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영, <하녀>, 1960.
작곡가인 그는 아내가 집을 비운 사이 하녀(가정부)와 육체적 관계를 갖는다. 그와 하녀의 관계가 지속될수록 하녀는 아내에게 질투를 느끼고 노골적으로 아내에게 적개심을 드러낸다. 그가 하녀를 꾸짖자 그녀는 그를 위협하고 어쩔 수 없이 그는 하녀에게 끌려가게 된다. 아무 것도 모르는 아내는 당돌해져 가는 하녀를 내보내자고 하고 그는 아내에게 사실을 들킬까봐 불안해 한다. 고민을 하던 그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하녀와 자살한다.
김기영의 <하녀>에 나오는 '하녀'는 그야말로 알 수 없는 인물입니다. 특별히 무언가를 감추거나 속이는 것도 아닌데, 우리는 그녀를 따라잡을 수 없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하녀가 눈을 동그랗게 치켜뜨고 주위를 둘러볼 때, 혀를 살짝 내민 채 소리 없이 움직일 때, 그녀는 자신을 이해하려거나 파악하려는 관객의 손아귀에서 가볍게 빠져나가버리는 것 같습니다. 그녀는 도대체 어떤 존재일까요. 같은 스크린 위에 있으면서도 그녀만 유난히 특별한 몸짓을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녀는 어디에 놓인 채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 것일까요.
매듭 없는 하나의 세계처럼만 보이는 영화 속 공간은 어쩌면 보이지 않는 가운데 서로 나뉜 채로 어긋나거나 겹쳐지는 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녀>에 나오는 그녀의 움직임을 좇아가는 과정에서 그 공간들을 더듬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걸고 이 글을 시작해 봅니다.
□ 사이
이 영화에서 카메라는 시종일관 앞뒤로 움직입니다. 인물이 걸어 들어가면 뒤따라가고, 걸어 나오면 뒷걸음질치고, 때로는 가까이 들이밀며 훑어대고, 종종걸음 치듯 빠져나와 모른 척 숨죽이고 있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 움직임을 따라가면서 화면 안을 들여다보고 또 느낄 수 있게 됩니다. 나도 모르게 인물 앞에 얼굴을 들이대고 바라보고 있다가도 어느새 몰래 숨어서 지켜보고 있게 되는 것이지요.
애초에 영화라는 것을 볼 때에 관객이 카메라의 시선을 따라가는 것은 당연한 일임에도, <하녀>에서 나오는 이 시선은 그렇게만 설명할 수는 없는 듯합니다. 이 시선은 결코 순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채로 들여다보는 관객과 같은 처지인 척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영화의 첫 장면에서 부부만 보여주던 카메라가 어느 순간 뒤로 빠져서 실뜨기 하는 아이들을 보여줄 때, 우리는 이 시선의 주인은 애초부터 거기에 아이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을, 그것을 의도적으로 모른 척 했다가 나중에서야 보여주었음을 알게 됩니다.
재미있는 것은 하녀라는 인물이 있는 자리가 어느 순간부터 이러한 시선의 위치와 겹쳐진다는 사실입니다. 정면에서 바라 본 집 건물의 이층 공간은 왼쪽에 있는 하녀의 방과 오른쪽에 있는 피아노 방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하녀는 자신의 방에서 유리로 된 문을 열고 테라스로 나와 오른쪽으로 건너가지요. 아직 문을 열지는 않은 채로, 그러니까 방 안으로 들어가지도 집 밖으로 나오지도 않은 채 난간이라는 그 '사이'의 공간에 서서 유리문 안으로 피아노 방을 들여다봅니다.
