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를 찾아서] ‘어머니는 내 모든 문학의 메타포’가 아니었습니다.
봄 찾아 길 나섰습니다. 너무
오랫동안 [나무편지]를 띄우지 못했습니다. 아버지 돌아가셨다는 소식 전한 게 12월 초였으니, 넉달이 훌쩍 지났습니다. 모두
안녕하셨지요.
아버지 돌아가신 뒤
서글픈 마음 추스려 늦어도 설날 전에는 다시 나무편지를 띄우겠다고 단단히 마음 먹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설날 가까워 오며 겨울 나무의 안부를
찾아 길 위에 오르려던 즈음, 그러나 나무편지는커녕 겨울 나무의 안부조차 찾아보지 못했습니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고작 두 달밖에 안 된 그때.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 떠난 뒤여서 어머니를 곁에서 모시는 일은 더 애틋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끔씩 최근의 기억들을 내려놓으시기는 했지만, 그렇게 빨리 아버지를 따라 가시리라고는 생각 못했습니다. 그런데 바람 매섭던 어느 날 아침에
갑자기 폐렴 증세를 보이시더니, 눈에 띌 정도로 급격하게 건강이 악화되셨어요. 호흡 보조 마스크를 쓰고 거칠고 힘겨운 숨에 괴로워 하던 어머니는
그날부터 닷새 되던 날 밤 혈압이 빠르게 떨어지셨고, 그 밤을 넘기지 못하고 자정을 넘기면서 차츰 이승에서의 숨을 천천히
거두셨습니다.
잦아드는
어머니의 숨결이 보였습니다. 눈감고 가만히 간난의 세월을 하나 둘 허공으로 날려 보내는 어머니의 손을 꼭 잡고, ‘이제 편안히 가셔도 된다’고
어머니의 귀에 대고 가만히 이야기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살가운 목소리로 어머니의 마지막 남은 청각에 호소했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그래서 평생 그리 간절한 걱정의 대상이기만 했던 아들로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게 전부였습니다. 그야말로 뼈만 남은 앙상한 어머니의 손목에서
전해오는 가늣한 체온은 이내 식어갔고, 마침내 숨결조차 멎었습니다. 생애 내내 한 순간도 내려놓지 않았던 어머니의 세상 걱정도 따라서
멎었습니다. 그게 설 연휴 바로 전날이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를 두 달 사이에 모두 보내드렸습니다. 갑작스러웠던 두 달 전 아버지의 죽음을 바라보면서도 그랬지만, 더 큰 고생 없이 영원한 평안에 드신
것을 오히려 다행스럽다 한 생각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어머니는 어머니였습니다. 장례식장의 분향실에서 어머니의 영정을 홀로 바라보며 숨죽여
흐느껴야 했고, 어머니를 기억하며 눈물 흘리는 누군가와는 부등켜 안고 울었습니다. 떠들썩한 장례식장 안에서도 홀로 있게 되는 시간이면 어김없이
눈물이 흘렀습니다. 아버지 곁에 어머니를 모시고 집으로 돌아왔지만, 평생을 함께 했던 두 분의 빈 자리가 허전해 어질머리가 일었습니다. 내 사는
집이 이토록 텅 비어 허전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그래도
봄이 옵니다. 그래서 봄을 찾아 길 떠났습니다. 가슴 쪽에 가로로 줄무늬가 있는 스웨터를 입고 집을 나서자니, 어릴 때 어머니가 손뜨개로 지어준
주황색 털스웨터가 떠올랐습니다. 가슴께에 가로로 줄을 내고 그 가운데에 토끼 두 마리를 수놓은 겨울 스웨터예요. 토끼 해여서 토끼 두 마리를
새겼다고 하셨어요. 길을 건너려 횡단보도에 서 있는 모르는 한 노인이 눈에 띄자, 그 자리에 서서 학교에서 돌아올 손주를 기다리던 어머니의
구부정한 허리가 또렷하게 보였습니다. 눈 감자 옛날에 화분에 분꽃 피어나는 걸 바라보며 ‘분꽃 피니 저녁할 시간 됐구나’하시던 어머니의 음성이
허공을 치달려 다가옵니다. 어머니는 돌아가셨지만 돌아보니 어머니는 참 많은 곳에 남아있었습니다. 뭘 바라보고 무얼 해도 어머니의 자취를 빼고는
이야기하기 어려운 날들입니다.
