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景福34 제70차 文化遺産踏査; 國立民俗博物館-宗親府(4-3)
國立民俗博物館(3-3)
(98) 서화(書畵). 두루마리지[色間紙]-경원서법(經畹書法)-서첩(書帖)-매산집(梅山集)-
산수화(山水畵) (왼쪽부터, 산수화는 왼쪽 뒤)
조선시대 兩班 士大夫들은 학문적 修養을 통해 官職에 나가는 것을 出世로 여길 뿐만 아니라
詩∙書∙畵 모두에 能한 것을 최고의 재주로 여겼다. 사대부들은 종종 일상생활에서 벗어나
경치 좋은 곳에서 서로 글을 주고받거나 그림을 감상하면서 서로의 技倆을 겨루었으며,
이런 모임을 기념하여 書畵帖을 남기기도 했다. (*倆: 재주 량)
=두루마리지: 편지나 글을 쓸 때 필요한 만큼 잘라 쓰는 두루마리 종이
=經畹書法: 經踠 趙秀三(1762~1849)이 書法과 書體에 대해 설명한 책 (*畹: 밭 면적단위 원)
=서첩(書帖): 東國眞體를 완성한 圓嶠 李匡師의 글씨를 모아 엮은 책. (*嶠: 산 쭈뼛할 교)
=매산집(梅山集): 조선 후기의 文臣 梅山 洪直弼의 詩文集으로, 梅山 死後 任憲晦 등
제자들이 편집하여 高宗 3년(1866)에 편집∙간행하였다. (*晦: 그믐 회)
=산수화(山水畵): 조선 중기의 文人畵家 金禔(1524~1593)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산수화로, 江을 끼고 있는 바위산을 배경으로 집과 사람들을 그렸다. (*禔: 복 시)
(99) 가야금(伽倻琴) -조선후기
삼국시대 이전부터 전해오는 12줄의 絃樂器로, 소리가 말고 우아하여 雅樂과 民俗樂에
널리 사용되었으며, 19세기 이후 사랑방의 風流는 물론 器樂獨奏音樂(散調)을 대표하는
현악기가 되었다.
(100) 소금(小芩)-퉁소[洞簫]-중금(中芩)-대금(산조용)(大芩) (앞에서부터) (*芩: 풀 이름 금)
*小芩: 관악기 중 가장 높고 맑은 音色을 지니고 있는 가로로 부는 管樂器.
*퉁소: 세로로 부는 악기로 현재 북청사자놀음의 반주악기로 사용한다.
*中芩: 대금보다 약간 작으며 청공이 없는 것이 대금과 다르다.
*大芩: 본래 신라 三竹의 하나로, 젓대라고도 하는 한국의 대표적인 橫笛으로 대나무관에
吹口(입김을 불어 놓는 구멍) 1개, 淸孔(얇은 갈대 속막을 붙이는 구멍) 1개,
指孔(손가락으로 막고 여는 구멍) 6개가 있으며 지공 아래에는 음높이를 조절하기
위한 七星孔으로 이루어져 있다.
(101) 놀이. 쌍륙(雙六)-장기(將棋)-바둑[圍棋]
조선시대 양반 士大夫들은 일상생활에서 벗어나 自然 속에서 놀이를 하며 즐겼다.
사랑방이나 경치 좋은 亭子 또는 野外에서는 바둑, 장기, 쌍륙놀이 등으로 여가를 즐기고,
산과 들에서는 활 쏘기로 心身을 단련하였다.
=쌍륙: 주사위를 던져서 나온 수만큼 말을 진행시켜 敵陣에 먼저 들어가면 이기는 놀이로,
주사위를 던져 나오는 눈이 6∙6이면 반드시 이긴다고 ‘雙六’이라고 한다.
=장기: 두 사람이 장기 알을 번갈아 두면서 勝負를 가리는 전통놀이.
=바둑: 두 사람이 바둑판 위에 함 점씩 번갈아 놓고 집 수효를 계산하여 승부를 겨루는 놀이.
(102) [悅雲亭] 편액
扁額은 건물이름을 널판지나 비단 또는 종이에 써 문 위에 거는 액자이다.
‘悅雲亭(열운정)’은 ‘구름을 즐길만한 정자’를 뜻하며, 조선시대 士大夫들은 아름다운
樓亭(樓閣과 亭子)을 짓고 거기에서 風流를 즐겼다.
松江 鄭澈은 ‘悅雲亭’이라는 詩를 남겼다.
