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감상요지
가치관의 대혼란이 나타난 근대와 현대가 뒤섞인1930년대 영국의 격동기에 집사로서 평생을 보낸 남자, '스티븐스'의 6일간의 여행을 따라가면서 그의 가족과 연인, 그리고 30여 년간 모셔온 옛 주인에 대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잃어버린 사랑의 허망함과 애잔함에 관해 내밀하게 써내려간다
투철한 직업정신과 헌신으로 일반명사화 하다시피한 ‘영국집사’의 인생역정을 통해 '맹목적인 의무'의 위험에 더 집중하는 경향이 보여지기도 하지만 영화 속 얼개는 주인인 달링턴 경과 집사인 스티븐즈, 가정부인 미스 켄튼과 스티븐즈의 관계를 씨실과 날실처럼 엮는다. 전통이 인간의 보편적 감정을 억누르는 영국 사회의 모습과 굉장히 영국적이고 은밀한 러브 스토리가 그것이다.
스티븐즈는 자신의 주인을 온 몸을 바쳐 섬기는 이상적인 하인이고, 달링턴 경은 불평등 조약으로 신음하는 옛 적국 사람들을 진심으로 동정하는 인도주의자이다. 하지만 그런 미덕이 그들을 비극으로 몰고간다. 달링턴 경은 자신의 이상주의와 페어플레이 정신 때문에 자신이 돕고자 하는 나찌의 진면목을 보지 못한다. 주인과 한몸이다시피 기거하는 스티븐즈는 자신이 본것 듣은 것에 대한 모른체 하거나 들은 적 없다고 이야기 한다. 때문에 그는 자기의 감정을 존중할 줄 모른다. 아니 존중하지 않는다. 완벽한 집사가 되기위해서... 프로페셔널한 직업정신에 대해 경외감마저 들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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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 켄튼과 스티븐즈의 사랑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일을 전면에 내세운 두사람은 서로에 대해 호감을 품고 있지만 한 번도 자신의 감정을 상대방에게 밝히지 않는다. 말없고 수줍은 두 남녀가 더듬더듬 거리면서 서로에게 접근하다 훌쩍 뒤로 물러나는 장면들은 굉장히 다이나믹하면서도 섬세하다. 그 중 가장 결정적인 장면은 역시 미스 켄튼이 스티븐즈가 읽던 연애 소설을 빼앗아 제목을 읽을 때, 불빛에 비친 남자의 푸른 눈동자는 얼마나 깊었는지, 그 장면은 다른 어떤 말보다 사랑의 진실에 대해 더 많은 말을 해준다. 절제된 사랑을 보여주는 홉킨스와 톰슨의 내면 연기가 압권이다. 시를 읽을 때 드러나는 수사학의 진수처럼...그 비극적 사랑을 미화시키는데 완벽하다. 수사란 것이 가끔 진정성을 가리기도 하지만 멋진 수사야말로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이다. 완벽한 줄거리 완벽한 연기, 완벽함이 주는 지루함이 혹시 결점이라면 결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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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만에 켄튼을 만나러 갔지만 비오는 역전에서 헤어지는 두사람의 모습이 오래 남는다. 비와 연인을 생각하면 <남과 여>의 두 주인공이 생각나지만 차장에 얼룩지는 빗물과 촉촉이 젖은 눈을 한채 떠나가는 스티븐즈를 버스 승강에서 선채 바라보는 켄튼.... 헤어졌으면서도 헤어지지 않는 사랑의 그림자로 내게 머물러 있다. 젊은 날의 사랑은 지나갔지만, 사랑을 입밖에 내지 않고 간직한 이상 남아 있는 나날에도 사랑은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