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는 맑스가 『공산당선언』에서 유럽을 배회하는 유령에 대해 이야기한 지 150년이 되는 해이다. 그로부터 150년이 지난 현재, 맑스가 주목한 공산주의라는 유령을 현실화하고자 했던 현실사회주의의 실험은 실패로 끝난 가운데 새로운 유령이 세계의 구석구석을 지배하려고 배회하고 있다. 그것은 신자유주의라는 유령이다. 한국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정부수립 50년 만에 최초의 선거에 의한 평화적 정권교체로 김대중정권이 출범했다. 그러나 이는 이른바 '외환위기'에 따른 'IMF관리체제'로의 추락과 함께 진행되었다. 아니 50년 만의 선거에 의한 여야간 정권교체는 불행하게도 경제위기에 따른 IMF관리체제로의 추락이라는 유례없는 비극에 의해서야 비로소 가능했고 이에 빚지고 있다.註1그 결과, 우리 사회는 IMF에 의해 강제되고 있으며 김대중정권 스스로도 자신이 신봉하는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의 몸살을 앓고 있다. 합법화된 정리해고의 칼날이 춤을 추면서 실업률이 공식통계만으로도 7.9%를 넘어섰고 외국의 이야기로만 알고 있던 노숙자들이 우리 사회의 일상적 풍경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이 글은 이와 관련, 한국의 현실을 신자유주의와 민주주의라는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조망해보는 데 목적이 있다.
2. 자유주의, 신자유주의, 그리고 민주주의
한국에서의 신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문제를 다루는 데 전제가 되어야 할 것은 1 일반론적 수준에서의 신자유주의와 민주주의, 나아가 신자유주의의 뿌리인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관계에 대한 문제, 2 제3세계에서의 신자유주의, 즉 종속적 신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문제이다. 논의에 앞서 하나 더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이다. 물론 소련촵동구의 몰락 이후 민주주의의 문제는 민주주의를 단순히 절차적 민주주의로 폄하하는 로버트 달(R. Dahl)류의 최소주의적 정의가 지배적 시각이 되어버렸지만 여전히 그 의미는 다양하고 논쟁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정의의 차이로 인한 단순한 개념적 논쟁을 피하기 위해 이 문제를 간단히 정리하고자 한다. 민주주의는 크게 보아 자유주의적 전통에서 주목하는 '절차적 민주주의' 내지 '정치적 민주주의', 사회민주주의적 전통에서 주목하는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분배의 민주주의), 맑스주의적 전통의 '생산의 민주주의',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 등에서 주목하는 '차이의 정치'와 '일상성의 민주주의'라는 네 영역의 문제로 집약될 수 있다. 다만 이 글에서는 민주주의의 문제를 정치적 민주주의와 사회경제적 민주주의의 문제로 국한하여 논의를 진행하고자 한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신자유주의는 전후 세계자본주의를 이끌어온 복지국가촵케인즈주의촵포드주의(포드주의적 국가독점자본주의)註2의 위기 속에서 위기 타파를 위해 추진되는 자본의 공세로서, 그간의 국가 개입과 규제에 반대하여 규제로부터 자유로운 자유시장만이 자원의 효율적 배분에 적합하다고 주장하는 경제이데올로기이다. 이같은 신자유주의의 민주주의적 함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역사적 시각을 통해 신자유주의의 원조인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관계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자유주의는 신자유주의와 마찬가지로, 사유재산권과 시장의 효용에 대한 맹신에 기초해 경제적 자유를 중심으로 국가의 개입에 반대하고 개인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생겨난 정치사상이다. 그런데 이같은 자유주의와 이에 기초한 시장경제가 민주주의, 즉 최소한의 정치적 민주주의(이하 별도 수식어가 없는 민주주의는 정치적 민주주의를 칭함)에 기능적이거나 최소한 친화적이라는 것이 지배적 시각이지만註3역사는 이와는 다른 이야기를 해주고 있다. 한마디로 역사적으로 자유주의와 시장경제가 민주주의와 친화되어 '민주주의와 함께하는 자유주의'(liberalism with democracy), 즉 '자유민주주의'가 된 것은 최근래의 일이며 자유주의는 기본적으로 '민주주의에 반하는 자유주의'(liberalism against democracy)였다. 이러한 점은 두 가지 측면, 즉 자유주의사상의 계보와 그 구체적 실현물인 시장경제의 역사에서 입증될 수 있다. 우선 정치사상적으로 자유주의사상은 봉건적 압제에 저항해 일어난, 그 시대로서는 일정하게 진보성을 가진 정치사상으로서 민주주의의 발전에 일정하게 기여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자유주의가 투쟁한 것은 단지 유산자들의 민주주의를 위해서였으며 정치적 민주주의의 최소 필요조건인 보통선거권에 대해서는 일관되고 치열하게 적대적 태도를 보여왔다. 자유주의자 중 개혁적인 '후기'자유주의자라고 볼 수 있는 밀(J. S. Mill) 같은 사상가들까지도 "읽고 쓰기와 기초산수를 할 수 없는 자가 선거에 참여해서는 안된다"느니, "고용주는 평균적으로 노동자들보다 지적"이기 때문에 "재산상의 자격에 근거를 두는 것도 어쩔 수 없다"느니, "납세자들만이 선거에 참여해야 한다"느니 하는 주장을 통해 보통선거권에 저항했다.註4 시장경제의 역사를 보더라도 동일하다. 