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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벌건 빛을 띤 레드락. 스포츠클라이밍 에어리어에서 외국 클라이머가 등반하고 있다.
더욱이 나는 이들에게 암벽등반을 가르친 선생이고, 그들에게 바람을 잡았으니 누구에겐들 좋은 소리를 들을 수 있으랴. 이런 나의 악행(?)에 위안받을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사실을 미국으로 떠나기 며칠 전에 알게 됐다는 것이고, 그로 인한 걱정거리로는 앞으로 무슨 일들이 벌어질지 몹시도 궁금하다는 것이었다.
볼더링 유혹에 덤벼들었다 목발 신세
10월29일 늦은 오후, 거대한 암벽 엘캐피탄(El Capitain·이하 엘캡), 아름다운 폭포 브라이들베일(Bridalveil), 밸리의 수문장 캐시드럴(Cathedral), 요세미티(Yosemite)의 얼굴마담 하프돔(Half Dome)은 깊은 가을 속에 잠겨 있었다. 습기 먹은 오후의 축축한 요세미티 밸리지만 길옆에 쌓인 낙엽과 간간이 떨어지는 침엽수 낙엽들의 정취는 아름다웠다. 예전에 느껴보지 못한 잔잔한 분위기다.
▲ 엘캐피탄에서 적응훈련중인 대원들. 왼쪽은 쇼티스트 스트로(박종관 선등).
LA 남가주산악회 회원들과 김일환씨의 도움으로 우리 다섯 명은 이곳 요세미티 밸리에 잘 도착했고, 일명 서니사이드(Sunny Side) 캠프장인 캠프4에 남가주산악회 이현수형에게 빌려온 각종 캠핑장비로 아늑하고 탄탄한 베이스캠프를 만들었다.
첫 등반계획인 엘캡 등반은 5명이 함께 초등루트인 총 34피치의 노즈(Nose·Ⅵ/5.10/A2)를 3박4일 동안 오르는 것이다. 선등과 후등은 물론 홀링까지 모든 역할을 각자 경험할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었으며, 적응훈련을 많이 한 후 본격적인 등반 시작일은 잡기로 했다.
첫 훈련대상지는 엘캡의 인기루트인 조디악(Zodiac·Ⅵ/5.11/A3+)과 쇼티스트 스트로(Shortest Straw·Ⅵ/5.10/A3+)로 잡았다. 가장 연장자인 최종하씨와 유춘열씨가 조디악을, 박종관과 장재창은 쇼티스트 스트로를 등반하기로 하고, 나와 김일환씨는 사진을 찍으면 그들을 돕기로 했다.
▲ 요세미티 밸리를 배경으로 기념촬영. 왼쪽부터 유춘열, 박종관, 김일환, 최종하, 장재창씨.
늦가을의 태양열은 매우 강렬해 덥고 따가웠다. 그 열기로 몸이 후끈 달아오르긴 했지만, 긴장이 고조된 훈련등반은 그런 열기를 식히기에 충분했다. 국내에서 훈련을 많이 했음에도 불구하고 거대한 암벽과 낯선 환경에서 오는 초조함인지 그들의 등반은 더디게 진행됐고, 지켜보는 나는 그들의 마음처럼 초조하기만 했다.
늦가을 태양은 낮게 떠서 엘캡 모퉁이로 빠르게 넘어가 버린다. 우리가 캠프로 돌아가야 할 시간쯤 조디악팀은 제1피치를 채 끝내지 못했고, 쇼티스트 스트로팀은 제1피치를 마쳤다. 조디악팀만 내일 등반을 마저 끝내기로 하고 하산 준비를 서둘렀다. 짧은 등반거리라 처음부터 만족할 수 없었지만, 앞으로 반복적인 적응훈련과 노즈 등반도 역시 훈련이라는 것에 여유를 부려본다.
▲ 노즈 등반대원들.
어둠이 짙게 내린 캠프에는 남가주산악회 회원들이 푸짐한 먹거리와 함께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도착해 있었다. 재미 교포 중 최고수이자 보잉사에 근무하는 남가주산악회 회장 최상범형, 부회장이자 우리의 영원한 서포터 이현수형, 유능한 변호사 고재남씨, 사업가이자 엘캡 수문장인 제이조, 휴먼사진작가 제이리였다. 깊어만 가는 밤, 모닥불 주위에 둘러앉은 우리는 세대차와 등반의 긴장감을 모두 잊은 채 산 이야기로 황홀한 밤을 지새웠다.
두 번째 맞는 요세미티 밸리의 아침, 맑은 새소리와 상큼한 소나무향, 그리고 모닥불은 궁합이 잘 맞는다. 좋은 아침이다. 곧이어 종관이가 무척이나 신봉하는 압력밥솥의 째지는 소리가 마치 작업장의 벨소리처럼 등반준비를 하자는 소리 같이 들렸다.
▲ 머뉴어 파일 버트레스 정상에서 멋진 폼을 잡는 클라이머들.
▲ 엘캐피탄 상단(Great Roof)오른쪽을 등반중인 대원들.
정상은 매우 널찍하여 일명 떡바위라고 한단다. 최상범형의 조금 외설스러운 떡바위 전설 이야기에 모두는 웃음을 터뜨렸고, 그 웃음에 따스한 오후 햇살이 가슴으로 푸근하게 빨려들었다. 우리는 새로운 놀이터를 찾는 애들처럼 다음 등반지인 글레이셔포인트(Glacier Point)로 가기 위해 커리빌리지(Curry Village)로 이동했다.
북향이지만 바위는 깨끗하고 산뜻했다. 인수봉 대슬랩과 같은 분위기이나 크기는 대슬랩에 비해 수십 배는 컸다. 바위면이 유리처럼 매끄러운 곳도 있었는데, 그 곳에 난 5.11b급인 그린 드래곤(Green Dragon)을 최상범 형은 마치 구렁이 담 넘듯 유유히 등반해냈다. 가이드북에 별 5개가 그려져 있는 아주 멋진 슬랩루트였다.
▲ 오웬스 리버 고지에서 다시 만난 남가주산악회 회원들과 함께.
몇 개의 다른 크랙루트를 등반하며 글레이셔포인트에서 적응훈련을 잘 마치고, 오후 조금 넘어 캠프로 돌아가 주변 볼더에서 남은 체력을 마저 소모시킬 작정이다. 요세미티 밸리에서 가장 멋진 볼더링 루트인 ‘미드나이트 라이트닝(Midnight Lighting)’이 캠프 바로 옆에 있다.
캠프장에는 조디악팀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조금 걱정스럽기도 하여 마중을 나가보려 했지만, 볼더링의 유혹을 떨칠 수가 없었다. 다섯 번 시도해서 해결되지 않으면 조디악팀을 마중 나가기로 하고 볼더로 달려갔다. 그러나 그 유혹은 성실하게 훈련하는 대원들을 성실히 마중나가지 않은 죄값을 치르게 했다. 두 번째 시도에서 떨어지며 바닥에 깔아놓은 볼더링 패드를 조금 벗어나, 발뒤꿈치에 큰 충격이 가해졌고, 결국 클러치(목발) 신세를 져야만 걸을 수 있었다. 다행히 뒤꿈치 타박상이라서 병원신세를 질 필요는 없었지만, 앞으로 등반계획이 어떻게 흘러갈지 몹시 당혹스러웠다.
▲ 그레이트 월 오브 차이나에 있는 난이도 5.10c 루트를 오르는 박종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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