람이 르네상스의 3대 아버지로 꼽는다)도 대귀족이고, 죽을 때까지 귀한 것은 라틴말로 써야 한다고 생각했던 사람이다. 그런데 19살 때 길가는 처녀(라우라)에게 한 눈에 반했다. 그에게 연애편지를 써야 하는데, 그 여인은 평민이었다. 그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편지를 쓰기 위해 칸쵸네(당시 이탈리아의 민요) 형식을 정제해서, 그 형식에 맞추어 사랑의 노래를 만들었다. 그것이 오늘날의 ‘손네트’라는 형식이 되었다. 손네트라는 형식을 만들어 냈고, 칸쵸네를 정제했기 때문에 그를 르네상스의 아버지 중 하나로 꼽는다. 「칸쵸니에(칸쵸네로부터 온 것)」라는 시집이 대표적이다. 마. 이런 분위기가 알프스를 넘어 전 유럽으로 퍼진 것이 르네상스이다. 6. 프랑스 말과 영국 말이 되살아난 사연 가. 프랑스는 16세기에 들어와서 고전 공부를 하는 모임이 파리에 있었다. 7명이 모여서 북두칠성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처음에는 라틴 고전을 공부했는데, 좌장(드 벨레 ?)을 중심으로 깨닫기 시작했다. 그리스가 중심일 때 라틴말은 쓰레기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는 그것이 중심이 되고 다른 것을 쓰레기로 만들었다. ‘그러면 프랑스 말은 안 되는가?'라는 의문을 품었고, 단테의 책 이름을 빌어 ‘프랑스 말을 옹호함’이라는 팜플렛을 펴고, ‘프랑스 말을 현양함’이라는 팜플렛을 만들어, 그 둘을 묶어 1549년에 「프랑스 말을 지키고 현양함」이라는 책을 펴냈다. 나. 왕립학술원(아카데미아)이 중심이 되어 프랑스 말과 문학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연구를 시작했다. 그래서 18세기에 들어서 프랑스 문명이 꽃을 피우고, 라틴 말을 뛰어넘게 되었다. 그 당시에는 영국 사람도 프랑스를 모국이라고 생각하고, 프랑스 말을 썼다. 다. 몽테뉴가 살았을 때는 이미 중세가 무너지던 때였다. 집안은 평민이었으나, 할어버지가 고기 장사를 해서 큰 부자가 되었다. 몽테뉴 할아버지가 귀족의 큰 성을 샀는데, 그 성의 이름이 몽테뉴(처음에는 마을 이름)이고, 그것이 성(姓)이 되었다. 그런데 귀족이 되려니 라틴말을 몰라서 될 수가 없었다. 그 무렵 장사는 아버지가 하고, 몽테뉴를 어떻게 해서라도 귀족을 만들려고 공부를 시켰다. 라틴말을 가르치려고 독일에서 라틴말을 잘 하는 유모를 구해서 항상 라틴말을 쓰게 했다. 다행히 공부를 잘 해서 법학을 공부를 시켰다. 법관으로서도 명성을 얻었고, 존경을 받았다. 라. 46세이던가? 이탈리아 여행을 가게 되었다. 석 달 동안 곳곳을 다니며 구경을 하면서 깨달았다. 우리 아버지 때문에 내가 헛길로 들어갔구나. 이미 라틴말은 끝이 났다. 당시 똑똑하던 사람들은 다 이탈리아 말로 노래하고 글을 쓰는데, 나는 그 죽어가는 라틴말로 살아가는구나! 마. 돌아오니 몽테뉴의 시장으로 선출되어 있었다. 그런데 굳이 사양하고 시장, 변호사를 그만두고 자신이 공부했던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알려줘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프랑스 말로 번역을 시작했다.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프랑스 말로 썼다. ‘에쎄(되는가 안 되는가 시험을 해 본다)’라는 제목의 책을 냈다. 장사하는 사람들이 쓰는 말로 이 위대한 고전들을 번역하는 것이 가능한가, 아닌가? 시험을 해 본다는 의미이다. 서문에서 ‘나는 파리의 시장 바닥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쓰는 말을 살려서 쓰려고 노력했다’라고 밝혔다. 이 책이 나오자 불티가 나듯이 팔렸다. 지식에 대한 갈증이 있으면서도 라틴말을 몰라서 공부를 못했던 사람들을 휘어잡았다. 이 책이 영국까지 건너가서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바. 영국의 베이컨이 보니, ‘프랑스 시시한 것들이 이런 것을 하네~’라는 생각에 몽테뉴의 책 제목을 빌어 ‘에쎄’라는 책을 냈다. 당시에는 과학 논문을 다 라틴어로 썼는데, 그것을 영어로 번역을 했다. 몽테뉴를 넘어서기 위해 애썼다. 세익스피어와 동갑인데, 그가 문학으로 영어를 세계어로 만들었다면, 베이컨은 과학으로 그것을 했다. 사. 데카르트는 ‘방법 서설’이라는 철학책을 썼는데, 그의 철학 내용이 유명한 것이 아니라, 그 철학을 프랑스 말로 썼다는 점에서 훌륭한 것이고 유명한 것이다. 아. 그러면서 18세기에 신구 논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루이왕이 열병을 앓아서 몇 달을 누웠다가, 연말에 쾌유가 되었다. 신년과 쾌유를 축하하기 위해 잔치를 열었는데, 학술원 회원도 다 참여했다. 학술원의 젊은 시인이 의도적으로 축시를 읽었는데, 프랑스 말로 된 것이었다. ‘루이왕의 시대는 위대하다’라는 제목이었는데, ‘그리스와 라틴이 위대했지만 지금은 프랑스가 최고이다. 그러므로 루이왕의 시대는 위대하다. 루이왕 만세!’라는 내용이었다. 임금은 좋아했으나 학술원 원로들은 발칵 뒤집혔다. 그때로부터 십년을 싸웠다. 처음에는 절대적으로 원로들이 우위에 있는 싸움이었으나, 역전을 했다. 결정적으로 뻬르롱(?)이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아리스토를 보았다. 그래서 나는 아리스토를 안다. 그런데 아리스토는 나를 보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나를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나는 아리스토보다 위대하다. 이와 같이 지나간 사람들은 새로 올 사람보다 위대할 수 없다. 이 말을 계기로 구세력이 신세력에게 무릎을 꿇게 되었다.
