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진신사리 112과를 모신 축서사
(2013. 6. 2)

경북 봉화 출신 지인에게 축서사를 소개 받고 가는 길은 가팔랐다.
부석사는 운전자가 눈치채지 못할 정도의 오름임에 반해 축서사 가는 길은
충주 소태 청량사나 봉화 각화사의 그것보다 길고 더 노골적인 된비알이었다.

차도 힘겨워하는 언덕을 올라 도착하고서야 이렇게 큰 절집이 산 속 깊숙히 자리하고 있슴에 놀랐다.
그동안 부석사와 각화사를 몇 번씩이나 다녔었는데 그 중간쯤에 위치하고 있으면서 규모도 상당히
큰 절인 각화사를 모르고 그냥 지나쳤다는게 그동안 여행꽤나 다녔다는 나로서도 의아했다.

보탑성전
축서사는 조선 말에 큰 화재로 대부분의 건물이 소실되어 현재 한창 중창불사가 진행 중인데
새로이 건축한 보탑성전과 범종각, 사리탑 등의 규모에서 절의 세를 느낄 수 있었다.

보탑성전의 뒷 모습
보탑성전의 가운데 통로를 이용하여 대웅전에 이르게 되어 있었다.

사리탑
탑과 전각들을 규모를 카우고 새로 짓다보니 산사 특유의 고졸한 맛을 느낄 수는 없지만
섬세한 조각 솜씨를 발휘했슴을 볼 수는 있었다. (컴퓨터를 이용했는지는 모르겠다.)


축서사라는 뜻은 독수리 축, 깃들 서 즉, 독수리가 사는 절이라는 뜻으로 예부터
독수리는 지혜를 뜻했으니 곧 큰 지혜를 가진 문수보살이 계신 절이라는 의미란다.
한편으로는 뒤에 있는 험준한 문수산의 산세가 풍수지리학상
독수리 형국이어서 축서사라 이름 붙였다는 설도 있다고 한다.

축서사는 신라 제 30대 문무왕 13년(서기 673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한 절이다.
대개의 큰 절들이 갖고 있는 창건설화를 축서사 역시 가지고 있는데 옛날 문수산 아래 지림사라는
절의 스님이 어느날 밤 지금의 개단초등학교 앞산을 바라보니 휘황찬란한 빛이 발산되고 있었다.
스님이 광채가 나는 곳으로 달려 갔더니 한 동자가 잘 조성된 불상 앞에서 절을 하고 있었다.
얼마 후 그 동자는 청량산 문수보살이라며 구름을 타고 사라져 버렸고 불상만 남았다고 한다.
훗날 이 소식을 들은 의상대사가 불상을 모실 곳을 찾아 다니다가
현재의 대웅전 터에 법당을 짓고 불상을 모셔서 축서사가 세워졌으며
마침 이 때 문수보살이 출현하셨기에 산 이름도 문수산으로 지었다고 한다.

안양원

범종각

사리탑 옆 대웅전으로 가는 길을 스님이 쓸었는지 솜씨가 대단하시다.
5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인데 절을 찾는 이가 없어서일까?
아니면 스님의 빗자루 솜씨가 탁월해서일까?
해질녁인데도 빗자루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대웅전

대웅전에는 조선 영조 44년(1768년)에 조성된 괘불탱화(보물 제 1379호)가 있다.


네 개의 문이 있는데 문살의 모양이 제각기 모두 다르게 조각되어 이채로웠다.

보광전
보광전에는 석조비로자나불상과 후광배(보물 제 995호)가 있다.

석등(고려 초기)
이날 축서사에 답사를 간 이유 중 하나는 부석사의 무량수전 앞의 석등에서처럼
석등 사이로 지는 해의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해서 갔었다.
그런데 해가 떨어지는 각을 보니 여름에는 어렵겠고 한겨울에나 가능하게 보였다.



문수산은 높이가 1206m이고 문수산의 중턱에 위치한 축서사는 해발 8백m쯤에 위치하고 있으니
백두대간을 바라보는 조망은 부석사의 그것과 비교해도 결코 뒤지지 않은 만큼 장쾌했다.
다만 멋진 전망에 비해 고찰의 고졸함이 없슴이 아쉬울 따름일 뿐이었다.

개인적으로 종교가 번성하고 교회나 사찰이 비대해지는 것을 그닥 탐탁하게 여기지는 않기에
냉소적인 눈길로 볼 수 밖에 없지만 축서사에 바란다면 비록 산 속 깊이 위치하고 있지만
장쾌한 정신세계로 교조적인 말씀에서 탈피하여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인 민생의 어려움
즉, 인간의 상처를 치유해주고 아픔을 보듬어주며 아래로 향하고 행동하기를 기원해 본다.

이 날 대기업을 정년퇴직하고 개인택시기사로 일하는 분과 우연히 얘길 나눴는데
한 달에 두 번 정도 분당에서 손님을 모시고 축서사에 오신다고 했다.
그 기사분이 강권하다시피해서 절에서 저녁공양을 함께 하게 됐는데
신자도 아니면서 한끼를 얻어 먹는 것처럼 여겨져서 궁색하고 염치 없었다.
첫댓글 좋은 자료 감사히 담아갑니다
건안 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