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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암살범 안두희 최후의 육성 녹취록
테러범의 말로는 비참했다.
백범 암살범 안두희.
그가 김구 선생에게 퍼부었던 수발의 총탄은 결국 50여년 뒤 한 시민의 "정의봉"이 되어 그에게 돌아왔다.
지난달 23일 안씨는 버스기사 박기서씨의 몽둥이 세례로 모질던 팔십 평생을 마감했다.
그의 죽음을 두고 사람들은 말한다. "이제야 비극의 역사드라마가 끝났다"고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비극은 아직 막을 내리지 않았다. 등장인물은 사라졌지만 암살극의 연출자가 여전히 역사의 그늘 속에 가려져 있기 때문이다.
최근<일요신문>은 암살의 배후에 대한 안두의씨의 육성고백이 담긴 비공개 비디오 테이프의 녹취록을 입수했다.
이 녹취록은 지난 92년 이른바 "안두희 납치사건" 당시 사건 관련자들이 비디오카메라로 녹화해둔 안씨의 고백 장면을 글로 되살린 것이다. 녹취록 속에서 안씨는 김구 선생 암살 6일 전인 1949년 6월 20일 "경무대에서 이승만 대통령을 만나는 과정"과 "신성모 국방장관에게 격려금을 받은 일" 등을 생생히 증언하고 있어 백범 암살의 배후에 대한 또하나의 논란을 불러 일으킬 것으로 예상된다.
문제의 녹취록은 권중희씨(민족정기구현회, 회장)와 함께 납치 사건을 주도했던 김인수씨가 보관해 온 것으로 A4 용지 47쪽 분량. 김씨는 현재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준비위원장을 맡아 경교장(백범의 처소) 복원운동을 벌이고 있다.
녹취록의 일부 내용은 한때 안씨의 기자회견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기도 했다. 그러나 뒷날 안씨가 "폭력과 강요에 의한 것이었다"며 이를 번복, 지금까지 논란의 대상이 돼왔다. 하지만 이번에 <일요신문>이 안씨의 피납과 입을 열기까지의 모든 과정이 담긴 녹취록을 공개함으로써 그의 고백을 둘러싼 진위 논쟁에 상당한 영향을 끼칠것으로 보인다. 안씨 피납 당시의 정황과 함께 녹취록 전문을 발췌, 요약했다.
지난 92년 9월 23일 새벽 6시께, 안씨가 은둔해 살던 인천 동영아파트에 네 사람의 불청객이 찾아왔다. "안두희의 천적"으로 불리던 권중희씨와 의분에 찬 시민 김인수, 변수환, 신현석씨 등이었다.
안씨를 한적한 곳으로 데려다 암살 배후를 밝히겠다는 게 이들의 계획. 거사는 순식간에 이뤄졌다. 안씨의 동거녀 김명희씨가 운동하러 문밖으로 나오는 사이 권씨 일행은 쏜살같이 집안으로 들이닥쳤다. 동거녀 김씨의 손발을 묶은 일행은 안씨가 자고 있던 방문을 열었다.
잠옷 차림의 안씨는 무표정한 얼굴로 일행을 바라봤다. 안면이 있던 권씨가 먼저 말을 던졌다.
"미안하지만 널 묶을 수밖에 없어, 알았어?"
안씨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았다. 단지 욕실에 있던 틀니를 가져다달라고 요구했을 뿐이다.
권씨 등은 그를 마대 자루 속에 넣어 대기해놓은 승용차에 실었다. 일행이 달려간 곳은 청평 호반이 건너다 보이는 경기도 가평군의 한 호젓한 마을. 동지인 박배규씨의 농장이 있는 곳이었다.
아침 10시쯤 목적지에 도착한 일행은 마대자루에서 안씨를 꺼내 결박을 풀어 줬다. 안씨의 눈은 여전히 검은 천으로 가려진 상태였다. 안씨를 안방에 앉힌 뒤 "신문"이 시작됐다.