7. 우리의 상황은? 가. 헐버트 목사(19세기 말에 고종황제 고문관이었고 독립운동을 위해 애쓴 사람)가 보니 한글이라는 위대한 글자가 있더라. 이것을 살려 쓰면 대번에 나라가 살아날 것인데, 왜 한자를 쓰느냐고 고종에게 건의했다. 그래서 고종이 국문연구소를 차렸고, 주시경 선생 등이 그에게 영향을 받았던 것이다. 그 헐버트 목사가 『한국의 역사』라는 책에서 (우리 역사에서 딱 한 번 있었던 일이었는데) 한문으로 의사소통이 가능한 사람을 조사해 봤더니, 2%에 불과했다. 민영환 선생이 죽으며 2천만 동포에게 고한다고 했는데, 2%이면 40만이다. 한문을 오래도록 썼지만, 그것 때문에 가슴은 쳤지만, 그것을 어쩌지 못했다. 우리말은 ‘상놈말’이라고 봤다. 쓰레기라고 봤다. 나. 이렇게 해서 백성들 말에 한자어가 들어오기는 했지만, 한자어는 우리 백성을 누른 돌덩이와 비슷했다. 우리 백성을 눌렀지만 물들게는 못했다. 2천년 동안 멍만 들었다. 그것이 우리 백성의 삶에 침투하지는 못했다. 그것 때문에 백성들의 삶이 달라지지는 않았다. 다. 그런데 영어는 다르다.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바로 쓰고, 입말로 들어오면서 바로 우리말을 해치고 들어온다. 일제 시대에 일본말도 이와 비슷하다. 한문이 2,000년 동안 상처를 준 것 이상으로 일본말이 우리를 해쳤다. 지금은 영어가 그것을 훨씬 능가한다. 이것이 우리말의 상태이다. 라. 우리를 살릴 수 있는 길은 우리말을 살리는 것이요, 우리말을 살릴 수 있는 길은 국어교육밖에 없다. 질문 1 : 언어 사용 기능 신장 질문(정일) : 6차 교육과정의 목표는 ‘언어 사용 기능 신장’이라고 한다. 대답 : ‘언어 사용 기능 신장’이라는 것이 다 한자말이다. 우리말로 바꾸면 ‘말하기’ 혹은 ‘말 잘하기’라고 하면 끝난다. 이렇게 쉬운데 한자말로 바꾸니 어렵고 무서운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말을 듣고 대번에 뜻을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공동체가 다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막 쓰고 있다. 초등학교 학생들도 다 알아듣고, 노인들도 다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써야 한다. ‘말’이라고 하면 쉬운데 ‘언어’라고 하니 어려워진다. 이것을 풀려면 그리스까지 들어가야 한다. 학술적으로 이래저래 떠벌리지만, 실제로 알맹이는 하나도 잡히지 않는다. 그냥 ‘말’이라고 하면 된다. ‘사용 기능’이라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 ‘말’이라는 것이 ‘도구’라는 뜻이다. 말이 내 안에 있고, 그것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 아니다. 말은 사람 밖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용해야 하는 것이라고 본 것이다. ‘기능’이라는 말을 알기 위해서도 그리스까지 가야 한다. ‘신장’도 쉽지는 않다. 우리말로 ‘말 잘하기’라고 하면 모든 것이 끝난다. 이런 것을 이오덕 선생이 깨달은 것이다. 이런 것을 하면 세상이 달라진다.
가. 첫째, ‘말은 도구다’라는 말에 대해 생각해 보자. 경성제국대학에서 고바야시라는 교수가 어문학부를 가르치면서 가장 힘써서 가르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소쉬르의 일반 언어학 책을 가지고 가르쳤는데, 그 책에 그런 말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그 책의 본령이 아니다. 가는 줄기였는데, 이것만 힘써 가르쳤다. 속셈이 있다. 서구 문명에서 말은 두 뿌리가 있다. 그리스에서는 기원전 1000년 경에 인간의 모든 활동은 말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철학을 하려면, 아는 것을 즐기려면, 말을 붙잡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데아를 잡기 위해서는 말을 잡아야 한다. 말을 잡으면 이데아를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세상을 알고 싶으면 ‘말’에게 물으라고 했다. 말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언어(로고스)와 문학(미토스)이라는 개념이다. ‘로고스’는 생각을 잡는다는 뜻이다. ‘미토스’는 감정을 잡는다는 뜻이다. 전자는 과학의 언어이고, 후자는 예술의 언어이다. 이것이 영어에서는 각각 ‘논리’와 ‘신화’로 번역된 것이다. 이런 바탕 위에서 철학을 하고, 문학을 했다. 이것이 지중해 문명의 중심이었다. 이것이 로마로 오면서, 히브리족의 문명을 받아들였다. 바울과 베드로가 전교를 하면서 세상의 중심이 된 로마로 들어왔다. 하층민에게 먼저 들어가 땅 밑으로 들어갔다. 이 둘이 로마에서 순교를 했고, 예로니모가 성서를 라틴어로 번역하면서 귀족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5세기에 국교로 인정했다. 헤브라이즘(이스라엘)과 헬레니즘(그리스)이 결합하여 라틴 문명을 만들고, 그것이 세상을 지배했다. 이스라엘에서는 더 철저했다. 모든 것의 근원을 신으로 보는데, 신의 존재를 말씀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인간처럼 육신을 가진 것이 아니라, 신의 존재는 말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말은 신과 같다. 눈에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힘을 지니고 있다. 말은 곧 신이다. 아브라함을 이스라엘의 조상으로 본다. 아브라함을 움직인 것도 말이다. 예수까지 2,000년 동안 티그리스 유프라테스를 거쳐, 이집트를 거쳐, 이스라엘로 자리를 잡은 것이다. 그 때는 때때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있었다. 사람들이 잊을 만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와서 세상 사람들에게 부르짖었다. 