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 다시 살아나는 해상왕 장보고- 이번 산동반도의 청도 제남 곡부와 위해 연태 펑라이여행은 정말 세계에 대한 우리민족의 나아갈 길에 대한 새로운 지평을 열어 주었다. 장보고는 혼자서 된 해상왕 장보고가 아니다. 우리 역사의 그 많은 의인들이 혼자 의인이 아니듯이 그를 밭쳐주었던 수많은 민중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 시대 중국의 조선족과 러시아의 고려인 그리고 재일동포와 베트남과 말레이시아 등지의 한민족의 세력을 규합하여 하나라 묶어 낼 수 있었던 그의 뛰어난 재능을 현재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그 당시 세계를 보는 안목을 가지고 중국의 남방까지 진출 했다는 사실이 지금 나를 충분히 흥분하게 한다.
사실 중국이나 일본이 장보고를 자기나라 출신이라고 하고 장보고의 동상과 기념비를 세우고 기념공원을 만들고 관광객에게 안내를 하고 저러는 판에 우리 한국은 너무나 무관심하다.
아무리 삼국사기 열전 등에 확실한 기록이 있다지만 우리 국민들이 얼마나 알고 있느냐 홍보가 필요하다. 인천이랑 완도에 동상을 세우고 기념관도 짓고 나라에서, 기념사업회에서, 해상왕 장보고를 더 확실하게 역사를 바로 알도록 해야 한다.
이순신 장보고 두 분이 같은 바다의 사나이인데 한 분은 외적을 물리친 장수, 한 분은 거대한 바다와 먼 대륙의 상권을 움직인 무역상, 누구를 부각시켜 그분의 정신을 이어받게 하면 좋을지 의논할 때 당시 삼성 이병철 회장은 잘사는 나라를 만들려면 일찍부터 해상무역으로 세계로의 도전정신을 가졌던 장보고가 적합하다고 추천했지만 박정희 대통령이 군인이었기에 성웅 이순신을 추앙하며 그 정신을 본받자고 전 국민들에게 알리고 초등학교 운동장마다 동상을 세우고... 결국 더 위대한 선각자는 역사 속에 조용히 침묵할 수 밖에 없었다.
과거 천 이백 여년 전 한민족 재외동포들의 세력을 규합하여 한․중․일 의 해상 무역을 장악했듯이 지금 우리나라도 세계의 요소 요소에 퍼져 있는 우리 동포들에 대한 더 없는 관심이 필요한 때이기도 하다. 나아가 중국이 세계 제일의 경제규모를 가지게 되었을 때 우리나라에 대해 주변속국으로서의 중화를 요구하게 되지는 않을지 심히 우려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이 시점에서 나는 우리나라의 통일이 중국의 이러한 야심을 걷어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 생각하지만 정치적 통일을 기대하는 건 이제 어렵다. 필자는 경제적 통일이면 가능성이 있고 또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산동성 지방에서 장보고를 연구한 사람들은 당당하게 장보고의 조상이 중국인이었다고 얘기한다. 우리로 보면 정말로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훌륭한 조상을 둔 후예로서의 긍지와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야겠다는 그들의 의지는 대부분 확실하다. 지난 여름 중국 집안시의 고구려 고분 답사를 갔을 때도 그곳의 중국인은 본인이 고구려인으로 그 뜻을 기려 간다고 자랑스럽게 말하고 고구려의 호태왕(광개토대왕) 비문의 글씨체를 전수하고 평생을 그 연구에 전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고구려가 이미 중국의 영토이고 중국의 일부로 자연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법화원에서 안내하는 중국인들이 장보고라는 훌륭한 인물을 자기네 조상으로 생각한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는 사실 상당한 충격이었다. 그리고 더욱이 장보고가 일본과 더 가까운 관계라고 생각한다고 할 때 정말로 안타까운 심정을 어찌 말로 표현 하겠는가…?
장보고님을 바로 알아야! 그 동안 역사 속에 묻혀 있다가 새로운 역사적 인물로 재평가 받고 있는 장보고의 위대함을 배우고 느낄 수가 있었고 이번 여행을 통해 조금이나마 역사적 안목을 넓힐 수 있었다. 사실 KBS <역사스페셜>의 5부작 ‘해신’을 볼 때만 해도 작가 최인호 선생님의 안내이기에 바닷길을 통한 9세기의 동서해양문명의 교류와 무역 활동을 하신 분 정도였지 천 이백 여년 전, 신라인으로 그 당시 중국연안에 출몰하는 해적무리를 모두 소탕하여 우리민족의 기세를 만방에 떨쳤고 또한 '바다의 왕'으로, 무역왕으로, 장군이며 민족지도자로, 일본과 중국 당나라에 까지 당신의 위상이 생생하게 역사되어진 분이신 줄 미쳐 몰랐다.
최근 중국의 의도된 고구려사 왜곡으로 한중간 '역사전쟁'이 촉발, 한국 정부가 이의 시정을 위해 결연한 외교적 의지를 천명하고 있는 가운데 홍콩의 중학교 역사교과서에도 한반도의 북쪽 절반이 중국의 세력범위라는 지도를 소개한 이후 한반도의 절반이 중국 땅이므로 고구려가 중국 땅이라고 기술돼 있어 갈수록 중국측의 역사왜곡 파문이 확산되고 있고 우리의 울분을 자아내고 있는데, 이런 시점에서 이번 여행은 올바른 장보고의 도전정신과 역사의식, 나라와 민족을 사랑의 마음을 전파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기에 더욱 보람된 여정이었다.
중국이라는 나라가 우리보다 땅덩어리도 훨씬 넓고 인구도 엄청 많은 큰 나라라서 역사일래 한반도와는 많은 교류를 했고 조선시대에는 우리나라를 간섭하고 괴롭히기도 했지만 이미 1,200년 전에 중국과 한반도, 일본을 연결하는 장대한 해상경로를 개척한 해상왕 장보고가 있었고 13억 인구 중에서 선발된 축구에서도 항상 우리 선수들이 중국을 이겨낸 것처럼 우리의 저력은 대단하다.
최근에 다시 “불멸의 성웅 이순신”을 외치며 만화로 드라마로 소설로 이순신장군이 다시 시대가 요구하는 정신을 갖춘 영웅이라며 부각되고 있는데 반면에 장보고 대사가 어느 시대 사람인지, 얼마만큼 훌륭한 분인지를 너무 모르고 있는 사람들에게 안타까운 마음이고 장보고대사의 놀라운 빛나는 업적과 도전정신을 다시 한번 상세히 얘기하고 싶다. 물 안개가 자욱하여 망망대해 섬 하나 불빛 하나 보이지 않는 끝없는 바다 풍경을 보며 해상왕 장보고는 얼마나 어려운 상황이 많았을 텐데 무슨 생각을 하며 이 캄캄한 바닷길을 얼마나 많이 오고 갔을까?