테르본(G. Therborn)의 역사적인 연구註5와 이후의 연구들註6이 잘 보여주듯이, 자본주의와 시장경제 3백여년의 역사에서 선진자본주의국가에서도 보통선거권이 도입되기 시작한 것은 1910년대, 본격적으로 보편화된 것은 1940년대에 불과하다. 특히 테르본의 연구에서 주목할 것은 민주주의가 자본주의와 시장경제, 그리고 자유주의 '때문에' 이루어졌다기보다는 이에도 '불구하고' 이에 '반하여' 노동자계급 등 민중세력의 밑으로부터의 압력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같은 보통선거권의 도입 등을 통한 '민주주의에 반하는 자유주의'의 '민주주의와 함께하는 자유주의'로의 전화는 밑으로부터의 압력이 지배적 요인이었지만 그것만으로 가능했던 것은 아니다. 이는 테르본의 표현을 빌리면 이러한 밑으로부터의 요구를 수용할 수 있는 "현대자본주의의 팽창성과 탄력성"에 의해 가능했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할 것은 자유주의의 민주주의와의 결합을 가능케 했던 현대자본주의의 팽창성과 탄력성이 자본주의가 '탈자유주의화'된 결과라는 점이다. 즉 현대자본주의의 팽창성과 탄력성은 뉴딜로 상징되는 국가의 시장경제에의 전면적 개입, 즉 자본주의의 국가독점자본주의 체제화와 군사주의적 케인즈주의화, 나아가 노동시장의 유연성에 반하는 포드주의에 의해 가능했다는 사실이다. 자유주의에 대해서 두 가지만 더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첫째, 자유주의의 자유방임과 야경국가의 신화이다. 이에 대해서는 폴라니(K. Polanyi)가 잘 비판한 바 있지만 맑스로 훨씬 더 거슬러올라갈 필요가 있다. 즉 『자본』에서의 맑스의 표현대로 생산은 단순한 물질의 생산이 아니라 "생산의 사회적 조건의 생산"이기도 하며 이같은 생산의 사회적 조건은 시장에 의해 결코 이루어질 수 없으며 국가의 개입을 필요로 한다. 즉 자본주의는 생산자와 생산수단의 분리에 따른 소유관계와 점유관계의 일치로 인해 '경제'와 '정치'가 두 개의 분리된 영역으로 표상되어 나타나지만 이미 경제 속에는 정치와 국가가 내재해 가로지르고 있다.註7따라서 국가의 개입이 없는 자본주의와 시장경제는 애당초 불가능하며 발본적 시각에서 볼 때 모든 자본주의는 '국가자본주의'이고 모든 자본가계급은 '국가자본가계급'이라는 주장까지도 가능하다.註8 둘째, 자유주의가 신봉하는 시장의 효율성 신화이다. 이는 단순히 정보비용 등에 따른 시장신봉론자들이 상정하는 완전경쟁 불가능성의 문제가 아니라 좀더 근본적인 문제이다. 우선 자본주의의 구조적 특성에서 연유하는 내재적 경향으로서의 과잉축적의 문제로 이는 주기적으로 공황 등 엄청난 재앙을 가져다준다는 점이다.註9나아가 자본간의 경쟁에 따른 시장경제는 불가피하게 경쟁이 그 대립물인 독점으로 전화되어 기껏해야 독점자본 지배하의 '독점적 시장경제'로 전화된다는 사실이다. 이 두 경향이 결합한 결과가 바로 대공황과 20세기 전반의 세계사적 비극이다. 즉 폴라니가 잘 분석했듯이 파시즘과 세계대전, 공황이라는 세계사적 비극이 사회적 통제를 벗어난 '자율적 시장경제'의 결과라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註10
신자유주의와 민주주의 앞서 지적했듯이 신자유주의는 20세기 전반 자유주의와 자유방임적 시장경제가 낳은 세계자본주의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도입된 케인즈주의적 국가개입주의와 포드주의적 국가독점자본주의체제가 1970년대 들어 다시 위기에 처하면서 생겨난 시장주의적 처방이다. 즉 '시장의 실패'를 해결하기 위한 '해결사'로서의 국가가 다시 '문제'로 전화하면서, 국가가 해결하고자 했던 '문제'인 시장이 다시 '해결사'로 복귀한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의 순환을 통해 원점으로 되돌아온 셈이다. 한 연구자는 이와 관련해 현재의 상황을 "1930년대로의 전진?"이라고 의미심장하게 비꼬고 있다.註11 물론 신자유주의가 단순히 자유주의로의 복귀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신자유주의에 따른 시장의 자율화가 현재의 국가독점자본주의를 자유주의시대의 경쟁적 자본주의로 되돌려주지는 않을 것이며, 포드주의적 축적양식을 대체하는 유연축적과 포스트포드주의가 과거의 유혈적 테일러주의와 같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포드주의적촵복지국가적 국가독점자본주의체제로부터 포스트포드주의적촵근로국가적 국가독점자본주의체제로의 전환이 나타나고 있다.註12이밖에 최근의 신자유주의는 두 가지 주목할 만한 점이 있다. 첫째, 신자유주의는 일국적 수준을 넘어서 '지구화'라는 흐름과 결합하여 '지구적 신자유주의'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물론 최근의 국제적 경제교류 수준이 1920년대보다 못하다는 것을 들어 지구화는 신화에 불과하다는 반론이 제기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문제는 현재의 자본의 지구화는 과거와는 질적으로 다르게 '생산의 지구화'라는 흐름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이와 결합된 신자유주의는 맑스의 표현을 약간만 바꾼다면 "모든 민족에게 멸망하지 않고 싶으면 신자유주의를 채택하도록 강제"한다는 점이다. 둘째, 한 연구자가 최근 "금융자본의 최종 승리"라고 표현한 것註13으로 70년대 이후 지속되는 서구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 속에서 평균이윤율이 하락하여 과잉축적된 미증유적 규모의 자본들이 투자처를 찾지 못하고 투기자본화한데다가 이것이 전자결제 등 정보화혁명 및 지구화와 결합해 신자유주의가 신자유주의적 금융자본의 세계화로 표상된다는 사실이다.註14 이같은 신자유주의의 민주주의적 함의는 무엇인가? 신자유주의는 한마디로 '민주주의와 함께하는 자유주의'로부터 다시 원래의 모습인 '민주주의에 반하는 자유주의'로의 복귀라고 할 수 있다.