그들이 예언자(말을 예금해서 전해주는 사람)이다. 바벨탑 이야기는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근방의 신화이다. 그것이 성경에 들어간 것이다. 흩어진 말을 쓰면 인간은 무력해 진다. 말을 어떻게 쓰느냐 하는 것이 사람들의 삶을 결정한다. 그렇게 말은 무서운 것이다. 예수가 오고 나서, 그리스 사람들에게 예수를 전하기 위해 쓴 것이 요한복음이다. 말 잘하는 그리스 사람들에게 읽히기 위해 굉장히 논리적으로 쓴 것이다. 첫 구절이 ‘태초에 말씀이 계시었다. ~ 그 말씀이 사람이 되어서 우리에게로 왔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몰랐다’라는 것이다. 이것이 히브리의 철학이다. 신을 전제로 하느냐, 아니냐? 하는 차이는 있지만, 말이 삶을 결정한다는 점에서 히브리와 그리스가 차이가 없다. 프란치스코가 이탈리아 말을 쓴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탈리아 말로 설교를 해야 사람들이 듣고, 그래야 그들의 삶이 바뀔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말이 사람들의 삶을 결정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소쉬르 이전에는 ‘언어는 하나님과 같이 거룩한 것이기에 사람들이 함부로 다루어서는 안 된다’라고 생각했다. 소쉬르는 이것을 깨려고 했던 것이다. 언어가 진정한 과학이 되기 위해서는 언어를 깨뜨려서 봐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언어는 도구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바탕도 없으면서, ‘도구’라고만 주장했다. 언어는 신성한 것이고, 너무나 소중한 것이라는 것이 바탕이 되고, 그 바탕 위에서 ‘도구’라고 주장해야 하는데, 근본은 쏙 빼고 ‘도구’라고만 주장했다. 이것은 속셈이 있다. 굳이 조선말을 쓸 필요가 있느냐? 소통만 되면 되지 않느냐? 하고 주장하려는 것이다. 이희승 등이 그것을 받은 것이다. 지금 평가원에 있는 사람들도 그것을 그대로 받은 것이다. 한 번 정보가 들어가면 바뀌지 않는다. 학자들이 제일 안 바뀐다. 그래서 학자가 바뀌면 세상이 바뀌는 것이다. 미군정의 교수 요목(라카드 대위가 철학도 없이, 미국에서 하던 것을 본 따서 그대로 만든 것이다)을 아직도 바꾸지 못하는 것은 우리에게 철학이 없기 때문이다. 근본적인 질문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거짓이 견디는 것은 철학이 없기 때문이다. 근본적인 질문을 해야 거짓을 도려내고, 알맹이만 남길 수 있다. 그런데 근본적인 질문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을 바꾸지 못한다. 미국은 그렇게 갈 수밖에 없다. 앞으로도 그렇게 갈 것이다. 미국은 말의 깊은 심층에 들어갈 수가 없다. 국민을 국민이 되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 급한 나라이다. 전 세계에서 몰려드는 사람들에게 말을 가르쳐서 의식주를 해결하도록 해야 한다. 이것만으로도 교육은 땀을 빼는 것이다. 그러므로 깊이 들어갈 수가 없다. 그런데 그런 것을 생각하지 않고, ‘미국도 이렇다’라고 주장한다. 그처럼 천박한 미국을 따라가려고 한다. 그에 비해 우리는 같은 동아리로 살아왔다. 그래서 눈빛만 봐도 서로의 생각을 알 수 있다. 할아버지가 기침 소리만 해도 그 뜻을 알고 움직였다. 유럽도 부부끼리 매일 사랑한다고 얘기를 해야 한다. 우리는 그렇지 않다. 유럽이 뿌리가 깊다고 해도, 국가가 자리를 잡은 것은 6세기에 시작해서 9세기에 끝났다. 그나마 각자 자기의 말을 쓴 것은 13세기 이후이다. 우리는 몇 만 년 넘게 같이 살았다. 유럽과도 비교가 안 된다. 그래도 그나마 가장 비슷한 곳이 유럽이다. 배울 수 있는 곳은 유럽이다. 자연과학은 몰라도, 언어(철학)에 대한 것은 다른 나라의 것을 가져다 쓰기가 정말로 힘들다. 나. ‘사용 기능’에 대해 생각해 보자. 말은 주고받는 것인데, 주고받기 전에는, 사용하기 전에는 없었느냐? 아니다. 이미 우리 머리 속에 들어있다. 그러므로 ‘언어 사용 기능’이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언어 사용이라는 것은 입에서 나와서 귀로 들어가기 전까지만(빠롤만) 얘기하는 것이다. 소쉬르도 이것을 보라고 얘기했다. 사용 이전은 랑그, 사용 이후는 빠롤이다. 기호로는 시니피에와 시니피앙이다. 촘스키도 능력과 수행(퍼포먼스)로 구분했다. 이 둘을 다 봐야 한다고 얘기했다. 그런데 이것을 빼고, 기능만 말한다. 지금 우리나라의 교육과정을 만드는 사람들은 그 뿌리를 경성제국대학, 미군정에 두고 있다. 우리는 철학이 없으니 아직까지 그것을 바꾸지를 못하고 있는 것이다. 질문 2 :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질문(현종갑) : 첫째, 국어가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해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특히 학생들에게는 먹히지 않는다. 영어를 섞어서 쓰는 것이 멋지다고 생각한다. 둘째, 우리말을 살리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해야 할 것인가? 대답 : 아이들의 잘못이 아니다. 지난 이천 년 동안 유전으로 핏속으로 녹아 들어 있다. 만만치 않은 일이다. 그리고 우리 말 살리기는 눈 앞에서 결과가 드러나는 일이 아니다. 백년 이백 년 줄기차게 싸워가야 가능한 일이다. 로마가 그리스를 물리적으로 지배하고 나서고, 그 말을 몰아내고 자신들의 말을 세우기까지 300년이 걸렸다. 사람들이 못 알아듣는다고 그것 때문에 좌절해서 포기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노력하기에 따라서 그 시간을 당길 수는 있다. 중국 인구가 10억인데 1%만 과학에 달려들어도 천만이다. 그러나 중국은 죄악의 세상이다. 4천만을 제외하고, 9억 6천만은 비극적으로 살고 있다. 중국은 60개 이상으로 쪼개서 토박이말을 살려서 쓰도록 해야 한다. 인류가 복되게 사는 길이다. 