人皆登此亭(인개등차정) / 사람들 모두 이 정자에 오르는데
悅雲不悅酒(열운불열주) / 구름만 즐기고 술은 즐기지 않네
好惡萬不同(호오만부동) / 좋아하고 싫어함이 사람마다 다르지만
悅酒吾與主(열주오여주) / 술을 즐기는 사람은 나와 주인뿐일세
(103) 한약방
醫員이 藥物과 鍼灸術로 환자를 치료하는 醫院 겸 藥房이다.
<鄕藥集成方>과 <東醫寶鑑>이 보급되고 鍼灸術의 발달과 함께 사람의 體質을 네 가지로
분류한 ‘四象體質醫學’이 나와 우리의 독자적인 醫術로 한약방을 운영하기도 했다.
(*鍼: 침 침 *灸: 뜸 구)
(104) 동의보감(東醫寶鑑) -국보 319호(사본)-
龜岩 許浚(1539∼1615)이 光海君 2년(1610)에 朝鮮과 中國에 유통되던 醫書와
臨床醫學的 체험을 통한 치료법을 엮어놓은 우리나라 최고의 韓醫書이다.
*내용은 目錄 2권, 內景」4권 26조, 外形篇 4권 26조, 雜病篇 11권 38조, 湯液篇3권 17조,
鍼灸篇1권 1조 등 모두 25권 108조목으로 구성되었으며, 내경, 외형, 잡병, 탕액,
침구 등의 5大綱을 기준으로 각기 細部로 분류한 다음 해당되는 병의 이론, 처방, 출전을
밝혀놓았다.
東醫寶鑑은 朝鮮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 등에도 광범위하게 유포되었는데 明末∙清初에
중국으로 유출되어 중국에서는 乾隆 28년(1763)이후 수 차례 간행되었다.
일본에서도 享保 9년(1724)京都書林에서 처음 간행된 이후 1799년에는 大坂書林에서
再版本이 간행되는 등 <동의보감>은 東洋醫學의 필독서가 되었다.
<東醫寶鑑>은 1991년 오대산사고본, 2008년 적상산사고본과 태백산사고본이 보물로
지정되었다가 2015년 五臺山史庫本(국보 319-1호), 赤裳山史庫本(국보 319-2호),
太白山史庫本(국보 319-3호) (2015.06.22)이 각각 國寶로 승격∙지정되었다.
오대산사고본과 적성산사고본은 2009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105) 침구도(鍼灸圖) 중 圖說 부분을 본떠 만든 인형
宣祖 33년(1600) 西厓 柳成龍이 <醫學入門)> 鍼灸編에서 발췌∙저술한
<鍼灸要訣> 가운데 圖說부분을 본떠 만든 인형이다.
人體와 그 안에 經絡 14개와 經穴 365개를 넣어 그린 圖說부분으로
韓醫師가 鍼術을 익히는데 중요한 敎本이 되었다. (*訣: 이별할 결)
(106) 약 저울[藥秤) -1920년대 (*秤: 저울 칭)
(107) 약연(藥硏) -조선 후기
藥材를 곱게 빻거나 갈 때 쓰는 기구.
(108)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
天文地理 교육: 조선시대에는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돌므로 天圓地方으로
여겨, 하늘을 이해하기 위하여 渾天儀를 만들어 天體의 운행이치를 배우고,
별자리를 그린 天文圖나 해시계를 통해 24節氣와 시간을 관측하였다.
*<天象列次分野之圖>는 조선 太祖 4년(1395) 고구려의 石刻天文圖 拓本으로
만든 天文圖이다. 고구려의 석각천문도는 고구려가 망할 당시(668년경)
大同江에 빠뜨려 잃어 버렸으나 다행히 이 천문도의 탁본을 보관하고 있던
사람이 조선 太祖 李成桂에게 바쳤다. 태조는 權近을 책임자로 검은 돌에
그대로 새기도록 하고, 그 이름을 ‘천상열차분야지도’라고 했으며,
世宗 15년(1433) 그 돌의 뒷면에 형태를 약간 고쳐 똑 같은 내용을 다시 새겼다.
태조와 세종 때 만든 『석각 천상열차분야지도』는 風霜에 마모되어
탁본하기 어렵게 되어 肅宗 13년(1687) <석각 천상열차분야지도>를 다시
만들었으며, 이 돌은 현재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전시관에 전시되어 있다.