註15신자유주의의 반민주적 성격은 이미 여러 연구자들이 지적하여 널리 알려졌기 때문에 긴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 새처(Thatcher)주의와 레이건주의가 잘 보여주듯이 신자유주의는 성실하게 일하고 세금을 빼앗기는 '좋은 국민'과 게으르고 기생적이어서 복지혜택이나 타먹는 '나쁜 국민'을 나누어 전자의 지지 아래 후자를 공격하는 '두 국민전략'註16에 의해 그동안 어려운 투쟁으로 획득한 민주적 성과들, 특히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고 있다. 특히 이러한 민주주의 후퇴의 피해는 실업자촵빈민촵여성촵복지수혜자촵소수민족 등 사회적 약자에 집중된다는 점에서 우려되는 바가 크다. 나아가 신자유주의는 이른바 중산층을 공격하여 하향평준화함으로써, 무한경쟁의 사회적 다윈(Darwin)주의에서 살아남아 과거에 비해 부유해진 20%와 적자생존에서 도태하는 80%의 "20대 80의 사회" 내지 "5분의 1의 사회"로 우리를 이끌어가고 있다.註17 신자유주의를 바라보는 데서 주의할 점은 신자유주의가 작은 국가와 국가의 축소를 지향한다는 통념이다. 그러나 이는 신화에 가깝다. 물론 신자유주의가 민영화, 탈규제, 복지기능 축소 등을 통해 국가의 축소를 지향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동시에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신자유주의가 '법과 질서'를 강조하고 '범죄와의 전쟁'을 선언하여 경찰력을 오히려 늘리는 등 '강한 국가'를 지향하는가 하면 낙태규제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어느 부문에서는 국가의 규제강화를 주장한다는 점이다. 즉 신자유주의는 국가의 축소가 아니라 국가의 기능 조정을 의미한다는 것이 더 정확한 평가일 것이다. 이와 관련해, 신자유주의는 단순한 사회경제적 민주주의의 후퇴를 넘어 정치적 민주주의의 후퇴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신자유주의는 1970년대 중반 세계자본주의의 위기 극복을 위한 세계질서의 '초제국주의적 지배전략'을 지향했던 '삼각위원회'(Trilateral Commission)가 지적한 '민주주의의 과잉'과 '통치가능성의 위기', 즉 또끄빌(Tocqueville, 프랑스혁명 등 민주주의의 확산에 우려를 표명한 프랑스의 정치학자)효과에 대한 처방을 현실화하여 '법과 질서'라는 이름 아래 (사회경제적 민주주의의 후퇴만큼 급격하지는 않지만) 정치적 민주주의에 대해서도 공격해오고 있다. 신자유주의가 정치적으로 '권위주의적 포퓰리즘'註18이니 '야금야금형(creeping) 권위주의'이니 하는 평가를 받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신자유주의가 정치적 민주주의를 후퇴시키는 또다른 측면은 신자유주의 자체보다는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와 관련이 있다. 즉 신자유주의적 지구화는 "민주적 의사형성으로부터 (촵촵촵) 대다수에게 생사여탈적 상관성을 가진 결정을 분리"註19시킴으로서 다수 국민들을 무력한 존재로 만들고 국제금융자본들이 주요 결정을 하도록 만들고 있다. 또한 신자유주의의 정치적 민주주의에 대한 가장 커다란 위협은 실업과 사회적 불평등 심화가 야기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공격, 네오나찌즘 등 유럽야만주의(Eurobaba-rianism)라고 불리는 국수주의적 움직임이다. 즉 신자유주의는 새로운 파시즘이나 그것이 아니더라도 20대 80 간의 전면적인 '계급전쟁'을 야기함으로써 정치적 민주주의의 파멸을 가져올 가능성이 적지 않다. 마지막으로 지적할 것은 자본의 공세인 신자유주의는 이미 그 본원지 유럽에서 앞서 열거한 부작용들을 야기함으로써 민중세력의 저항에 부딪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결과 최근 유럽연합의 15개 국가 중 12개 국가에서 '좌파정권'이 집권하고 사라진 줄 알았던 '유령'은 되돌아오고 있다.註20 제3세계의 신자유주의, 즉 '종속적 신자유주의'는 신자유주의 일반의 문제점 이외에도 제3세계적 특수성을 갖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주된 문제점인 사회경제적 민주주의의 후퇴는 제3세계의 경우 사회경제적 민주주의 수준이 취약하고 경제적 수준이 열악하다는 점에서 사회적 파장이 더욱 심각하다. 제3세계 신자유주의의 '원조'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신자유주의가 도입된 80년대 이후 '빈곤의 질병'으로 알려진 콜레라가 다시 기승을 부려 '콜레라시대'라는 자조적 표현이 생겨나는가 하면註21신자유주의를 '포스트모던적인 파괴'로,註22신자유주의의 80년대를 '잃어버린 10년'(lost decade)으로 부르고 있다. 제3세계 신자유주의의 또다른 특수성은 그것이 제3세계의 '탈산업화'와 '탈국적화'를 가져다준다는 점이다. "현대는 식민지시대가 아니므로 외국자본은 많이 들여올수록 좋은 것"이라는 김대중 대통령의 '국민과의 대화'에서의 주장과 달리 라틴아메리카의 경험은 신자유주의가 사실상 "제3세계의 재식민지화"註23이자 "싸이버네틱의 얼굴을 한 식민주의"註24임을 보여주고 있다. 사회경제적 민주주의와 달리 정치적 민주주의에 관한 한 제3세계에서 신자유주의는 다른 함의를 갖는 것으로 상정해볼 수 있다. 이는 정치적 민주주의가 발달한 서구와 달리 제3세계의 경우 정치적 민주주의가 취약하고 다양한 권위주의 국가가 억압정치를 펴왔다는 점에서 '국가개입의 축소'와 시장화는 정치적 민주주의의 전진을 유도한다는 가정이다. 사실 커밍스(B. Cumings) 같은 '비판적 학자'까지도 한국과 라틴아메리카 등의 최근 민주화가 제3세계의 시장개방과 경제적 자유화를 위한 미국 전략의 결과임을 보여주기 위해 "민주화는…(경제적 자유화를) 요구하기 위한 정치적인 필연적 귀결"이라고 주장하고 있다.註25그러나 이같은 주장은 문제가 많다. 라틴아메리카 신자유주의의 원조이자 대표적 사례인 칠레는 '인간도살자' 삐노체뜨정권의 초억압적 정치와 신자유주의가 모순 없이 지속해왔다. 즉 제3세계의 신자유주의는 많은 경우 민주주의의 얼굴, 즉 로크(J. Locke, 사회계약에 기초한 민주주의 옹호자)의 얼굴이 아니라 "홉스의 얼굴을 한 프리드먼"이었다註26(홉스T. Hobbes는 절대권력의 옹호자이며 프리드먼M. Friedman은 시장경제와 자유주의를 신봉하는 대표적 현대 경제학자). 나아가 '제3의 물결'이라는 80년대의 민주화 이후만 놓고 보더라도 라틴아메리카의 신자유주의는 정치의 퇴행, 정당체계의 위기, 대의민주주의의 위임민주주의로의 후퇴, 코포라티즘(corporatism)의 후퇴 등 오히려 정치적 민주주의의 전진이 아니라 후퇴를 가져다주고 있다.註27