그렇게 바라보고 있는 하녀의 시선을 카메라의 그것으로 바꾸어 놓고 생각해 본다면, 그녀가 서 있는 난간은 카메라가 뒤로 물러남으로써만 드러날 수 있는 프레임의 앞 쪽 공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는 분명 영화 속의 세계지만 아직은 보여지지 않은, 즉 보여주거나 보여주지 않으려는 의도를 반영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유리문이라는 프레임 바깥으로 나와 있는 하녀는 내가 마음 놓고 파악할 수 있는 영역을 벗어난 것이죠. 그러나 완전히 빠져나오지도 않은 채로, 거기에 숨어 자신의 관음증을 실현합니다. 사실 하녀라는 인물이 불러일으키는 의뭉스러운 느낌, 즉 무언가 알고 있고 또 감추고 있다는 느낌은 영화 전반에서 카메라 움직임이 불러일으키는 그것과 비슷한 효과인 셈입니다.
□ 아래
한편 높이라는 축을 두고 생각해 본다면, 하녀(下女)는 그 이름처럼 '아래'에 있습니다. 그녀는 상체를 숙이거나 무릎을 꿇어 완전히 몸을 낮추고서는 낮은 곳에서 위를 '올려다' 봅니다. 그런데 그것은 단지 하녀라는 사회적 지위에서 비롯된 습관적 행동은 아닌 듯합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아래, 바닥, 밑이라는 공간이 애초부터 그녀에게 자연스럽고 친숙한 것인 듯 느껴집니다. 생쥐가 떨어져 찬장 아래 틈으로 기어가는 것을 본 뒤 미소를 띠며 그 앞에 쪼그리고 앉는 그녀에게는, 그 어둡고 보이지 않는 공간이야말로 쉽게 장악할 수 있는 자신의 영역인 것이지요.
그러나 그녀는 아래에 머물러 있지만은 않습니다. 집주인인 음악 선생의 앞에 무릎을 꿇은 채로 그 다리를 붙들고 몸을 더듬어 올라갑니다. 계단에 쓰러진 그녀 옆으로 지나가는 안주인의 치맛자락을 붙들고 손을 뻗어 그녀를 움켜잡습니다. 분명 그들은 그녀보다 위에 있지만, 그녀를 누를 수 있을 것 같지만, 오히려 그녀가 그들을 타고 올라갑니다. 그들은 그녀의 뺨을 때리고, 머리채를 쥐어뜯고, 목을 조르지만, 그리고 그렇게 내팽개쳐진 그녀는 마치 자신의 자리인 양 바닥으로 돌아오기 마련이지만, 그녀는 결코 잠잠해지지 않고서 다시 그들에게로 기어 올라갑니다. 결국 남자는 하녀에게 유혹당하고, 여자는 하녀에 의해 아들과 남편을 잃게 됩니다.
영화의 초반부에는 쓰이지 않았는데 뒤로 가면서 자주 등장하는 샷이 있는데, 바로 약간 높이에서 하녀의 뒷모습을 걸어 부부의 모습을 잡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아래에만 웅크리고 있었던 그녀가 서서히 위로 올라오면서 화면 안에서 높은 위치까지 점하게 되는 것이지요. 처음에 이 평화로운 부부는 다만 하녀를 두려고 했을 뿐이었는데, 그들은 자신들의 아래에 있게 된 이 하녀라는 영역을 결코 지배할 수 없게 됩니다. 그들이 처음에 점하고 있었던 자리를 하녀에게 내어주게 된다는 것을 이러한 화면 배치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녀가 완전히 승리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녀의 마지막은 이 하강하는 움직임의 극단을 보여줍니다. 남자와 함께 쥐약을 탄 물을 마셨을 때, 하녀는 부인의 곁으로 가려는 남자의 다리에 매달린 채로 끝까지 그를 바닥으로 끌어내립니다. 아예 머리가 아래쪽으로 향하도록 거꾸러져서, 계단에 머리 부딪는 소리를 내면서 그녀는 아래로 내려옵니다. 결국 아래에서 위를 향하려 했던 그녀의 갈망은 계단에서 아래를 향해 비참하게 널브러져 있는 모습으로 끝맺게 되는 것이지요.
