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에 바둥거리는 이파리들로 마지막 추위 달래는 은행나무 주욱 늘어선 홍제천변을 잠시 걸었다. 그 길에 맞대어 자그마한 카페를 열려고 준비하는 선배와 후배 부부의 작업장에 잠시 멈춰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이가 들면 사람은 이기적으로 바뀐다는 이야기 (그래서 우리들의 엄마가 점점 이기적인 어린 아이를 닮아가고 있다는 사실에 서로 동의하였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는 별다른 문제제기 없이 무난하고 착한 사람들이 자신의 엄마에게는 유독 모질다는 이야기 (그러니까 우리는 어린 아이 같아지는 엄마를 몰아붙이는 못난 자식들이 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에도 동의할 수밖에 없다) 등을 하였다.
슬픔이 없는 십오 초/ 심보선
아득한 고층 아파트 위 태양이 가슴을 쥐어뜯으며 낮달 옆에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 치욕에 관한 한 세상은 멸망한 지 오래다 가끔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난다 가능한 모든 변명들을 대면서 길들이 사방에서 휘고 있다 그림자 거뭇한 길가에 쌓이는 침묵 거기서 초 단위로 조용히 늙고 싶다 늙어가는 모든 존재는 비가 샌다 비가 새는 모든 늙은 존재들이 새 지붕을 얹듯 사랑을 꿈꾼다 누구나 잘 안다 이렇게 된 것은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태양이 온 힘을 다해 빛을 쥐어짜내는 오후 과거가 뒷걸음질 치다 아파트 난간 아래로 떨어진다 미래도 곧이어 그 뒤를 따른다 현재는 다만 꽃의 나날 꽃의 나날은 꽃이 피고 지는 시간이어서 슬프다 고양이가 꽃잎을 냠냠 뜯어먹고 있다 여자가 카모밀 차를 홀짝거리고 있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듯도 하다 나는 길 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다 남자가 울면서 자전거를 타고 지나간다 궁극적으로 넘어질 운명의 인간이다 현기증이 만발하는 머릿속 꿈 동산 이제 막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났다 어디로든 발걸음을 옮겨야 하겠으나 어디로든 끝간에는 사라지는 길이다
[시인과 함께 읽는 시]심보선 시인의 ‘슬픔이 없는 십오초’//
"살아가면서 시간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다는 걸 받아들이게 되죠. 거기서 느껴지는 슬픔과 십오 초 동안 마주해보세요"
#1
어두운 방 한쪽에서 여자는 아이에게 죽을 떠먹이고 있다. 남편이 들어와 불을 켜자 화면은 긴 터널 속을 빠져나온 듯 비로소 빛이 스며든다. 멍한 남편의 표정을 뒤로하고 아내는 한 손에는 숟가락을 쥔 채 편지를 받아 읽는다. 그러고는 다시 편지를 내려두고 아이에게 계속 죽을 먹인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슬픔을 저장해둔 듯한 표정, 울음을 미뤄두고 아이의 입에 죽을 밀어 넣던 그녀의 그 오묘한 표정을 잊지 못한다. 숨 막힐 듯한 침묵 속에서 묵묵히 계속되던 그 장면이 바로 내가 영화 '비정성시'를 기억하는 이유다. 그리고 가끔 마음 한구석에서 이 영화를 불러내 조용히 이름을 읊조려보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름마저 비장한, 가늠할 수 없는 그 슬픈 깊이 때문에. 짧은 시간이 흘렀다.
#2
살아간다는 것이 죄스러울 때가 있다. 피붙이의 죽음 앞에서 목 놓아 울다가도 쇠고깃국을 떠먹고 있는 나를 발견할 때, 친한 친구의 사고 소식에 하루 종일 무거운 마음을 하고서는 다음날 계획된 여행을 떠나기 위해 짐을 싸고 있는 자신을 보면서 '가능한 모든 변명들을 대면서' 다독여보기도 한다. 분명 슬픔은 사라지지 않은 것 같은데, 나도 모르게 슬픔을 잊게 된 걸까. 아니면 살면서 울음을 미뤄두는 연습을 많이 해온 덕에 점점 슬픔을 모르게 된 걸까.
심보선 시인은 다른 감정과 달리 슬픔은 누적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점점 슬퍼진다. 눈물이 왈칵 쏟아지는 그런 서러움이 아니라 가슴이 저릿한 먹먹한 슬픔.