3. 한국의 신자유주의와 민주주의
정실 신자유주의? 한국의 신자유주의 문제를 논하는 데서 우선 명확히하고 넘어갈 것은 우리에게 신자유주의가 새로운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즉 신자유주의는 전두환에 의해 처음 도입되어 라틴아메리카에서와 마찬가지로 "홉스의 얼굴을 한 프리드먼"으로 우리에게 첫선을 보였다.註28이같은 신자유주의적 정책기조는 노태우정권으로 이어지면서 더욱 심화되어 김영삼정권의 세계화전략으로 집약된 바 있다. 이같은 사실에 주목하는 일부 학자들은 최근의 경제위기가 일반적으로 믿고 있듯이 국가주도형 박정희모델, 즉 '발전국가'의 실패註29가 아니라 오히려 신자유주의적 시장이 실패한 결과라고 주장하고 있다.註30물론 이같은 주장은 박정희모델의 권위주의적 국가개입주의에 내재한 문제들을 은폐한다는 문제점이 있지만(사실 김영삼정권의 정책은 낡은 박정희모델과 신자유주의의 '최악의 조합'으로서 최근 위기는 '국가의 실패'와 '시장의 실패'가 중첩된 결과이다.註31) 신자유주의가 새로운 것이며 신자유주의가 문제를 해결해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지배적 시각에 대한 문제제기로는 귀담아들을 필요성이 있다. 이처럼 신자유주의가 1980년대 이후 한국사회에 확대되어왔지만 한국자본주의의 지배적 틀로 자리잡기 시작한 것은 지난 IMF위기 이후, 특히 김대중정권 출범 이후이다. 물론 김대중정권의 경제정책은 아직 구체적인 상이 완성되지는 않았고, '보수촵수구연합'이라는 정치적 정파연합과는 별개로 경제정책과 관련해서도 보수적 신자유주의자들과 독일의 사회적 시장경제론을 추종하는 개혁적인 '민주적 시장경제론자'들이 공존하고 있다.註32그러나 "유럽형 모델은 실패한 모델이고 미국형 모형이 우리의 살길"이라는 김대통령의 언명과 지금까지의 정책이 보여주듯이 김대중정권의 기본 성격은 신자유주의, 특히 세계체제적 위상과 관련해 '종속적 신자유주의' 정권이라고 할 수 있다.註33이는 IMF관리체제에 따라 외부로부터 강제된 결과이기도 하지만 김대통령 자신을 비롯해 현정권의 경제철학의 발로이기도 하다. '종속적 신자유주의'라는 특징 이외에도 한국의 신자유주의가 갖는 또다른 특징은 우려스럽게도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이 한국적 특징인 정경유착촵연고주의와 결합한 '정실(crony) 신자유주의' 내지 '정경유착형 신자유주의'로 나아간다는 점이다.註34즉 신자유주의가 여러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시장과 경쟁의 원리에 의해 나름의 '효율성' 제고 등의 결과를 가져온다면, 우리의 신자유주의는 그 구조조정마저도 시장과 경쟁의 원리가 아니라 정경유착과 연고주의에 의해 이루어짐으로써 신자유주의의 부작용만 가져오고 '신자유주의적 장점'은 실현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든다. 즉 '정실 국가주의'가 '정실 신자유주의'로 변화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이다. 이같은 의구심을 갖게 하는 것은 다음의 사례들이다.
사례 1: 정리해고 김대중정부는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의 일환으로 '가장 안정된 직장'으로 알려져온 금융기관 중 경쟁력이 없는 은행을 퇴출시키는 한편 퇴출은행을 합병한 은행이 필요인원에 대해서만 직원의 고용을 승계하고 나머지는 정리해고를 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이에 따라 동화은행이 퇴출되어 신한은행에 합병되었고, 신한은행은 동화은행 임직원 중 선별적으로 고용을 승계하였다. 그런데 민주노총에 따르면 간부급에서는 10명을 재고용했는데 이 가운데 8명이 자민련부총재, 전경제부총리, 전국회의장, 국회의원 등 정치인들과 은행감독원 등 관련기관 고위직 관계자들의 친인척인 것으로 밝혀졌다(『한겨레』, 1998년 8월 5일). 즉 신자유주의적 정리해고가 능력 기준이 아니라 정경유착 내지 연고주의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사례 2: 민영화 신자유주의의 중요한 정책 중의 하나는 민영화이다. 새 정부 역시 이같은 기조에 따라 국가의 주요 기간산업, 특히 상당한 흑자를 내는 국영기업들을 민영화, 그것도 외국인에게도 개방하여 민영화할 방침을 표명하고 있어 적지 않은 저항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러나 정작 김대통령이 대선과정에서 정부소유 주식의 매각과 사원지주제를 통한 민영화를 약속한 바 있고, 다른 흑자 국영기업에 비해 경영상태가 훨씬 나쁜 서울신문을 대선공약을 번복하여 관영기업으로 놔두기로 결정했다(『뉴스메이커』, 1998년 5월 7일). 특히 이는 신자유주의가 아니더라도 민주적 자본주의사회에는 '관변신문'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문제이며 결국 민영화하는 데 '신자유주의적 원칙'이 아니라 정치적 의도의 정실주의가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뿐만 아니라 대통령 자신의 친인척과 측근, 그것도 언론경력이 거의 없는 사람을 임원으로 다수 임명함으로써 이중적인 의미의 정실주의를 보여주고 있다.
