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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7일은 베트남 국민에게 특별한 날,
60년 전 베트남 북서쪽 라오스 국경 지역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승리한 날이다.
7일 디엔비엔푸에서는 대통령을 비롯,
각국의 사절, 외교단, 지역 주민들이 참석한
대대적인 승전기념식이 있었다.
TV마다 당시 전투 상황을 담은 다큐멘터리,
훈장을 주렁주렁 단 90세 노병들의 치열했던 전투 인터뷰,
시내 주요 거리에는 승전 문구를 담은 현수막,
나라 전체가 디엔비엔푸로 떠들썩하다.
당시 전설적인 승리를 지휘했던 보응우옌잡 장군은
작년 가을 102세로 세상을 떠났는데
고향에 묻힌 그의 묘소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배종하 FAO 대표)
베트남 독립과 공산주의 혁명 군대를 지휘한 지압장군은
게릴라 전술을 이용해 막강한 외국군을 물리치면서
베트남인들에게 전쟁 영웅으로 칭송을 받고 있는 분입니다.
베트남에서는 그의 명성이 호치민 다음으로 높습니다.
구엔 지압 장군은 생전에 3불정책으로 압축되는 전략으로
초 강대국들 (프랑스/미국/중국/) 자존심에 큰 상처를 안겨줍니다.
3불정책이란
1. 적이 원하는 곳에서 싸우지 않는다.
2. 적이 원하는 시간에 싸우지 않는다.
3. 적이 생각하지 못하는 전술로 싸운다.
지압 장군의 유해는 13일 국장이 끝난 후
고향인 꽝빈 성으로 운구돼 매장되었읍니다
베트남을 넘어 전세계인의 존경을 받아온
그의 별세소식에 안타까움을 전합니다.
한국군이 베트남에서 한일을 기억하지만
한국을 원망하지 않는다는
그분의 생전 인터뷰에 존경의 마음을 전합니다.
<디엔비엔푸 전투>
베트남은 오랜 식민지 시대를 거쳤으면서도 전쟁만은
대국들과 당당하게 맞서 싸워 이긴 국가다.
식민지 지배국가였던 프랑스, 국경 싸움을 벌였던
중국, 베트남 전쟁의 미국등 세계적인 초 강대국들과의
싸움에서 한치의 양보없이 싸운끝에 강대국의 무릎을 꿇려
지금의 통일 베트남이 있게 된 기초가 되었다.
(하노이에서 북서쪽으로 350km 떨어진 디엔비엔푸 분지)
태평양 전쟁 막바지인 1945년 7월 포츠담 회담 결과
무장해제된 일본군 대신
베트남 북쪽은 중국이, 남쪽은 영국이 점령한다.
하지만 프랑스는 밀실협상을 통해
중국과 영국의 양보를 얻어
태평양 전쟁 전 베트남을 지배했던
식민지 권리를 되찾기 위해 프랑스군을 진주시킨다.
일본의 지배를 벗어나 막 독립을 쟁취한
호치민의 베트남 민주 공화국은
다시금 식민지배를 원했던 프랑스에 맞서 힘겨운
독립전쟁을 벌이게 된다.
2차세계대전을 통해 잔뼈가 굵은 나폴레옹의 후예들과
자전거를 타고 손자병법을 읽던 호치민의 베트남인들은
이렇게 맞부딪치게 된다.
그러던 중 1953년 5월 프랑스군 사령관으로 부임한
앙리 나바르(Henry Navarre) 장군은
베트남 국토의 2/3을 점령한 베트남군의 주력을 격파해서
승기를 잡고 싶어했다.
앙리 장군과 미 군사 고문단은
베트남 북서부 라오스 국경 근처에 위치한
디엔 비엔 푸(Dien Vien Phu)로
베트남군을 유인해서 섬멸하는 작전 계획을 세우고,
1953년 11월 20일 작전을 시작한다.
어찌 어찌하다보니
무장도 열악한 베트남군에게 지금껏 밀리긴 했지만,
월등한 화력을 집중시킬 수 있는 개활지로 유인해 낼수만 있다면
한 주먹 꺼리도 않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유인해 내려면 미끼가 필요하고,
그래서 디엔 비엔 푸라는 곳에 미끼를 뿌리기로 결정한 것이다.
(디엔 비엔 푸에 강하중인 프랑스 군인들)
남북으로 18km,
동서 6km에 이르는 분지로 주변 고지대에 둘러싸여있던
디엔 비엔 푸는
수송기에서 강하한 프랑스군에 의해 손쉽게 점령됬다.
수차례 추가 강하를 통해 주둔군은
16,000명으로 증강되어 비행장 시설을 확보하고,
최신식 화기와 대포 60문을 배치한다.
