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이야기는 지금부터 약35년 전(1973년 5월13일) 해병 북파공작 특수부대와
강화도 외포리 레이더 기지를 지키는 공군 첩보부대와 충돌하여
공군장교 사망 2명, 중태 22명을 낸 사고의 실체를 처음으로 밝히는 바이다.
용기와 패기가 넘치던 21살의 이질범은 1972년 8월26일에
해병대에 지원을 하여 진해 훈련소에 입소하게 된다.
진해에서 전반기 훈련 8주 후반기 4주, 총 12주의 해병대 훈련을 받고
김포 해병 제2여단으로 명을 받아 신병 생활을 시작한다.
신병 생활 3개월째에 보안대 차출을 받아 들어간 곳이
엉뚱하게도 북파공작 특수임무를 수행하는
강화도 마니산에 위치한 해병 M.I.U 특수부대었다.
그곳에서 대한민국 군인으로써 당연히 받아야 할 군인의 기본권,
외출, 외박, 휴가, 등 심지어 가족과 친구들 간의 통신마저
나라에 반납 한 체 마치 지옥과 같은 특수훈련을 받게 된다.
그러던 73년 5월 13일 부대원 전원이 강화도 전등사로 단체 외출을 나왔다가,
때마침 부대전원이 벚꽃놀이를 나왔던 강화도 외포리의 레이더 망 지킴이
공군 첩보부대 대원 24명과 극히 사소한 시비가 붙어 충돌하게 된다.
처음에는 이동수, 이질범, 이봉한, 배형수 이렇게 4명이
공군 24명과 싸우다가 한명씩 한명씩 연락을 받고 참여한 대원3명 등
총 7명이서 7:24의 목숨을 건 싸움으로 발전했다.
적, 괴뢰군 일당백이라는 슬로건을 걸고 산속에서 훈련만 받던
굶주린 사자들에게는 공군 장교들 24명은 그렇게 힘든 상대가 아니었다.
벚꽃이 만개한 일요일 날,
관광 명소이었던 강화도 전등사 앞 온수리에서는
피가 터지고 갈비뼈가 으스러지는 지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공군 첩보부대 장교들 24명은 모두 중상을 입었으며 그중 2명은 죽고 말았다.
그 사건의 주동자가 된 이질범은 해병여단 헌병대 내의 교도소에서
조사를 받고 영창에 수감 되었으며 그날부터 징역살이를 하게 된다.
영창에 수감되어 있는 백이면 백명이 백가지 사연들의 죄를 짓고
죄인의 멍애를 쓰고 들어와 죄수라는 같은 처지의 입장이라는 것 때문에
서로 위로하고 사랑하며 재기의 꿈을 키워 나간다.
치정 때문에 권총으로 마누라를 쏴 죽인 김포 보안대 김하사 애기를 비롯
결혼을 약속하고 3년 동안 뒷바라지를 해 주었던 해군사관생의 여인을
새로운 사랑을 이루기 위해 잔인하게 목 졸라 죽이고 완전 범죄를 노리고
얼굴과 손바닥을 대검으로 난도질을 해 산속에 버렸다가 나뭇꾼에 의해
범행이 발각되어 죄 값을 치르고 있던 김포 항공대 정대위사건,
또 일반 소소한 잡범들까지 한 곳에 엉켜 보내야 했던
해병 영창생활의 희노애락을 직접 체험 하고 느낀 모든 것을
여기에 생생하게 기록을 해 놓고 있다.
이질범 그는 현행 군법에서는 제일 큰 중죄인으로
‘상관폭행치사’ 죄명으로 사고 후 4개월 만에 해병여단 군법정에서
사형 형의 판결을 받았으나 그 당시에 중앙정보부(현 국정원)의
배려로 6개월로 감형을 받고 6개월의 징역을 살고 원대 복귀한다.
그가 그런 큰 죄명을 가지고 6개월 형을 받을 수 있었던 것도
전시를 제외한 군법 사상 처음 있는 일이 였으며 그 사건에
중앙정보부가 개입한 것도 또한 타인이 보면 불가한 일이었으나
그것은 그가 속해 있는 부대가 극비의 비 편제 부대로써
공군 실미도 부대와 같이 중앙정보부에 소속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누가 나에게 죄수라는 멍에를 씌웠는가?
오직 살고 싶어서 발버둥 치며 철창에 매달려
고향의 부모님 생각에 사무친 정을 그리워하며
캄캄한 암흑의 감방 안에서 때로는 노래를 부르며
때로는 통곡을 하면서 보낸 해병대 영창 생활 6개월
그 6개월의 세월이 나에게는 결코 짧은 시간은 아니었다.
몸은 철창에 묶인 몸이나 마음은 밤마다 세상을 마음대로
떠돌아다니면서 사랑하는 부모, 형제와 나에 가슴에 처음으로
사랑을 심어주었던 여인 춘옥이를 만나고 다니면서
그는 내일의 희망을 꿈 꿀 수 있었다.
세상 사람들아 옳은 일 하자스라.
사람이 태어나서 옳은 일을 못하면,
짐승과 다를 것이 무엇이랴.
그 사건이 있은 후 그는 인생관을 바꿔
언~ 60여 평생을 다 살면서 한번도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은 물론
범법 행위를 일체 하지 않고 살았다고 자부 한다.
그리고 양평의 칠읍산 속에 오두막을 지어 살면서 2004부터
국정원(옛 중앙정보부)을 찾아다니며 세상 어디에도 없던
실체를 인정받았으며 전국 방방곡곡을 찾아다니며
그 당시에(1969~1975) 근무했던 약 200여명의 대원 중 125명을 찾아
국가의 보상(2006년2월8일 특수임무자 보상법 제정)을 받게 하였으며
훈련을 받으며 부상을 입고 불구자로 살아가는 대원들에게 부상 경, 중에 따라
장애 등급을 받게 하였으며 125명 전 대원들에게 국가 유공자를 품위 받게 하였으며
그들의 자녀들을 초등교에서 대학까지 학비를 면제 받는 것은 물론,
해병대 역사에도 기록이 없던 것을 “아! 무적” 이라는 책을 써서
세상에 알리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전국을 다니면서 구술로 전해들은
특수임무자의 이름 약 40쪽 메모지를 년도와 계급, 군번 등을 정리하여
국군 정보사령부와 국정원, 해병대사령부에 재출하여
정식 공문서로서 활용하게 되었던 것이다.
지금 현제 나는 M.I.U 대원들과 “사단법인 무궁화 봉사회” 를 설립하여
전국 방방곡곡에 무궁화 꽂을 심으려 다나며 살고 있다.
이 나라 이 땅에 무궁화를 심는 것은 필생의 사업이며
내가 죽는 날 까지 무궁화 꽃나무 심기는 계속 될 것이다.
첫댓글 패기가넘첬던젊음이 다흘러가고 나이들어 중후한시절은 또의리로 옛대원들찿아 다니며 좋은일하셨군요 존경스럽습니다...........
이질범해병은 253기 저의 동기 입니다, ~~^^ 키도크고 인물도 탈렌트같이 미남형입니다, 동기모임도 나오고 했는데 요즘은 아마 외국 갔나 봅니다,~~^^!@!
이사람! 젊은날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받첬고, 국가의 보상으로 무궁화를 심다가, 또 심다가 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