사례 3: 재벌개혁 재벌개혁 역시 앞의 경우처럼 '직접적'으로 정실주의가 작동한다고는 볼 수 없으나 그 원리는 동일하다. 한국경제 구조조정의 핵심인 재벌개혁의 과정에서 경쟁력이 취약한 중소기업들은 말할 것 없고 30대 재벌의 다수 대기업들도 '해체'의 길을 가고 있다. 그러나 5대 재벌에는 빅딜 등이 있다고는 하지만 오히려 그 독점성이 강화되고 각종 자금지원 등이 집중되고 있다. 5대 재벌이라고 시장경쟁력이 30대 재벌들보다 특히 강하다고 상정할 수 없음에도 자금과 지원이 집중되는 것은 구조조정에 신자유주의적 시장기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한 증거일 수 있다. 나아가 도산한 다른 투자신탁과 달리 한남투자신탁의 경우 특정지역에 연고를 두고 있다는 이유로 도산이 아니라 한 재벌로 하여금 인수토록 하는 한편, 막대한 적자를 무릅쓰고 이를 인수한 이 재벌이 재벌간 빅딜 등에서 승승장구하는 것은 우연이라고 보기 어렵다. 재벌의 구조조정도 정실주의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갖게 하는 것이다. 즉 과거 정권의 특정재벌 편들기와 같은 원리가 아닌가 하는 우려이다. 물론 그간의 불균형발전전략에 따른 지역적 낙후를 생각할 때 한남투신에 대한 배려는 충분히 정책적 타당성이 있다. 그러나 이는 지역적 불균형 교정 차원에서 취해진 정책이란 점을 공론화하는 과정을 거쳤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밀실조정'에 의함으로써 정실주의의 의혹을 받고 있다.
종속적촵신자유주의적촵제한적인 정치적 민주주의 한국의 신자유주의가 한국민주주의에 갖는 함의는 무엇인가? 한국의 신자유주의는 다른 신자유주의와 마찬가지로 사회경제적 민주주의의 심각한 후퇴를 초래하고 있다. 특히 우리의 경우 사회경제적 민주주의가 제3세계 기준으로도 극히 낙후한 현실을 감안하면註35이는 심각한 문제이다. 사실 신자유주의란 원래 '복지국가의 위기'에서 생겨난 것인데 우리는 복지국가와 사회경제적 민주주의가 부재한 상태에서 신자유주의부터 먼저 맛보는 아니러니에 처해 있다. 즉 '복지국가 없는 신자유주의'이다. 사실 한국사회에서 복지제도가 있었다면 그것은 그간의 '고도성장'에 기인한 높은 취업률과 안정된 고용이었다. 이 점에서 한국자본주의는 그동안 복지제도를 기업촵개인촵가족들에게 의존하는 '복지제도의 사유화'를 제도화했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이같은 유일한 복지제도인 고용안정이 깨지면서 많은 국민들이 길거리로 내동댕이쳐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는 복지국가의 부재와 실업의 일상화라는 최악의 조합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물론 새 정부는 공공근로사업 등 실업기금에 적지 않은 돈을 투입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언 발에 오줌 누기'에 불과하며 얼마 안되는 예산 역시 체계적인 정책의 부재로 비효율적으로 낭비하고 있다. 또다른 문제는 실업 등의 고통이 여성과 장애자 등 사회적 약자에 집중된다는 점이다. 이 역시 한국적 신자유주의만의 특징은 아니다. 그러나 문제는 여러 인권지수들에 잘 나타나듯이 IMF위기 이전에도 한국에서 여성과 장애자들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워낙 낮았는데다 설상가상으로 고통이 이들에게 제일 먼저 집중된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현재의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은 노동자들에게 고통이 집중되고 재벌개혁은 지지부진하는 등 형평을 잃음으로써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란 측면에서 문제가 많다. 물론 신자유주의란 원래 자본의 노동에 대한 공격이다. 이 점에서 노동자들의 고통전담, 재벌개혁의 부진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현재 진행되는 재벌개혁은 신자유주의와 대립되는 것이 아니고 재벌이라는 한국적 특수성을 근대화하여 근대적 독점자본으로 변화시키려는 신자유주의적 개혁이다.註36신자유주의적 개혁에서도 부실기업의 도태뿐만 아니라 부실경영에 대한 형사촵민사적 책임을 묻는 것이 상례이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는 그렇지 못함으로써 신자유주의적 기준에 의해서까지도 사회경제적 형평성이 깨어지고 있다. 사회경제적 민주주의의 문제와 달리 정치적 민주주의의 문제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우선 논의의 출발점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제3세계도 신자유주의가 정치적 민주주의를 가져다주지는 않았고, 우리의 경우도 전두환의 압정과 함께 신자유주의를 맛본 바 있다는 사실이다. 또 최근의 변화 중 여야간 정권교체의 측면에서 생겨나는 민주주의적 함의, 김대중정권의 성격에서 생겨나는 민주주의적 함의, 순수하게 신자유주의에서 생겨나는 민주주의적 함의에 대한 구별의 어려움이다. 사실 이 문제와 관련해, 지난 대선 직후 김대중정권은 한국정치사상 "최초로 '수식어 없는' 민주정부"라는 주장이 제기되는가 하면,註37새 정권의 민주주의적 함의를 비판적으로 보는 관점에서 "신자유주의하에서는 다두제민주주의가 자리잡게" 되지만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는 후퇴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하였다.