「우리나라가 동북아의 중심으로 발전하고 있으며 경제발전의 원동력이 되기에 좋은 조건이 바로 바다를 끼고 있는 나라이고 조선기술이나 원양어업 등 해양력이 우수하기 때문이다. 바다경영을 바탕으로 국가에 이름을 남기고 부를 이룩하신 해상경영의 영웅인 장보고 같은 인물이 키워질 수 있도록 노력하는 길이 우리나라 경제발전에 기여하는 일이다.」
이탈리아 반도의 로마가 비록 반도 국가이고 작았지만 세계를 제패하였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제 제1, 제2의 장보고와 같은 인물이 한반도를 세계의 중심으로 능히 올려 놓을 수 있음은 우리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처음1999년 11월 민간주도로 "해상왕 장보고 재조명·평가사업"을 추진하였고 해상왕 장보고의 해양 개척정신과 국제 해상무역의 업적을 계승 발전시키고, 나아가 21세기 일류 해양국가 건설을 위한 토대를 마련하고자 장보고기념사업회가 설립되었고 삼성에서는 선친의 유지를 받들어 10억원이라는 기금을 내놓았다. 이제 장보고님의 업적도 서서히 솟아오르고.....늦었지만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장보고님! 당신의 발 자취를 느끼고 공부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기에 감사드립니다.
조그마한 반도 국가의 어려운 여건에서도 멀리 바다를 정복하고,
넓은 바다를 이용할 줄 알았던 당신!
신분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스스로 자신의 자아를 찾아서 개척한 영웅. 결국 시대를 잘 못 만나 좁은 한반도에 머물려는 역신들의 무리 때문에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너무나 지방 장수가 세력이 커지자 그 큰 꿈 펼치지 못하고 아깝게 죽임을 당하신 것,
지금은 조선족 동포와 한국인이 같은 한 핏줄 한민족으로 산동반도의 역사를 다시 쓰고 있습니다.
이제는 거대한 바다와 대륙의 상권을 움직였고 호령했던 해신(海神) 장보고님의 업적을 우리가 후손들에게 바로 알리고 그 길을 우리가 따라 갈 것입니다.
한민족 공동체를 꿈꾸는 지금
장보고님!
당신의 뜻이 다시 산동반동에서 살아나고 있다
중국 이야기(43)-한민족 이민역사-
다시 생각하는 해신 장보고
이번 겨울방학 중국 대학 순회 강연 투어를 하면서 우리 민족의 이민 역사를 다시 한번 느낀다. 우리 민족의 최근의 이민 역사를 보면 1800년대부터 시작된 만주 연해주 지방으로의 개척이민으로부터 시작해서 1900년대 초반 북쪽망명이민으로 일컬어지는 중국, 러시아 연해주 이주의 1기, 1930년대 부터 1945 해방기까지 노동자이민으로 일컬어지는 중일전쟁 전후로 강제 징용되는 일본으로의 이주 2기, 1945-1965까지 국제결혼, 유학생, 입양 등, 백인문화 속으로 동화되는 엘리트 이민으로 일컬어지는 미국, 남미, 유럽으로의 이주 3기, 월남전이 끝난 1975년 비즈니스 이민으로 일컬어지는 동남아, 호주로의 이주 4기, IMF 이후 몽고, 남아공, 중동, 미국, 또한 그 외 여러 지역으로 이주의 방향이나 성격이 모호한 이주 5기. 이렇듯 이 한민족의 이민사는 시대별 주요사건에 밀접한 영향을 받았고, 한국을 떠난 동포들은 세계 각지에서 제각기 자리를 잡게 되었다. 한민족의 이민사는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기가 막힌 사건들도 많았고, 머나먼 타국에서 우리 재외동포들이 안정을 이룩하기까지 수많은 인고의 세월이 흘렀다.
각 지역 별로 살펴보면,
미국교포의 경우, 노동자 중심으로 운영되는 미국의 이주민 정책에 비해 더 나은 인생과 꿈을 찾아 이민을 간 교포들은 미국정책의 관점과 실제 생활에서 많은 차이를 느꼈으며, 가족전체가 이민을 감으로 인해서 문화에 적응하는 속도가 각기 다른 부모와 자식 간의 세대 차이가 많은 가족 문제를 야기하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미국에서 한국어가 SAT II에 채택된 쾌거를 이루기도 하였다. 많은 고난과 시련의 이주 생활에서도 이렇듯 한국의 위상을 높이는 위대한 사건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많은 미국 교포들의 눈물 겨운 노력의 결실이라 할 수 있다.
일본 쪽은 더 눈물 겨운데. 입학, 졸업, 취업, 결혼, 모든 교육과 문화, 생활에서 조센징이라는 차별을 이겨 낸 일본 교포들이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현재까지 유지할 수 있었던 이면에는 수많은 일본 교포들의 피와 땀이 어려있다는 것은 간과하면 안 된다. 그 쾌거는 최초의 한국인 교수인 일본동경대학 강상중 교수 임용으로 증명되었다.
중국 쪽은 더욱더 눈물겹다고 할 수 있겠다. 전 중국은 10%에 육박하는 고도의 경제 성장을 하고 있으나, 조선족은 소수 민족으로 취급되어 근대화에 낙오가 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하지만, 그러나 끈기와 인내를 가진 조선족들 은 중국 내, 세계 각지에서 막일을 하면서 현대화의 물결에서 살아 남으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30만며이 한국의 3D업종에서 일하고 만 여명의 조선족이 한국 미국 호주 등지에서 석박사 과정으로 유학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러시아 쪽은 이민 140주년을 맞게 되었지만, 다른 지역 들에 비해 더 열악한 상황에서 자리를 못 잡은 것이 비극이라면 비극이라 할 수 있다. 더구나 연해주는 지정학적 위치나 농업, 공업 개발 등의 생산적인 가치로 볼 때, 일본, 중국, 한국이 서로 이권을 차지하려고 경쟁하고 있는 곳이기 때문에, 오랜 역사에서 일본과 중국에 피해를 입은 연해주의 배타적인 정서를 잘 이용해서 한국이 서로 공존 공생 할 수 있는 위치를 잘 차지하여야 한다.
그 당시의 해상왕 장보고는 지금의 우리 한민족 한반도의 갈 길을 말해주고 있다. 일본 중국 러시아 그리고 멀리 말레이시아 베트남등 동남아세아의 여러 나라 가운데 가장 많이 나가 가장 많은 노력으로 성공적으로 정착하고 있는 한민족 장보고의 후예들은 이미 그 때의 장보고를 느끼고 있다.
연태대학 부총장과 좋은 만찬 자리 후- 특히 부총장은 여성으로 미국에서 유학한 젊은 엘리트였는데 한국에 대한 우호적인 모습이나 비록 이미 방학을 한 일요일 저녁임에도 관계자들을 격려하고 극진히 우리들을 대접하는 모습이 참으로 감격스러웠고 우리나라와는 비교 되는 모습에서 조금은 씁쓸한 기분으로 강의 장으로 향했다. -에 저녁 7시에서 9시까지의 빡빡한 강의 일정을 마치고 17일 威海(웨이하이, 위해)의 우리의 영웅인 장보고 해신의 기념공원 답사를 마치고 북경으로 귀환하였다. 연태대학은 한국인이 이미 3만 명이나 상주하고 목포대학과 자매결연을 맺어 활발한 교류가 있었고 학교 이름은 할빈대학이나 길림대학 만큼 유명하지는 않으나 학교 시설이나 한국에 대한 관계 우호적인 외사처(한국 대학의 국제 교류처에 해당)등은 북방보다 훨씬 더 좋은 인상을 받았다.
