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산 지역에 천주교가 언제 전래되었는지 확실하게 밝혀 주는 자료는 없지만 경기도 지역의 복음 전래 과정의 연장선상에서 생각해 볼 때 기해박해 이후 1840년이 지나면서부터 점차 신자들이 생긴 것으로 짐작된다.
본래 박해 초기에 신자들은 산간 지역으로 피신하여 공동체를 형성하였으나 기해박해가 지나고 1850년대까지는 비교적 평온한 시기였기에 신자들은 산에서 나와 평야 지대에서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죽산 역시 평야 지역으로 인근지역, 즉 갓등이, 굴암, 골배마실, 성남 등지에서 박해를 피해 온 교우들을 중심으로 교우촌을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

죽산은 임진왜란 당시 도성 수호의 주요 전략지로 파악되어 도호부(都護府)로 승격되고, 죽산 도호부사(종3품)가 수어후영장(守禦後營將)과 토포사(討捕使)를 겸하게 되었다. 그래서 병인박해 당시 죽산 도호부사는 막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천주교인들을 체포할 수가 있었다. 기록에는 병인박해가 시작되자 작은 고을이었던 죽산에서는 22명이나 되는 신자들이 순교하였는데, 죽산에서 확실히 순교한 신자는 18명이며, 죽산 포교에게 체포되어 죽산에서 순교한 것으로 추정되는 신자들은 4명이다.
죽산으로 끌려온 신자들은 진영 동헌 앞에서 신문받고 고문당했으며 수감되어 배교를 강요당하기도 하고 교수형에 처해지기도 하였다. 따라서 진영 동헌 앞이나 옥터도 중요한 사적지 중에 하나다. 죽산 옥터 자리만 죽산 성지에서 멀지 않은 죽산면 사무소 입구 우측에 농업기술센터 죽산면 농업인 상담소가 있는 위치로 알려졌을 뿐 진영 동헌 앞은 그 위치조차 확인되지 않고 있다. 현재 죽산 성지로 개발된 곳은 당시 신자들의 처형지로 알려진 장소로 ‘잊은 터’라고 불린다.

이곳 옥터는 수원교구시성시복 대상자 중 참수형이 아닌 교수형을 당한 순교자들의 순교터이다. 이곳에서 박 프란치스코(1835~1868)와 오 마르가리타 부부가 교수형을 받았다. 이들 부부가 흔적도 없는 면사무소 건물들만의 옥터 자리를 보면서 동생 박 필립보와 큰아들 박 안토니오에게 한 마지막 당부를 되새겨 본다.
“어린 조카들을 잘 보살피면서 진정으로 천주님을 공경하고, 천주님께서 안배하시는 대로 순명하여 나의 뒤를 따라오도록 하여라.”
◆ 두들기
죽산에는 ‘두들기’라는 곳이 있다. 죽산 읍내에서 15리쯤, 지금은 삼죽면 소재지로 80여 호가 사는 큰 마을이지만 옛날에는 인가가 드문 작은 주막거리였다고 한다. 그 이름의 유래에는 여러 가지 재미있는 설이 있다. 지형이 조금 도드라져 이렇게 불렸다고도 하고 땅이 진흙이어서 신을 땅에 두드려 패지 않으면 신 바닥에 붙은 진흙이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두들기는 병인박해 때 교우들의 애절한 사연이 담긴 한 많은 땅으로 변한다. 용인, 안성, 원삼 등지에 사는 교우들이 포졸에게 잡혀 가는 호송 길에 이 주막거리는 잠시 쉬어 가는 곳이 되곤 했다. 포졸들은 줄줄이 묶어 둔 교우들을 툭하면 갖은 트집을 잡아 두들겨 패곤 했다. 또 뒤쫓아 온 가족들은 잡혀 온 교우들이 맞는 것을 보고 땅을 두드리며 원통해 했다. 이래저래 '두들기'는 두들겨 맞는 곳으로 전해지는 것이다. 삼죽면 사무소 바로 앞에 언덕길을 두들기라고 부르며, 전에는 더 높은 언덕길이었지만 현재는 도로 개설로 낮아졌다. 면사무소에서 나와 오른쪽으로 약 50m 가면 '두들기' 버스 정류장이 있다.
▒ 아직도 고통이 모자라(죽산 이진터에서) <김영수> ▒
땅 기우는 고문도
시원한 바람일 수 있는 것입니까
하늘은 맑고 햇살은 곱습니다
나는 침묵 투명한 땅에서
캄캄히 나의 삶 들여다봅니다
캄캄히 나의 죽음 들여다봅니다
나는 아직도 고통이 모자라
피 맑지 못한 기도는
여전히 구름 뚫지 못하는데
진정 나의 사랑은 어느 높이에서
잠을 깨고 있는 것입니까
멀리 지평선 이루는 숨결
아득히 약속 밝히는 기억
부질없이 떠돌았던 나의 젊음도
이제는 밝은 파문 일으키는
작은 죽음 하나 꿈꿀 때 되었습니라
■ 순교자
◆ 박 프란치스코 (1835∼1868년) <하느님의 종 124위>
박 프란치스코는 오(吳) 마르가리타와 혼인하여 충청도 청주에서 살았다. 이후 그들 부부는 1866년에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안전한 곳을 찾아 아들 4형제를 데리고 진천 절골(현 진천군 백곡면)로 이주하여 비밀리에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의 가족은 절골에서 약 2년 동안 평온하게 생활하면서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였다.
그러나 1868년 9월 5일(음력 7월 19일)에는 죽산 포졸들이 절골로 들이닥쳐 산중으로 피신하던 도중에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그 중에서 그의 아내 마르가리타는 어린 자식을 업고 산에 숨어 있다가 체포되어 많은 매를 맞아야만 하였다. 한편 가족들의 사정이 궁금해진 그는 동정을 살피기 위해 산에서 내려온 후 그 동네의 한 비신자 집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그러나 그 비신자의 밀고로 체포되어 아내 마르가리타와 함께 죽산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그들 부부는 이후 어떠한 형벌에도 굴하지 않고 굳건하게 신앙을 지켰다. 그런 다음 1868년 9월 29일(음력 8월 13일) 죽산에서 함께 순교하였으니, 당시 프란치스코의 나이는 34세였다.
◆ 오 마르가리타 ( ? ∼1868년) <하느님의 종 124위>
오 마르가리타의 출생지와 천주교에 입교한 사정은 알려져 있지 않고, 훗날 박 프란치스코와 혼인하여 충청도 청주에서 살았다는 사실만이 알려져 있다. 이후 그들 부부는 1866년에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안전한 곳을 찾아 아들 4형제를 데리고 진천 절골(현 진천군 백곡면)로 이주하여 비밀리에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1868년 9월 5일(음력 7월 19일)에는 죽산 포졸들이 절골로 들이닥쳐 산중으로 피신하던 도중에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그 중에서 마르가리타는 어린 자식을 업고 산에 숨어 있다가 가장 먼저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많은 매를 맞아야만 하였다. 한편 가족들의 사정이 궁금해진 남편 프란치스코는 동정을 살피기 위해 산에서 내려왔다가 한 비신자의 밀고로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그들 부부는 이후 어떠한 형벌에도 굴하지 않고 굳건하게 신앙을 지켰다. 그런 다음 1868년 9월 29일(음력 8월 13일) 죽산에서 함께 순교하였다.

■ 찾아가는 길

■ 순례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