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희의 문학의 숲]
창가의 나무
〈내 방에는 커다란 창이 있고, 창 바로 옆에는 나무가 하나 있다. 내 일상의 하루하루는 이 나무와 시작해서 이 나무로 끝난다. 매일 아침에 눈을 뜨면 하트 모양의 나뭇잎들이 투명한 아침 햇살에 찬란한 금테를 두르고, 오늘같이 화창한 봄날에는 창문을 열면 마치 바다냄새 같은 나무 향기가 나는 것 같다. 긴 하루가 지나고 침대에 누우면 달이 나뭇가지에 걸리고, 미풍에 흔들리는 나뭇잎 하나하나는 마치 작은 깃발처럼 현실보다 훨씬 좋은 꿈의 세계로 초청한다.
창가의 나무는 계절의 순환에 따라 사는 방법을 가르친다. 봄에는 재생의 기쁨을, 여름에는 성장의 보람과 생명력을, 가을에는 희생과 성숙을, 그리고 겨울에는 인내와 기다림을 가르친다. 조이스 킬머는 ‘나무’라는 시에서 “나무처럼 아름다운 시는/ 내 결코 볼 수 없으리/ 온종일 하느님을 바라보며/ 잎 무성한 팔을 들어 기도하는 나무…/ 시는 나 같은 바보가 만들지만/ 나무는 오직 하느님만 만들 수 있는 것”이라고 노래했고, 타고르는 “나무는 땅이 하늘에 말하는 언어”라고 했다. 로버트 프로스트의 ‘창가의 나무’라는 시를 읽는 지금도 나무는 내 책상 위로 그림자 물결을 던지고 서 있다. “내 창문가의 나무, 창문 나무/ 밤이 오면 나는 창틀을 내린다/ 그러나 너와 나 사이에는 커튼이 드리워지지 않기를….”〉
우연히 오래 전에 어느 대학 영자 신문의 청탁을 받고 쓰다가 마무리가 생각이 안 나서 그만두었던 ‘나무’라는 글을 발견했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 읽으니 마치 내 글이 아닌 것처럼 목소리가 생경하다. 지금의 내 글들보다 훨씬 더 낭만적, 아니 서정적이기까지 하다. 물론 지금은 환경도 많이 달라졌다. 지금의 내 방 창문은 옆집 벽과 맞닿아 있고, 글 속의 나무 백일홍은 이사 와서 뜰 한구석으로 옮겨졌지만, 솔직히 말해 그 나무를 제대로 쳐다본 게 언제인지 기억조차 까마득하다. 오래 전 글에는 아직도 조금 삶의 여유와 낭만이 있고,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는 눈이 있다. 요새 내가 쓰는 글에는 삶의 여유보다는 부대낌이, 낭만보다는 현실이, 그리고 자연보다는 인간이 더 많이 등장하는 것 같다.
따지고 보면 슬픈 일이지만,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대학 때부터 지독한 근시였던 내가 삶의 가까운 쪽, 앞쪽, 아름다운 쪽만 보았다면, 원시가 된 지금은 삶의 좀 더 먼 쪽, 뒤쪽, 그리고 결코 아름답다고 할 수 없는 쪽도 눈에 들어온다. 삶 속에는 달콤한 꿈, 야망, 낭만적 환상, 별, 장미꽃밭, 아름다운 숲, 향기로운 미풍, 연인과 만나는 호텔 스카이라운지, 아이들이 분홍빛 조가비를 줍는 백사장이 있다. 하지만 삶 속에는 실패와 배신, 위험, 좌절도 있고 찌개가 타는 부엌, 가족 간의 사소한 다툼, 악쓰고 우는 아기도 있다. 하나라도 더 팔려고 소리쳐대는 시장통에도, 노동자들이 등짐을 져 나르는 건설현장에도, 어깨를 스치며 다니는 복잡한 거리에도 삶은 있다. 삶은 사람들이 울고 웃고 싸우고 상처를 주고받고, 그리고 사랑하고 미워하는 곳이면 어디에든 있다.
‘나무’라는 글을 쓴 지 십수 년이 지난 지금에야 글을 어떻게 마무리할 수 있는지 알 것 같다. 그 글에서는 프로스트의 시 ‘창가의 나무’의 첫 부분만 인용했었는데 아마 이 시의 진정한 의미는 마지막 두 줄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너의 머리가 바깥 기후에 시달리듯/ 내 머리는 내 안의 풍파에 시달린다.”
여전히 뜰 한구석에 서있는 나무는 변화무쌍한 바깥 기후에 시달리고 있고, 나는 내 안의 풍파를 견뎌내면서 조금씩 성숙의 나이로 다가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