산동반도는 이번 여행을 포함하여 1995년부터 7-8차례 여행을 했는데 그때마다 감회가 새롭고 달라지는 분위기에 놀란다. 산동성의 성도는 제남이고 중국 최대의 미항으로 꼽히는 청도가 있다. 그리고 우리 민족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가장 우리나라와 비슷한 기후와 기질을 가지고 있는 북쪽 발해만에 인접한 위해 연태 봉래 지방이 있다.
중국 산동성-위해, 연태을 주목하자-신라방 신라소를 아는가?
1.산동성(山東省)
중국의 동북부에 자리 잡고 있으며. 총면적이 15만㎢이고 인구는 약 8,700만명이다. 산동은 중국 고대 문화의 중요한 발원지의 하나이다. 관광지고 석노인레저구, 낭야대, 설가도, 전황도 등 성급(우리의 도립공원수준)관광레저구도 각각의 매력으로 관광객들의 발길을 끌고 있고 넓이는 우리 남한의 약 1.5배의 면적에 주로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기후가 한국과 제일 비슷한 곳이다. 산동성은 한국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며 한반도와 인연이 많은 곳인데 현재 한국에 들어와 있는 화교의 대부분이 산동성 사람이며 한국인들이 먹는 중국음식 가운데도 산동음식이 많다.
산동반도는 북으로는 묘도군도를 통해서 요동반도와 이어지고, 동으로는 바다건너 한반도의 인천 군산 목포등 여러지역과 연결되고 있다. 선사시대부터 교류했을 가능성이 크며, 고조선시대에도 교역을 했다. 특히 삼국시대에는 고구려·백제 등 우리와 매우 관련이 깊은데. 유명한 항구로는 북쪽에 등주 (봉래시) 래주항이 있고, 동쪽 연태와 위해등이, 남쪽에는 청도부근의 밀주 등 여러 항구들이 있다. 신라사람들이 집중적으로 거주했던 산동성은 우리나라 삼국 시대이후 남북국시대의 통일신라가 신라방 신라소를 두어 사실상 지배했던 곳이다. 고구려 유민 이정기(李正己)일가가 세운 소왕국 번진(齊)이 55년간 통치했으며, 장보고가 법화원(法華院)을 세워 일대의 정치경제를 장악했다. 한·중 수교이후에는 산동성에 한국기업이 가장 많이 진출했으며 현재 거주하는 한국사람도 7만여명으로 추정되는 곳으로 한국인들이 중국에서 가장 많이 살고 있는 곳이다. 지도상으로 보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가까운 지역으로 비행기로는 40분정도 걸리고 보통의 여객선으로도 14시간쯤 걸린다.
2. 산동성의 연태시와 위해시(威海市)
중국의 조선족 판도는 바뀌고 있다.-해신 장보고의 후예들
물론 산동성의 성도(수도)인 제남과 중국동북의 최대의 해변도시인 대현과 청도가 이미 많이 알려지고 발달해 있지만 상대적으로 세계열강들의 진출로 경쟁이 치열한 곳이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위해 연태지역이 우리나라로는 경쟁력이 있는 곳이고 또한 역사적으로도 의미가 있는 곳으로 위해시의 장보고 기념공원은 정말 충격적이었다. 처음 일본인들이 이 개발을 시작하고 중국에서 대대적으로 투자하여(현재 한화 500억 정도를 투자하여 장보고 기념공원을 건설 중이다. 처음 장보고는 이곳에서는 일본인으로 생각하고 있었다고 한다.) 올 봄 완공을 목표로 하고 있는데 그 규모나 내용이 장보고의 후예인 한국인으로 생각하면 부끄러울 따름이다. 산꼭대기 위에 우뚝 세워놓은 장보고의 동상은 당시의 장보고의 위대성을 아직도 가슴 깊이 세기고 있는 이곳 산동인의 마음을 보는 듯하였다.
정말로 장보고가 이곳 중국 산동성의 산 기슭에서 살아 나고 있었다.
지금 중국의 동북공정이 우리나라 통일 이후 동북아에 대한 그들의 패권을 유지하기 위함이라는 것이 대다수의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이유의 하나인 바인데 우리나라의 통일과 우리 조선족들이 살고 있는 연변지역에 대한 투자로 조선족 자치주가 물류와 경제적으로 큰 자치구로 승격 된다면 중국도 우리나라에 대해 그네들의 대국 자만심을 더 이상 펼치지 못하리라.
위해시는 산둥반도의 제일 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한국군산과 가장 가까이 바다를 마주하고 있다. 화원도시의 칭호를 가지고 있는 위해시는 관광, 휴가, 피서지의 성지로 우리나라의 꽃과 식물 작물 모두 비슷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위해시가 유명하게 된 것은 지난 90년 한, 중간 뱃길이 열리면서부터인데, 코리안드림에 부푼 조선족들이 한국으로 가는 카페리를 타기위해 전대륙에서 구름같이 몰려들었다. 그래서 위해항 주위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조선족들로 발디딜 틈도 없었고 아직도 한국의 대중국 무역항으로서는 따이공(보따리무역상)이 가장 많은 지역중의 하나이다. 산동반도의 동북쪽 끝에 위치한 성산두는 우리 나라와 가장 가까운 중국 땅으로 중국 바닷가에서의 최동단으로 예로부터 '태양이 떠오르는 곳(중국의 희망봉)'으로도 불리며 예로부터 군사요충지로서 여러 왕조를 거치면서 많은 전쟁을 겪었다. 육군과 수군을 동원하여 조선과 전쟁을 벌인 한무제도 이곳에 와서 제사를 지냈으며, 백제를 치기위하여 소정방이 13만의 수군을 거느리고 출발한 항구도 이곳이다. 청·일 갑오전쟁의 황해대전도 성산두의 동쪽 해상에서 벌어졌는데 중국의 민족영웅 등세창(鄧世昌)도 이곳에서 나라를 위하여 순직한 곳이기도 하다. 이는 물론 이 지역이 동방의 해상으로 진출하는 전략적 가치가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었고 이곳에는 현재에도 진교유적(秦橋遺跡), 진대화석(秦代化石), 사교대(射鮫臺), 시황묘(始皇廟), 진동문(秦東門) 등 진시황과 관련된 많은 유적들이 있다. 그 외에도 현재 중국의 많은 지도자들도 이곳을 방문했는데 전임총서기인 호요방(胡耀邦)은 이곳에서 '천진두(天盡頭)'란 휘호를 남겼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진시황이 장생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동쪽으로 동쪽으로 가기 위해 도착한 곳이 산동성이고 그 끝이 이곳인데 진시황은 동쪽에 왜 그리 마음을 두었을까? 중국 사람들이 그렇게 기리는 해가 떠오르는 곳, 동쪽에는 우리나라가 있다. 지금은 동북공정이니 어쩌니 하면서, 중국의 속국으로 중화시키려고 몸부림치는 우리나라! 여기는 곧 그네들이 예부터 마음속에 항상 간직하고 동경하였던 동쪽에 있는 나라, 바로 우리나라 대한민국이 아닌가? 자아도취라고 해도 자기합리화라 해도 우리는 동방의 해뜨는 곳으로 인도의 시성 타골이 예견했고 중국사람들이 우러러 보는 동쪽에 사는 사람임이 분명하다.
