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심귀명례 보광불, 지심귀명례 보명불, 지심귀명례 보정불…”
경기도 과천역 인근의 한 아파트. 미용실을 운영하는 조용희(55·법명 청정행) 원장의 하루는 새벽 3시에 시작된다. 향 하나 사루어 올린 뒤 지극한 마음으로 드리는 예불의식. 이어 백팔참회문을 읽어나가며 한 배 한 배 정성껏 절을 올린다. 뚝뚝 떨어지는 땀방울, 그 속에서 조 원장은 불보살님들의 명호를 부르며 수많은 생에서 알게 모르게 지었던 죄를 참회하는 것이다.
15년째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천배로 시작하는 조 원장. 그에게 절은 첫 일과이며,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성찰이며, 자신의 깊은 내면과 마주하는 명상이기도 하다.
이런 조 원장이 절을 처음 시작한 것은 새내기 대학생과의 만남에서 비롯됐다. 1994년 봄, 미용실에 앳된 여대생 하나가 찾아왔다. 그를 처음 본 조 원장은 여느 또래의 여대생과는 확연히 다름을 느꼈다. 자그만 체형에 소녀티도 벗지 못했지만 보면 볼수록 산속 계곡물처럼 맑아보였다. 또 문득문득 차돌 같은 강인함이 엿보이더니 나중에는 신비감마저 들었다.
이름이 한경혜라는 그 여대생은 미용실 단골이 됐다. 그리고 머리를 하러 올 때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20살 젊디젊은 그녀가 들려준 얘기는 충격적이었다. 돌이 갓 지나 뇌성마비로 죽음을 선고 받고 시름시름 앓았던 일, 7살 되던 해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찾아갔던 성철 스님이 “네 몸 건사하려거든 매일 천배를 하라”고 당부했던 일, 큰스님과의 약속을 지키려 매일 아픈 몸으로 천배의 약속을 지켜왔던 일들을 담담이 털어놓았다. 조 원장은 절로 뇌성마비가 극복될 수 있다는 점이 놀라웠지만, 가녀린 몸으로 십수 년 째 천배를 해오고 있다는 사실이 더 놀라웠다.
경혜씨는 미용실을 찾을 때마다 조 원장에게 절할 것을 권유했다. 어떤 허약 체질도 건강해질 수 있고, 3년만 절하면 평생 먹고 살 길이 생긴다는 옛 스님들의 말씀도 전했다. 괴로운 일이 줄어드는 것은 물론 어려운 일들도 쉽게 풀릴 거라고도 했다. 처음 반신반의하고 쭈뼛쭈뼛도 했지만 오래지 않아 조 원장은 매일 새벽 백팔배를 시작했다. 예불과 능엄주 독송도 빠지지 않았다.
날이 갈수록 절이 몸에 익었고 몸과 마음은 차분해졌다. 그렇게 3년이 가까워질 무렵 경혜씨가 하루 1만배를 함께 하자고 제안해왔다. 하루 삼천배도 힘든데 어떻게 만배를 한단 말인가? 자신은 그 단계에 이르려면 아직 멀었다며 펄쩍 뛰었다. 그러나 묘하게도 마음 한 구석에선 한 번 해볼까 하는 생각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어린 시절부터 들곤 했던 풀리지 않은 호기심들…, 나는 누구이고, 어디서 생겨나 어디로 가는 존재일까? 1만배에 성공하면 그 오래된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고민을 거듭하던 조 원장은 마침내 도전키로 결심했다. 절 횟수도 백팔배에서 삼백배로, 삼백배에서 오백배로 늘려가며 열심히 준비했다. 그리고 1998년 1월 밤 12시, 1만배 정진에 들어갔다. 서서 합장하고 무릎을 굽히고 머리를 바닥에 댄 채 두 손을 들어 올리는 단순한 동작의 반복. 3~4천배까지는 그런대로 견딜만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모든 육체적 고통을 압축시켜 놓은 듯했다. 온 몸이 당장 부서져나가는 듯 했고 절 한 번 할 때마다 무거운 쌀자루라도 들고 일어나는 듯 버거웠다.
만배에 도전했던 몇몇은 이미 포기했고 그에게도 유혹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그러나 포기하느니 차라리 이 자리에서 죽겠다는 오기 비슷한 것이 솟아났다. 그렇게 7천배 쯤 이르자 육체의 괴로움이 줄어드는 대신 내면의 미묘한 변화가 느껴졌다. 온갖 잡념이 햇볕 아래 이슬처럼 점차 사그라지고 절 자체에 올곧이 집중되는 색다른 체험이었다. 그렇게 고통과 평온의 시간이 반복적으로 흐르고 마침내 20시간 30분 만에 1만배에 이를 수 있었다. 온 몸이 땀으로 뒤범벅되어서야 끝내 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조 원장은 비록 오랜 의문이 풀리지는 않았지만 언젠가는 절을 통해 그 답을 알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몇 달 뒤인 1998년 7월 조 원장은 매일 천배를 시작했다. 아무리 힘들어도 새벽에 일어나 절부터 했으며, 예불을 드리고 능엄주를 외며 자신이 지은 업장에 대해 참회했다. 신기하게도 참회를 하면 할수록 자신의 업장이 수미산 같다는 경전의 말씀이 사실로 와 닿았다. 아주 오래된 기억에서부터 몇 시간 전 손님들과의 사소한 대화에서도 잘못된 행동이 맑은 거울 속처럼 들여다보이며 자신을 아프게 했다.