권(권중희): 자, 이제 모든 것을 털어놔, 증언을하고 돌아서면 번복하는데 그 이유가 뭐야, 암살의 배후에 대해 아는 데로 실토해,
연이은 다그침에도 안씨는 묵묵부답이었다. 화가 치민 일행 중 하나가 가느다란 막대기로 몇차례 안씨의 무릎 위를 내리 쳤다. 그러나 안씨는 얼굴을 찡그린 채 아무런 얘기도 꺼내려 하지 않았다. 다시 안씨의 뺨을 후려쳤지만 역시 효과가 없었다. 이때 한 사람이 헛간에서 낫을 들고 들어왔다.
김(김인수): 안두희, 네놈이 김구 선생을 암살할 때 방아쇠를 당긴 손가락을 내놔 봐,
안씨가 검지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그의 손가락에 날카로운 낫의 날이 맞닿아 있다.
김: 이게 뭔지 알겠나?
안(안두희): 낫이오.
눈이 가려진 상태에서도 그의 분별력은 정확했다.
김: 이제 더러운 이 손가락을 잘라내겠다. 후회없겠지, 안두희?
안씨는 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서슬퍼런 낫 앞에서 낯빛 하나 바꾸지 않는 그의 배짱에 일행은 질릴 정도였다. 권씨와 김씨는 위협과 강요로는 결코 그를 굴복시킬 수 없음을 직감했다. 두 사람은 베개로 안씨의 등을 받쳐 주고 편안한 자세로 앉게 했다. 또 다시 이어지는 질문. 그러나 여전히 안씨의 입은 무거웠다. 이때부터 안씨에 대한 호칭과 어조도 조금씩 변해간다.
김: 영감, 이제 얼마나 살겠다고 그래, 당신이 무슨 죄가 있어, 죽일 놈들은 뒤에서 시킨 놈들이지, 이제 속시원히 털어 놓고 마지막 남은 인생을 암살범 안두희가 아닌 인간 안두희로서 민족 앞에 떳떳이 살아봐, 그게 당신 스스로 속죄하는 길이 되고 민족과 백범 선생에게 속죄하는 길이야.
안: ........
권: 당신도 지쳤겠지만 나도 지쳤어, 이번엔 내가 죽든 당신이 죽든 마무리를 짓자. 알겠어?
김: 툭 터놓고 진실을 밝히고 나면 권 선생과의 사이도 오히려 가까워지고 당신도 홀가분할 거야.
이 무렵 권씨와 김씨가 안씨의 두 눈을 가렸던 검은 천을 풀어줬다. 너 댓 시간 동안 빛을 못 본 안씨는 서서히 눈을 뜨면서 방 안을 두리번 거렸다.
안: 물 좀 주시오.
안씨의 첫 마디는 힘이 없었다. 이후 권씨와 김씨는 번갈아 쉬어가며 안씨를 신문했다. 알려진 몇 가지 얘기가 오간 끝에 안씨가 입을 열기 시작했다.
안: 경무대에 갔었어.....
순간 누워 있던 김씨가 벌떡 일어 났다.
김: 지금 경무대 얘기가 나왔습니까.
권: 쉽게 털어 놓은 군요.
두 사람의 말투는 어느새 경어로 바뀌어 있었다.
김: 안 선생, 형식을 갖춥시다. 당신의 말이 진실이라면 양심선언을 할 수 있습니까?
안: ..... 하지요.
안씨는 얼굴을 찡그리면서도 결연한 표정으로 짧게 대답했다. 두 사람은 잠시 비디오카메라를 똑바로 세우고 필기구를 준비했다. 김씨가 커피를 끓여 안씨에게 권하자 밝아진 표정으로 잔을 받는다.
안: 여기가 어디요?
김: 임진강 근처 민갑니다.
김씨는 안씨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 몇 분 동안 화제를 낚시 얘기로 돌렸다. 안씨는 젊은 시절의 풍류담을 늘어 놓으며 쉴 새없이 말을 늘어 놓는다. 이때 라디오에서 정오 뉴가 흘러 나왔다. 안씨가 인천 신흥동 자택에서 납치됐다는 보도였다. 그 뉴스를 듣자 안씨가 게면쩍은 듯 말을 꺼냈다.