바다 건너 멀리 동쪽에는 진시황이 그리도 원하던 불로초가 있을 것임을 한 신하가 손가락으로 가르키고 있는 모습으로 된 동상이 있고 진시황이 두 번 방문했다고 하는데 그는 이곳의 아름다움과 힘에 반해, 이곳이 영생의 비밀을 갖고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고 한다.
3. 삼국시대 당나라시대의 중국 그리고 신라-장보고
중국 당대 중국 땅에는 많은 한민족 사람들(신라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해주의 숙성촌과 초주 연수현의 신라방, 서주의 용교, 양주의 신라인, 강소성의 소주, 절강성 항주의 신라 무역상, 명주와 영파 , 임해의 신라방과 신라산, 광동성 광주의 신라상인등 얼리 분포하여 왔으며 특히 산동반도 연해안과 회수와 대운하변 그리고 양자강 하류 및 남중국 연해안에 마을을 이루어 살고 있었다. 이들은 오랜 시간 동안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정착한 사람들이다. 그들 중에는 옛날 고구려와 백제에서 전쟁포로가 되어 강제로 끌려온 사람도 있었고, 굶주림을 피하여 온 사람, 해적에 나포되어 팔려온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삼국의 해외발전기에 진출해 온 무역상인·유학생·구법승·군인·선원·농민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와 같이 시간과 나라와 경우를 달리하면서 건너온 이들 정착민들은 긴 역사의 흐름 속에서 서로 융합하여 ‘신라인’으로 각자의 생업에 전념해 갔다.
일본의 견당청익승(遣唐請益僧) 엔닌(圓仁)은 서기 838년 7월부터 847년 초겨울까지 거의 9년 반 동안이나 당 나라의 동쪽 해안일대와 대운하변 그리고 광대한 제국의 내륙 등지를 여행하면서 상세한 기록을 남겼다고 하는데. 『入唐求法巡禮行記』라고 알려진 이 책은 시대적으로는 9세기 중엽을, 지역적으로는 중국에 한하여 기록하고 있지만, 실로 시간적·공간적·지역적인 것을 초월한 역사적인 문헌임에 틀림이 없다. 그것은 한 시대의 사회와 민중의 생활을 그토록 상세하고도 생동감 있게 적어 놓은 여행기는 일찍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순례행기』는 당을 여행하였던 일본스님의 기록이지만 전권을 통하여 등장하는 인물의 반 이상은 당나라 사람이나 일본 사람이 아닌 신라사람들이 차지한다. 우리가 이 기록을 통하여 당시의 세계를 보는 한 이들 신라인들은 세계무역사의 새로운 단계, 즉 동서해상무역의 초기단계에 가담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세계는 종전의 당을 중심으로 한 정치적 조공 무역에서 점차 사교역을 주로 하는 경제관계로 그 내용이 바뀌어 갔다. 그리고 우리는 이 『순례행기』를 통하여 당나라에 거주하던 신라인 마을과 그 분포, 그들의 생업, 그리고 그들 간의 유대와 조직이며 그들이 누렸던 치외법권적 특권 등이 어떠했던가를 알 수도 있다.
그리고 당나라 가담(賈耽, 730-805)이 저술한 『도리기』(道里記, ·신당서· 권 43 지리지)에 보면 중국에서 신라로 가는 해로를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는데, 우리가 흔히 이야기 하는 ‘북방해로’인 것이다. 이에 의하면 등주(登州, 산동성 봉래 山東省 蓬來)를 출발하여 동으로 대사도 (大謝島, 장산도)· 구험도(구기도)· 동도(대·소험도)· 조호도(남황성도)를 거쳐 300리를 나아간다. 그리고 북으로 노철산 수로를 지나 마석산(馬石山, 노철산)의 도리진(都里津, 여순만)까지 200리를 가서 동으로 청니포(대련 부근)·도화포(금현 청수하구)·은화포(장하현 화원구)·석인왕(석성도)과 대양하구를 지나 오골강(烏骨江, 압록강)까지 800리 길을 간다. 여기서 다시 남쪽 해안, 즉 한반도 서해안을 따라 오목도(평북 선천군)·패강구(대동강 하구)·숙도를 지나 장구진(황해도 풍천군)에 이른다. 다시 곡도(백령도)· 진왕석교와 마전도·고사도(강화도)· 덕물도(덕적도)를 거쳐 당은포에 이른다. 이곳은 『도리기』의 종점으로 신라 시대에 대중국 대륙 교통의 요지 가운데의 하나였다. 당은포에서 ‘육로로 700리’ 길을 가서 신라의 서울 경주에 도착한다.
이 해로는 곧 중국의 산동반도 등주를 출발하여 동북쪽으로 발해만의 노철산하구를 거쳐 대련만의 동쪽을 지나 압록강 하구에 이른다. 여기에서 한반도의 서해안을 따라 남하하여 대동강 하구와 초도를 지나 옹진만과 강화도·덕적도를 거쳐 남양만에 이르는 항로를 말한다. 이 뱃길은 552년 신라가 한강 유역을 점유한 뒤로 때로는 고구려·백제의 방해로 막히고 위협을 받기로 하였으나 멸망할 때까지 중단 없이 이용하였다.
신라와 당 사이의 이 행로는 근해연안 혹은 섬을 따라 항해하기 때문에 비교적 안전하였다. 비록 항해거리가 멀고 시간이 걸린다고는 하지만 안전하다는 이유로 이른바 ‘사신을 보내 헌공한다’는 정치적·경제적·군사적·의례적인 교빈관계가 이 항로를 통하여 오래도록 지속되었고 그래서 이 곳에는 일찍부터 신라관·발해관이 마련되어 있었다. 신라 말 경애왕 4년(927)의 기록이기는 하지만, 등주 신라관에 지후관(知後官) 이언모(李彦謀)를 파송하여 사무를 관장하게 하고 있다
그리고 적산포는 신라와 당 그리고 일본을 이어주는 가장 안전하고도 중요한 항로의 종착지이며 중원과 일본으로 아나가는 시발점이기도 했다. 장보고의 ‘대당매물사’ 선박이 오고가던 곳이며 일본으로 교관선(交關船)이 출발하던 항포였다. 장보고의 통제 하에 있던 국제무역항이던 셈이다. 법화원의 승려들까지도 일본으로 쉽게 갈 수 있었던 곳이며 청주병마사 오자진(吳子陳) 등이 신무왕의 즉위를 위문하는 사신이 되어 수행원 30여 명과 함께 법화원을 방문하고 신라로 출발했던 곳도 바로 이 적산포였다. 앞서 초주에서 9척의 신라선을 구입하여 귀국하던 일본의 조공사 선박도 이곳에서 출항하였고 후일 일본의 엔닌도 적산포에서 귀국하였다. 장보고의 무역선단을 이끌고 온 청해진의 병마사 최훈이 다시 이곳에서 양주로 유산포로 왕래하고 있다. 이와 같이 많은 선박들이 국제 무역선이건 연해안 운항선이건 적산포를 기점으로 남북을 멀다 않고 오고 가고 하였다고 한다.