□ 안
크게 보아 이 영화에서 본격적인 이야기는 하녀가 집 '안'으로 들어오면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녀를 기준으로 보자면 그녀가 '안'이라는 곳에 들어와 있었던 것은 그 전부터입니다. 처음 하녀가 등장하는 기숙사 장면에서 보면, 미스 조가 옷장을 열기 전부터 이미 그 안에서 있었던 채로 나타납니다. 그 다음 장면에서는 기숙사에서 음악선생 집까지의 이동 경로 또한 생략된 채로, 이미 음악 선생의 집 안에 들어와 있는 모습이 보여집니다. 침실에서 사람들이 이야기할 때 부엌으로 몰래 들어가는 것처럼, 그녀는 소개되거나 허락되지 않은 상황에서, 제 멋대로 미리 들어가 버립니다.
그녀가 애초부터 '안'에 위치하고 있는 존재라면, 그녀의 침입을 막으려고 문을 닫아버리는 음악 선생의 노력도 소용이 없는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 말라고 해도 하녀는 기어코 피아노 방으로 들어가 피아노를 쳐 대고, 결국에는 부부의 침실에까지 들어가 버리기 때문입니다. 어떤 공간을 마련해 준 뒤 그 안에 인물을 출입하게 하는 식이 적어도 하녀의 경우에는 적용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밀어내고, 떨쳐버리고, 문을 잠글지라도 그녀는 이미 안으로 들어와 있고, 오히려 자신의 영역으로 그곳을 점령해 버립니다. 선생의 아이를 임신하게 된 뒤에는 하녀를 집 밖으로 쫓아낼 수 없게 되는데, 이것으로써 상황은 밀폐되고 내부의 주도권은 하녀에게 쥐어지게 됩니다.
그녀는 들어와 있습니다. 안을 점령해 버린 것이지요.
공장, 기숙사, 기차 역, 시장 등 영화의 초반부에는종종 보여졌던 바깥의 공간은 점점 사라지고 이야기는 오직 집 안에서만 전개되기 시작합니다. 거의 유일하게, 죽은 아들의 운구차에 올라 탄 선생이 등장할 때에야 집 바깥의 모습이 나오는데, 그 때 그가 바라본 집의 이층 난간에는 담배를 피우는 하녀가 서 있습니다. 이 때에 등장하는 바깥의 공간은 내부가 그녀에게 점령당했음을 보여주기 위한 수단 정도인 듯 합니다. 어쨌거나, 이런 식으로 하녀는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 내부라는 공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합니다. 마치 그곳이 본래의 서식지였던 것처럼 퍼져가는 꺼림칙한 이물을 침입시킴으로써, 안이라는 공간이 실은 알 수 없는 곳이고 생각만큼 안전하지 않음을 느끼게 합니다.
그리고
최근의 상영 때에도 관객들의 폭소를 자아냈다는 <하녀>의 마지막 장면은 보통 액자식 구성들이 그렇듯 조금 김이 빠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두 부부가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이제까지의 파란만장한 이야기가 단지 꿈이었던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거기에만 머무르지 않는 것은 바로 이 때 문을 열고 들어오는 하녀의 모습 때문입니다. 분명 처음에는 없었던 하녀가 애초부터 있었던 것처럼 등장합니다. 그럼으로써 처음과 끝은 매끄럽게 이어지는 대신 어디에선가 한 번은 뒤틀리게 되고, 거기에서는 어느 것이 꿈이고 또 현실인지를 따지기에는 약간 얼얼해진 채로 이 울퉁불퉁한 자리를 매만져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이제까지 내가 좇아 다니는 줄로만 알았던 이 하녀라는 인물이, 어느 순간 내 손에서 멀리 빠져나가 아무 것도 모르는 얼굴로 나타나 있는 모습에, 그렇게 그녀를 놓아두는 장난을 치는 감독의 손놀림에 피식 웃을 수 밖에 없습니다.
잡힐 듯 말 듯, 그녀가 어디 있는지는 여전히 수수께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