그런 뜻에서 우리는 남북 통일이 급하다. 칠천만이 되면 새로운 역사를, 힘을 모을 수 있을 것이다. 갈라져 있는 시간보다 치유시간이 더 걸릴 것이다. 옆에 있는 사람들을 설득하려고 강박관념을 가질 필요는 없다. 어렵다고만 생각할 필요도 없고 그것 때문에 좌절할 필요도 없다. 멀리보고 근본 물음 가지느냐 환히 보이도록 보느냐가 중요하다. 내가 스스로 얼마나 확고하게 깨닫느냐? 나의 의지가 중요하다. 이오덕 선생을 보라. 그 분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바뀌었나? 그것 말고도 여기저기서 기운이 느껴진다. 가까이서 보자. 국어 교사들이 모여서 출판사를 둘이나 차리고, 국정 교과서에 대항해서 교과서를 만들어 내고, 대학원에서 공부를 하고, 신정숙(글과 그림), 박문희(마주이야기), 글쓰기교육연구회, 우리말 사리는 겨레 모임, 국립국어원의 변화…. 이런 노력들이 모여서 세상을 바꿀 것이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교육이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좋아지고 있다. 이오덕 선생님이 [삶]⇒[말]⇒[글]이라고 했던 이유를 깨달아야 한다. 가장 좋은 글은 말을 그대로 쓰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글이 말을 비틀고 있다. 그것도 우리글이 아니라 중국, 일본, 미국의 글이 우리말을 비틀고 있다. 그 틀을 깨야 한다. 그리고 말이란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다. 삶에서 나오는 것이다. 먼저 삶을 계속 걱정하고 다듬어야 한다. 질문 3 :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질문(주중연) : 있는 말 ― 있어야 할 말, 없는 말 ― 없어야 할 말. 다른 나라 말을 버리고 우리말을 살려서 쓰자고 하는데, 어느 정도로 해야 하는가? 옛말을 살려서 쓰는 것이나 새말을 만드는 것도 그래서 좋을 말이 있고, 오히려 소통을 가로막는 말도 있을 것이다. 대답 : 질문이 둘이다. 첫째, 프랑스의 예를 돌아볼 수 있을 것이다. 프랑스에서 북두칠성파(?)가 프랑스말로 고전을 번역하려니 어려움이 많았다. 시장 바닥에서 쓰는 말을 갖다 쓰려니 그것으로는 고전을 온전히 번역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들이 찾은 방법은 세 가지다. 1) 새로운 말을 만들어야겠다. 2) 옛말을 살려서 써야겠다. 3) 지금 쓰는 말 중에서 좋은 것을 가려서 써야겠다. 일본은 외국의 것을 거의 그대로 쓰고 있다. 중국은 거의 완전하게 바꿔서 받아들인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오덕 선생의 원칙은 일하는 사람들,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지금 쓰고 있는 말이 답이라고 생각한다. 그것 말고는 다 버려야 한다. 농사를 짓는 사람들도 새말을 만들어 쓴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로 괜찮다. 그런데 학자들이 머리로만 만들어 낸 말은 안 된다. 내 생각은 좀 다르다. 누구나 새로운 말을 만들 수 있다. 아이들도 새로운 말을 만들어 낸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고 하니 어른들의 언어를 받아들인다. 시인, 소설가도 새로운 말을 만들어 낸다. 학자들도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런데 만들어 낸다고 해서 다 살아남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쓸 수 있어야 살아남는다. 내 생각에는 자꾸 만들어 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살아남는 것을 가려야 한다. 외국에서 들어온 말도 마찬가지다. 바꿀 수 있으면 바꿔야 한다. 그러나 그럴 수 없으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말에 편입되면 우리말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누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다. 언어 공동체에서 하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정책을 수행하는 입장에서는 바꿀 수 있는 대로 바꿔야 한다. 그래서 언어 공동체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특수한 사정이 있다. 서양에서는 자기 말에 대한 열등의식이 없다. 이들에게 외래어란 우열이 없이 서로 왔다 갔다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그런 상태가 아니다. 우리 것은 보잘 것이 없는 것이요, 가치가 없는 것이요, 하찮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대신 남의 것은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2,000년 이상 살아오면서 배운 것이다. [뜰 - 정원 - 가든]이라고 생각한다. 우유는 300원, 밀크는 350원하던 때가 있었다. 우유보다는 밀크가 더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은 소젖인데, 그러면 사람은 못 먹는 것이다. 이런 의식이 있다. 우리 DNA 속에 있다. 회충약도 [나온다]는 망했다. [산토닉] 일색으로 팔렸다. 사람들의 의식을 바꾸지 않고, 단어 하나를 바꾸는 것은 큰 뜻이 없다. 단어 하나를 바꾸느냐, 마느냐? 하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의식을 바꾸어야 한다. 우리말이 더 좋은 것이라고 가르쳐야 한다. 이것은 국어 교육이 아니면 할 수 없다. 우리 스스로에 대한 인식이 많이 바뀌었다. 그러나 말에 대해서는 아직도 여전하다. 세계에 나가려면 외국말로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소나타 같은 차이름들) 영어로 안 하면 안 팔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이탈리아말 구찌. 