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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능력
롬 1:16~17
세상을 살아가려면 힘과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에게는 어떤 능력이 있습니까? 가족을 충분히 부양할 경제적인 능력이 있습니까? 땅을 파서라도 살아갈 건강의 능력이 있습니까? 고시 삼과에 합격할 수 있는 지식과 지혜의 능력이 있습니까? 하늘에 나는 새도 떨어뜨릴만한 권력이 있습니까?
이런 능력을 가진 사람들도 어느 날 세상을 다 떠납니다. 죽음 앞에서는 재물도, 건강도, 지식도, 명예, 권력도 다 무용지물입니다. 그렇다면 가장 큰 능력은 무엇입니까? 죽음을 이기는 능력입니다.
현대 의학이 발달해서 어지간한 장기는 이식하면 건강을 회복하기도 합니다.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만 사람에게 혈액을 수혈함으로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는 일은 인류사에 아주 획기적 사건이었습니다.
사람에게 최초로 수혈을 시도한 사람은 영국의 브룬델(James Blundell)입니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은 안전한 수혈의 시작은 1900년 ‘란트스타이너’가 혈액형을 발견하고 난 뒤부터입니다. 이로 인해 1,2차 세계대전으로 부상을 입고 죽을 위기에 있는 수많은 병사들을 구하였습니다. 죽어가는 사람 살리는 것은 대단한 능력입니다.
지금은 작고하셨지만 현신애 권사라는 분이 병 고치는 신유의 기도로 유명할 때의 일입니다. 신학생 한 사람이 위암 판정을 받고 얼굴이 사색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그 권사님을 찾아갔더니 밀가루 반죽을 환부 쪽에 바르고는 안수기도를 해 주더랍니다.
저는 그런 소리를 들으면서 한편으로는 참 어이없고, 한심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신학을 공부한다는 사람이 무슨 기도원에 가서 밀가루반죽이나 갖다 붙이고 기도받는다고 머리를 들이밀다니 그게 무슨 꼴이란 말이냐 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다음날 병원에서 정밀검사를 받은 결과 암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어떤 생각이 들었겠습니까? 처음 진단이 오진이었을까요? 아니면 기적이 일어난 것일까요? 틀림없는 것은 그분은 그것으로 더 이상 아프지 않았고, 또 그것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된 일이라고 믿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곧 간증입니다. 객관적 사실의 주관적 체험, 이것이 신앙의 체험이고 간증입니다.
복음은, 말이나 지혜, 논리가 아니라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입니다. 복음 안에는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생명력이 있습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봅니다.
(16절)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17절)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 말씀은 로마서 전체의 주제구절입니다. 이 말씀이 마르틴 루터를 일깨웠고, 많은 신학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의 심령을 사로잡은 구절입니다.
사도바울은 인간적으로 자랑할 것이 많은 사람이었지만 그는 오직 복음만을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갈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는 이 고백을 따라 그렇게 살았습니다.
복음만 자랑하는 삶! 십자가만 자랑하는 삶! 예수 그리스도만 높이는 삶!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뜨거운 열정의 삶! 바로 이런 삶이 행복한 삶이요, 성공한 삶이요, 후회 없는 삶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 아니하노니....”
바울 시대에 로마는 최고의 철학, 문학, 예술, 법 등이 존재하는 세계의 중심지였습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보여주듯이 로마는 가장 발달한 문명을 대표하는 도시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시대에 복음을 전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어 보일 수 있는지 바울 사도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전1:23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라.”
이처럼 최고의 문화 수준을 지니고 있는 로마인들에게 복음은 미련해 보일 것이며, 이 복음은 전하는 이로 하여금 충분히 부끄러움을 느끼게 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받은 우리에게는 너무 자랑스러운 것입니다. 왜요? 본문 말씀에서 우리는 두 가지 메시지를 들을 수 있습니다.
1. 복음은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고전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복음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 능력을 체험하고, 복음이 내 속에서 역사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내 속에서 꿈틀거릴 때, 그 사람이 비로소 그리스도인입니다.
복음의 능력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기독교신앙이 부끄러운 것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사람이 물 위를 걷고, 죽은 사람이 부활하고..., 이런 일들은 일반적인 상식으로 볼 때 얼마나 무지하고 몰상식한 말들입니까? 그러나 바울은 이 복음이 부끄럽기는커녕,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자랑합니다.
