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어르신들이 게이트볼을 하고 있다.
머리 희끗한 어르신들이 쉬엄쉬엄 공을 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철저하게 계산된
작전이 있고, 나름 치밀하기도 하다. 10명의 선수들이 풍기는 삼엄한 분위기에 봄꽃
떨어지는 소리마저 시끄럽게 느껴진다.
- ▲ 남자가 게이트볼을 하고 있다.
나에게 게이트볼은 보약'이다 _ 정무권(64세)
“내가 주변 사람들한테 항상 하는 말이 있어. ‘보약은 돈 주고 따로 먹을 필요 없다. 돈도 안 들고 건강까지 지키는 게이트볼을 두고 돈 낭비하지 마라.’
게이트볼은 진짜보약만큼 값진 운동이거든. 골프, 배드민턴, 축구… 다 해봤어. 격한 운동이라 자꾸 다치니까 겁이 나서 즐길 수가 없더라고.
근데 게이트볼은 달라. 나이가 들수록 좋은 운동이지. 몸도 건강하게 해주고 머리를 계속 쓰니까 치매예방에도 좋아. 다들 왜 게이트볼 안 하고 보약 같은 거먹나 몰라.”
- ▲ 여성이 게이트볼을 하고 있다.
나에게 게이트볼은 ‘행복’이다_ 박은희(60세)
“1999년부터 게이트볼을 시작했는데, 그때부터 사람들이 나한테 젊어 보인대. 이게 다 게이트볼 덕분인 것 같아.
경기를 시작하면 다른생각할 틈이 없어서 근심 걱정이 사라지거든.성취감도 들고. 그러니까 여기만 오면 기분이좋아져. 이렇게 행복하게 운동을 하니까 집에가서도 남편이랑 얼마나 사이가 좋아졌는지 몰라. 게이트볼이 나한테는 완전 행복 바이러스지 뭐.”
- ▲ 남성이 게이트볼 스틱을 들고있다.
나에게 게이트볼은 ‘소통’이다 _ 정규태 (84세)
나이 든 사람들은 다른 사람 만날 기회가 별로 없어. 그래서 자연스럽게 외로워지지. 근데 게이트볼을 하면 외로울 틈이 없어. 여기 오면 처음 본 사람도 '우리'가 돼서 같이 게임을 즐길 수 있거든. 한 게임만 하고 나면 10년 사귄 친구보다 더 가까워진 느낌까지 들어."
게이트볼 동호회 취재 현장 분위기는 비교적 여유로울 것이라 생각했다. 동네 공원을 지나다 게이트볼 경기를 본 적이 있는데, 천천히 진행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립창동게이트볼장에 도착해 통화한 이기풍 사무국장을 본 순간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이 사무국장은 걸음걸이부터 에너지가 넘쳤다. “먼 길 오느라 수고했네. 어서 와요.”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네는 그를 따라 게이트볼장 한편에 마련된 서울시 게이트볼연합회 사무실로 들어갔다.
아담하고 깔끔한 사무실의 한쪽 벽면에는 그동안 서울시 게이트볼연합회 대표팀인 서울 희망팀이 받은 트로피들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 ▲ 게이트볼 스틱과 공이 바닦에 놓여 있다.
게이트볼을 하면 나이 들 시간이 없다
서울 희망팀은 서울 각 지역구에서 실력이 뛰어난 선수들을 선발해 만든 시니어 게이트볼 팀이다. 최소 15년 이상의 경력을 지닌 선수들은 각종 대회에서 상을 휩쓸며 그 저력을 뽐냈다.
그들의 실력은 입소문을 타고 해외로까지 퍼져 나가 지난 3월 30일에는 중국 게이트볼 회원들이 교류전을 치르기 위해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벽을 가득 채우고 있는 트로피들을 지나 작은 방으로 들어가니 한 노신사가 소파에 앉아 있었다. 서울시 게이트볼연합회 정규태 회장이었다. 서울 25개 지역구 게이트볼연합회의 총 책임을 맡고 있는 그는 84세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젊어 보였다. “종합검진을 해도 어디 아픈 데가 없어. 그 흔한 감기도 잘 안 걸려. 아마 내가 웬만한 젊은 사람보다 체력은 더 좋을걸?” 정 회장은 자신의 건강 비결이 게이트볼이라고 했다.
“이따가 보면 알겠지만 게이트볼을 하는 사람 중에는 나이 들어 보이는 사람이 없어. 꾸준히 운동하고 사람들 만나서 웃고 떠드는데 늙을 새가 어디 있겠어.” 실제로 게이트볼장 곳곳을 돌아다니며 회원들을 만났지만 단 한 명의 나이도 맞추지 못했다. 60대 회원에게는 자신 있게 50대일 것 같다고 말했고, 80대 회원에게는 60대가 아니냐고 묻기도 했다. “이 사람 진짜 사람 볼 줄 아네.” 60대가 아니냐는 질문을 받은 82세 여성 회원은 기분 좋은 듯 콧노래를 부르며 에디터의 옆구리를 콕콕 찔렀다.
- ▲ 여성이 게이트볼을 하고 있다.