유럽에선 자기네들 말이름 때문에 상품이 세계에 못나간다 생각 아예 안한다.) 그것을 가르쳐야 한다. 있는 말과 있어야 할 말에 대해 얘기하자. 독일은 19세기 초반부터 자국어 운동을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굉장히 치열하고 폭력적이었다. [돌격대]라는 조직도 있었다. 간판을 막 뜯어냈다. 괴테, 쉴러 이런 문호들이 나오면서 완전히 일어서게 되었다. 피이테가 「독일 국민에게 고함」을 라디오 방송으로 계속 내보냈다. 독일 아카데미에서 오랜 기간 동안 독일말을 살리기 위해 노력을 했다. 현상공모까지 했는데, 한 번은 ‘어째서 프랑스어는 세계어가 되었는가?’라는 주제에 대해서 논문을 공모했다. 1) 쉽다. 2) 명쾌하다. 3) 소리가 아름답다. 이처럼 세 가지(위의 기준에 하나를 더한다면 ‘합리성’을 추가할 수 있다) 이유를 밝혔다. 이것이 독일어 순화의 잣대가 되었다. 19세기는 서양 언어학에서 음성학의 시대였다. 소리를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서 노력을 했다. 이것을 바탕으로 독일말을 아름답게 가꾸기 위해 노력했다. 이것을 거쳐서 음운, 문장론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우리는 음성학을 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우리말을 갈고 닦으려면, 먼저 우리말이 무엇인지를 생각해야 한다. 있어야 할 말은 글말과 입말이 같은 것이다. 하나가 되는 것이다. 말하듯이 글을 쓰고, 글을 쓰듯이 말을 해야 한다. 우리말을 살리도록 하려면 우리말이 좋다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 깨닫게 해야 한다. 국어 교사가 먼저 본보기를 보여야 한다. 학생들이 ‘아! 우리 선생님의 말씀은 참 쉽다. 잘 알아듣겠다 ’라고 생각하도록 해야 한다. 질문 4 : 좋은 교과서는? 질문(이경욱) : 아이들에게 맞는 교과서 개발 대답 : 그것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우리 아이들에 대해서 제대로 알아야 한다. 우리는 그에 대한 연구가 전혀 없다. 아이들이 쓰는 어휘의 수준, 우리 아이들의 사고방식, 발달 단계 등에 대한 자료가 전혀 없다. 반세기 동안 국어를 가르쳤지만, 그에 대한 고민도 없었던 것이다. 좋은 교과서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지만, 발이 땅에 닿는 곳이 없다. 질문 5 : 말하기 듣기를 생활에서 가르칠 수 있는 방법은? 질문(기정아) : 말하기 듣기에 대한 자료는 거의 없다. 아이들과 생활하다보면 말하기와 듣기가 정말로 중요한데, 그것을 제대로 가르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대답 : 국어를 여섯 영역으로 쪼개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짓이다. 철학이 없기 때문이다. 국어 교육에 대한 이론이 없기 때문이다. 근본적인 것을 묻지 않기 때문이다. 나누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고, 나누어 놓은 것을 가지고도 가르칠 수도 없다.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 국어 교육이 그랬다. 이것을 깨기 위해서 우리말 우리글은 주제별로 나갔다. 하지만 정교하게 나가지는 못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것을 거울로 삼아 국정과 우리말 우리글을 뛰어넘을 수 있는 교과서를 만들려고 한다. 교과서는 삶을 담아야 한다. 우리말 우리글이 비록 불완전하지만 국정보다는 훨씬 낫다. 아이들의 삶에 가까이 다가간 것이다. 그래서 언론에서 대서특필을 했던 것이다. 이제 아이들 삶을 더 정교하게 담아야 한다. 말하기와 듣기에서도 실생활에서 가져와야 한다. 자기들에게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왜 아이들이 귀를 기울이지 않겠나? 인간은 영물이다. 자기에게 유리한 것이라는 것을 알면 듣는다. 지금은 인간과 관계없는 시험으로 아이들을 잡는다. 이것은 폭력이다. 죄악적 폭력이다. 교육과정 모임에서 프랑스에 가서 실제 교실을 보려고 한다. 한 단원을 어떻게 소화하는 것인지 직접 보려고 한다. 그러면 더 좋은 교과서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질문 6 : 전자말 질문(한미라) : 전자말은 통신언어, 채팅언어 등도 포함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런 말들은 문제점도 많다. 굳이 그에 대해 연구하겠다는 것은 어떤 이유인가? 대답 1 : 통신언어의 문제점에 대해서 먼저 말하자. 기성세대들이 굉장히 위험한 현상으로 보고 있다. 병리 현상으로 보고, 정화를 시키고 순화를 시킬 길을 고민하고 있다. 나는 그 현상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 것에 일부 동의하고, 일부 동의하지 않는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잣대가 글말이다. 그래서 그 잣대로 보니 놀랍고 걱정스럽다. 그런데 그것은 전자말이다. 전자말의 본질로 봐야 한다. 그런 본질로 보면, 그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입말과 글말이 다르고, 글말과 전자말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것을 먼저 고려해야 한다. 사실 우리가 가진 잣대는 모두 글말에서 온 것이다. 말 잘하는 것에 대한 잣대는 없다. 입말에서는 소리와 짓, 눈빛이 굉장히 중요하다. 그런데 이에 대한 잣대는 없다. 입말에 대한 잣대는 없다. 말이 본래 가지고 있던 본질이 글말 때문에 비틀리고 있다. 글말의 기준으로 입말을 비틀어서는 안 된다. 마찬가지로 글말과 전자말은 다른 것이다. 글말의 잣대로 전자말을 비틀어서는 안 된다. 입말, 글말, 전자말이 어떻게 다른 것인가에 대한 기본적인 고민이 없이 국어교육을 하고 있었다. 