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영 장대벌은 병인박해 당시 경상 좌수영이 있던 곳으로, 이곳의 관장은 정3품의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약칭 水使)가 그 관장으로서, 예하에 종3품의 첨절제사(僉節制使)가 그 관장인 부산포진(釜山浦鎭), 다대포진(多大浦鎭)을 비롯한 대소의 포진(浦鎭)을 거느리고 있었다. 이곳은 많은 천주교 교인들이 처형당한 순교 현장이기도 하다. 이곳에서는 동래 지역 전교 회장이었던 이정식(李廷植, 1795~1868, 요한), 그의 아들 이월주 프란치스코, 며느리 박조이(朴召史) 마리아, 조카 이삼근 베드로, 조카(혹은 아우) 이관복 야고보, 차장득 프란치스코, 양재현(梁在鉉, 1827~1868, 마르티노), 옥조이(玉召史) 바르바라 등 8명의 천주교인들이 1868년 체포되어 이해 7월 말 군문효수형을 받고 순교한 곳이다.
박해가 진행되는 동안 동래의 회장 이정식 요한은 교우들에게 티를 내지 않도록 당부하고는 위험을 피해 가족들과 함께 기장과 울산 등지로 피신하여 생활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화근이 되었다. 동래 포졸들은 갑자기 없어진 사람들에게 의심을 품고 그들의 종적을 찾는 데 혈안이 되었고, 마침내는 울산에서 이 회장을 비롯하여 아들인 이월주, 박조이 부부 등 일가족 3명과 교우 이삼근, 이관복, 차장득,옥조이를 찾아내고 말았다. 이에 앞서 동래에서는 양재현이 체포되었다.
1868년 9월 20일(음 8월 4일), 동래 옥에 갇혀 있던 증거자 8명은 마침내 참수형 판결을 받고 수영 장대로 끌려 나가 영화로운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 가운데 이 요한 회장의 가족 4명의 시신은 친척들에게 거두어져 부산 가르멜 수녀원 뒷산(동래구 명장동 산96)에 묻혔다가 1977년 9월 17일에는 오륜대 한국 순교자 기념관 구역 내로 옮겨져 안장되었다. 이때 나머지 4명의 순교자는 시신을 찾을 수 없었으므로 기념비만 건립하였다.
이때 처형된 교인들의 목은 장대위에 매달아 두었는데, 이는 사람들에게 경각심과 천주교에 대한 증오심을 갖게 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많은 천주교인들의 처형 장면을 지켜본 사람들이 경탄하여 구전으로 전하는 바에 의하면 “처형을 하는 수영 장교들과 군졸들은 삼엄한 분위기에 위엄을 갖추었지만 사형수들은 마치 잔칫집에 나가는 기쁜 표정으로 순교했다.”고 한다.
이에 광안 본당은 1987년 6월 신자들의 성지 조성 헌금으로 이곳의 땅 1백 61평을 확보하고 이듬해 7월 부산교구 순교자 현양 위원회가 성역화에 착수해 공사를 완공하고 1988년 9월 30일 순교 기념비 제막식 및 현양 미사가 교구장 이갑수 주교에 의해 이루어졌다.
◆ 장대(將臺)벌
장대(將臺)가 있는 벌판이라는 뜻으로, 장대란 지휘관이 올라가서 군사들을 명령하던 돌로 쌓은 대(臺)를 말한다. 조선시대 군영(軍營)에는 연병장 정면에 장대가 있었고 연병장에서는 군사들의 훈련 · 사열 · 열병 이외에 간혹 중죄인에 대한 사형 즉 군문효수가 집행되기도 하였다. 그래서 조선시대 군대가 주둔했던 많은 곳이 장대벌로 불리고 있는데, 울산과 동래의 장대벌은 천주교인들이 처형당한 순교지로 유명하다.
① 울산의 장대벌 : 병인박해를 피해 경주 근처의 진목정(眞木亭)에서 은거하던 허인백, 김종륜, 이양등 등이 1868년 체포되어 군문효수형을 받고 순교한 곳이다. 울산의 장대벌에서 순교한 이들 세 명의 순교자들은 순교 직후 진목정에 안장되었다가 1932년 대구 감천리의 교회 묘지로 이장되었고 1973년 다시 대구 신천동 복자 성당으로 이장되었다.