게이트볼은 노화 방지에 최적화된 운동
경기장에 모인 회원들은 게이트볼이 노화 방지에 최적화된 운동이라 입을 모아 말했다. 경기 중 몸과 머리를 한시도 쉴 수 없기 때문이다. 경기 방법은 비교적 간단하다. 5명이 한 팀을 이루고 두 팀이 30분 동안 경기를 펼치는데, 선수들은 양 팀 교대로 출발점부터 스틱으로 자신의 공을 쳐서 3개의 게이트를 순서대로 통과시켜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경기장 한가운데 있는 종이 달려있는 막대기를 공으로 치면 차례가 끝난다. 골프 같기도 하고 당구 같기도 한 이 단순한 운동은 경기 내내 자신의 공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게이트에 넣을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하기 때문에 머리를 많이 쓰게 된다. 또 한 게임이 진행되는 30분 동안 끊임없이 몸을 움직여야 하기 때문에 격렬한 운동을 할 수 없는 시니어들에게 적합하다.
연습은 실전처럼, 실전도 실전처럼
정규태 회장과 짧은 대화를 마치고 게이트볼 경기를 관람하기 위해 경기장으로 향했다. 시립창동게이트볼장은 서울시에서 운영하는 구장 중 하나로 모두 8개의 코트를 보유하고 있다. 야외에 위치한 경기장 천장에는 두꺼운 천막이 쳐져 있어 비가 오거나 햇빛이 강한 날에도 문제없이 운동할 수 있다. 에디터가 경기장을 방문한 날에는 마침 서울 희망팀의 연습이 한창이었다.
“다음 주 대회를 앞두고 정신이 없어.” 서울 희망팀 정무권 감독은 에디터와 대화를 나누는 중에도 경기장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몸은 경기장 밖에 있었지만 눈동자로 빠르게 선수들과 공을 쫓으며 작전을 세우고 지시를 내렸다. 비록 연습경기였지만 경기가 진행되는 30분 동안 농담은커녕 웃음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각 팀 주장은 팀원들의 움직임을 보며 시시각각 지시를 내렸고, 팀원들은 지시를 응용해 기량을 펼쳤다. 연습경기라도 봐주는 건 없었다. 사진 촬영을 한답시고 에디터가 길을 막아서는 바람에 한 선수가 공을 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자 회원들은 공을 쳐야 되니 빨리 나오라며 단호하게 말했다.
알고 보니 정해진 시간 안에 공을 치는 게 규칙이란다. “연습을 실전처럼 해야지 경기장에 가서도실수를 안 해. 근데 실전을 연습처럼 하라고 하면 안 돼. 실전은 실전답게 해야 이기지.” 정 감독의 얘기를 들으니 그 많던 트로피가 노력의 산물이라는 것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 ▲ 남성이 게이트볼 스틱을 들고 서있다.
게이트볼이 만들어준 새 삶
엄숙하다고 해도 될 정도로 진지하게 진행되던 경기를 지켜보던 중 유독 눈에 들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서울 희망팀 선수 한재상 씨였다. 그는 게이트볼 스틱을 지팡이처럼 짚고 다리를 절뚝거리며 경기에 참여하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다가가 불편하지 않느냐고 묻자 그는 의외로 쾌활하게 답했다. “20년쯤 전에 교통사고를 당했어. 그때 다리를 절게 됐고 장애 판정까지 받았지.” 교통사고가 나기 전까지 그는 각종 운동을 섭렵한 만능스포츠맨이었다.
하지만 40세 젊은 나이에 큰 교통사고로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가게 됐다. “그때는 정말 막막했어. 운동은커녕 걷는 것조차 힘들었으니까. 그래도 사람이 죽으란 법은 없다고, 그때쯤 게이트볼을 알게됐어. 나한테는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 거지.” 한재상 씨는 물리치료를 마치자마자 게이트볼을 시작했다. 갑자기 들이닥친 시련에 마음의 문을 굳게 닫고 있던 그였지만 게이트볼을 하면서 사람들을 만나고 몸도 건강해지자 차츰 마음을 열게 됐다.
“내가 운동한다고 하면 다들 무시해. 걷지도 못하는데 무슨 운동이냐고. 근데 나는 이렇게 대표팀 선수까지 됐잖아? 게이트볼장에 올 때마다 나 자신이 자랑스럽고 그래.” 10분간의 휴식시간이 끝나고 경기가 시작된다는주장의 호각 소리가 들리자 한재상 씨는 다시 스틱을 잡고 경기장으로 늠름하게 돌아갔다.
게이트볼을 하면 건강에 좋을까?
게이트볼 경기 하는 모습을 보면 느리 게 걸으며 공을 치기 때문에 운동 효과 를 의심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게이트 볼은 어르신들의 심신 건강을 지키는 데 최적화된 운동이다. 격렬하게 뛰는 동작 은 없지만 경기 내내 근육과 관절을 골 고루 사용하는 전신운동이다. 경기하는 동안 끊임없이 걷기 때문에 심장이나 폐 에 무리를 주지 않고 유산소운동 효과 도 볼 수 있다.
실제로 제주발전연구원이 65~74세 남성 중 정기적으로 게이트볼 을 한 사람과 별다른 운동을 하지 않는 사람 92명을 조사한 결과, 게이트볼을 한 그룹이 10m 걷기, 누운 자세에서 일 어나기 등의 항목에서 우수한 것으로 밝 혀졌다. 게이트볼은 몸뿐 아니라 마음도 건강하게 한다. 대부분 야외에서 하기 때 문에 비타민 D 합성에 효과적이며, 다른 사람들과 팀을 이뤄 적당한 경쟁을 즐기 면서 하기에 우울증을 예방하는 데도 도 움이 된다.
/ 에디터 이현정 lhj@chosun.com/ 포토그래퍼 김지아 jkim@chosun.com
/ 도움말 조수현(중앙대병원 가정의학과 교수)
/ 촬영협조 서울시 게이트볼연합회 대표팀
월간헬스조선 5월호에 실린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