전자말에서는 속도가 생명이다.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그것을 떠나서 속도는 생명이요 본질이다. 그러다 보니 속도에 휘말리게 된다. 그러다 보니 기존의 글말이 갖고 있던 체계를 깨뜨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볼 수 있다. 미국의 옹은 이런 연구를 오래 전부터 시작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이런 본질을 제대로 찾아내는 것은 시기상조다. 누구 하나 체계적으로 연구한 사람이 없다. 이런 현상을 포착하고, 관찰하고, 주시하고, 분석해서, 그 속에 담긴 아이들의 삶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먼저 그러한 실상을 파악하고 잘못된 것이 있으면 고쳐야 한다.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 옛날의 잣대로 고치려고만 해서는 안 된다. 대답 2 : 영화에 나오는 말은 그냥 말이 아니냐는 문제에 대해 말하자. 입말과 전자말의 차이를 알아야 한다. 매체가 다르다. 입말로 하면 이 방의 사람만 듣는다. 그런데 전자말로 하면 바깥의 사람도 듣고, 미국에 있는 사람도 듣고, 미래에 있는 사람도 듣는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다. 주고 받는 체계가 다르다. 이것은 입말과 글말의 차이와 같다. 같은 내용인데 입으로 하면 입말이고, 글에다 쓰면 글말이다. 그런데 주고 받는 방식이 다른 것이다. 기성세대는 이것이 새로운 방식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몸이 다르면 다른 사람이다. 맥루한이 말했듯이, 미디어(매체)가 달라지면 메시지가 달라진다. 글말과 전자말, 입말과 전자말은 매체가 다른 것이다. 새로운 방식이다. 아직까지 세계적으로 모든 사람이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미국에는 옹을 비롯해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여러 가지 주장들 중에서 이런 생각들이 가장 합리적이라 생각한다. 질문 2(현종갑) : 그런 것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이것을 꼭 국어과에서 중요한 과제로 다루어야 하는 것이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좀더 생각해 봐야할 것 같다. 대답 3 : 그런 생각은 당연하다. 왜냐하면 이전에 그것에 대해서 해 놓은 것이 전혀 없다. 아무도 하지 않았던 것을 새로 해야 한다. 그에 대한 두려움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공룡처럼 무서운 것이라 하더라도, 그런데 어차피 우리 아이들은 그런 세상에 살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어른으로서 그것에 대해 고민하지 않고, 미리 대비하지 않는다면 우리 아이들이 그런 세계를 살아갈 때 누가 그것을 이끌 것인가? 이것을 제대로 못 살면 말을 잘못하고, 글을 잘못 쓰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앞으로는 치명적으로 못살게 될 것이다. 그런데 꼴을 보아하니 우리 말고 누가 이것을 할 것인가? 하면 값지다는 것은 말한 것도 없다. 영국에서는 교육학자, 사회학자, 컴퓨터학자가 모여서 『Call(1979년)』이라는 책을 썼다. 퍼스널 컴퓨터가 나오기 전이다. 컴퓨터학자가 얘기한다. 곧 개인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컴퓨터가 나올 것이다. 그런데 아이들은 새로운 것에 대해서 아무런 두려움이 없기 때문에 막 쓸 것이다. 그런데 어른들을 그것을 따라갈 수가 없다. 그렇게 된다면 아이들을 바른 길로 이끌 수가 없다. 이런 때에 대비하기 위해 어른들이 미리 배우고 준비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이 컴퓨터를 아이들 교육에 활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고, 막상 그 때가 닥치면, 그 때는 늦다. 미리 준비해야 한다. 이제 우리는 이미 그런 세상으로 접어들었다. 아이들은 그 세상에 살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아무런 준비가 없다. 대신 ‘아이들이 저걸로 나쁜 것 한다. 어어! 저거 못하게 해라.’ 이런 말만 한다. 어른으로서의 역할을 못하는 것이다. 질문 3(홍소연) : 전자말을 잘 부리고 사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했는데, 국어과에서 어느 정도를 해야 하는가? 대답 4 : 나도 정확하게 정리되지 않았다. 물론 각 교과에서 역할을 맡아서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의사소통의 통로로서 아이들이 그것을 잘 부려서 쓸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우리말에서 ‘잘’이란 것이 참 어렵다. 어떻게 해야 ‘잘’ 하는 것인지 계속 연구를 해야 할 것이다. 서양에서는 이렇게 실질적인 것이 논문의 주제이다. 그런 연구들이 자꾸 쌓여야 한다. 야곱슨이 언어를 다층적인 구조로 보도록 만들었다. 언어에는 6가지 복합적 요인이 있다. 그것을 말이 하는 기능으로 설명했다. 말이 여섯 가지를 한다고 본 것이다. 보내는 사람은 자기를 드러내는 기능을 한다. 받는 사람은 그것을 받아서 자기를 변화하는 기능을 한다. 가고 오는 것을 또 넷으로 나누었다. 외면(접촉, 코드)과 내면(정보, 관련 사항)의 측면으로 나누었다. 전자말에서는 이런 것들이 훨씬 복잡하게 얽힐 것이다. 그러므로 국어과에서 어느 정도로 다루어야 하는가를 쉽게 말하기는 힘들다. 모든 것은 다른 것과 일정한 관계를 맺으며 존재한다. 딱 잘라서 말하기 힘들다. 질문 4(이경희) : 전자말의 개념은 알겠는데, 굳이 새로운 영역으로 잡아서 연구해야 할 필요성은 잘 느끼지 못하겠다. 대답 5 : 입말에서는 마주 보고 이야기한다. 