안: 납치는 무슨 납치야, 내가 경찰서에 전화해서 납치가 아니라고 이야기 하겠소.
권: 그건 안돼요. 우리 소재가 파악되니까. 양심선언이 끝난 뒤에도 늦지 않아요.
권씨가 안씨의 말을 막으면서 노트와 펜을 들었다. 질문을 시작하자 갑자기 안씨가 엉뚱한 얘기를 털어 놓는다.
안: 봄에 사건(권씨등이 안씨의 집으로 찾아가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폭행한 사건)이 있은 뒤 연일 기자들이 찾아 오곤 하니 김명희(동거녀)가 동네 창피하다며 집을 나가든지, 죽든지 하라며 구박이 보통 심한 게 아니었어, 하루는 세 시간 여유를 줄테니 짐 싸서 나가라고 그래, 지금은 별거 아닌 별거중이오, 누구하고 말 한마디 못한 채 몇개월을 그렇게 지내다 보니 입에서 군내가 날 지경이었지, 하루종일 테레비를 보며 미군 방송이 끝날 때까지.... 말할 사람이 그리워지고, 그런데 어제 저녁엔 권 선생이 자꾸 떠오르더군, 근데 새벽에 권선생이 온 것을 보면 무언 가 텔레파시가 통한 것 같아, 허허허.
안씨는 너털 웃음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70대 중반의 노인답지 않게 조리있는 말솜씨였다. 먼저 "양심선언"이 시작됐다.
안: 이제 그동안 밝힐 수 없었던 내가 알고 있는 진실을 양심선언으로 역사와 민족 앞에 밝히고자 합니다.
권: 조금 전 경무대에 갔어다는 데 언제 누구와 무슨일로 갔었는지 기억나는 대로 말해 보시오.
안: 6월 어느날.... 20일이었어 (김구선생이 암살당한 날은 6월 26일) 사령관(장은산포병사령관)의 호출로 그의 방엘 갔더니 한 위관급 장교와 함께 있더군, 그런데 사령관이 젊은 장교 앞에서 굽신거리는 것을 보고 그가 높은 데서 온 장교인 줄 알았지, 참모장(채병덕)이 부른다기에 그가 타고 온 지프를 타고 삼각지 육군 본부로 갔는 데 참모장 방에 들어가니 "북어대가리"도 함께 있더군
김: 잠깐, 북어대가리라니....
안: 신성모 국방장관의 별명이지, 당시 군내에서는 그를 북어대가리라고 불렀어.
김: 계속하세요
안: 참모장과 북어대가리에게 거수경례를 하니 "자네가 관측장교상을 받은 안 소위지"하며 악수를 청하던군, 그들끼리 이런저런 얘기를 하더니 채병덕이 일어서며 "안 소위 경무대 구경이나 갈까"하더군,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북어대가리는 "나도 각하께 보고할 것도 있고 하니 같이 갈까" 하더군, 난 순간적으로 드라마라고 느꼈지, 우연히 경무대 이야기를 꺼낸 것 같지만 미리 각본을 짜놓은 감을 느낄 수 있었어. 그러고 나서 경무대를 향해 출발했지,
김: 그때가 몇 시쯤 됐지요?
안: 한 서너시경 됐을 걸.
권: 경무대에 도착한 다음 이야기를 해보시오.
안: 미리 연락을 받았는지 박 비서가 나와 있더니 곧바로 대통령 집무실로 안내하더군.
김: 경무대를 그렇게 쉽게 들어 가다니 이해가 안 되는 군요.
안씨가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엄지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안: 신성모와 참모장과 함께 들어가는 데 무슨 절차가 있겠어.
김: 한 가지만 더 묻겠는데요. 박아무개 비서의 이름을 말해 줄 수 없나요. 그 당시면 박용만(96년 10월 19일 사망)이 근무할 때가 아닌 가요, 현재 민자당에 있는......
긴장한 두 사람은 집요하게 이 부분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안씨는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대답을 회피했다.