"슬픔과 시간은 불가분의 관계예요. 슬픔은 시간에 의해 구속받는 거잖아요. 인생의 흐름 속에서 우리가 다양한 감정을 느끼게 되겠지만 어떤 것도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없죠. 그런데 슬픔은 영원하진 않지만 확대되고 증식되는 것 같아요. 높아졌다 낮아졌다 하는 곡선을 그리면서요."
'어찌할 바를 모를 정도로' 슬픈 순간은 꽤나 자주 찾아온다. 그리고 나이를 먹어가며 한 사람을 더 만나고, 한 가지 일을 더 겪고, 하루를 더 견뎌낸다는 것은 슬픔을 맛봐야 할 기회도 늘어난다는 뜻이다. 그렇게 '늙어가는 모든 존재는 비가 새고', 우리가 저릿한 가슴을 부여잡고 담담히 살아가다 보면 가끔 누군가 시간을 묶어두었음을 느낀다. 그렇게 슬픔이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났음을, 시인은 조용히 세어본다.
"삶에 대해 생각할 때 가슴이 먹먹하게 저린 감정이 드는 것은 '어떤 일에서 내가 개입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아가기 때문이죠. 그것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데서 느껴지는 슬픔. '이렇게 된 것은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시간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시간과 슬픔을 연결시켰어요."
하지만 시간 속에 슬픔을 저축해뒀다고 해서 그저 그냥 바라만 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받아들이는 슬픔은 그저 포기해버리는 '체념'과는 다른 감정이에요.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차곡차곡 가져가는 거니까요. 그렇게 쌓아가다가 잊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면으로 직시하는 순간, 슬픔과 마주 보는 순간, 그때가 바로 슬픔이 없는 십오 초가 아닐까요?"
#3
"거기가 옛날에 내가 살던 곳이야. 깊고 깊은 바다 속. 난 거기서 헤엄쳐 나왔어. 그곳은 빛도 소리도 없고, 바람도 안 불고 비도 안 와. 정적만 있을 뿐이지. 별로 외롭지는 않아.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그냥 천천히 시간이 흐를 뿐이지…. 언젠가 네가 사라지고 나면 난 길 잃은 조개껍데기처럼 혼자 깊은 해저에서 데굴데굴 굴러다니겠지. 그것도 그런 대로 나쁘지는 않아." -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中
아이러니하게 들리겠지만 어둠을 오래 겪은 사람이 진짜 빛을 긍정할 수 있다. 빛이 사라져버린 '미래'까지도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슬픔을 담담하게 똑바로 쳐다보는 법을 배우게 되면 시간이 빚어내는 유한한 삶에 대해서도 직시하게 된다. 태어난 것은 언젠가 반드시 사라지게 마련인 생의 한가운데서 '그럼에도 살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다.
"끝을 항상 염두에 두지도 잊어버리지도 않고 똑바로 보면서 전진하려고 해요. 그렇게 후퇴하지 않고 끝을 직시하며 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시(時)예요. 새로운 언어가 새로운 세계를 만들고 그걸 통해서 힘을 얻기도 하고 위안을 받기도 하고요."
"저는 보통 시를 쓸 때 한 장면, 한순간의 느낌, 이미지로부터 출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에요. 이 시 같은 경우도 어느 날 고양이가 꽃잎을 냠냠 뜯어 먹는 것을 멍하게 보고 있는데 마음속에서 말들이 막 솟아나기 시작하면서 쓰게 됐어요. 말들이 이미지를 만들고 세계가 되고 이렇게 내놓게 됐네요."
울림 깊은 목소리의 심보선 시인은 시를 쓴다는 것에 대해 ''내 안의 비밀을 바깥 세계의 다른 비밀들과 연결시키는 특별한 일'이라고 이야기했다. 각자 갖고 있던 비밀들이 꿈틀꿈틀 튀어나와 세계가 되어 서로 만나게 되는 것, 시가 있고 예술이 있는 이유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시를 읽고 그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유독 많은 영화와 음악이 머릿속을 돌아다녔다. 모두가 하나의 목표를 향해 삶의 키를 겨누고 있는 것만 같은 요즘, 그의 시집을 읽으며 다양한 생각과 비밀을 나눠보길 권한다.
심보선
시인은 199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풍경'이 당선되면서 등단했다. 특정한 계기가 갈고리가 되어 마음속 말과 이미지를 낚아 올릴 때만 시를 쓰기 때문에 다작을 하는 편은 아니다. '21세기 전망'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대학에서 '예술사회학'에 관한 강의를 하고 있다. 지적인 외모에 건조한 듯한 시어를 쓰는 시인이지만, 삶에서도 그리고 시 곳곳에서도 유머를 촘촘히 엮어내려는 그의 시도가 눈에 띈다.