註38그러나 전자는 정권이 출범하기도 전에 나온 분석, 즉 새 정권이 반민주적인 제도적 장벽들을 제거할지의 여부를 보기도 전에 나온 분석이라는 점에서 정치적 민주주의를 구체적 정책이 아니라 단순히 집권절차의 민주성 문제로 형해화하거나 아니면 향후의 정책을 미리 예단한 잘못된 분석이다. 후자 역시 문제의식은 신자유주의에서 오는 사회경제적 민주주의의 후퇴를 지적하기 위한 전제로서 언급된 것이지만 남미와 전두환정권 등의 경험이 보여주듯이 신자유주의와 자유민주주의 간의 기능적 친화성을 부당하게 전제하고 있다. 어쨌든 전제는 IMF위기 이전의 한국정치 현실, 즉 김대중정권이 유산으로 물려받은(그중 일부는 현정권이 과거 야당시절 스스로 함께 만든 공동유산이지만) 한국정치의 현실이다. 이는 크게 보아 1 과거와 같은 (종속적) 파시즘체제는 아니지만 정치적 민주주의의 수준에서 보더라도 제한적인 '제한적 정치적 민주주의'註39 2 대통령 1인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위임민주주의'(delegative democracy)註40 3 전근대적 정당체계(지역정당체계)와 정당구조(사당私黨체제) 4 정경유착 5 대외적 종속성이다. 첫째, 김대중정권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이라는 구호를 통해 정치적 민주주의, 나아가 이보다 한 단계 높은 참여민주주의를 주창하지만 아직도 한국의 국가성격은 참여민주주의는커녕 절차적 민주주의에도 못 미치는 '제한적 정치적 민주주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다시 말해 김대중정권의 정확한 국가성격은 '종속적촵신자유주의적촵제한적인 정치적 민주주의'이다. 그리고 최초의 여야간 평화적 정권교체도, 신자유주의도 이른 시일에 국가보안법을 폐지해 사상촵결사촵집회의 자유 등 기본권을 완전히 보장하여 한국정치를 '수식어 없는 민주주의'로 만들어줄 것 같지 않다. 물론 정치적 민주주의의 진전은 있었다. 그것은 노동조합의 정치참여 허용, 교원노조 허용이다. 이는 김영삼정권이 추진하고 김대중정권이 완성한 노사관계의 '신자유주의적 빅딜'의 결과이다. 즉 정리해고의 합법화라는 개별적 노사관계의 개악을 대가로 집단적 노사관계의 개혁을 빅딜한 것으로서 김영삼정권의 노사관계개혁위원회에서 결정되었지만 선거자금법 등에 묶여 실효가 없었던 노동조합의 정치참여 등을 노사정위원회를 통해 실질화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한마디로 현금을 주고 약속어음, 그것도 불확실한 약속어음을 받은 것과 마찬가지로 대차대조표상 민주주의의 후퇴이다. 또다른 정치적 민주주의의 발전은 노사정위원회라는 '사회코포라티즘'註41적 틀이다. 이 역시 김영삼정권의 '노개위'라는 형식을 발전시킨 것으로 정책결정과정에서 노동자들의 참여를 제도화한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말할 것도 없이 일반국민들의 여론조사에서도 노사정위원회가 친자본적이라는 응답이 절대 다수를 차지할 정도로 이 기관은 사실상 노동자의 고통전담에 대해 노동자들의 추인을 얻어내기 위한 기관, 즉 사회코포라티즘의 형식을 빌린 국가코포라티즘의 성격이 강하다. 나아가 이는 사회경제적 민주주의의 후퇴를 의미하는 신자유주의를 강제하기 위한 '신자유주의적 코포라티즘'이라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註42 정치적 민주주의의 후퇴도 있다. 이는 한 저명한 국제인권기관 책임자가 얼마전 한국을 방문해 지적한 'IMF인권'의 문제이다. 즉 구속촵수배 노동자 수가 급증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뿐만 아니라 정치적 민주주의 수준에서도 노동자들의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나아가 IMF와 무관한 일반양심수도 특별한 공안사건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김영삼정권보다도 더 늘고 있다. 즉 새 정권 출범 후 9월말까지 국가보안법 구속자와 양심수는 각각 287명과 539명에 달해 김영삼정권 초기의 같은 기간에 비해 각각 4배와 4.5배나 늘어났다. 특히 노동자의 정치 참여를 허용했지만 지난 지자체선거에서 당선된 노동자 출신 울산지역 구청장 등이 10년 전의 조직사건으로 구속된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 둘째, 위임민주주의의 문제로서 이 역시 개선될 조짐은 보이지 않고 오히려 신자유주의 때문에 강화되는 면이 있다. 국회의장을 사실상 대통령이 지명하는 관행은 계속되고(이는 대통령의 '헌법파괴행위'이다) 검찰의 독립은 요원한 채 현정권이 야당시절 주장했던 특별검사제 도입 등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나아가 라틴아메리카에서와 마찬가지로 신자유주의를 집행하기 위해 위임민주주의가 강화되는 경향도 있다. 주요 정책결정을 노사정위원회라는 초법적 기구로 가져감으로써 국회와 정당은 무력화되고 있다. 또 행정개혁이라는 것이 사실상 인사권촵예산권을 대통령에게 더욱 집중시키는 방향으로 진행되어 대통령의 권한은 오히려 강화되고 있다. 셋째, 한국정치에서 가장 반민주적이고 낙후한 정당체계와 정당구조의 민주화 또한 큰 진전이 없다. 지역정당체제는 오히려 강화되어 동서분단은 '김유신 이전'으로 돌아간 느낌이고 사당체제 역시 여전하다. 신자유주의가 의도와는 다르게 노동자와 실업자들의 정치의식을 고양시켜 진보정당을 가능케 함으로써 지역정당체제를 깨는 데 기여할지는 두고볼 일이지만 지역주의의 강고함을 고려할 때 그 전망은 밝지 않다. 신자유주의와 무관하게 지역주의 타파를 위해 현정부가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 도입을 추진하고 있지만 정당민주화가 선행되지 않은 이같은 제도변경은 사당체제만을 강화해 부작용이 더 크고, 오히려 몰표를 주기 위한 지역주의 강화로 나아갈 수 있다. 