권: 아니 기억이 안난다는 거야, 그렇지 않으면 알고 있으면서도 대답을 못하겠다는 거야.
안씨가 한 숨을 쉬며 두 사람을 쳐다봤다.
권 : 좋소. 그 부분은 나중에 다시 하기로 하고 계속 말해보시오.
안: 집무실에 들어가 이 대통령 앞에서 신 장관이 "각하 이번 사격대회에서 상을 받은 안두희 소위입니다".하고 소개하니 대통령은 내게 악수를 청하며 "으음, 자네가 안 소위인가, 신 장관에게 얘기 많이 들었네" 하시더군.
차를 마신 뒤 20~30분 지나 그곳을 나왔지.
권: 그 자리서 혹시 대통령이 김구 선생과 한독당 얘기를 한 적은 없었소.
안: 전혀 그런 이야기는 듣지 못했지, 집무실을 나올때 거수경례를 하며 인사하니까 대통령이 "높은 사람 시키는 대로 일 잘하고 말 잘 듣게나"하시더군.
안씨는 잠시 허공을 응시하며 한 숨을 내쉬었다.
안: 경무대를 나와서 나는 사령부로 왔지. 그때가 퇴근 무렵이었어, 장 사령관에게 경무대 방문을 보고했더니 그는 빙그레 웃으며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그것봐, 내 말이 맞지"하더군, 백범 암살 계획을 세워놓고 사실 난 고민에 빠져 있었어, 그것을 눈치 챈 사령관은 내게 결행을 촉구하면서 협박과 회유, 심지어 "네가 김구 선생을 암살하려고 한단 것을 세상에 알려서 매장시키겠다고"고 까지 하더군, 내게 뒤가 있다는 것을 확인한 뒤 최종결심을 하게 됐소, 이판사판인 심정에서 값싼 영웅심이 발동되더군.
권: 지난 4월 12일(안씨가 언급한 폭행사건이 일어난 날)에 김창룡에 관해 진술했는데, 자세히 얘기해보시오.
안: 김창룡이 1연대 정보참모 시절 조선호텔 앞 대륙상사라고 위장한 특무대 사무실에서 주로 만났는 데 만날때 마다 그는 "백범은 거목이지만 수많은 빨갱들이 그 밑에 숨어 있다. 그 빨갱이를 일일이 잡아낼 수 없으니 거목이 쓰러지면 자연히 빨갱들이 없어진다"는 말을 했지. 이와 비슷한 말은 장택상, 노덕술 최운하도 했었어, 내가 서청(서북청년단) 총무로 있을 때 수도청장이었던 장택상씨를 자주 찾아갔었지, 내 밑에 있는 애들이 빨갱이 많이 잡느라고 사고를 많이 냈거든, 사람을 다치게 하고 심지어 죽이기 까지 했어, 그 때 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직접 처리해주고 그 이상은 조박사(조병옥)에게 전화를 해 해결해주었어, 서대문형무소에 있던 사형수까지 빼내 썼소.
권 : 사형수라니?
안 : 형무소에 수감된 사형수들이지, 곧 죽을 목숨을 구해주는데 물불 한 가리고 나설 수 밖에..
한 번 말문이 터진 안씨는 묻지도 않은 사실에 대해서도 "고백"을 하기도 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시역의 고민>에 대한 대목이었다. <시역의 고민>은 백범 암살 뒤 그의 이름으로 나온 수기로 안씨의 성장과정과 암살결심 동기 등이 적혀 있다. 안씨는 이 책이 김창룡의 부하와 동향 출신의 특무대 장교가 쓴 타필 자서전이라고 했다.
다시 이어지는 안씨의 이야기
안: 서청 총무로 있을 때 한국말을 잘하는 미군 중령이 찾아왔었어, 자기가 미 정보기관 한국책임자라면서 북에 있는 허가이와 최용건의 동태를 파악해달라고 했고 그뒤에도 정보협조차 반도호텔에서 서너번 더 만났지, 나중에 그가 여순반란사건과 표 소령 월북사건 등에 한독당 개입됐다며 백범을 "블랙타이거"라고 부르면서 백범을 국론분열주의자. 통일의 방해꾼이며 대한민국 발전에 해로운 암적 존재라고 말해 알살에 대한 암시를 주었지.