여기에 전시된 『천상열차분야지도』는 이 돌에서 탁본한 것이다.
(109) 혼천전도(渾天全圖) -18세기 (*渾: 흐릴 혼)
조선 후기의 木版本 천문도로 조선 전기의 천상열차분야지도의 형식을
바탕으로 西洋天文學의 영향을 많이 반영하여 수정한 천문도이다.
망원경으로 관측한 7개의 天體(해, 달, 토성, 목성, 화성, 금성, 수성)을
그린 ‘七政周天圖’ 등 당시 중국을 통해 조선에 알려진 서양천문학의
내용이 반영되었다.
(110) 동국지도(東國地圖) -조선 후기
*英祖 때 鄭尙驥가 제작한 우리나라 최초의 축척이 표시된 지도로
9장의 지도첩에 全國圖와 42만분의 1 축적의 道別圖로 구성되어
있으며 도별도는 8장을 합치면 전국도가 되도록 축척을 일치시켰다.
(*驥: 천리마 기)
이 지도의 가장 큰 특징은 지도에 축척을 표시하여 실제 거리를
계산할 수 있도록 한 점으로, 조선 후기 大縮尺 지도 발달에 획기적인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당시로서는 가장 정확한 지도이다.
(111) 청구남승도(靑邱覽勝圖)
대개 ‘勝覽圖’라고 하며 승람도 놀이에 사용되는 놀이판으로 넓은 종이에
전국의 名勝地를 적어 놓고, 주사위를 던져 나온 수에 따라 전국의 명승지를
돌아 도착지에 먼저 돌아오면 이기는 地名을 익히는 놀이이다.
*장방형의 종이판에 칸을 그리고, 각 칸에는 전국의 산·亭子·절·地名 등의
명승지가 적혀 있으며, 중앙에는 세로로 '靑邱覽勝圖'가 적혀 있고,
그 왼쪽에는 이 놀이의 여행객(말)인 미인, 어부, 스님, 道師, 시인의 그림을
각 칸마다 그렸다.
(112) 학습서적(學習書籍), 책가문방도(冊架文房圖)
조선시대에는 漢字를 사용했기 때문에 한자의 뜻과 음을 익히기 위해 ‘千字文’을 배우고,
기초적인 倫理素養을 위해 三綱五倫과 옛 聖賢의 행적을 정리한 ‘童蒙先習’이나 ‘小學’,
가족 禮節書인 ‘朱子家禮’ 등을 배웠다.
=三綱行實圖: 世宗 13년(1431) 集賢殿 副提學 偰循 등이 三綱에 모범이 될만한 孝子∙忠臣∙
烈女의 행적을 그림과 함께 한글로 번역한 倫理 敎育書. (*偰: 말을 설 *循: 돌 순)
=童蒙先習: 조선 中宗 때 학자 消遙堂 朴世茂(1487~1554)가 저술하였다. <千字文>을
익히고 난 후 배우는 초급교재로, 먼저 五倫을 설명하고, 중국의 三皇五帝에서부터
明나라까지의 曆代 史實과 한국의 檀君에서부터 조선시대까지의 역사를 약술하였다.
=擊蒙要訣: 宣祖 10년(1577) 栗谷 李珥가 일반 학도들에게 道學의 入門을 지시하기 위해
저술한 책으로, 德行과 知識涵養을 위한 초등과정의 교재로 近世에 이르기까지
여러 번 간행되었을 뿐만 아니라, 初學者들에게 <千字文>·<童蒙先習>·<訓蒙字會>에
이어 널리 읽혔다.
=論語諺解: 1590년경 <論語>의 原文에 토를 달고 諺解한 책으로 御命으로 校定廳에서
행한 四書三經 諺解事業의 일환으로 간행되었다. 원문인 漢文을 앞에 싣고 諺解를
붙이는 형식으로 되어 있으며, 원문에는 한글로 된 토와 한자음이 있고, 언해문에도
漢字와 漢字音을 표기하였다.
*四書三經諺解: 儒敎 經典인 四書(論語, 大學, 中庸, 孟子)와 三經(詩經, 書經, 周易)의
원문에 한글로 音과 토를 달고 다시 우리 말로 번역한 책.
