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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문예중앙》신인문학상 당선작 _ 김해준
한 뼘의 해안선 (외 6편)
김해준
마른 국화를 태워 연기를 풀어놓는다. 꽃잎이 불씨를 타고 오그라든다. 별들로 판서된 역사가 쇠락한 하늘 아래, 야경꾼의 홍채에선 달이 곪아간다. 통금의 한계에 닿아 부서지는 경탁 소리가 시리다. 첫 기제의 밤이 젖어간다.
된서리 맞고 실밥 모양으로 주춤주춤 경계를 얼려가던 복부에서 비린내가 터져 나온다. 절개했던 자리가 하얗게 번뜩인다. 새어머니는 훗배앓이 중이다. 뻘에서 태어난 입술에서 고동 소리가 샌다. 물려받은 반지의 녹이 지난 맹세로 생식한다.
태어난 해안에서 침몰해가는 유년. 바리캉으로 밀어낸 태모가 이방에 닿아 바람으로 분다. 가마의 계절풍은 성장을 멈추고, 내가 가졌던 땅을 만조로 삼키는 병풍이 펼쳐진다.
유폐했던 이름이 글썽이며 타들어간다. 문간에서 날린 살비듬이 어떤 풍향을 탔는지 나는 모른다. 술잔에 내린 테를 삼켜 캄캄한 바다. 두 명의 어머니가 같은 연안에 이불을 깐다. 해진 안감에 귀를 묻고 손금이 크는 소리를 듣는다. 빛과 어둠이 범벅된 하늘이 몸 안으로 새어든다.
상처
옥탑은 섬이다. 주민들은 난간을 경계로 마주한다.
달은 집열등이 되어 고향이 그리운 사람의 눈을 빼앗고
이사 온 중국인 부부는 체위를 바꿔가며 그림자극을 한다.
곪은 달이 빠져나왔다 모낭을 찢고 완숙이 된 염증 주위로 구름이 멍들었다 대기가 천천히 말라 벼락을 뿌렸다 젖은 땅에서 풍장 냄새가 났다 어둠이 썩고 나자 짐승들이 눈을 떴다 가문 사회에 촉을 틔우는 눈알들, 몇몇 고양이가 보호색을 입고 하얀 발로 달을 만졌다 묽어진 빛이 눈가에 번졌다 통증이 천천히 실핏줄을 점거했다 충혈된 뿌리에 감긴 사물들이 선명해졌다 천공에 상처가 덧씌워지고 덜 여문 달은 새로운 무늬를 몸에 새겼다 헌 달은 부스러져가는 순간에도 땅에 그림자 묘석을 올렸다 싸르륵 잔상이 퇴적했다 얇은 일력의 페이지 밑으로 다음 날이 비쳤다 여태 찢어버렸던 지평선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가장 깊은 곳에 도달한 상처는 어제의 나이테를 둘렀다 과거가 간절한 이들은 제 흉곽에 상처를 심는다
그믐밤
투계 한 쌍이 그림자를 섞는다. 허블렌즈 속 투기장에서 피를 흩뿌린다. 깃은 성운의 성분으로 붉게 물든다. 부리를 견주던 우주 하나가 저문다. 왼쪽 얼굴이 사라진 닭이 죽은 닭을 지나 주인 쪽으로 걷는다. 깨진 온도계가 된 눈 속에서 인간들의 표정이 녹아간다. 시야가 목뼈 아래로 흘러내린다. 발자국이 유리 파편으로 흩어진다. 울음만 따로 모여 개의 어금니에서 부서진다.
장부에 걸린 머리들, 무제 노트는 말간 작두다. 닭은 무당 옷을 입고 죽는다. 털을 뽑아내면 소복 차림으로 상례를 갖춘다. 살로 제찬을 펴고 뼈로 육장을 끓인다. 볏은 사형수의 명찰로 질기기만 하다. 돈 잃은 자는 땅에 담배를 비벼 끄고 장부에 지장을 찍는다. 잘린 목이 줄줄이 효시된다. 맹세를 처형당한 남자는 엄지를 자른 기억으로 고기를 정리한다. 살기 위해 쾅쾅 닫았던 울음이 필요 없어진다.
숫돌이 둥근 눈썹으로 웃는다. 날의 눈초리가 날카로워진다. 물의 낯빛이 붉어질 때까지 뻔뻔하게 전희를 한다. 남자는 한월에 칼을 말리고 숨소리를 듣는다. 날 위로 얇은 얼음이 언다. 비명이 잠시 쉬어간다. 절명을 발음하기 위해 잡육이 쌓인 구덩이의 목울대는 깊어진다. 몇 마리의 닭이 죽음을 예감하고 헛웃음을 친다.