설사 그렇지 않더라도 일반국민의 지역주의적 투표행태는 변하지 않고 비례대표에 의해 국회의원만 탈지역화하는, '무늬만의 탈지역주의'로 끝날 가능성이 농후하다. 사실 기본적으로 반민주적인 신자유주의가 예외적으로 민주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분야인 정치권은 정작 우리 사회에서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의 무풍지대로 남아 있다. 우선 개방화촵지구화에 따라 외국상품과의 경쟁이 있어야 하지만 정치인과 정당을 수입하지 못한다는 현실 때문에 정치권은 국제적 경쟁이 부재하다. 국내적으로도 지역주의적 정치균열구조에 의해 정치의 시장은 사실상 수도권을 제외하고는 경쟁이 부재한 독점시장으로서 신자유주의적 시장기제가 먹혀들어가지 않는다. 넷째, 정경유착의 극복을 위한 개혁은 부패정치인에 대한 사정과 깨끗한 정치를 위한 제도개혁의 실천이 그 핵심이므로 신자유주의가 크게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지만 현실은 그런 것 같지 않다. 우선 김영삼정권때와 마찬가지로 편파사정의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즉 국세청모금사건이나 김윤환의원 등에 대한 사정은 문제가 없지만, 기이하게도 자민련은 한 명도 없고 야당의 경우 그전에 여당생활을 한달도 하지 않은 이기택촵이부영 의원이, 국민회의도 당권에 도전해온 정대철만이 문제가 되었다는 것은 도저히 우연이라고 할 수 없다. 제도개혁의 경우 김영삼정권 초기에 제정한 혁명적인 선거법을 후에 여야간 야합으로 개악했지만 이에 대한 재개혁 움직임은 보이지 않고, 부패방지법 역시 여당은 야당시절의 입장을 바꾸어 입법을 거부하다가 마지못해 제정하되 특별검사제가 아니라 행정부하에 두기로 함으로써 설사 입법화하더라도 그 효과가 의심스럽다. 깨끗한 정치의 실천이라는 면에서 아직 고위층의 부정부패사건이 없는 것은 긍정적이나 이는 두고보아야 할 문제이다. 정작 문제는 지난해 국회의원 재보궐선거에서 일부 선거구의 경우 여권후보를 중심으로 엄청난 선거자금이 뿌려져 돈 드는 선거풍토가 IMF위기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마지막으로 대외적 자율성이라는 면에서 우리의 정치적 민주주의는 더욱 후퇴하고 있다. 'IMF 신탁통치'라는 자조적 표현이 보여주듯이 경제정책에 관한 한 IMF가 대통령이고 김대통령은 '현지지휘관'일 정도로 우리의 자기결정권은 축소되어버렸다. 문제는 앞으로 IMF관리체제를 벗어나더라도 그동안 시행될 신자유주의적 정책에 따라 우리 경제와 사회에 대한 선진자본의 지배력이 강화될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자기결정권은 IMF사태 이전보다 대폭 축소될 수밖에 없다. 일각의 지구화시대의 상호의존론과 달리 우리는 '새로운 종속'의 시대를 살고 있다.註43특히 우려되는 것은 현정권이 이에 대한 비판적 문제의식이 전혀 없이 개방을 절대적으로 미덕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4. 맺는 글 마지막으로 두 가지만 지적하고자 한다. 우선 현재의 위기를 극복하고 옛날의 고도성장과 '좋았던 시절'로 돌아가려는 것은 환상이라는 점이다. 세계적인 자본의 움직임과 현재의 경제정책을 고려할 때, 설사 현위기를 극복한다고 하더라도 그 사회는 과거와는 전혀 다른 사회가 될 것이라는 점이다. 이 점에서 과거의 성장제일주의촵경제제일주의에서 벗어나 발상의 전환, 문명의 전환을 고민해야 한다. 현재 우리에게, 즉 좁게는 한국민들에게 넓게는 인류에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다른 연구자의 표현을 빌리자면,註44 TINA(There is No Alternative), 즉 "문제와 비판은 다 맞는데 대안이 없다"라는 패배주의와 자포자기이다. 문제가 있는 한 해결책은 있게 마련이다. 다시 1930년대의 '야만'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지 않은가? □
孫浩哲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 이 글은 1998년 11월 한국사회과학협의회 주최 씸포지엄 ‘신자유주의와 한국의 대응’에 발표한 논문을 수정촵보완한 것이다. 1) 일반적으로 지난 대선의 결과에 대해 DJP연합, 이인제의 경선불복에 따른 여권의 분열 등을 야당의 승리요인으로 지목하지만 진짜 요인은 경제위기와 IMF체제이다. 김대중 후보는 DJP연합과 여권의 분열, 경제위기에도 불구하고 1.7%의 근소한 차이로 승리했다. 이는 경제위기로 지지후보를 바꾼 유권자가 최소한 0.85% 이상만 되더라도 경제위기가 없었다면 정권교체에 실패했을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2) 흔히 국가독점자본주의론은 정통좌파적 자본주의의 단계론적 유형화이고 포드주의는 조절이론적 시각에서의 유형화로서 서로 대립되는 대안적 인식으로 받아들여져왔다. 그러나 조절이론이 잘 비판하듯이 ‘국독자론’이 노동과 자본의 관계, 소비관계 등의 변화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반면 조절이론은 독점자본 대 민중이라는 대치선과 ‘국가와 독점자본의 융합’이라는 문제를 부각시키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절충적’이지만 포드주의적 ‘국독자’, 포스트포드주의적 ‘국독자’라는 개념화를 이 글에서는 사용하고자 한다(이같은 용어를 사용하는 입장은 김세균, 「(종속적)국독자와 민주주의, 사회주의」, 『현장에서 미래를』 1997년 8월호, 139면).
3) 이에 대한 요약 소개로는 임혁백, 「시장경제와 민주주의: 긴장에서 공존으로」, 『사상』 1998년 여름호 참조.