4. 중국의 동쪽 끝 –봉래시- 등주(登州, 山東省 蓬來, Penglai )
장보고의 고향 같은 등주(登州)는 산동성의 동북쪽 해안에 있는 펑라이(봉래시, 蓬來市)시의 옛 지명이다. 지금의 봉래수성의 동쪽 해안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곳이다. 춘추 이래 그 이름이 사서에 나타나지만, 수당 시대에 와서 우리나라의 삼국을 비롯하여 발해·일본 등과의 교류가 활발해지자 더욱 번성하였다. 봉래라는 이름은 옛날 신선들이 살았다는 전설 속의 바다 가운데 있는 산의 이름으로 중국 한조 때 한 무제가 이곳에 와서 신선산을 보려고 했으나,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신선산이 보이지 않으니 경치가 수려한 이곳을 '봉래(蓬萊)'라 명하였다 한다. 그래서 그 이름이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으며, 당조 때에는 봉래진으로 불리우다 후에는 등주라 불렀다 한다.
이 봉래(펑라이)시는 필자와는 인연이 깊은 도시인데 처음 북경 청화대학 연구교수로 부임해 왔을 때 첫번째 프로젝트로 이곳 펑라이 신도시 개발 계획을 맡았었다. 프랑스에서 유학한 청화대학의 리더샹교수와 같이 이일에 참여하여 이곳 펑라이의 역사정과 발전성에 대해 많은 토론을 하고 이곳 관계자들로부터 융숭한 대접을 받은 기억이 있다.
그리고 이 곳의 봉래시의 관리는 연변과학기술대학 교수로 재직하던 시절 가르쳤던 제자 김광춘인데 처음 이곳 봉래로 발령 받아 와서는 무척 고생이 심하였지만 지금은 서른둘의 젊은 나이로 대한국 기업의 총괄 책임을 맡고 있는 봉래시 초상국 국장으로 일하고 있다.
중국 각지에서 성실하고도 능력이 출중하게 일하는 우리 한민족 동포들을 볼때마다 장보고의 후예로서의 자부심과 한민족 깊은 곳의 동질감을 느낀다.
이 등주수성은 한무제가 고조선을 침략할 때, 수·당이 고구려를 침공할 때 수군을 발진시킨 곳으로, 아름답다라기 보다는 전재의 냉기가 스며 있는 곳이고 이곳에서 발견된 고대 선박들을 모아 고선박물관이라고 하는 곳에 전시하여 놓았는데 이 박물관은1988년 7월부터 건축하여 1990년에 완공되었으며 통석선조각과 봉래 원나라 전선이 전시되어 있었다.
등주는 도교·신선사상과 매우 관계가 깊은 곳이다. 그래서 봉래각을 중심으로 한 전각들, 삼청전·천후궁·용왕궁 등에 모셔져 있는 상(像)들을 보면 짐작할 수 있고 등주 앞바다에는 예부터 신기루가 자주 일어나서 중국 사람들은 ‘해시신루’ (海市蜃樓)라고 하여 신선이 살고 있는 성시라 생각했다.
진시황의 신하인 서복(徐福)이 불로초를 구하고자 배를 타고 떠난 곳도 산동성 성산각(成山角)으로 이곳 산동은 중국 도교·신선사상의 고장이다. 그래서 8신선이 바닷가에 큰 동상으로 자리잡고 이곳 봉래시에 오는 이들을 반긴다. 중국인들에게는 8신선이 살던 곳으로 이곳 펑라이시가 잘 알려져 있다.
이곳은 북쪽이 바다이기에 겨울 바람이 유난히 차다. 그 찬바람 몰아치는 등주수성.. 그러나 해변가에 위치한 등주수성은 침입자들이 스스로 무기를 버리고 붓을 들어 시를 지었다고 할 만큼 주변의 경관이 수려한 곳이다. 해안 절벽 위에 우뚝 솟아있되 거만하지 않으며, 성벽을 두르되 고집스럽지 않은 등주수성. 이곳이 여러 차례 전쟁에 휩싸인 접전지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중국의 도시들을 이동하면서 보면 중국의 도로들은 앞으로 50년 이상을 내다보고 설계한 도로여서 한산하다 못해 텅 비어 있는 도로와, 물류가 늘어날 경우를 대비하여 차도만큼 넓은 자전거 도로, 가로수 외에 가로수 옆에 묘목 밭을 둠으로써 이중의 방음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계획한 점을 보면 넓은 중국이라는 것이 몸으로 느껴진다.
봉래각이 있는 이곳 등주지역은 장보고 시대에 장보고 선단이 들렀던 곳인데 역사를 배우는 것은 그 시대의 사람들이 무슨 생각으로 어떻게 살았는가를 아는 것이 중요하며, 단순히 역사적인 사실을 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과거의 역사를 보고 오늘 현재에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판단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현재에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 보다 역사적인 사실에 치중한 것이 아니었던가 ? 사람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 사실 이 말은 앞으로 역사 공부 뿐만 아니라 내가 어떤 일을 결정할 때나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데 기준이 될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가 처한 위기의 순간들은 과거 장보고가 좁은 한반도를 떠나 드넓은 해상을 호령하던 시대를 거울삼아 동북아 시대를 꿈꾸는 한민족 공동체의 앞길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5. 위해시 석도진 적산법화원 (赤山法華院) – 장보고님이제 우리 차례입니다
영성시 석도진은 한반도와 중국을 1차로 연결하는 항구로서 1,200년 전 장보고 대륙진출의 거점이었다. 석도진항 부근에는 신라인들의 자치기관, 신라인들이 만든 조선소와 선박수리소가 있던 곳으로 알려져 있으나 현재는 흔적은 찾을수 없고 포구는 해수욕장으로 변했다. 문등현 청녕향 적산촌(산동성 영성시 석도진)은 산동반도 일대를 중심으로 한 신라인 사회의 심장부일 뿐만 아니라 당 내륙이나 연해안으로 이르는 교통과 나·당·일 삼국을 잇는 교역의 중심지이기도 하였다. 이곳에는 서기 820년대 초반 장보고 대사가 세운 적산법화원이 있어 당시 중국에 살던 신라인들의 마음의 고향이기도 하였다. 석도만에는 모야도(島)라는 섬이 있다. 통일신라 때 일본승려인 옌닌(圓仁)은 입당구법순례행기 (入唐求法巡禮行記)에서 장보고 선단의 배를 타고 이곳을 정오에 출발하였는데 그 다음날 오전에 신라의 땅을 보았다고 한다. 그만큼 한국과는 가까운 곳이다.