비몽(悲夢)
발톱을 깎으며 티눈이 육신의 얼룩이었음을 안다. 양말 속에서 꼼지락거렸을 피스톤에 유년과 초야의 감정이 번져 있다. 휘발성 기억이 말초에서 지독한 촉을 틔웠다. 바람의 가지를 탄 냄새가 밀실에서 무성해졌다. 작업을 끝낸 인부들이 서로의 코골이를 피해 발과 얼굴을 마주하는 밤. 주머니 속에서 꺼낸 임금봉투에는 새로 산 팬티물이 옮아 있었다. 전표에 뻗은 숫자는 등록금을 막을 방벽이다. 결국 담을 밟고 이동하는 고양이의 보폭으로 계절을 뛰어넘으며 노동을 했다. 그해 나는 동공의 우산을 접고 뱀눈 뜨는 법을 배웠다. 암굴에서 시간 버리는 연습을 했다. 스스로 껴안고 잠든 밤마다 고양이를 삼킨 구렁이가 되어 오랫동안 악재를 소화했다. 소변을 누며 옛 꿈을 꾸었고, 좌변기에 뜬 얼굴을 달로 보는 밤이 잦아졌다. 굳은살이 손금을 막아 운수가 나빠졌지만 삽질을 멈추는 날이 없었다.
요질(腰絰)
들보를 꺾기 위해 숨을 참는다. 맥박이 등골을 지나 열어놓은 지붕 밖을 흔들어놓는다. 빛이 연목을 조르고 있다. 단단한 기합으로 인부들의 팔심까지 그림자가 뻗친다. 낯살을 드러낸 기둥이 흙을 토해낸다. 아랫목의 때가 푸주만치 비리다. 무너진 채 마룻대를 떠받든 기둥이 냄새를 맡고 이빨을 드러낸다. 묵었던 먼지가 허공에 핏발을 세운다. 기울어진 추녀에서 그랭이 뜬 줏대까지 한 번에 무너질 참이다. 만 갈래로 찢어진 장력이 손안에서 부들거린다. 태양이 파먹은 중추가 눈앞에서 휘어진다. 부연이 날개를 접으며 심장까지 신호를 낸다. 땅을 박차 일 합에 허리를, 이 합에 숨을 끊는다. 땅이 울리고 하늘이 천장을 떠나 날아오른다. 허물어져 꽃피운 폐허. 백 년을 산 굴참나무가 잎을 버리고 탯줄로 남았다. 극락조 몇 마리가 터를 둥지로 보고 앉았다 간다. 손끝을 떠난 힘이 난각 깨는 소리로 들썩인다. 뜰이 바람을 입고 세간 냄새를 버리던 찰나, 뱀 머리 모양으로 매듭진 밧줄이 틈을 미끄러져 나온다. 아가리에 물린 목질이 쌍꺼풀을 뜨고 빈터를 응시한다.
안마사
—백안 속 실핏줄의 고도가 가파르다 농담이 깊으나 맺히는 상은 없다 동공을 덮은 구름은 바람을 타며 흰 촛농으로 굳어간다 멀리서 태양이 꺼지고 기억으로 응고한 연못 두 개가 허공을 담아 소금밭이 된다 악몽에서 태어난 비문(飛蚊)이 나락으로 회귀하려 여자의 눈꺼풀을 간질인다
암실의 벽은 서로의 평행마다 같은 자성을 띠고 대칭한다. 어둠 속에서 벽과 벽은 서로 멀어진다. 몸의 터럭이 쇳가루로 일어선다. 감광이 안마사의 등 뒤에 곰팡이로 슬어 착상한다. 몸이 문과 일식을 하며 실루엣을 팽창시킨다. 방이 그림자의 장기가 된다. 비림과 축축함이 죽은 전등을 중심으로 퍼져나간다.
바람벽 너머는 이국이다. 팔에 우거진 핏줄이 철책이 되어 여자를 가둔다. 유년의 기억을 고열로 날리고 잿빛 머리카락을 바람 부는 쪽으로 쓸어내린다. 벽을 두고 내왕하는 흐느낌에는 적이 없다.
안마사는 눈을 감는다. 꿈과의 경계를 눈꺼풀로 잠근다. 동공을 두레박으로 심연 끝까지 내려본다. 눈물이 머리를 밀며 피부 속으로 스며든다. 우글우글한 슬픔이 얼굴 밖으로 돋는다. 살마다 세로로 뜯어진 눈이 차가운 굴속에서 깜박거린다. 입 벌린 뱀을 닮은 생식기, 독에서 잉태된 아이들이 피임기구 안에서 목을 매단다. 습(襲)할 몸도 없이 무색으로 일렁이는 공중을 적소로 삼는다.
향초를 손가락으로 비벼 끈다. 시간의 속눈썹은 뜨겁고 계면을 넘어선 이는 꿈에서 멀어진다.