복음이 들어가면 인생이 바꿔집니다. 가치관이 변합니다. 복음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 이야기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있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부요함이 있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평강이 있습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1) 복음은 우리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의 승리입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 능력은 우리를 가난, 죄, 저주, 불안, 두려움과 공포, 스트레스, 상처, 질병, 죽음에서 해방시켜 자유를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2) 복음에는 죄를 사하는 용서의 능력이 있습니다.
인생이 무엇 때문에 괴롭고 힘듭니까? 몸이 아파서, 돈이 없어서, 남편이 속을 상해서, 자식이 괴롭혀서 고통스럽습니까? 어느 정도는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고통의 근본 원인은 죄의 문제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철저한 죄인입니다. 누구도 이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죄 로 인해 영혼이 죽을 인생들은 어떤 피를 수혈해도, 장기를 이식해도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오직 썩지 아니할 피,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만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죄를 사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 값을 대신 지불하셨습니다. 이 용서의 확신을 가질 때 비로소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3) 복음에는 풍성한 생명의 능력이 있습니다.
(요10:10)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복음을 받은 사람은 영혼이 소생합니다. 메마른 심령이 성령으로 촉촉이 적셔지고, 흐려진 눈이 밝아지고, 창백한 얼굴에 생기가 돕니다.
하나님의 생명은 우리의 생명에 생기를 부어 줍니다. 병든 심령이 치료받습니다. 육체의 질병에서 고침을 받습니다. 깨어진 관계가 회복됩니다.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복음에는 마귀의 일을 멸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요일3:8)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은 마귀의 일을 멸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마귀를 이길 수 있는 권세와 능력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마귀를 물리칠 수 있는 무기를 주셨습니다. 여러분의 영혼을 짓누르는 악한 영을 대적하십시오. 가정과 공동체를 결박하고 있는 마귀의 세력을 예수 이름으로 물리치십시오. 지역과 사회 문화를 지배하는 사단의 견고한 진이 파해지도록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포하십시오.
우리는 복음의 능력을 알고 있습니다. 완악하던 사람이 한 순간에 변화되어 하나님의 종으로 헌신하는 모습을 보면 복음의 위력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알게 됩니다.
현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돈, 명예, 권세, 지식, 건강, 과학이 아닙니다. 그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복음입니다. 돈이 있어도, 인기가 있어도, 미모가 있어도 자살하는 사람들 많습니다.
어느 부인이 강남에 살다 집을 팔고 강북의 더 큰 집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불과 2년 사이에 전에 살던 강남의 집값이 네 배로 오르자 자살했습니다. 아주 부자였지만 그리고 자기로서는 손해 본 것 없었지만 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보니 괴로웠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복음이 없어서 그런 불행을 봅니다.
2.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의’란 우리의 죄에 대하여 형벌하시는 응징으로서의 공의가 아니라 죄인을 용서하시고 의인이라고 인정하시는 하나님의 의를 말합니다.
루터는 복음을 깨닫기 전 하나님의 응징과 형벌로의 공의가 어찌 복음일 수 있는 지 고민하며 괴로워했습니다. 그러나 로마서를 연구해 가면서 하나님의 형벌로서의 공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 형벌하시는 십자가의 사건으로 다 성취되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얻고,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라고 인정받을 수 있음을 깨닫고 종교개혁을 감행하였습니다.
바울은 구약의 하박국서 2장 4절을 인용합니다.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사실 하박국 선지자의 이런 외침의 배경은 의인이 고난 받는 현실에 대한 부르짖음에 하나님이 응답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박국 선지자의 외침은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 왜 의롭고 신실한 자가 고난을 당해야 합니까? 악하고 패역한 자들은 잘만 삽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왜? 왜?”
부르짖고 기도하는데도 속한 응답이 없습니다. 이런 외침 가운데서 하박국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나님이 의롭다 여겨주시는 은혜 안에서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사는 것이 의로운 삶입니다. 이런 삶 가운데는 박해와 고난이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의로우신 하나님이 의로우신 중에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오늘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고자 몸부림치는 자를 결코 하나님은 외면치 아니하시고 은혜를 주십니다.
한국교회사에 순교자 유계준 장로님의 일화가 있습니다.