적산법화원은 산동성 영성시 석도진(石島鎭) 적산(赤山)기슭에 자리잡고 있는데 당조(唐朝)시기, 신라인 장보고(張保皐)가 지은 것으로 우리 전통의 사찰의 형식과는 다른 중국식의 형태로 볼 수 있다. 당조(唐朝)시기, 신라인 장보고(張保皐)가 지은 것으로 창립 초기에 법화경(法華經)을 읽었다 하여, 유래된 것인데 당시 산동에서 규모가 제일 큰 불교사원이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먼 옛날에 적산은 온통 붉은 것으로 뒤덮혀 있었는데 여기에 사는 적산신(赤山神)이 오가는 선박들의 안전을 가져다준다하여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와서 불공을 드렸다. 중국 역사서에는 당조(唐朝) 전성시기에 신라인 장보고가 출세를 위해 당(唐)으로 불법이민을 하였고. 무예가 능하고 전쟁에 용감하였기에 그는 당시 산동성 서주 절도사 휘하 주력부대 무령군의 군중소장(1000명 병사를 지휘하는 장교)으로 있었다고 한다. 흥덕왕 3년에 신라로 귀국하여 청해진을 창설하고 대사를 봉해 받음으로써 한·중·일 삼국의 해상무역을 독점하고 한·중·일간의 '해상실크로드'를 개척하여 해상무역왕으로 불리웠다. 그는 해상운송사업이 번영하기를 기원하면서 적산에 불교사찰을 지어 많은 스님들을 모셔와 <법화경>을 읽어 <적산법화원(赤山法華院)>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기원 838년 일본스님 옌닌대사 일행은 견당사로 입당하여 법화원에서 3년 가까이 묵으면서 법화원의 많은 신세를 졌다. 옌닌은 당조의 정치, 문화, 경제 등 여러방면의 지식을 배우면서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란 여행기를 썼는데 여행기에 법화원을 상세히 묘사하였다. 귀국한 뒤에도 옌닌은 적산법화원의 은혜를 잊지 못해 일본 교또의 소야산에 적산 이름으로 <적산선원(赤山禪院)>을 세웠으며 일본 불교 중종의 3세 좌주에 까지 올랐다 . 1988년 영성시(榮成市)에서는 민족문화를 발전시키고 선조들의 위업을 계속 이어나가기 위하여 원래의 위치에 재건하였다.
법화원은 북쪽으로는 적산(赤山)이 우뚝 솟아 진산을 이루고 서남쪽은 낮은 산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으며 동쪽은 활짝 열려 바로 아래 산동 제일의 어항 석도만(石島彎)과 오(吳)나라 철공인 간장(干將)의 전설이 전해오는 막야도(莫耶島)가 보이는 아름다운 곳에 자리잡고 있다. 더욱이 절 마당을 서에서 동으로 가로질러 흐르는 맑은 물이 이 절의 운치를 한껏 더해 준다. 연간 5백 섬의 알곡식을 수확하는 장전(莊田)을 소유하였던 법화원은 장보고 휘하의 구당신라소의 압아인 장영과 임대사(林大使), 그리고 왕훈 등 3명에 의하여 경영되었다. 상주승 24명, 니 2명, 노파 3명 등 29명이 있었고 5백석 수확의 장전은 아마도 가까운 척산(斥山)의 광대한 전지와 유산포 소촌 등의 땅이 그 일부였을 가능성이 크다. 법화원이 타국에서 이와 같은 넒은 땅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이 사원의 크기와 위상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일부 기록만 보아도 법화원에는 법당과 장경각을 비롯하여 승방, 니방, 그리고 수개의 객사, 식당, 창고 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법당의 크기는 당시 거행된 겨울철 법화경 강의에 모였던 스님과 신도들의 수로 추측이 가능하다.
장보고가 1200백년 전에 세웠다는 적산 법화원 그리고 그 지역이 모두 온통 붉은 돌로 이루어져있어서 적산(赤山)이라고 한다. 그곳의 초가집 민가들도 모두 이 붉은 돌로 이루어져 있고, 이곳 산동사람들이 중국에서 돌공사를 잘 하기로 이름이 나있다. 중국 각도시의 공사장에서 주요한 돌공사의 일은 거의 산동사람들이 도맡아 하고 있음은 우연한 일이 아닌듯 했다. 장보고의 마음이 서려 있는 곳, 천 이 백 년을 넘어 이곳에서 나에게 역사적인 의미로 다시 살아난 미래인 장보고가 해상운송사업이 번영하기를 기원한 곳 적산법화원! 한․중․일간의 해상실크로드를 개척한 해상 무역왕 장보고의 영정을 보았다. 그는 지금 내게 무엇을 원하는가?
1200년 전에 이 곳에 세웠다는 뜻의 글이 새겨진 기다랗고 커다란 돌 앞에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신라시대의 무역과 장보고의 활동, 일본의 승려 옌닌. 신라방 등에 대한 설명을 잠시 들었다. 장보고(張保皐)는 무예가 능하고 전쟁에 용감하였기에 그는 당시 산동성 서주 절도사 휘하 주력부대 무령군의 군중 소장(1000명 병사를 지휘하는 장교)으로 있었다고 한다. 그는 흥덕왕 3년에 신라로 귀국하여 청해진을 창설하고 대사를 봉해 받음으로써 한·중·일 삼국의 해상무역을 독점하고 한·중·일간의'해상실크로드'를 개척하여 해상 무역왕으로 불리웠다고. 그는 해상운송사업이 번영하기를 기원하면서 적산에 불교사찰을 지어 많은 스님들을 모셔와 <법화경>을 읽어 <적산법화원 (赤山法華院)> 이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1987년 일본학계의 저명한 한 인사가 영성시정부의 협조아래, 200만 인민폐를 투자해 이곳을 중건했고, 중건사업을 거쳐 국제적인 투자와 지지를 받게 되었으며 아직도 장보고가 일본인의 후손이라고까지 한다고 한다.