조 원장은 다시 독한 결심을 했다. 이번에는 하루 1만배를 100일간 해보겠다는 다짐이었다. 첫 하루 1만배를 마친 뒤 종종 1만배를 해왔지만 100일간 지속하는 것은 전혀 차원이 다른 일이었다. 부지런히 서둘러도 하루 20시간 가량 절을 해야 하는 까닭에 잠자는 시간은 기껏해야 3~4시간도 되지 않았다. 그것도 100일씩이나. 때문에 그것은 곧 스스로를 극한의 고통으로 몰아넣는 일임을 의미했다.
조 원장은 탐욕과 분노에 휩쓸리는 자신을 바꾸기 위해선 때론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오듯 인내의 시간이 필연적이라 확신했다. 2000년 9월, 조 원장은 미용실을 잠시 다른 이에게 맡겼다. 그리고 삭발까지 해가며 혹독히 스스로를 담금질하는 1만배 정진에 돌입했다. 조 원장은 촌음을 아껴가며 절에 몰두했다. 힘들수록 천 길 낭떠러지에 선 심정으로 스스로를 다잡았다. 자칫 깜빡 졸거나 조금이라도 게을러진다면 1만배는 불가능했다. 식사도 들이키듯 몇 분 안에 해결하고 물 먹는 시간조차 아껴가며 절을 해나갔다. 고통이 극에 달할 때면 360개의 뼈마디가 부서져 내리고 8만4000개의 털구멍이 모두 곤두서는 듯했다. 그래도 멈출 수는 없었다. 그저 절 한 번에 최선을 다하려 했다. 하지만 그날의 절이 끝났다고 고통이 모두 끝난 것은 아니었다. 3~4시간이라도 잠을 자야 힘이 생겨 다음날 절을 할텐데 밀려오는 육체의 고통으로 도통 잠이 들 수 없었던 것이다.
오로지 오체투지로 반복되는 하루. 때로는 고도의 몰입과 미묘한 체험에 환희심이 솟기도 했지만 결국은 이를 악물고 견뎌야 하는 인고의 시간들이었다. 그렇게 사투를 벌이듯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났으며, 다시 열흘이 지나고 스무날이 흘렀다. 그리고 23일째 되던 날, 조 원장은 1만배 정진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쇠약해진 몸 상태도 그렇지만 이 일을 전해들은 가족들의 걱정을 넘어설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던 것이다.
1만배 23일, 일반인들에게 그것은 경이로운 수치다. 하지만 조 원장에게는 안타까움으로 다가왔다. 처음 뜻한 바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23일간의 절은 조 원장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나아가도록 그를 탈바꿈시켰던 것이다.
매일 새벽 천배를 하고 미용실을 운영했다. 화요일마다 1만배도 하는 틈틈이 오랫동안 적을 두고 있던 방통대학을 서둘러 졸업했다. 그리고 2004년에는 한성대대학원에 입학해 2년 만에 동양의학을 바탕으로 한 모발관리 연구로 석사학위를 취득할 수 있었다.
올해 초 조 원장은 또다시 큰 모험에 뛰어들었다. 동국대 선학과 대학원 박사과정에 입학한 것이다. 불교학을 공부해서 꼭 쓰고 싶은 논문이 있었다. 절이 선(禪)과 맞닿아 있음을 학문적으로 규명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허나 불교에 익숙하다고 해서 불교학까지 익숙할 수는 없다. 생소한 언어와 난해한 문헌들. 그것은 처음 절과 마주했을 때의 두려움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절 한번이 모여 천배와 만배에 이르듯 하나의 개념과 문장을 익히다 보면 그 막막함과 두려움 또한 넘어설 수 있으리라 그는 확신한다.
때로는 하기 싫어도 억지로 참고 하는 것이 기도이고 수행이라고 말하는 조 원장. 그에게 수행은 어제보다 나은 오늘을 만드는 일이며 스스로의 삶을 다스려 자유에 이르는 길이기도 하다. 조 원장은 “바닷물을 바가지로 퍼내듯 꾸준히 정진해나갈 때 수많은 윤회 속에서 지어온 업장을 녹일 수 있으며, 참다운 삶의 가치와 행복도 발견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출처 - 법보신문 이재형기자 / 아비라카페 알맹이찾기)
첫댓글 2014.6.13
나모 땃서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 삼붇닷서! 존귀하신분, 공뱡받아 마땅하신분, 바르게 깨달으신 그분께 귀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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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대단하시네요
관세음보살_()()()_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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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감사합니다. 나무 아미타불_()_
존경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