=奎章全韻: 조선 正祖 때 御命으로 李德懋 등이 편찬한 漢字 音韻辭典으로. 漢詩를 짓는데
필요한 音韻을 적었으며, 東音(朝鮮의 漢字音)과 華音(中國의 本土字音)을 함께
표시하였다. 漢字를 四聲에 따라 소리의 높고 낮음으로 구별하고 한글로 글자의
음을 달아 漢字音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사용되었다. (*懋: 무성할 무)
*四聲: 平聲, 上聲, 去聲, 入聲
=明心寶鑑: 중국 明나라 范立本이 중국 古典 중에서 敎訓이 될만한 내용을 편집하여 편찬한
아동용 교재로, 마음을 맑게 하는 보물 같은 귀중한 책이라고 ‘명심보감’이라고
했다. (*范: 성씨 범)
(113) 서당(書堂)
*書堂은 鄕村社會에 생활근거를 둔 士族과 백성이 주체가 되어 面∙洞∙里를 기본단위로
설립한 初∙中等 단계의 사설교육기관이다.
서당교육의 궁극적인 목적은 四學과 鄕校에 입학을 위한 준비기관이었으나, 실제는
지방의 청소년에게 漢文의 讀解力을 이해시키고 儒敎에 대한 초보적 지식을
이해시키는 데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114) 나무기러기
新郞이 新婦의 부모 또는 친척 앞에서 百年偕老를 서약하는 奠雁禮 때 올리는 나무로 만든
기러기이다. (*偕: 함께 해 *奠: 정할 전 *雁: 기러기 안)
(115) 굿청
특별한 치료법이 없던 조선시대에 天然痘와 紅疫은 가장 두려운 질병으로, 이를 예방하거나
다스리기 위해 무당을 불러 별상굿이나 호구굿을 하고 마을에서는 마마배송굿을 했다.
여기의 굿청은 홍역을 다스리기 위한 호구굿으로, 무당이 오른손에는 부채를, 왼손에는
방울을 흔들며 굿하는 장면을 재현하였다.
=巫神圖: 천연두를 예방하기 위한 굿으로 모신 호구부인과 별상 그림
=작두[斫刀]: 무당이 작두거리 등에서 神靈의 위엄을 나타낼 때 쓰는 巫具.
(*斫: 벨 작 *巫: 무당 무)
=三枝槍: 신령의 위엄을 나타내거나 雜鬼를 쫓을 때 사용하는 무구.
=장군 칼: 신령의 위엄을 나타내거나 雜鬼를 쫓을 때 사용하는 무구.
=신칼[神刀]: 무당이 굿할 때 쓰는 칼.
=칠성방울: 굿할 때 무당이 손에 쥐고 흔들어 惡鬼를 쫓고 神靈을 청할 때 사용하는 무구.
=아흔아홉상쇠방울: 黃海道 무당들이 사용하는 방울로, 命을 주는 명쇠, 福을 주는 복쇠,
길을 열 때 필요한 길쇠 등 99개의 방울이 달려있다.
=명두(明斗): 중부지방의 명두는 큰무당이며 스승 격인 神어머니가 많은 제자인 神딸
가운데 한 사람을 선정하여 자기의 代를 물려줄 경우 그 상징물로 명두를 물려준다.
=오방신장기(五方神將旗): 무당이 굿할 때 사용하는 다섯 색깔의 깃발로 주로 운수를
점치는 무구.
(116) 주술과 점복(呪術∙占卜). 부적, 부적판, 다라니판, 唐四柱책, 점통
인간이 초자연적인 힘을 빌어 어떤 목적을 달성하고자 할 때 행하는 원초적인 술법이
呪術이다. 주술은 歲時風俗으로 나타나기도 하나, 주로 病을 예방하거나 치료를 위해
무당의 능력에 의지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귀신이나 재앙을 쫓고 福을 부르기 위해
부적을 쓰기도 했다.
한편 궁금한 미래의 일을 미리 알고 싶어서 점통의 내용으로 점을 치는 作卦占이나 사람의
얼굴과 손금을 보아 그 사람의 일생을 판단하는 觀相占 등을 보았다. (*卦: 점괘 괘)
(117) 회갑(回甲)
부모님의 회갑을 맞이하여 자식들이 그 은혜에 감사하며 長壽를 기원하는 뜻에서 차려
드리는 回甲床은 다른 잔칫상과 달리 孝誠을 나타내고자 밤·대추 등의 과일을 높이 쌓아
올리고, ‘囍’, ‘壽’ 등 기원하는 글자를 장식하였다.