② 동래의 장대벌 : 병인박해를 피해 울산에서 은거하던 이정식, 이월주(이정식의 아들), 박소사(이관복의 아내), 이삼근(이정식의 처남), 양재현, 이관복, 차장득, 옥소사 등이 1868년 체포되어 이해 8월 군문효수형을 받고 순교한 곳이다. 이곳에서 순교한 8명의 순교자들은 순교 직후 부산 명장동의 야산에 안장되었고, 이들 중 차장득, 양재현, 이월주, 옥소사 등의 유해는 1972년 오륜대 순교자 묘소로 이장되었다.
▒ 피 곱게 흘린다면 (수영 장대벌에서) <김영수> ▒
금련산 밑 장대벌 언덕에서
나는 피빛 밝은 적막에 들어
먼 꿈의 종소리 듣습니다
문득 가슴 서늘히 우거져
무덤들에 그늘 드리우는 아카시아나무
나는 가지 하나 붙잡고
먼지 한 점의 나를 들여다 봅니다
내 이제라도 사랑에다 머리를 받아
피 곱게 흘린다면
나의 어둠도 한 점 향기일 수 있을까요
맨살의 햇살들 맨살의 바람들 사는
여기 눈물 어리는 언덕에서
푸르게 번지는 미소의 하늘 봅니다
끝없이 투명한 숨결 봅니다
■ 순교자
◆ 이정식 요한 (1794-1868년) <하느님의 종 124위>
이정식 요한은 경상도 동래 북문 밖에 살던 사람이었다. 그는 젊었을 때 무과에 급제한 뒤 동래의 장교가 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활 쏘는 법을 가르친 적도 있었다. 그러다가 나이 60세 때 교리를 배워 천주교에 입교한 뒤로는 첩을 내보내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이러한 열심 때문에 요한은 입교한 지 얼마 안 되어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1866년에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가족들과 함께 기장과 경주로 피신하였다가 다시 울산 수박골로 피신하여 교우들과 함께 생활하였다.
1868년 그는 동래 교우들의 문초 과정에서 그 이름이 알려지게 되어 교우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때 이 소식을 들은 그의 아들 이관복(프란치스코)과 조카 이삼근(베드로)은 스스로 포졸들 앞으로 나와 자수하였다. 천주교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문초를 받게 되자, 그는 천주교 신자임을 분명히 하고는 많은 교우들을 가르쳤다는 것도 시인하였다. 문초와 형벌을 받은 뒤 47일 동안 옥에 갇혀 있다가 장대로 압송되었다. 이때 사형을 맡은 군사들이 부자를 한날에 죽이는 것을 꺼려하자, 동래 관장은 동시에 사형을 집행하라고 명령하였다. 삼종 기도를 바치고 십자 성호를 그은 다음에 칼을 받았으니, 그때가 1868년 여름으로, 당시 그의 나이는 75세였다. 순교 후 그의 시신은 가족들에 의해 거두어져 사형장 인근에 안장되었다.
◆ 양재현 마르티노 (1827-1868년) <하느님의 종 124위>
1827년에 태어난 양재현 마르티노는 언제부터인가 경상도 동래의 북문 밖에서 살았다. 그는 동래에서 좌수(坐首)라는 직책을 갖고 있었는데, 어느 날 이정식(요한) 회장을 만나면서 천주교 신앙에 대해 알게 되었고, 이후 그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1868년의 박해 때 체포되어 관장 앞으로 나가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자, 그는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는 형벌을 달게 받았다. 수군의 병영에서도 여전히 굳건하게 신앙을 지키고 옥에 수감되었다. 옥에서 옥졸의 꾀임에 빠져 ‘돈을 주겠다’고 약속한 뒤 몰래 그곳을 빠져 나와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옥졸은 그가 집으로 돌아가자 관장에게 가서 ‘죄수가 몰래 도망쳤다’고 거짓으로 보고하여 다시 동래 관아로 압송되었다. 장대(將臺)에서 십자 성호를 그은 다음에 칼을 받았으니, 그때가 1868년 여름으로, 당시 그의 나이는 42세였다. 순교 후 그의 시신은 가족들에 의해 거두어져 사형장 인근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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