늙어가는 모든 것들은 예외 없이 상처받는다. 그 상처가 그들을 이기적인 존재로 만드는 것은 무척 보편적인 이야기일 것이다. 나 그리고 선배와 후배 내외는 자식을 낳지 않았으니 수모를 당하지는 않을 테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들이 이기적인 존재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볼 수는 없겠지... 그건 그렇고, 선배가 소개해준 이 시인도 참 시를 잘 쓴다. 이런 시를 읽으며 늙어간다면 나의 이기의 속도가 조금은 늦춰지지 않을까...
“나는 엄마와 가을의 햇빛 속을 거닌다 / 손바닥을 뒤집으니 손등이 환해지고 / 따사롭다는 말은 따사롭다는 뜻이고 / 여생이란 가을, 겨울, 봄, 여름을 몇 번 더 반복한다는 거다” - <웃는다, 웃어야 하기에> 중
그건 그렇고 엄마의 스킨십이 늘었다. 길을 걸을 때면 나의 손을 잡아 끌고는 한다. 젊은 아내의 손은 잘도 잡아주면서 엄마의 손을 먼저 끌어 당겨본 적이 언제던가, 계절을 반복하고 반복하다 어지럼증까지 생기게 된 엄마의 손을... 어두운 낯빛 싫어하는 아들을 위하여 부러 웃음 지으려 노력하는 엄마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은 고사하고, 오늘도 나는 추운 날씨만큼이나 쌀쌀한 표정으로 전화를 받지 않았는가...
어찌할 수 없는 소문
나는 나에 대한 소문이다 죽음이 삶의 귀에 대고 속삭이는 불길한 낱말이다 나는 전전긍긍 살아간다 나의 태도는 칠흑같이 어둡다
오지 않을 것 같은데 매번 오고야 마는 것이 미래다 미래는 원숭이처럼 아무 데서나 불쑥 나타나 악수를 권한다 불쾌하기 그지없다 다만 피하고 싶다
오래전 나의 마음을 비켜간 것들 어디 하데 모여 동그랗고 환한 국가를 이루었을 것만 같다 거기서는 산책과 햇볕과 노래와 달빛이 좋은 금실로 맺어져 있을 것이다 모두들 기린에게서 선사받은 우아한 그림자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 쉽고 투명한 말로만 대화할 것이다 엄살이 유일한 비극적 상황일 것이다
살짝만 눌러도 뻥튀기처럼 파삭 부서질 생의 연약한 하늘 아래 내가 낳아 먹여주고 키워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정말 아무것도 없다 이 불쌍한 사물들은 어찌하다 이름을 얻게 됐는가
그렇다면,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이 살아 있음을, 내 귀 언저리를 맴돌며, 웅웅거리며, 끊이지 않는 이 소문을, 도대체,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내 삶의 ‘어찌할 수 없는’ 시원을 항하여 나는 왜 그리 오만불손한 것인지. 이것은 제 삶을 향하여 기대할 것 없음이라고 불치의 진단을 내린 나 자신을 향한 연민일까, 아니면 나를 둘러싼 피로하기 그지없는 삶의 허황된 소문들을 멀리하고자 하는 늙은 반항일까... 그저 나는 나의 자식들을 만들지 않음으로써 나의 소문을 더욱 늘리지 않은 것으로 만족하고 자족한다.
“꽃가루처럼 산산이 부서져 흩날리는 생의 신비여 / 십자가 위에서 으아, 기지개 펴는 낙담한 신성이여 / 이제 내 몸엔 구석구석마다 가지각색의 영혼들이 깃들어 있다 / 다들 사소해서 다들 무고하다” - <종교에 관하여> 중
그러고보니 나는 어제 겨울은 종교적인 계절이다는 뉘앙스의 트윗을 올렸다. 딱히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은 내게 부모님은 나의 종교가 되어야 마땅한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나의 불손은 불경에 가까운 것일까... 그렇지만 나는 나와 부모님의 관계를 ‘다들 사소해서 다들 무고하다’고 정리해야겠다. 아, 오늘은 얼마 전 허리 수술을 끝내고 다시금 육신의 평정을 찾은, 어머니의 종교인 것만 같은 아버님의 생신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