회갑상은 살아있는 사람을 위한 잔치이기 때문에, 남자는 동쪽에 여자는 서쪽에 앉지만,
산 제사라고 하여 반대로 앉는 경우도 있다. 회갑상 앞에는 술과 잔이 놓인 獻酒床을 따로
놓고, 자손과 친척들이 연령순으로 잔을 올리고, 큰 절로 건강과 장수를 기원하였다.
(118) 상여(喪輿). 山淸 全州 崔氏 古靈宅 喪輿 -重要民俗資料 제230호-
상여는 喪禮 때 屍身을 묘지까지 운반하는 기구로, 규모에 따라 大輿, 小輿라고도 하며,
원래 소나 말, 또는 사람이 끄는 수레[柳車]였으나, <朱子家禮>를 수용하면서 사람이
어깨에 메는 것으로 바뀌었다.
상여의 형태는 가마와 비슷하나, 몸체 좌우에는 멜채[長杠]가 있어 형편에 따라 12인
또는 24인까지 맬 수 있다. 상여는 대개 마을마다 마련하되 상여틀을 분해, 조립할 수
있도록 만들며, 동네에서 조금 떨어진 상여집에 보관하였다. (*杠: 막대기 공)
*충남 禮山 伽倻山기슭의 南延君(興宣大院君의 父親)墓 뒤쪽에는 運柩할 때 썼던
상여(복제품)를 보관했다는 상여집이 있다. (*柩: 널 구)
(119) 음택풍수(陰宅風水)
옛날부터 우리 조상들은 집 지을 자리[陽宅]를 잡거나 산소 자리[陰宅]를 잡을 때
風水地理를 활용했으며, 그 중에서도 중국에서 전래된 <錦囊經>을 ‘葬經’, ‘葬書’라고
부른 것처럼, 明堂에 조상의 산소를 쓰면 조상이 山川의 좋은 地氣를 받아 자손들도 福을
받게 된다는 陰宅風水를 중시하였다. (*囊: 주머니 낭)
조선 후기에는 儒敎的 이념에 따라 풍수의 폐단을 비판하기도 했으나, 좋은 묘자리를 찾아
조상 묘를 여러 번 移葬하거나, 장례를 미루어도 조상 숭배라는 좋은 뜻으로 당시 사람들은
받아들였다.
=明堂圖(뒤쪽 그림): 장군산을 기점으로 전북 茂長縣(현재 高敞郡 茂長面) 西面에 있는
朴氏 墓所의 穴과 形局에 대하여 山水의 흐름과 方位를 표시한 그림이다.
*明堂: 陽宅[집터]은 主建物의 전방이고, 陰宅[묏자리]인 경우에는 무덤 앞에서 案山과의
사이 공간을 말하며, 左靑龍·右白虎에 둘러싸인 부분이다.
=墓 그림(오른쪽 위로부터): 金鷄抱卵形(전남 海南, 孤山 尹善道 묘) -
將軍大坐形(전북 扶安, 瀛城君 高曦 묘) – 臥牛形(전남 務安 參判公 朴益卿 묘)
–玉女織錦形(전북 全州 崔潑 묘). (*瀛: 바다 영 *曦: 햇빛 희 *潑: 물 뿌릴 발)
(120) 지석(誌石)
지석은 죽은 사람의 人的 事項이나 무덤의 위치를 돌이나 瓷器 등에 기록하여 무덤 주변에
묻는 표지로, 훗날 封墳이 무너져서 묘 자리를 잃게 되었을 때를 대비한 것이다.
지석은 삼국시대부터 사용되었는데, 碑石과 같이 돌로 만들었기 때문에 지석이라고 했으며,
조선시대에는 <朱子家禮>에 따라 2개의 板石(이름을 쓴 뚜껑, 인적 사항을 쓴 바탕석)으로
지석을 만들었다. 그러나 지석 제작에 어려움이 있어 陶瓷나 흙으로 굽기도 하고, 먹으로
사발에 써서 石函이나 나무 궤에 넣어 묻기도 했으며, 시대가 내려오면서 지석에 기록하는
내용도 묻힌 이의 벼슬과 이름만을 쓰는 등 단순화 되었다.
(121) 삼년상(三年喪)
삼년상은 자식이 부모가 돌아가신 후 3년 동안 낳아주시고 키워주신 부모에 대한 보은과
孝道를 다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지냈다. 장사를 마친 후에도 喪廳 靈座에 부모의 神主를
모시고 廬幕에 거처하며, 아침저녁으로 식사를 올리는 등 마치 살아계신 듯이 섬겼다.
