맏며느리의 몸에서 태어난 큰손녀는 3.6kg의 우량아였다. 손녀와 할아버지는 분만실 앞에서 첫 인사를 나눈다. 손녀는 사바세계 그 어느 것도 궁금하지 않다는 듯이, 또는 보고 싶지도 않다는 듯이 빨간 얼굴에 두 눈은 꼭 감고 있었다. 손녀와는 달리 둘째 며느리의 몸을 빌려 태어난 손자는 2.95kg의 다소 왜소한 몸집이었지만 또랑또랑한 눈망울로 할아버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본다고 해서 보일 리가 없으니 손녀 손자와의 첫 만남은 할아버지 혼자만의 짝사랑이었다.
태어난 날과 부모는 다르지만 두 아이의 공통점이 있다면 제 아버지의 얼굴을 판박이처럼 닮았다는 것과, 손녀와 손자를 바라보고 있는 나에게 두 병원의 간호사가 녹음이나 한 듯이 똑같이 말했다는 점이다.
“너무 닮아서 이산가족 걱정은 안 해도 되겠어요. 아빠 얼굴 그대로네요. 할아버지도 닮 고요.”
“어허 그건 안 되지”
“왜요?”
“이 할아버진 사진발이 영 안 받거든. 그러니 날 닮으면 곤란하단 얘기지”
한바탕 웃음. 그래서 손녀 손자와 할아버지의 첫 만남은 웃음 속에 끝났다.
출산 뒤, 두 며느리가 느끼는 감상은 서로 달랐을 것이다. 큰며느리의 경우, 한 집안의 장남에게 대를 이을 아들을 낳아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마음이 전혀 없진 않았겠지만, 이제 문을 열었으니 아들이야 다음에 낳으면 된다는 식의 안도감으로 살림밑천인 첫 딸이 더욱 사랑스러웠을 것이다. 둘째의 경우는 또 다르다. 아들이 없는 당숙에게 양자로 입적하여 느닷없이 6대 종손이 된 남편에게 아들을 낳아주었으니 출산의 고통도 쉽게 잊을 수 있었을 것 같다. 그러나 두 며느리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건강한 아이를 아무 탈 없이 출산하였다는 것일 게다.
나는 손자의 손을 가만히 잡아본다. 고사리 새순 같은 손가락이 내 손바닥 안에서 꼼지락거린다. 그것은 감동이었고 축복이었다. 손녀의 손을 처음 잡았을 때의 떨리던 감동이 되살아난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 중에 어떤 인연으로 이 아이들은 나의 손녀 손자로 태어났고 나는 할아버지가 되었을까?
불가(佛家)에서는 인연(因緣)을, ‘인과 연, 즉 결과를 만드는 직접적인 원인과, 그 원인과 협동하여 결과를 만드는 간접적인 힘이 되는 연줄에 의해서 인연이 맺어지고 끊어진다.’고 한다. 그리고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음으로 이것이 있는’ ‘연기의 법칙’으로 설명하기도 하지만 문외한인 나에게는 난해한 해석이다. 그러나 쉽게 풀이하자면,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 이어지는 윤회의 법칙과 운명의 실에 이끌려 인연이 맺어진다는 설명 아닐까. 나와 아이들의 인연 역시 그렇게 해서 맺어졌을 것이다.
그 애들이 태어난 지 제법 많은 날들이 흘렀다. 손자가 할아버지의 얼굴을 기억하고는 아는 척 방글방글 웃는다. 나는 그 웃음을 보며 때때로 상념에 잠긴다. 까닭 없이 태어난 생명은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아이들은 어떤 운명의 별에 이끌려, 어떤 배역을 맡아 이 세상에 태어났을까. 맏아들의 장녀인 손녀 지원이의 짐도 가볍지는 않지만, 7대 종손으로 태어난 손자 원찬이에게 지워진 짐의 무게는 도무지 계량할 방법이 없을 것 같다. 지금은 유교적인 색채가 많이 퇴색하였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전통을 지키려고 애를 쓰고 있는 가문의 종손에게 지워진 짐이니 얼마나 무겁겠는가. 그러나 그 짐을 지는 것은 먼 훗날의 일, 아무 것도 모르고 천사처럼 웃고 있는 두 아이는 연인처럼 사랑스럽다. 아니 ‘처럼’이라는 보조사는 빼자. 손녀와 손자는 나의 작은 연인이니까.
고사리 손 그대로인 손자와, 두 돌이 지나 제법 ‘왈가닥 루시’ 흉내를 내며 천방지축으로 뛰어다니는 손녀도 아직은 새싹같이 연약하다. 그래서 바람 앞에서는 곧장 쓰러질 것 같고, 보슬비만 내려도 뼈 속까지 젖을 것 같다.
아프리카의 밀림 속에서 자라는 ‘유추프라카치아’란 꽃이 있다. 햇빛조차 제대로 들지 않는 우거진 숲 속에서, 어쩌다 잠깐 들렸다 가는 햇살과 새벽이슬을 먹고 자란다는 꽃이다. 너무나 연약하여 지나가던 곤충이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연분홍 꽃술은 상처를 받아 시들고, 무심히 스치는 사람의 손길에도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간다는... 애정결핍증의 가녀린 식물이다. 그러나 한 번 닿았던 손길이 다음 날도 잊지 않고 찾아와 따뜻한 마음으로 쓰다듬어주면 생기를 되찾아 생명을 이어간다는 신비한 꽃이다.
손녀와 손자, 그 애들은 나의 ‘유추프라카치오’꽃이다. 행여 그 꽃잎 시들세라 늘 귀여워하며 쓰다듬어 주어야 싱싱하게 자랄 수 있다. 하지만 그 애들을 언제까지나 여린 모습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 ‘유추프라카치아’가 아니라 박달나무처럼 단단하고 대나무처럼 곧고 튼튼하면서도 때로는 버들가지처럼 부드러워질 수 있는 사람, 그러면서도 가을 국화처럼 향기로운 인품을 가진 사람으로 자라게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르쳐야 할 것이 참 많다. 용기와 신념, 사랑과 미움, 아름다움과 추함, 선과 악 등등, 그리고 진실과 거짓이 뒤범벅이 된 혼탁한 이 세상에서 바른 길을 걷는 방법과 지혜도 깨우쳐줘야겠고, 온갖 시련을 이겨내는 방법도 알려주어야 한다. 그러나 할아버지로서의 내 능력은 턱없이 부족하다.
인연과 연인을 반대로 읽으면 인연은 연인이 되고 연인은 인연이 된다. 얼마나 아름다운 말인가. 비록 지금은 어리디어리지만 나의 손녀와 손자는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 튼튼하고 지혜롭게 자랄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아니다. 나는 그 애들과 나 사이에 맺어진 인연에 감사하면서 주말이면 찾아와 내 품에 안길 아이들을 기다린다. 마치 연인을 기다리는 연인처럼.
첫댓글 훗.. 지금 배속에서 꼬물거리는 첫아기가 있어서 그런지.. 글이 너무 다정하고 사랑스럽네요..
산정화님 손녀 손자 재롱에 푹 빠지셨내요 참 행복하세요 그때가 제일 예뿔때죠..좋은 글 잘읽었습니다.
앵두님 반갑습니다. 축하 축하 또 축하 ㅎㅎ~잘 하셨어요 ㅎㅎ 산정화님 죄송해요 댓글에 이렇게해도되는지요 미안 미안
난곡님 반갑습니다. 그리고 빨간앵두님, 회임을 축하드립니다. 예쁜 아기 순산하기를 기원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