소립자들
척수로부터 올라온 감각이 뇌에서 구름으로 맺힌다. 사람마다 다른 억양으로 구부러진 연한 살덩어리. 혀와 뇌가 같은 재질임을 안다. 흉곽 쪽으로 쓸어놓은 언어가 진창이다.
허기에 눈 밟는 소리가 난다. 심장이 품을 두드리며 죽음 앞을 서성일 때, 등은 내가 지나온 시간과 공간의 끝에서 골목을 사수한다.
눈앞에는 과거를 포장했던 껍질만 남는다. 뇌는 적막할 때만 그 시절을 핥는다. 울음과 걸음이 비례하는 동물 신발을 신고 방금 내린 눈에 발자국을 새긴다.
폐기종 선고를 받고 만성이라는 성질을 얻는다. 나의 재질은 이미 그림자였으니 햇볕으로 얼굴을 씻어도 그늘만 농염해질 뿐이다. 가슴을 훑고 간 엑스선에는 옛 연인의 실루엣만 기록되었고 나는 그녀의 얼굴을 떠올리지 못한다.
기억이 영하로 내려가자 뇌는 두개골 벽면을 샅샅이 긁어놓는다. 나는 기낭이 되어버린 폐를 위해 손가락을 불쏘시개 삼아 자판을 두드린다. 그을린 단어 몇 개가 자모로 갈라져 부서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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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선작 10 편이 모두 발표됐지만 그 중에서 여기 7편만 소개합니다.
▲ 김해준 / 1985년 출생. 2011년 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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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권혁웅
모든 예술이 다 그렇겠지만, 시에서도 누구를 아버지와 어머니로 두느냐에 따라 출발이 꽤나 달라질 수 있다. 어려운 일을 겪을 때마다 우리는 어머니에게 돌아가지만 아버지는 대개 극복의 대상이 된다. 이게 다 아버지를 잘못 만난 탓이야! 하버드대 나온 사람까지 이런 소릴 하는 걸 보면 남의 아버지는 커 보이고 제 아버지는 작아 보이는 것도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아버지는 내 시의 대략의 생김을 지금처럼 만든 장본인이다. 몇 년 전부터 조금씩 응모작들이 섬기는 아버지가 달라지고 있다는 것은 신인상 심사에서 공통적으로 관찰되는 현상이다. 응모작들에서 이른바 신춘문예형 규격화가 사라지고 그 자리를 젊은 시인들의 감각적이고 사변적이고 열정적인 진술들이 채워나가고 있다. 응모작을 보내는 이들의 나이는 일정한데 모두가 나이를 먹으니 젊은 아버지들이 새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삼촌이나 할아버지들은 걱정이 많겠지만 사실 이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우려할 일도, 장려할 일도 아니고 그저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시적 공감의 변화다. 이번 문예중앙 신인문학상 응모작들의 경우에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심사에 임하면서 제일 염두에 두는 것은 개별 응모자의 문장 운용 능력이다. 모든 시의 기본은 문장력이다. 생각이 단조로우면 어휘의 범위가 좁고 감각이 거칠면 쓰는 문형이 제한된다. 문장의 차원에서 독자의 눈을 잡지 못하는 글은 대개 현학으로 사고의 빈약함을 가리거나, 말의 쇄말에 기대어 느낌의 조야함을 감추려 든다. 문장 단위로 사고하고 쓸 필요가 있음을 힘주어 강조하고 싶다. 그 결과로 다섯 응모자가 남았다. 추미선의 「화성에서 만나」외 11편은 시편마다 그 시를 시작하게 만든 시적인 핵심 하나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그것이 개별 시편으로 풀려나올 때에 평준화되곤 했다. A4용지 한 장을 가득 채우는 시들이라면 어딘가 과잉이 있게 마련이라는 것을 유념해주셨으면 한다. 김복희의 「사랑하는 내가」외 12편은 매력적이고 경쾌했지만 시가 구축된 공간이 진공에 가까웠다. 내 말을 메아리만 받는다면 쉽게 지치게 된다. 뒤로 갈수록 시가 일기에 가까워지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내 시에 타인들을 더 많이 초대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안희연의 「개에게서 소년에게」외 9편은 많은 젊은 아버지들을 이어받았지만, 그들을 무대 위의 배우로만 대하고 있었다. 발언을 시키고 동작을 지정하지만, 거기에 시인 자신의 정념을 싣는 데에는 인색했다는 뜻이다. 문장의 불필요한 반복이 잦은 것도 그 말 뒤에 숨고 싶은 욕망 때문일 것이다. 조금 더 용기를 내도 좋을 거라고 생각한다.