(*廬: 농막집 여)
외출할 때에는 하늘을 볼 수 없는 죄인이라 여겨 방갓[方笠]을 쓰고 다녔으며, 삼년상이
끝난 이후에도 자식은 자신이 죽을 때까지 제사를 통해 부모에 대한 못다 한 孝를 하였다.
(122) 안동권씨 충재 권벌 종가 제사상(安東權氏 沖齋 權橃 宗家 祭祀床)
*冲齋 權橃(1478~1548): 조선 中宗~明宗 때의 文臣으로 어린 明宗이 즉위하자 院相에
임명되고, 乙巳士禍로 衛社功臣에 올랐으나 鄭順朋의 반대로 削勳되었으며,
良才驛壁書事件에 연루되어 求禮에 유배되었다가 朔州에 移配되어 거기에서 죽었다.
宣祖 초에 伸寃되고, 奉化의 三溪書院에 配享되었으며, 문집에 <冲齋集>이 있다.
(*冲: 화할 충 *橃: 뗏목 벌 *寃: 원통할 원)
*不遷位祭祀: 4代를 넘긴 神主를 땅에 묻지 않고 사당에 영구히 모시면서 지내는 제사.
(123) 사례편람(四禮便覽)의 기제사(忌祭祀) 절차
四禮便覽은 조선 후기의 학자 이재(李縡)가 憲宗 10년(1844) 四禮에 관하여 편찬한 책으로,
禮學에 관한 깊은 조예를 토대로, 朱子의 <家禮>의 虛點을 보완하면서 현실적으로
사용하기 편리하도록 엮었다. (*縡: 일 재)
① 진설(陳設): 나물과 과일 등을 먼저 차린다.
② 출주(出主): 사당에서 신주를 정침으로 모신다.
③ 참신(參神): 주인 이하 모두 두 번 절을 한다.
④ 강신(降神): 주인이 분향하고 술을 따라 모사기에 따른 후 두 번 절한다.
⑤ 진찬(進饌): 국과 밥 등을 올린다.
⑥ 초헌(初獻): 주인이 첫 번째 잔을 올리고 축문을 읽은 후에 두 번 절 한다.
⑦ 아헌(亞獻): 주부가 두 번째 잔을 올리고, 네 번 절을 한다.
⑧ 종헌(終獻): 형제 중의 맏이나 친척 중에 연장자가 세 번째 잔을 올리고,
두 번 절을 한다
⑨ 유식(侑食): 잔에 술을 더 채우며, 숟가락을 밥에 꽂고 젓가락을 가지런히 놓은 후에
두 번 절을 한다.
⑩ 합문(闔門): 문을 닫고 나가 歆饗하기를 기다린다. (*闔: 문짝 합)
⑪ 계문(啓門): 문을 열고 들어가 국을 내려 숭늉을 올린다.
⑫ 사신(辭神): 제사가 끝나 주인 이하 모두 두 번 절을 한다.
⑬ 납주(納主): 신주를 사당으로 다시 모신다.
⑭ 철찬(撤饌): 제사상의 음식을 모두 물리고, 그 음식으로 飮福한다.
記憶의 共感. 2017년도 기증자료
(124) 군복 등 기증품
군복, 소쿠리, 사진기, 나침반, 時計修理道具, 高校우등상패, 군 전역 축하패.
(125) 백수백복도 자수병풍 등 기증품
勝景圖놀이판, 주판, 文房具函, 실패, 인두, 한복저고리, 한글편지, 나막신, 토지매매계약서,
襃彰完議文, 歲寒齋 宋時燾의 文集 歲寒齋遺稿, 백수복복도 자수병풍. (*襃: 기릴 포)
*百壽百福圖: ‘壽’ 자와 ‘福’ 자를 여러 모양으로 도안하여 반복해 구성한 그림.
국립민속박물관 野外展示場
(126) 양외전시장, 마을의 共同體 信仰物
전통마을에는 대개 뒷산에 守護神을 모신 山神堂 또는 城隍堂이 있고, 마을 입구에는
장승∙솟대∙돌탑∙神木 등의 신앙 대상물이 있어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한다.
여기 전시된 신앙대상물의 형태는 마을 입구에 모시는 신앙대상물의 가장 일반적인
신앙형태를 복합적으로 연출했다. (*隍: 해자 황)
전시된 장승과 솟대는 전국 각 지방의 장승과 솟대 중 그 지역의 특성을 잘 나타낸
대표적인 것을 선정하여 實物 크기로 똑 같이 만들어 세웠다.