산동지역 ‘장보고 역사연구회’의 장샤(張峽·중국 향토사학자) 회장은 “장보고는 아버지가 석도(스다오 . shidao)출신이며 신라에 귀화한 인물”이라고 주장하였다. 고구려사 왜곡도 모자라 장보고까지 ...... 절 한쪽의 ‘장보고 기념관’은 한 중국인 기업가가 34억원의 거금을 쾌척해 건립 중이고, 현재의 절 건물도 스러진 옛터에 1988년 중국측이 재건한 것이라니…지금도 대대적으로 복원작업 및 조성 공사를 하고 있었는데 거대한 장보고상을 산 위에 짓고 장보고 기념관을 짓는 등 이곳 지방정부에서 한국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공들이는 모습에 비해 1991년 한 대학 교수의 노력으로 장보고 기념탑이 세워진 게 전부인 우리의 현실과 노력은 너무나 미약하고 비교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장보고기념탑(張保皐紀念塔)은 적산법화원의 북쪽에 있는데 1991년 한국성신여대 교수, 세계한민족연합회(世界韓民族聯合會)회장 최민자(崔珉子)교수가 적산법화원에 왔다가, 한민족의 선각자 장보고대사를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것인데 1994년 7월 24일에 준공되었으며, 탑의 설계가 특이할 뿐 만 아니라 그 의미가 한·중 양국의 친선이 영원함이라고 하여 더욱 깊다고 하겠다. <장보고기념탑(張保皐紀念塔)> 여섯 글자는 김영삼 전대통령의 친필휘호이어서 적산법화원은 역사가 유구할 뿐 만 아니라 한·중 양국 국민의 친선을 상징하는 장소가 되어있다. 재 중국정부로부터 4A급(AAAA),으로 인정받아 인민폐 2억위엔(한화 2백필십억원정도)의 정부 지원을 받아 거대하게 장보고 기념공원을 가꾸고 있다.
마치 우리의 것을 우리가 소중히 여기지 않아 남에게 빼앗긴 기분이었다. 이제서야 드라마 제작을 위해 완도에 청해진 세트작업을 하고 그 흔한 동상하나 없고 만화나 게임 마져 이순신이 판을 치고 장보고는 한낮 지방호족 정도로 배워왔으니…많은 이들이 장보고 이름 석자와 청해진, 신라말기 해상무역을 하며 해적을 물리친 장수, 혼란기에 권력다툼으로 희생된 사람 정도의 얄팍한 상식만을 알고 있었음이 송구한 마음으로 해상왕 장보고의 숨결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적산법화원을 뒤로 하며 아쉽게 북경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6. 중국의 3대 명산인 태산. –공자의 고향 곡부
산동성의 수도(성도)는 제남이지만 우리가 가장 가보고 싶은 곳은 태산과 곡부이다. 곡부는 공자의 묘와 사당 기념관이 있는 곳으로 우리나라 특히 유교를 숭상하는 이들에게는 메카와 같은 곳이라 할 수 있다. 제남에 내리자마자 태산으로 가는 차를 예약한 후에 시내 호텔에 여정을 풀었다. 아시안 컵 축구 경기가 이곳 제남에서 열리고 있는 터라 산동 여러 지역의 한국인들이 한국과의 경기를 응원하러 이곳 제남에 숙박하고 있다.
아침일찍 새벽 바람을 가르며 도착한 태산은 높이는 1,545m로 이름처럼 거대한 규모에 장엄한 경관을 자랑하는 산은 아니었으나, 곳곳에서 명승고적과 비문을 발견할 수 있을 만큼 역사적 가치가 높고, 골의 생김생김이 아름다워 가히 태산이라 불릴 만한 산이었다. 태산의 경관은 계곡, 폭포 등 우리나라의 산과 비슷하였으나 아름다움과 규모가 금강산이나 설악산에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중국의 많은 높고 아름다운 산보다 태산이 유명한 것은 태산을 한 번 오르면 10년 젊어진다는 말이 있고 또 많은 황제들(20여 명)이 제를 지내러 왔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태산의 꼭대기에는 진시황이 제사를 지냈다는 조그만 절이 있고 이름처럼 거대한 규모에 장엄한 경관을 자랑하는 산은 아니었으나, 곳곳에서 명승고적과 비문을 발견할 수 있을 만큼 역사적 가치가 높고, 골골의 생김생김이 아름다워 가히 태산이라 불릴 만한 산이었다. 태산은 옛부터 중국의 5대 명산이 아닌가. 그리고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이로다..." 시조로만 읇조리던 바로 그 태산. 태산은 옛 부터 황제가 봉선이란 의식을 통해 만민 앞에 공식적인 그리고 정통성의 계보를 잇는 통치를 공표하는 예식을 이어왔다. 지금은 케이블카를 타고 쉽게 정상에 오를 수 있지만, 그 옛날 숱한 백성이 피땀 흘려 이곳까지 황제를 모시고 와서 치뤘을 의식을 떠올리니 백성의 통한과 한(恨)을 어렵잖게 떠올릴 수 있었다.
중국은 대부분 화장을 한다. 그래서 산이 많은 이곳 들판을 아무리 지나가도 무덤이 없다. 중국의 지도자 주은래는 죽은후에 3무를 남겼다고 하는데 첫째가 무덤을 남기지 않았고 자식을 남기지 않았고 재산을 남기지 않은 걸로 유명하다. 우리나라 지도자들이 새겨 들어야 할 대목이 아닌가 한다. 우리나라처럼 산새가 수려하지 않지만 태산은 케이블카를 타고 계단을 걸어 올라 정상에 오르니 구름아래 비껴 보이는 세상이 모두가 나의 발 아래에 펼쳐져 있고 구름에 끼인 아래의 절경들이 사라졌다 다시 나타나는 모습들은 가히 신선의 모습을 연상케 하였다.
부리나케 태산을 내려와 다시 차를 돌려 공자의 고향인 곡부로 향하니 이미 오후를 넘긴 시간이지만 운전 기사의 빠른 운전솜씨(?)로 무사히 공자의 족적들을 볼 수 있었다.
한국인들은 항상 이렇게 시간을 촉박하게 다니는냐는 안내자의 힐책이 귓가에 멤돌지만 어찌하겠는가 짧은 시간에 많은 것을 한꺼번에 하는 것이 이미 우리의 일상이 되어 버린 우리내의 습성을 우린들 어찌하겠냐고…
7. 청도 노산 – 아름다운 해변 산동성의 최고의 경제도시로 성장한 청도는 중국에서 아름다운 항구로 4위인 경제중심 도시이자 연해개방 도시이며 휴양지이다. 우리나라 기업이 많이 진출한 도시로 5만여 명의 한국인이 살고 있으며, 주로 한국인이 경영하는 기업으로는 공예품회사, 문방구 관련사업, 전자제품사업, 프라스틱 사업이라고 하는데 한국 간판이 심심치 않게 보인다. 2008년 북경 올림픽이 열릴 때 해상 경기는 청도 바다에서 열릴 예정인데 중국인들도 청도를 가장 살기 좋은 휴양지로 손 꼽는다.
그리고 청도와 북경이 중국에서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도시인데 각각 5만 명 가량 있는데 이는 중국에 장기적으로 거주하여 살고 있는 한국인이 30만 명으로 볼 때 거의 3분의 1정도의 인원이다. 북경은 중국의 수도 이므로 중국에 진출한 기업들의 주재원들이 주로 있고 좋은 학교가 밀집된 곳이어서 유학생이나 비교적 안정적인 봉급생활자인 주재원들이 압도적으로 많다. 하지만 청도는 중소기업이 많이 진출하고 있고 조선족의 숫자도 동북 삼성을 제외하고 가장 많은 곳이다.