서종현의 「Neverland Neverending」외 9편을 두고는 오래 논의했다. 동화적 소재의 알레고리적 활용은 최근의 클리셰 가운데 하나지만, 이 응모자의 발랄한 언어에는 그것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있었다. 문제는 그 언어가 일상의 대상에서도 똑같이 발현되어야 한다는 점인데, 장애물달리기로 치자면 그 마지막 허들을 넘지 못했다. 이 점에서 마지막 두 편(「피곤한 거리」, 「자화상」)은 이 응모자의 약점이자 도전이 되기도 할 것이다.
이렇게 해서 김해준의 「한 뼘의 해안선」이 남았다. 무엇보다도 문면에 떠오른 문장들이 하와이의 해안선을 말아오는 파도들처럼 읽는 이를 계속해서 압도하고 있었다. 이 응모자는 세계란 무엇보다도 그 개별적인 문장으로 번역되는 것임을 알고 있었고, 세계를 다 번역하고야 말겠다는 결기도 품고 있었다. 설명에 대한 지나친 욕구가 너무 많은 복문을 낳고 있다는 점만 주의한다면 앞길을 기대해도 좋을 것이라 믿는다. 좋은 후배시인을 만나게 되어 기쁘다. 당선을 축하한다.
조강석
전체적으로 응모작들의 수준이 고르고 높았다. 이런 표현이 어떨지 모르겠지만 소위 아마추어리즘을 드러내는 작품들은 많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이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의 기준에 거는 기대치의 반영인지, 여러 정황상 시기적으로 적절한 것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저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작품의 세세한 결을 헤아려보기 전에 한쪽에 밀어놓는 작품의 수는 많지 않았다. 그러나 물론 이것이 바로 당선권에 드는 작품들이 많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균일하게 평균적인 것의 지루함에도 우리가 견뎌야 하는 일 중의 하나였다는 것을 말해둘 필요는 있겠다. 미달은 적지만 질적 수준에 있어 표준편차 안에 드는 작품들이 대부분인 것이 문학적으로 좋은 현상인지는 모르겠다. 훈련을 받은 이들이 쓰는 작품이라는 것을 대번 알게 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각별히 뛰어나거나 개성적인 작품들은 역시 드물게 마련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눈에 띄는 작품이 있었고 결국 끝까지 그 작품을 손에 들고 있었다는 것은 행운이었다.
작품들을 일독한 후에 일차적으로 김해준, 서종현, 안희연, 김복희, 추미선의 작품들을 추려냈다. 이 가운데 안희연, 김복희, 추미선의 작품들은 고유의 장점들을 지니고 있지만 당선권에 들기에는 단점 역시 명백했다. 추미선의 작품은 단정했지만 사태를 파악하는 감성의 폭이 좁았고 표현이 평균적이었다. 김복희의 작품은 착상이 기발했지만 개별 작품의 이미지들이 다소 도식적으로 파생되었다. 문장은 날래고 이미지는 무거운 편에 속하는 시였다. 안희연의 작품은 대상에 대해 집요하게 파고드는 장점을 가지고 있지만 다소 번쇄한 느낌을 주었다. 설명적 진술을 줄이고 조금 더 압축적으로 정돈된다면 더 나은 시가 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선작과 함께 마지막까지 들고 있었던 것은 서종현의 작품이다. 동화를 차용하되 상투적인 방식이 아니라 개성적인 방식으로 자기 세계를 만든 것은 돋보였다. 문제는 이와는 다른 계열의 시에 상투적인 표현들이 종종 눈에 띈다는 것이었다. 예컨대 “시간의 피곤에 사로잡혀 바라보는”과 같은 구절을 오래 생각해보기 바란다.
김해준의 작품을 두고 심사위원들은 잠시 망설였다. 처음부터 가장 눈에 띄는 작품들임은 틀림없었다. 하나의 사태를 풍부하고 적실한 이미지로 다채롭게 풀어내는 능력이 발군이었다. 사태를 집요하게 관찰하는 사유와 이를 유연하게 이야기로 풀어내는 기량 역시 신뢰할 만한 것이었다. 다만, 간혹 눈에 띄는 어색한 문장들을 새로운 에너지의 질료로 인정해줄 것인가, 아니면 훈련 부족의 증거로 삼을 것인가를 두고 잠깐 숨을 골랐다. 그리고 그 작품을 골랐다. 무엇보다 다채로운 이미지들이 신선했고 진술이 과장됨 없이 패기에 차 있기 때문이었다. 이럴 때 쓰라고 있는 말이 ‘가능성’이다. 기대된다. 파이팅!
—《문예중앙》2012년 봄호
첫댓글 한 뼘의 해안선; 4연; 혹시 '유쾌했던 이름이'이 '유폐했던 이름이 글썽이며 타들어간다' 아닐까요?
그게 맞습니다. 그렇게 정정합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