(당시 디엔 비엔 푸 항공 촬영 사진)
프랑스군은 북서 베트남의 교통 요지였던
디엔 비엔 푸를 점령하면,
주변 산맥과 정글에 배치된 베트남군 주력이
탈환을 위해 평야 지대로 집결할 것으로 예상했다.
숫적으로 우세한 적군 한 복판에 스스로 포위됨으로써
방심한 베트남군이 총 공세로 나올 경우, 노
출된 적을 월등한 항공 전력과 포병 화력으로
괴멸시키겠다는 의도였다.
걸리면 뼈도 못추리게 해주겠다는 강한 자신감의 표현이랄까...
(프랑스군 방어진지)
의도대로 디엔 비엔 푸를 요새화한 프랑스군은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베트남군이 집결하기를 기다린다.
하지만 프랑스군 수뇌부는
베트남군의 전투 의지와 능력을 과소평가했다.
정글을 헤치고 디엔 비엔 푸에 집결한 베트남군은
총 4개 사단 5만명에 달했고,
전의를 불태운 호치민과 보 구엔 지압 장군(Vo Nguyen Giap)은
험준한 산을 넘어 총 200문에 달하는 야포를 옮겨 온 것이다.
이 것은 프랑스 수뇌부가 예상한 것 보다 훨씬 막강한 전력이었다.
(포위상태에서 적을 불러내 섬멸하려던 계획에서,
반대로 적에게 섬멸된 프랑스군)
프랑스군의 공중 폭격과 포격으로
베트남군 역시 상당한 인명 손실이 생겼지만,
5만에 달하는 총 병력은 지속적인 공세를 유지하기에 충분했다.
포위상태가 지속되면서 프랑스군의 참호와 요새는
하나 둘씩 베트남군 수중으로 떨어졌고,
프랑스군의 항공보급은 정확도가 떨어졌다.
부상자조차 후방으로 후송할 수 없었던 프랑스군의 사상자는
늘어났지만 디엔 비엔 푸를 이중, 삼중으로 둘러싼
지뢰, 부비 트랩, 참호, 포위망 때문에 후퇴조차 불가능했다.
애초 스스로 포위 상태가 되도록
유도한 프랑스 군 수뇌부의 뜻대로 완벽히 포위는 되었지만,
계획대로 프랑스 공군과 포병은 베트남군에 괴멸적 피해를 주지 못했다.
베트남군은 프랑스군을 포위했고
야포들은 전투기에 노출되지 않도록 교묘히 위장된 채
디엔 비엔 푸 공격선에 배치됬다.
하지만 프랑스 주둔군 역시 의도했던 포위인지라
추가 병력 증원도 거부한 채 기꺼이 일전을 기다리고 있었다.
전투가 시작되면 비록 수적으로 열세라도 항공 폭격을 동원하고,
경전차, 곡사포, 중박격포, 대공포등을 이용해
정글에서 노출된 베트남군을 박살내겠다는 의욕에 차 있었다.
베트남군의 야포는 몇 대 되지 않을 뿐더러 경사면에 배치되어
정확도도 떨어지고,
프랑스 폭격기들의 손쉬운 표적이 될 것으로 예상했다.
포위된 상태에서도 적에 대한 과소평가는 여전했다.
몇 번의 산발적인 전투를 거쳐 1954년 3월 13일
야간, 베트남군의 총 공격이 시작되었다.
프랑스군 요새 진지에 대한 정밀 포격이 시작되고
프랑스군 진지를 향해 베트남군이 땅을 파 들어오자
군 수뇌부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예상보다 베트남 야포의 사격은 정확했고,
반대로 아군의 포격은 은폐된 적 대포를 효율적으로 타격하지 못했다.
엎친데 덮쳐 우기가 시작되자
진지 내 비행장으로의 수송기 이착륙이 불가능해졌고,
불량한 시계로 공군의 지원 역시 받기 힘들어 졌다.
이 정도도 예상 못하고 만 육천명을
적진 한가운데 보낸 군 수뇌부는 참 한심한 셈이다.
(부상자의 후송조차 불가능했던 디엔 비엔 푸 상황)
주요 방어 기점을 빼앗긴 상태에서
저공 폭격을 해야 했던 프랑스와 미국 공군은
대공화기에 50대 가까운 항공기를 격추당했다.
탄약도 떨어지고 후방 지원도 힘들어진 상태에서도
정예 부대였던 프랑스군은 용감하게 싸웠다.
프랑스 공수부대, 외인부대 모두 명성에 걸맞게
물밀듯 밀려오는 베트남군을 상대로
백병전을 벌이면서 버텨나갔다.
하지만 공군 지원도 포병 지원도 무력해지고
보급물자도 부족한 상태에서 세 배가 넘는 베트남군을
막아내기는 불가능했다.
(디엔 비엔 푸를 점령하고 깃발을 휘날리고 있는 베트남군)
마지막 날 전투에서 모든 요새가
베트남군에 의해 점령되면서
디엔 비엔 푸 포위전은 끝나게 된다.