(127) 장승
한국의 마을 또는 절 입구, 길가에 세운 사람 머리 모양의 기둥으로, 장승의 機能은
지역간의 경계표 구실, 里程標 구실, 마을의 守護神 역할이다.
(128) 효자각(孝子閣)-효자문(孝子門)
나라에서 泰仁 許氏 許權(1847~1895)에게 내린 孝子旌閭(효자에 내린 표창)를 기념한
효자비의 보호 건물과 출입문이다. 효자각은 연꽃봉오리. 용, 봉황 등을 彫刻하고 丹靑으로
화려하게 장식했으며, 효자문에는 ‘孝子門’ 편액을 걸고 주위에는 호랑이와 梅蘭菊竹을
그렸으며, 孝子閣과 孝子門을 통해 효를 중시했던 당시의 사회상과 건축기술, 공예문화를
엿볼 수 있다. (*旌: 기 정 *閭: 마을 려)
이 건물은 전북 扶安郡 保安面 許權 후손의 살림집 안에 있었던 것을 2008년
국립민속박물관 경내로 옮겨 보존한 것이다.
(129) 許權 孝子 旌閭碑
(130) 성기숭배신앙(性器崇拜信仰)
呪術宗敎的 행위로 男女의 生殖器 형태나 모형을 숭배 대상으로 받드는 民俗信仰이다.
현재 傳乘되는 性 信仰은 사람의 性器같이 생긴 자연암석이나 地形을 祈子, 마을수호,
豊饒祈願의 대상으로 숭배하거나, 男女性器의 모형을 나무∙돌∙土器 등으로 만들어 마을
守護神에게 奉安하기도 한다. 또한 줄다리기에서 암줄과 수줄을 결합한 模擬 性行爲를
통해 豊饒를 기원하는 풍습도 전승되고 있다.
지역에 따라서는 좆바위∙자지바위∙보지바위∙여근암∙남근암∙성기바위∙씹섬바위∙공알바위∙
삐죽바위∙암탑과 수탑 등으로 다양하게 부르고 있다.
* 전국 산에는 ‘촛대바위’가 많은데 이는 ‘좆대바위’의 변형이다.
-창덕리 남근석; 전북 淳昌郡 八德面 昌德里
-경기 安養市 石水洞 三幕寺
-전북 井邑市 七寶面 白岩里 원백암마을
(131) 安養 三幕山 三幕寺 女根石 -경기도민속자료 3호- -1012.11.02 사진-
*三幕寺 男女根石 -경기도민속자료 3호-
경기 安養 石水洞 三聖山 三幕寺에 있는 人工을 가하지 않은 화강석 2基로
男根石은 높이 150㎝, 女根石은 높이 110㎝이다.
신라 文武王 17년(677) 元曉大師가 삼막사를 창건하기 이전부터 土俗信仰의 대상으로
숭배했다고 하며, 이 바위를 없애지 않고 그 옆으로 七星閣을 둔 것은, 佛敎와 民間信仰이
어우러진 우리 나라 민간 신앙의 한 형태를 볼 수 있는 좋은 예이다. 지금도 민간에서는
이 바위를 만짐으로써 多産과 出産에 효험이 있다고 믿어 4월 초파일, 7월 칠석이면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祈願하며, 銅錢을 바위에 문질러 붙이는 의식을 행하기도 한다.
(131-1) 冠岳山 男根石 -2007.04.17 촬영사진-
(131-2) 道峯山 女性峰 -2006.07.02 사진-
(132) 정주목과 정랑
濟州島에만 있는 것으로, 정낭을 정주목의 뚫린 구멍에 걸쳐두어 牛馬의 출입을 막고
주인의 외출여부를 표시하는 구실을 한다.
잠깐 이웃집에 갈 경우 맨 아래 구멍에 정낭 하나만을 걸쳐 두고, 반나절 집을 비울 경우
2개, 먼 곳으로 ‘마실’을 갔을 경우 3개 모두 걸쳐둔다.
(133) 돌하르방 -제주도민속자료 2호-
제주도지역에서 傳承되고 있는 돌하르방은 ‘돌할아버지’란 뜻으로
‘偶石木’, ‘武石木’, ‘백하르방’, ‘翁仲石’이라고도 한다. (*偶: 짝 우)
대개 마을 입구에 있는 돌하르방은 마을을 지키는 守護神 역할을 한다.