너무
오랫동안 그쳤던 [나무편지]를 다시 쓰겠다고 하얀 백지를 꺼내들어도 어머니의 얼굴만 떠올랐습니다. 불과 넉달 전까지만 해도 건너뛸 수 없는
일상이었던 [나무편지] 를 쓰겠다고 마음 단단히 먹어봤자 별무소용이었습니다. 나무를 바라보고 상큼히 불어오는 봄바람에 뺨을 맡겨봐야 어쩔 수
없었습니다. 아무 상관 없는 소설책을 꺼내들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시력이 떨어져 글 보기가 어려웠지만, 아들이 애써 쓴 책이라며 꺼내어 겨우
두어 줄 읽고는 베갯맡에 고이 간직하던 어머니를 제가 어찌 떠올리지 않을 수 있을까요. 세월 지나도 어머니는 오래도록 내 안에 남아있을 겁니다.
역시 ‘엄마는 엄마’였습니다.
어머니
아버지 모두 떠나신 이곳에도 어김없이 봄은 옵니다. 돌담 사이에 무성하게 울타리를 이룬 영춘화 노란 꽃송이들이 이 봄을 슬프게 노래합니다. 바람
찬 겨울부터 피었던 애기동백에도 아직 꽃송이가 남아있습니다. 누구보다 먼저 봄을 알리려 매운 바람 무릅쓰고 피어난 풍년화는 이제 다른 꽃들에게
봄 노래 순서를 넘겨주려 합니다. 새 봄을 더 없이 화려하게 장식할 목련 꽃봉오리들은 일제히 통통한 제 몸을 삐죽거립니다. 숲에서 들려오는 봄
노래를 하냥 바라보고 돌아나오는 길에 화분 판매장을 들렀습니다. 그곳에 아! 제라늄 화분이 있었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한 어머니가 살아계시는
동안 한 순간도 집에 없었던 적이 없는 화분입니다.
어머니는 제라늄을 유난히
좋아하셨습니다. 봄 꽃들의 화창함 앞에 잠시나마 마음을 다스렸나 싶었는데, 다시 제라늄 빨간 꽃 앞에 홀로 서서 다시 또 마음 속으로 울어야
했습니다. 울면서 울면서 큰 소리로 불러 봅니다. ‘엄니!’ ‘엄마!’
어떤 작가의 문장을 베껴서 나도
‘내 모든 문학의 메타포는 어머니’라고 화려하게 쓰려고 했는데……, 그런데…… 그런데 알고보니 내 엄마는 그저 메타포가 아니었습니다. ‘어머니는
내 삶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너무 뒤늦은 깨달음으로 눈물 훔치며 [나무편지]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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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아버지 안 계신 텅 빈 집에서 새 봄을 맞이하며 3월 21일 아침에 ……
솔숲(http://solsup.com)에서 고규홍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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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숲의 나무 이야기]는 2000년 5월부터 나무를 사랑하는 분들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
첫댓글 '분꽃 피니 저녁 할 시간 됐구나~~'
오랜만에 들어봅니다.
모든것에 엄마, 어머니가 함께하지요.
줄무늬 옷을 서술한 대목에 눈물납니다.
고규홍 님을 알지는 못하지만
두달 간격으로 부모님을 떠나보내신 맘이 오죽 허전할까 싶습니다.
두 분의 명복을 빕니다.
그분의 부인이 어진내 님의 친구라고 하더군요.
저도 개인적으로 아는 분은 아니지만 오랫동안 봐 온 분인데 참 착한 분으로 보여요.
어릴 적의 추억은 거의 비슷한 것 같아요.
줄무늬 스웨터의 기억과 친정 마당에 피어있던 함박꽃..
2013년도에 돌아가신 친정어머니가..아직도 보고싶을 때가 많습니다.
영원한 내 편인 엄마가 그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