4) J. S. Mill, Considerations on Representative Government, NY: E. P. Dutton & Co. 1951.
5) Goran Therborn, "The Rise of Capital & the Rise of Democracy," New Left Review 103, 1977년.
6) Adam Przeworski, et al. Paper Stones: A History of Electoral Socialism, Chicago: Chicago Univ. Press 1988.
7) N. Poulantzas, State, Power, Socialism, London: NLB 1978.
8) E. Balibar, "From Class Struggle to Classless Struggle?," E. Balibar & I. Wallerstein, Race, Nation, Class, London: Verso 1992.
9) Simon Clark, "Overaccumulation, Class Struggle and the Regulation Approach," Capital & Class 1988년 겨울호.
10) Karl Polanyi, The Great Transformation, Boston: Beacon Press 1944.
11) H. 마르틴 외, 『세계화의 덫』, 영림카디널 1987, 394면.
12) Bob Jessop, "The Transition to Post-Fordism and the Schumpeterian Workfare State," Roger Burrows et al. eds., Towards a Post-Fordist Welfare State?, London: Routledge 1994; 김세균, 앞의 글.
13) Paul Sweezy, "The Triumph of Financial Capital," Foreign Affair 1994년 6월호.
14) G. Arrighi, The Long Twentieth Century, London: Verso 1994.
15) David Held, "Introduction: New Forms of Democracy," D. Held et al. eds., New Forms of Democracy, Berverly Hills: Sage 1986.
16) Bob Jessop, "Authoritarian Populism, Two Nations and Thatcherism," New Left Review 1984년 9-10월호.
17) 마르틴 외, 앞의 책, 38면. 18) Jessop, 앞의 글, 1994. 19) Jorg Huffschmid, 「시장통합 1992---배경, 공격방향, 그리고 전망」, 『동향과 전망』 1991년 여름호, 155면. 20) Danie Bennsaid, 「되돌아온 유령을 환영하며」, 『선언 150년 이후: 「공산당선언」 150주년 파리국제학술회의 논문선집』, 이후 1998. 21) 이성형, 「콜레라시대의 라틴아메리카」, 『사상』 1994년 가을호. 22) E. Rosenzvaig, "Neo-liberalism: Economic Philosophy of Postmodern Demolition," Latin American Perspectives 1997년 11월호. 23) 이성형, 앞의 글, 195면. 24) Rosenzvaig, 앞의 글, 56면. 25) Bruce Cumings, "The Abortive Abetura," New Left Review 1989년 1-2월호. 26) Atilio Boron, "Latin America: Between Hobbes and Friedman," New Left Review 1981년 11-12월호. 27) Edgar Lander, "The Impact of Neoliberal Adjustment in Venezuela," Latin American Perspectives 1996년 여름호; 이성형, 앞의 글. 28) 졸고, 「한국의 ‘권위주의’ 정치체제와 자본주의 발전」, 『전환기의 한국정치』, 창작과비평사 1993, 83면. 29) 조희연, 「동아시아 성장론의 검토」, 『경제와 사회』 1997년 겨울호. 30) 이병천, 「한국의 발전국가 자본주의의 딜레머」, 『창작과비평』 1998년 가을호; 윤소영, 『일반화된 맑스주의와 역사적 자본주의 분석』, 공감 1998. 31) 세계체체적 요인으로부터 일국적 요인, 그리고 분석 수준을 달리하는, IMF위기의 복합적 원인에 대한 필자 나름의 종합적 연구로는 「발전과 위기의 정치경제학: IMF위기와 동아시아 모델」, 한국정치연구회 편, 『동아시아 모델은 실패했는가?』, 삼인 1998 참조. 32) 후자, 즉 개혁적 분파의 대표적 예가 최장집의 민주적 시장경제론이라고 볼 수 있다. 최장집, 「한국 정치경제의 위기와 대안」, 『사상』 1998년 여름호. 33) 졸고, 「위기의 한국, 위기의 사회과학: IMF위기를 보고」, 『경제와 사회』 1998년 여름호. 34) 이 역시 한국만의 고유한 현상은 아니어서 라틴아메리카의 경우도 신자유주의의 도입에 따른 민영화 등이 다시 특혜적 정경유착에 의해 이루어지는 ‘아미고(amigo) 자본주의’로 나타난 바 있다. 이성형, 앞의 글, 204~5면. 35) 유엔의 기준에 따르면 한국은 ‘중간소득국가’임에도 불구하고 복지국가 수준은 ‘저소득국가’ 내에서도 중간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36) 졸고, 「국가론의 시각에서 본 김대중정권의 개혁: 재벌개혁을 중심으로」, 『한국과 국제정치』 1998년 여름호. 37) 정대화, 「김대중정부의 성격과 과제, 개혁/진보세력의 역할」, 『경제와 사회』 1998년 봄호, 227면. 38) 정영태, 「15대 대선, 김대중정권, 그리고 민주주의」, 같은 책, 218면. 39) 졸고, 「김영삼정권의 국가성격」, 『현대한국정치: 이론과 역사』, 사회평론 1996. 40) G. O'onnell, "Delegative Democracy," Journal of Democracy 1994년 1월호. 41) 사회코포라티즘은 사회조직이 자율성을 가지고 밑으로부터의 요구를 국가에 반영하는 유럽형 이익대표체계이며, 이에 반하여 국가코포라티즘은 노조 등이 국가 통제에 의하여 위로부터 아래로의 통제기제가 되는 제3세계형이다. 42) 김세균, 「IMF 관리체제, 김대중정권, 노동운동」, 『현장에서 미래를』 1998년 3월호, 51면. 43) 졸고, 「위기의 한국, 위기의 사회과학: IMF위기를 보고」. 44) James Petras, "Alternatives to Neoliberalism in Latin America," Latin American Perpectives 1997년 1월호; Hines Collins, "Out of Adversity Comes Opportunity," 서울국제민중회의 개최 국제학술회의 ‘IMF에 도전하는 민중’(1998년 9월) 발표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