外觀은 불끈 쥐고 있는 두 주먹과 큰 눈망울, 머리에 꾹 눌러쓴 벙거지 등은
무서운듯하나 微笑를 머금고 있는 얼굴은 익살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다.
(134) 수표(水標) -복제품-
물의 높이를 측정하는 기구로 世宗 때 처음 만들어 漢江邊과 淸溪川
馬廛橋(후에 水標橋로 개칭)에 설치하였으며 현재 남아있는 것은
英祖 때 제작하여 水標橋 옆에 세웠던 것으로 淸溪川 覆蓋工事 때
세종대왕기념관으로 移轉하여 보관하고 있다.
(135) 오촌댁(梧村宅 ) (*梧: 오동나무 오)
英陽 南氏 蘭皐宗派 時庵 南皋의 둘째 손자 南龍鎭(1887~1912)이 경북 盈德郡 蒼水面
梧村里 출신 載寧 李氏와 혼인하면서 붙인 宅號이다. 해체 과정에서 ‘道光二十捌秊戊申
三月二日申時立柱 上樑同日時’라고 적은 上樑文이 나와 1846년에 건립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皐: 언덕 고 *皋: 언덕 고 *捌: 여덟 팔 *秊: 해 년)
오촌댁의 구조는 ‘ㅁ’자 형태의 구조로 대문을 들어서면 오촌댁의 아담한 마당이 손님을
맞이한다. 한눈에 쉽게 볼 수 있는 35평의 가옥으로 안방, 上房, 사랑방, 문간방 등 4개의
방과 안마루(안대청), 사랑대청(사랑마루)이 居住空間이다. 그 외에 정지(부엌),
수장공간으로 도장방과 庫房이. 대문간의 우측에 외양간이 있다. 뒷마당에는 장독대를,
오른쪽마당에는 디딜방앗간, 우물, 뒷간을 배치하였다. 이 지역에 있던 조선 후기
中∙上流階層 전통 韓屋의 유형을 잘 보여주고 있다. 1848년 경북 盈德郡 寧海面 元邱里에
英陽 南氏 一家의 가옥으로 건립되어 1990년대 초까지 寄贈者 가족이 살았던 집으로
2010년 移建 하였다.
(136) 오촌댁에서
(137) 우물
(138) 디딜방아. 발로 밟아서 곡식을 찧거나 빻는 농기구.
(139)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
十二支라는 개념은 중국 殷 代에서 비롯되었으며, 이를 방위나 시간에 대응시킨 것은
대체로 漢代 중기의 일로 추정되며, 이를 쥐[子]·소[丑]·범[寅]·토끼[卯]·용[辰]·뱀[巳]·
말[午]·양[未]·원숭이[申]·닭[酉]·개[戌]·돼지[亥] 등 열두 동물과 대응시킨 것은 훨씬
後代의 일이다. 한국의 경우는 護石에 十二支神像을 조각한 慶州 掛陵(元聖王陵 추정)이나
金庾信 墓가 최초의 것으로 보인다.
(140) 韓屋 기와집
(141) 너와집
(142) 연자방아
곡식을 脫穀 또는 製粉하는 방아로 ‘연자매’라고도 하며, 발동기가 없던 옛날 한꺼번에 많은
곡식을 찧거나 밀을 빻을 때 마소의 힘을 이용한 방아이다. 둥글고 판판한 돌판 위에
그보다 작고 둥근 돌을 옆으로 세워 얹어, 아래 위가 잘 맞닿도록 하고 마소가 끌고 돌린다.
옛날에는 마을마다 하나씩 있어 공동으로 사용하였으며 이곳을 연자방앗간 또는
연자맷간이라 했다.
(143) 회격묘(灰隔墓) (*隔: 사이 뜰 격)
경기 南楊州市 別內面 택지개발지구에서 출토된 無名의 墳墓로 灰隔 안에서 木槨, 木棺,
服飾遺物, 운삽 등이 나왔다. 회격묘는 고려시대에 주로 사용되던 石棺을 대체하여
조선시대에 권장되던 장례문화이다.
*灰隔墓: 棺을 구덩이 속에 내려놓고, 그 사이를 석회로 메워 다진 묘.
(144) 국립민속박물관 입구 -삭제
(145) 말타기 놀이 모형
(146) 景福宮 돌담
-景福34 제70차 文化遺産踏査; 國立民俗博物館-宗親府(4-4)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