안씨의 말은 다시 신성모 당시 국방장관에 대한 대목으로 이어졌다. 안씨는 49년 백범 암살 뒤 종신형 선고(3개월 뒤 15년 형으로 감형)를 받았으나 625전쟁으로 군에 복귀, 대위로 제대했다.
안: 부산 피난 시절 이화여대 임시 교사를 마련해주면서 김활란 박사와 알게 됐는데 어느날 김활란 박사의 사무실에서 오라고 전화가 와서 갔더니 북어대가리가 거기에 와 있던군, "그동안 형무소에서 고생 많았어, 수고했네"하는 말과 함께 금일봉을 주었는데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1백만환은 됐던 것 같아.
안씨의 3시간에 걸친 "양심선언"은 이날 오후 3시쯤 끝났다. 홀가분해서인지 안씨는 밝은 표정으로 농담을 하는 등 즐거워 했다. 심지어 자신의 "천적"인 권중희씨를 대변인으로 삼겠다는 얘기까지 나왔다.
사건 다음 날 아침, 권씨 등은 폭행 및 납치 등의 혐의로 경찰에 붙잡혔다. 비슷한 시각, 안씨는 서울 우당기념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자신이 가평의 한 농가에서 고백했던 내용의 일부분을 언론에 공개했다.
하지만 인천의 집으로 돌아간 뒤 무슨 이유에선지 안씨의 태도는 돌변한다. 불과 하룻만에 "양심선언"의 내용을 뒤집는 기자회견을 자청해던 것이다.
"암살의 배후는 없다. 모든 것이 폭력으로 강요된 거싯 진술이었다."
진실을 번복한 안씨는 그로부터 2년 뒤 백범진상규명위원회의 국회 증언대에 섰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그는 "애매모호한 진술을 되풀이 했다.
<업보>는 자식들에게 이어졌다.
생전에 안씨는 백범 암살의 대가로 모두 일곱차례의 "응징"을 당했다. 그때마다 안씨는 거처를 옮기고 가명을 쓰며 추적자들를 피해다녔다. 견디다 못한 그는 한때 미국이민을 추진하기도 했다. 그러나 자신의 이민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지난 77년 부인과 합의 이혼, 가족(3남2녀)들을 모두 미국으로 보냈다. 자신의 업보가 자식들에게 이어지는 것 결코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씨의 가족의 모진 운명은 국경을 달리해도 막을 수 없었다. 미국에 있는 그의 한 아들은 안두희의 자식이란 이유로 파혼의 아픔을 당했던 것을로 알려진다. 결혼 일보직전에 집안내력이 밝혀져 절교를 당했다는것이다.
이 사건은 결국 안씨 가족들 사이에 깊은 감정의 골이 패게 했다. 충격을 받은 안씨는 자살을 결심하기도 했다고 한다. 자식에 부끄러운 아버지와 아버지의 이름을 창피하게 여기는 자식들. 하지만 그들은 어디까지나 한 혈육일 수 밖에 없었다. 한 아들은 안씨에게 간간이 4백~5백 달러의 생활비를 부쳤고 안씨는 그나마 그런 아들이 있는 미국을 동경해왔다. 피살되기 얼마전까지도 그는 미국에 가고 싶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꺼냈다고 한다. 그러나 안씨 생전에 부자의 상봉은 결코 이뤄지지 못했다.
실향민이었던 안씨는 북한에 딸 하나를 남겨둔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그는 딸의 안전을 위해 이 사실을 거의 입밖에 내지 않았다고 한다.
세상과 자식, 양심 이 모든 것으로부터 동떨어져 살아왔기 때문일까. 빈소에서 안씨를 지키는 것은 그 자신의 영정뿐이었다.
*이 기사는 안두희가 사망한 후 보도(1996년 11월 3일 일요신문)되었으며 백범 김구 전집(12권 암살편)에 수록된 내용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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