대상이 있다. 그런데 전자말에서는 불특정 다수에 대해 말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런 것에 대해서 연구하자는 것이다. 아파트 경비실에서 방송하는 것을 예로 들었는데, 그것은 단순한 예이다. 사실은 훨씬 더 넓은 것이다. 시를 읽고, 소설을 읽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면, 인터넷을 보고 방송을 보는 것도 가르쳐야 한다. 전자말 영역에서 우리 아이들은 전 세계적으로 가장 앞서서 달리고 있다. 미국도 우리를 따르지 못한다. 그런데 어른들은 손을 놓고 있다. 프랑스에서 이부련 선생님 아들에게 핸드폰을 사 줄 때, 아버지가 물리학자여서 반대를 했다. 전자파가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을 사 줄 때 6가지 약속을 정하고 줬다. 이것을 지킬 수 있다면 쓰게 해 주겠다. 예를 들어서 이런 것이다. 이 정도로 철저하다. 우리는 아무런 준비가 없다. 1) 벨이 울리면 몸과 10Cm 이상을 떼서 안테나를 뽑아라. 그리고 5초 후에 받아라. 2) 절대로 몸에 지니지 말고 가방 등에 넣고 다녀라. 등등
질문 5(황현정) : 전자말은 조작될 수 있다. 특히 아이들이 조작해서 악용할 수 있다. 대답 : 아이들이 왜 그렇게 되었나? 교육이 제도를 가지고 폭력적으로 그렇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 아이들은 영어, 수학은 못해도 엄청난 쓸모를 갖고 태어났다. 그런데 학교에서는 그런 것은 필요 없다. 영어 수학을 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른 것은 다 쓰레기라고 한다. 그것을 못하는 인간 역시 쓰레기라고 한다. 그렇게 폭력적으로 당해서 아이들 가슴에 멍이 들었다. 그런 아이들이 무슨 짓인들 못하겠는가? 질문 6(이경욱) : 초등학교 6학년 아이들이 『○○ 선생을 싫어하는 아이들의 모임』 같은 것을 만들어서 불만과 증오를 증폭시키는 경우도 있었다. 대답 : 아이들은 무척 빠르다. 유치원 아이들도 핸드폰을 막 쓴다. 이제부터라도 어른들이 자기 역할을 찾아야 한다. 질문 7(김승진) : 아이들이 스스로 하고 싶은 것을 찾고, 스스로 바른 방향을 잡을 수 있다면, 교사는 손을 놓아도 되는 것 아닌가? 대답 : 입말은 여섯 살만 되면 문법적으로 완벽하다. 그런데 우리는 8살이 되어서야 가르친다. 이미 6살에 졸업한 아이들을 8살에 가르치기 시작한다. 이 아이들이 전자말에 노출되어 있고, 푹 빠져있지만, 그렇다고 전자말을 가르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아이들과 얘기를 많이 해 보면, 아이들은 좋은 것을 찾아 나간다. 그런데 아이들은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아이들이 생각해 볼 수 있도록 기회를 만들어 주는 것이다. 그것도 교육에서 매우 큰 역할이다. 질문 8(백명희) : 글말도 불평등이 존재하는데, 전자말에서는 엄청난 불평등이 존재할 것이다. 이런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하는 문제도 고민해야 할 것이다. 대답 : 우리도 해야 하지만, 국가적 차원에서, 세계적인 차원에서도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런 것도 중요한 연구 과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질문9(백명희) : 전자매체를 잘 쓰는 방법까지 가르쳐야 하는 것이 아닌가? 예를 들어 마이크를 사용하는 방법까지도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반론(이경희) : 그렇다면 국어 교육의 고유한 영역은 어떤 것인가? 다른 교과에서 할 수 없고, 국어 교육에서만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대답 : 새로운 교육과정을 만들면서 밥그릇 싸움이 심했다. 각 교과에서 서로 많은 시간을 확보하려고 싸웠다. 그런 과정에서 국어 시간을 줄였다. 국어에서 말하고, 듣고, 읽기, 쓰기를 가르친다고 하는데, 그것은 국어만 하냐? 우리도 한다. 국어 시간을 내놓아라. 그래서 줄었다. 서구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서양에서는 다른 교과를 맡은 사람도 국어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국어 시간에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할 것을 주장한다. 그런데 내용으로 들어가면 다른 교과에서 못한다. 언어와 문학은 다른 교과에서 할 수 없다. 언어와 문학은 침해당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것은 누가 보더라도 중요한 것이다. 그런 것을 찾아야 한다. 전자말도 마찬가지다. 전자말로 하는 언어와 문학을 다루어야 한다. 입말과 글말이 다른 영역과 얽히듯이, 전자말도 다른 영역과 얽힌다. 문명이 진보하면서 영역은 얽힐 수밖에 없다. 교육도 그런 쪽으로 가고 있다. 그래서 교육과정 모임에서도 통합에 대해서 비중 있게 공부하고 있다. 질문 10(한미라) : 선생님 책에서 ‘조붓거리다, 뜨레’와 같은 토박이 말을 쓰고 있는데, 지역의 사투리를 책에다 쓰는 것이 어색하다. 대답 : 첫째, 현재 표준어 규정은 무의미하다. 그러므로 이 낱말들이 표준어가 아니므로 쓰지 말자고 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둘째, ‘그런 낱말을 써서 의사소통이 안 된다’라는 문제 제기는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사투리의 차이가 크지 않기 때문에 의사소통에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니다. 맥락으로 짐작해서 뜻을 알아차릴 수 있다. 그리고 거기에 쓴 단어들은 사전에 올라있는 단어 가운데는 어떤 것으로도 대신할 수 없다. 그 상황에서는 그 단어가 가장 적합하다. 그래서 썼다. 더 나아가 다양한 낱말을 아는 것은 자기 생각을 더 섬세하게 표현할 수 있는 길이다. 프랑스의 경우에도 빠리의 시장 바닥 말이 표준어가 되었다. 