프랑스군은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한 병사가
70명에 불과했고 전사자 5,000명에 11,000명이 넘는 부상자, 생존자가 포로가 됬다.
(포로가 된 프랑스 군, 이들중 다수가 행군 중 사망한다)
디엔비엔푸에서 350km 떨어진 하노이 근교의
포로수용소로 후송되는 부상 당하고,병 들고,
굶주린 11000명 포로를 돌보는 의료인은 간호장교 한 사람...
참으로 혹독한 죽음의 행렬이엇겠지요?
베트남군도 전사자가 2만 5천명에 달하는
막대한 피해를 입어야 했지만,
이 전투의 결과 전의를 상실한 프랑스로 하여금
1954년 7월 21일 제네바 휴전 협정에 서명토록 만들수 있었다.
(전투가 종결되고, 디엔 비엔 푸에 입성하고 잇는 보 구엔 지압 장군)
프랑스는 1956년 4월 베트남에서
영구 철수하기 전 마지막 작별 선물을 준비한다.
호치민의 베트남 민주 공화국에 맞서
남부 베트남에 무능하고 부패한 고딘디엠 정권을 세움으로써,
자신들을 괴롭힌 베트남인들 스스로 싸우도록 만든 것이다.
이 분단 상황이 이후 2차 인도차이나 전쟁,
즉 베트남 전쟁으로 확대됬으니
그런 면에서 분풀이 제대로 하고 간 셈이다.
프랑스군은 자신들 대신 베트남에 진주하는
미군들에게 이길 수 없는 전쟁이니
베트남인들과 싸우지 마라는 충고를 했지만,
그들 역시 프랑스군이 가졌던 오만과 편견을 벗어나지 못했다.
우월한 장비와 월등한 화력으로
베트남인들의 통일 의지를 꺽을 수 있을 것이라고 오판 한 것이다.
1954년 3월 중순 佛軍 은 美의 즉각적인 지원이 없다면
함락될 것으로 판단되어 美의 군사 개입을 원했다.
국무장관 덜레스는 월맹군에게 원자탄으로 대응하겠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한국전에서의 악몽을 기억하고 있는
합참의장 리지웨이는 공습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고 주장, 아이젠하워는 이에 동의.
디엔비엔푸의 포위된 불군을 구하기 위하여
핵 공격을 하면 월맹군과 불군 모두에게
막대한 피해를 줄 것이 분명했다.
미국의 군사개입은 한국전에서처럼 중국의 개입을 초래하고
중국뒤에는 소련이 버티고 섰다.
소련은 원자무기 보유국이었다. 결국 아이젠하워는 결정을 미루었고
실제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디엔비에푸 전투는 1954년 5월 7일 불군의 함락으로
끝이 났다. 불군은 항복을 하더라도 백기는 들수 없다 하였고,
이에 지압장군은 껄껄 웃으면서 허락하여 주었다.
베트남 전후 맥나마라가 하노이로 지압장군을 방문하였을 때,
" 미국은 이라크에서 반드시 패퇴 할 것이다.
남의 나라를 침공하여 이긴적은 없다."
"나는 전투에서는 졌고, 전쟁에서 이겼을 뿐이다."
< 네이버에서... >
첫댓글 베트남에 제갈량처럼 뛰어난 명장이 있었구나.
3불전략~손오병법처럼 상대의 허를 찌르는 계교!
긴~책을 읽고 간략히 소개해주는 친구가 고맙구나.~생큐
(sohn's rule~~
70나이에는 3불전략의 반대로 해야 살아남을 것 같구나.ㅎㅎ
상대가 원하는 시간, 장소에서
상대가 생각하는것을 동조해주는 즉 져주는 삶이 이기는 것이 아닐까?) ㅋㅋ
며칠 전 통일연수원에 가서 한국의 통일안보와 통일 미래에 관한 교육을 받고 왔고,
오늘은 서초포럼의 조찬 모임에서 한국과 세계 정국의 변화와 통일과 안보에 대한 우리의 가치관을
재조명하는 정몽준 의원의 강의를 듣고 왔습니다.
때문에, 베트남의 탁월한 명장에 대한 말씀이 새롭게 와닿습니다,
항상 쉬지않고 자기개발에 열심이신 원장님께 좋은 멘토링을 배웁니다. -희망가족:네이버카페-
호치민과 지압 장군.두 분이서 matching이 잘되어서 큰일을 성공적으로 완수한것같읍니다. 그러나 전사자가 너무 많았읍니다. 철조망에 엎드려있는 시체를 넘어 육탄 돌격을 하였다하니 나의조국의독립을위해 전력 질주하는 애국심 그리고 우리나라의 독립운동가의 거룩하셨던 투쟁 에 존경하는마음이 그지없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