그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가 죽자 가세가 급격히 기울어 13세 때 객지로 떠나야 했습니다. 마침 미국인 선교사 사무엘 모펫이 평양시내에서 전도하는 것을 보고 선교사를 구타하는 등 선교를 방해하였으나, 그렇게 맞고도 예수 믿으라고 권유하는 선교사님께 설복되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평양에서 유서 깊은 산정현교회의 교인이 되면서 한경직, 길선주, 주기철 목사님 그리고 조만식, 안창호 장로님들과 가까이 교제하며 어두워져 가는 한국과 한국교회를 밝힐 횃불이 되기로 결단하였습니다.
특히 주기철 목사님이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감옥에서 순교할 때까지 5년 4개월을 그의 옥바라지와 가족 뒷바라지를 도맡아 해냈습니다. 결국 이 일로 일본 경찰들에게 협박당하면서도 “우리 목사님이 지금 감옥에 들어가 고생을 하고 계시는데 그 가족의 생활비마저 어떻게 안 드릴수가 있겠소.” 라고 당당하게 말했다고 합니다. 산정현교회가 어려운 시대를 이겨 나갈 수 있었던 것은 생명 내걸고 묵묵히 옹호하는 장로님들의 힘이 컸다고 교회사는 전합니다.
유계준 장로님은 6.25 발발 전 부인과 8남매를 강제로 남하시킨 후 교회를 지키겠다고 홀로 남았습니다. 공산당이 산정현 교회를 가마니 공장으로 쓰겠다고 내놓으라고 강요할 때 끝까지 반대하다가 마침내 순교의 피를 흘리게 되었습니다.
남하한 가족들은 맨손으로 홀어머니와 팔남매가 기구한 삶을 꾸려가야 했습니다. “물질과 목숨을 던져 하나님께 헌신한 결과가 이것입니까?” 이것이 하박국 선지지의 외침입니다. 그 때 주님이 주신 말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훗날 유계준 장로님의 후손들이 어떻게 된 줄 아십니까? 8남매 모두가 장로와 권사로 봉사하고 있으며, 8남매 중 6명은 한국과 미국에서 소문난 의사로, 나머지 2명 중 한 명은 서울대 총장을 지낸 유기준 박사이고, 마지막 한 명은 약사이며, 3대까지만 봐도 26명의 의사와 약사들이며, 교회를 섬기는 기둥 같은 일꾼들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는 자를 주님은 의인이라 인정하십니다. 구원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믿어서 그 믿음으로 하나님께 의인으로 인정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얻는 의 때문에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습니다. 죄와 죽음과 사탄의 세력에서 자유를 얻습니다. 오직 믿음, 오직 구원 이것이 영생이며 축복입니다.
초등학생 하나가 예수님을 믿고 아버지를 전도하는데 아버지가 듣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아들이 교통사고로 죽었습니다. 슬픔에 처한 부모가 아들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일기장을 발견했습니다.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하나님! 우리 아빠 꼭 예수님 믿게 해 주세요. 아빠가 예수님 믿기 위해서 내가 죽어야 한다면 나는 죽기를 원합니다. 내가 죽어서라도 아빠를 예수님 믿게 해 주세요.” 그런 글을 보고 눈물 흘리지 않고 예수님 안 믿을 사람 있겠습니까? 즉시 회개하고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아들의 목숨과 자기 구원을 바꾼 셈입니다.
구원의 감격, 복음의 능력을 회복하면 하나님께 열매를 드리고 싶은 마음이 가슴 속에서부터 치솟아 오릅니다. 안 믿는 사람 보면 견딜 수 없어 아파합니다. 오직 복음, 오직 영혼구원, 이 뜨거운 복음의 열정이 우리 가슴에도 불을 지르기 원합니다.
십자가의 복음은 죽었던 교회와 심령을 살리는 능력이 있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은 목표를 잃어버린 가슴에 불을 지릅니다. 십자가의 복음은 위기에 처한 국가를 다시 세우는 능력이 있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은 타락한 문화를 거룩한 문화로 재창조하는 힘이며, 어둠의 견고한 진을 파하는 힘입니다. 무너진 데를 수축하며 여호와의 물댄 동산 같은 교회를 세우는 비결은 오직 십자가의 복음뿐입니다. 영혼이 살고, 영원한 행복을 얻는 비결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뿐입니다.
첫댓글 항상 감사합니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