청도는 명승지인 노산에서 나는 샘물로 만들어진 청도맥주가 유명한데, 독일이 점령했을 때 이곳에 독일맥주공장을 세웠기 때문이라고 한다. 인구가 224만이나 되는 큰 도시답게 사람들로 북적대는 5.4광장(3.1운동 같은 독립운동이 일어난)은 비가 오는데도 사람들로 북적대고 있어서 버스 속에서 안개속에 희미한 잔교를 보고 가노라니 아름다운 해변에서는 비를 맞으면서 해수욕을 하는 사람들이 보였고 해안을 따라 지어진 집들이 아름답고 서양의 도시처럼 아기자기한 도시이다.
청도를 대표하는 명소인 노산(Lao Shan : 라오샨) 은 "태산이 아무리 높다 해도 동해의 노산만 못하다." 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중국 내에서 노산은 명산으로 꼽힌다. 산동 반도의 동서부에 위치해 있고, 청도시 동쪽으로 약 30㎞ 떨어져 있으며 황해에 바로 인접해 있다. 옛날에는 도교의 본거지라고 여겨질 만큼 노산의 도교 사원은 매우 유명하다. 노산은 중국 정부에 의해 가장 아름다운 관광지로 선정되기도 했으며, 세 개의 등산로가 있다. 1,113m 높이의 정상 코스를 등반하는 데에는 약간의 체력과 지구력이 요구되지만, 청도의 경관과 정상으로부터 외곽 지역을 둘러싼 곳의 경치는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이며, 특히 이곳 정상에서 바라본 바다 너머로 일출, 일몰 등의 장관은 두고 두고 잊지 못할 추억이 될 것이다. 그리고 청도 바닷가의 수려한 경관들 독일풍의 산기슭 별장과 서구 풍의 해변 휴양 별장들은 그 동안 내륙과 동북에 익숙했던 필자에게는 이곳이 중국인가를 의심케 하기에 충분했다.
8. 중국 이야기(45)-중국의 한민족 거주지역 판도가 바뀌고 있다
중국과의 수교 13년째를 맞아 동북지역 특히 연변을 중심으로한 교역과 관광에서 출발하여 처음에는 동북삼성지역인 길림성지역의 장춘시 길림시 교하시 통화시와 흑룡강성지역의 하얼빈시 목단강시 그리고 요녕성의 심양시 대련시지역의 교역과 북경 청도 상해 중심으로 퍼져 나갔다. 조선족의 판도 역시 중국 개혁개방 20년간 기존의 동북지역 농촌 지역에서 벗어나 점차 경제가 발달한 지역인 연해도시로 확산되면서 심양 대련을 중심으로한 동북시역과 북경 천진을 중심으로 한 경진지역 청도 위해 연태를 아우르는 산동지역, 난징 이우 푸동 소주 항주를 포함하는 상해지역 심천 광주의 광동지역등 새로운 5개 지역으로 퍼져 가고 있는데 이는 처음 중국의 경제가 홍콩을 중심으로 남쪽 연안에서부터 동부 연안까지 이어졌다가 다시 내륙과 동북으로 발달하는 경제흐름의 지도를 반대로 닮아 가고 있는 형상이다.
동북삼성을 제외하고 인구 십만 이상의 조선족 도시는 북경과 산동지역이고 5만 이상의 도시는 상해 광동 천진등 3개지역, 1만명이상은 강소성 절강성 해남도등 3개 지역이다. 이 지역의 조선족 인구는 현지 조선족 기업협회와 조선족학교, 정부 해당부문을 통한 자료와 동북 3성 12개 현(시)를 상대로 실질적인 조선족 거주 이주상황을 표본 조사한 자료를 통합 분석한 결과 중국 전국적으로 동북삼성을 제외할 때 무려 60만에 이른다. 그리고 한국을 비록한 외국에 진출한 인구가 20만명으로 추정되고(현재 한국에서는 한국에 거주하는 한족을 포함한 중국인의 숫자를 대략 30만명으로 보고 있슴), 그리고 동북삼성의 도시에 거주하는 40만의 조선족을 합하면 조선족의 도시화율은 총 조선족 200만명중 120만명으로 60%를 넘는다,
그리고 한국인의 중국 진출을 보면 더욱 그 증가는 놀라운데 차이나드림을 안고 연평균 150여만명의 한국인이 중국을 다녀가는데(2003년 156만명) 구체적으로 중국에 장기적으로 거주하고 있는 한국인구는 북경에 5만 5천명, 천진에 3만 명, 산동지역에 8만 명, 화남지역에 1만 8천명, 동북에 4만 2천명, 상해에 4만 3천명 그리고 기타지역에 2만 5천명으로 총 29만 3천명으로 집계되었다. 또한 한국 기업체 숫자도 산동에 1만 5천여 개 북경과 상해에 각각 8천여 개, 화남지역에 7천 100여 개 동북에 6천여 개 천진에 1천 900여 개, 기타지역에 6천여 개 등 총 5만 2천 여 개로 나타나고 있는데 이런 추세로 간다면 2010년에 이르면 재중 한국인의 인구는 100만 명에 이르리라 생각된다.
이는 최근 중국 사회과학원이 발표한 ‘중국 도시경쟁력 보고서’에서 중국 9대 경제 구역중 5위까지의 지역으로 1.홍콩 마카오 심천 광주를 중심으로 한 화남 지역, 2.상하이를 중심으로 한 장강하류지역, 3. 베이징 천진을 중심으로 한 화북지역, 4. 대련 할빈 장춘 심양 길림을 중심으로 한 동북지역, 5. 청도와 제남을 중심으로 한 황하 중하류 지역으로 이는 한국인과 조선족이 자리잡고 있는 5대 지역과 일치하고 있으며 중국에서 가장 북쪽인 흑룡강 성부터 남단의 해남도에 이르기까지 중국 연해를 따라 에스(S)을자 형태의 모양을 이루고 있다.
한민족인 한국인 중국의 조선족 러시아의 고려인 그리고 북한과 재일 동포,와 재미동포등 재외의 한민족은 지난 1200여 년전의 장보고의 해상 루트를 따라 발전하고 있슴이 우연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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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essor Kim, June-Bong (김준봉,金俊峰) Ph D. Dept. of Architecture Beijing Univ. of Technology,100084, P.R.China .Urban & Housing Environment Research Center China Office 100044 中國 北京市 朝陽區 北京工業大學 建築科 敎授 13311589848 E-mail :kimjunebong@hanmail.net: jbkim@bjut.edu.cn Korea Office: 82-2-337-5335(延世大學校都市工學科 東北亞都市住居環境硏究所 所長/客員敎授),82-11-469-0743, F:02-337-0984 E-mail: jbkim@yonsei.ac.kr
첫댓글 고구려 유민 이정기 장군이 산동반도에 세운 <靑州>의 제나라가 빠지면 안되는 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