빠리가 프랑스의 수도가 되는 것도 역사적으로 얘깃거리가 된다. 다만 시장 바닥의 말이었던 것이 표준어가 되었지만, 국가주의가 흥할 때는 아무도 거기에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런데 다시 보니 썩 좋은 말이 아니었다. 오히려 지방의 말들 중에서 더 좋은 말들이 많더라. 그래서 그것을 적극적으로 발굴해서 썼다. 이탈리아의 경우에도 초등학교 아이들은 공용어로 표준어를 쓸 것인지, 그 지방의 말을 쓸 것인지 학교 단위에서 결정하도록 한다. 그런데 우리는 초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집에서 쓰던 말을 버리라 한다. 할아버지 할머니와 쓰던 말을 버리라 한다. 그것을 가르치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 아이들이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 중요한데, 아이들이 너무나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말도 토박이말로 쓰면 트집을 잡는다. 아이들이 알아들을 수도 없는 말도 일본식 한자말로 쓰면 트집을 잡지 않는다. 토박이말로 하면 얕잡고 공격하는 것 같다. 내가 말꽃이라고 했더니 그럼 물감꽃이고 소리꽃이냐? 하고 트집을 잡더라. 같은 예술의 종류이면 같은 항렬이라야 하지 않느냐? 하고 트집을 잡더라. 그러면서도 문학, 음학, 미학이고 문술, 미술, 음술이냐? 그것은 항렬이 맞지 않아도 트집을 잡지 않는다. 그런데 토박이말만 문제 삼는다. 아무리 어려운 말이라도 한자말로 썼으면 트집을 잡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모르는구나 하고 가슴을 쳤을 것이다. 그런데 토박이말로 하니 트집을 잡는 것이다. 질문 11(이경희) : 새로 교과서를 만들게 되는데, 한자말로 된 것을 우리말로 잘 살려서 쓰는 노력을 해야 하지 않을까? 대답 1 : 학문이든 뭐든 본질과 속살을 제대로 알려야 한다. 그런데 말에 담아서 알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말이 중요하다. 이런 의식이 있어야 한다. 그런 의식만 갖고 있으면 문제는 간단히 해결할 수 있다. 그런데 의미도 없는 단어를 주고 외워서 시험을 보라고 한다. 그것은 의미도 없고, 폭력적이기까지 하다. 제안(주중연) : 조총련 학교에서는 ‘뉘앙스’를 ‘뜻빛깔’이라고 하더라. 넓게 본다면 북한에서도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전망(최경숙) : 바뀌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는데, 조금씩 바뀌고 있다. 모둠, ○○길, 갓길와 같은 것이 그렇다. 이런 것도 끝없는 노력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앞으로도 계속 노력을 해서 바꾸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대답 2 : 놀이, 노래, 이야기도 이제 교과서에서도 쓰이고 있다. ‘들머리’와 ‘마무리’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 논문에서도 쓰고 있다. 학문의 언어도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몽테뉴도 시장 바닥의 말을 갖다 썼는데 안 맞았다. 그래도 다듬고 썼다. 데카르트도 그것으로 철학을 해 보자고 했다. 제대로 되었겠나? 안 되었을 것이다. 무진장 욕을 먹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다듬고 썼다. 그러면서 세상은 조금씩 바뀐 것이다. 말꽃(20년 고민의 열매)을 쓸 때도 그러했다. 우리 교욱에서 낱말 가르치기의 역사는 철저하게 한자 낱말 가르치기의 역사였다. 뒤죽박죽 쓰는 우리말 어휘를 풍부하게 모쓰고 세대간 화합에도 문제가 생긴다. 어름어름 쓰고 사는 버릇이 들어있다.(방송 일기예보 강한 바람, 강한 구름, 강한 눈) 토박이말 공부를 제대로 해야 한다. 우리말에 어찌씨와 그림씨가 많고 이름씨가 없다는데 이것은 말도 안되는 틀린 말이다. 한 겨레가 몇 품사만 많이 썼겠는가? 표준국어대사전에 [가]를 찾으면 19개가 나오는데 17개가 한잣말이다. 나도 모르는 가가 있다. 일본사전을 베껴 온 것이다. 제기 일종이라는 풀이 [가]는 죽었다 깨나도 안 쓸 한잣말이다. 철학이 없는 것이다.
* 씨나락, 볍씨, 모, 벼, 나락, 짚, 우케, 쌀, 등겨, 왕겨, 뉘, 밥(하다), 메(짓다), 고두밥, 누룽지, 흰죽, 미음 … ꀧ 꽃봉우리가 맺기 시작할 때부터 나락이다. 그래서 우리는 태어나자마자 1살이다. * 풀 하나 돌 하나 나무 하나 나비 하나 이름이 다 붙이고 불렀다.나비 이름이 100개 이상
대답 : 우리말 성조의 특징. 성조 분별도 가르쳐야 의사소통을 제대로 할 수 있지 않을까
* 북쪽 김두봉(조선 말본, 깁고더한 조선말본) 독립군 총사령관, 연안파 김일성 수상, 김두봉 부수상 70년대까지 북한 언어정책 기초를 닦음 70년대 이후 그 이상이 무너지고 정책도 무너졌다. 그래도 '문화어'-계속 더 좋은 말 쓰는 길을 열어 놓았다.
* 사투리는 '얼'까지 주고 받게 한다. -말꽃 다루는 사람 다운 것 역시 토박이말 살려 쓰기다 최명희가 박경리씨만큼만 살았어도 하는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박경리, 이문구, 홍명희<임꺽정>-여러 계층 폭넓게 토박이말 구사, 천민부터 왕실 삶까지 계층말 여실하게 구사, 1930년대 우리말 계층말을 총 망라해 놓았다.
*의식이 새로 살아나야 한다. 교사양성-제대로 해야 시험-제대로 평가해야 한다. 연수-열심히 하는 사람 대우해 주는 제도로 <복잡한 제도 개선><말의 민주성> |
첫댓글 십분의 일 정도 읽고 나갑니다. 빠른 시간 안에 다시 읽어야할텐데,,,대단하십니다. 이렇게 정리를 다 하다니..읽는 것도 쉽지 않은데.
제가 정리한 건 아닙니다. 정리한 거 살을 조금 보탰을 뿐이지요. 우리 말을 보는 눈이 깊어지리라 믿습니다.
언제나 가장 열심히 사는 사람은 선생님이시네요. 뽑아서 읽어봐야 겠네요. 곧 개학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