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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킨토시의 글을 최근에야 보게 되었는데,
젊었을 때 보았더라면
그렇게 혼란스럽지 않게 빨리 복음의 진리에 도달했을텐데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매킨토시는 모세오경 주석에 대해 가장 훌륭한 주석을 한 사람으로 인정된 유명한 신학자입니다.
저는 많은 사람의 글을 읽어보았지만,
이 분 만큼 그리스도의 법을 잘 깨닫고 있는 사람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법은 문자로 된 율법과는 다른 것인데, 많은 신학자들이 문자로 된
다른 법으로 생각하고 추구하다가 결국 수없이 오류에 빠졌습니다.
수 많은 신학자들이 율법의 유익한 면을 깊이 생각하다가
율법을 그리스도인들의 규례로 제시하는 심각한 오류를 범했습니다.
그런데 매킨토시는 바울이 말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법을
확실하게 깨닫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그는 그리스도의 법을 체험한 거듭난 그리스도인임에 틀림없습니다.
칼빈, 루터.. 모두 기라성같은 분들임에는 틀림없지만,
우리가 좇아야 하는 것은 그들이 아니라 바울이며,
바로 바울이 전한 원시복음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울에게 바로 이 복음을 맡기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매킨토시는 시원하게
바울이 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제대로 설명했다고 보여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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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과율법 - C.H. 매킨토시
율법과 관련해서 두 가지의 고찰해볼 사항이 있습니다.
첫째는 옳법이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는 근거 가 될 수 있는가에 관해서이고
둘째는 율법이 우리의 생명의 법으로 작용할 수 있는가에 관해서입니다.
성경 몇 구절을 통해 이해를 톱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우리가 율법으로 의를 얻을 수 있느냐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애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혜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률 깨달음이니라."(롬 3: 20).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 위애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 3:28).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외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
다음은 율법이 생명의 법으로서의 기능을 하는지에 관해 기록된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롬 7:4)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롬 7:6)
두 번째로 인용한 로마서 7장 6절에서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가 율법에서 벗어났다”는 것이고,
둘째는 우리가 본성(nature)의 만족을 따라서 주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긴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속박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우리는 자유함 속에서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되었고,
이것은 우리의 특권입니다.
로마서 7장을 더 읽어 가면 10절 말씀을 만나게 됩니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여기서 율법은 분명히 바울에게 있어 “생명의 법”으로 발견되지 않습니다.
“전에 법을 깨닫지 못활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롬 7:9)
로마서 7장의 “나”가 누구이든지 간에,
율법이 이르기 전에는 살다가 율법이 온 후에는 축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그에게 “생명의 법”이 될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사망의 법”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죄인이 율법의 행위로써 의롭다 함올 얻을 수 없음이 명백해집니다.
그리고 율법이 신자의 생명의 법이 될 수 없다는 것 역시 분명해집니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있나니"(갈 3:10).
율법은 거듭난 자들과 거듭나지 못한 자들을 구별할 줄 모릅니다.
율법은 그 앞에 서고자 애쓰는 모든 자들을 저주합니다.
그 사람이 살아있는 한 그를 지배하고 저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율법을 지킬 능력이 없음을 확실히 인정하며,
율법 아래의 완전한 저주 속으로 들어가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 의의 기초는 무엇입니까? 또 우리 생명의 법은 무엇이란 말입니까?
하나님 말씀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과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생명의 법이 되신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주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몸으로 친히 우리의 죄를 담당 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진노의 잔을 받으셨습니다.
주님은 사망의 이기는 것과 쏘는 것을 제거해주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신 분이 바로 주님이십니다.
우리의 하나님이시자 그분의 하나님,
우리의 아버지이시자 곧 그분의 아버지이신 분 앞에서,
우리를 생명과 거룩함과 은혜와 영광 안에서 그분 자신과 영원히 교제케 하시려고
주님은 우리가 머물던 사망으로 내려오셨습니다.
(다음 구절들을 주의 깊게 읽어보십시오. 요 20:17;
롬 4:25; 5:1-10; 6:1-11; 7장 여러 곳 8:1-4; 고전 1:30~31; 6:11; 15:55~57
고후 5:17-21; 갈 3:13,25~29; 4:31; 엡 1:19-23; 2:1-6;
골 2:10-15; 히 2:14,15; 벧전 1:23).
만일 당신이 기도하는 심령으로 이 모든 말씀들을 상고 한다면,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 구원받은 것이 아님을 확실히 알게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얻었는가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소유한 생명과 의로움과 평안함의 견고한 토대에 대해서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믿는 자들에게 속한 이 생명과 의와 평안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 가운데 있었던 것이며,
완성된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말씀 안에서 계시된 것이며,
모든 참된 신자들의 즐거운 경험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사도는 신자의 생명의 법에 대해 언급하기를
“내게 사는 것이 율법이니”라고 하지 않고,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빌 1:21)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법이시며, 본이시고, 기준이시며, 모든 것이 되십니다.
율법은 결코 우리의 대적들을 향해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에게 축복해주며,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도록 가르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바로 복음이 우리에게 그렇게 하라고 가르치는 바요,
우리 안의 거룩한 성품이 우리를 이끌어가는 삶의 모습입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만일 율법으로 의롭게 되려 한다면 그는 멸망당할 것입니다.
또한 율법을 자기 모든 행위의 기준으로 삼는 자가 있다면,
그는 반드시 자기 자신이 세운 목표에 크게 못 미치는 삶을 살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이 아닌,
그분의 아들의 형상을 본 받도록 우리를 예정하셨습니다.
우리는 주 예수님을 닮아 가도록 미리 정하여진 것입니다
(마 5:21-48; 롬 8:29; 고전 13:4-8; 롬 13:8-10;
갈 5:14-26; 엡 1:3-5; 빌 3:20,21 ; 2:5; 4:8; 골 3:1-17).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신다"
(롬 8:4; “the righteousness of the law is fulfilled in us",
“율법의 의가 우리에게 이루어진다"-역주)는 말씀과
우리가 율법으로 의롭게 될 수 없고
율법을 우리 생명의 법으로 삼을 수도 없다고 가르치는 말씀들이
어떤 이들에게는 모순처럼 여겨질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통해 이런 말씀들 상호간에 모순이 없다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거듭난 사람이라면 이 복스런 교리를 이해하는데 아무 어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본질상 “우리의 허물과 좌로 죽었던” 자들인데,
죽은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이 율법을 지킴으로써 생명을 얻는 것이 과연 가능하겠습니까?
율법은 그것을 지키지 못할 경우 사람들이 가지고 있지도 않은 생명을 요구합니다.
그러면 사람이 어떻게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생명이 되십니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분 안에서 삽니다.
우리는 나무에 달려서 우리를 위해 저주를 받으신 주님 안에서 복을 얻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 죄가 되신 주 예수님 안에서 의롭습니다.
우리 위해 버림을 받으신(롬 5:6-15; 엡 2:4-6; 갈 3:13) 그 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가까워졌습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과 의를 얻었기에,
우리는 주님이 행하신 것처럼 행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주님이 순결하신 것처럽 우리 자선도 순결하게 나타나야 합니다.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가야 하며, 그분의 덕을 드러내야 하되
그분의 성령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요 13: 14,15; 17:14-l9 ;벧전 2:21; 요일 2:6,29; 3:3).
독자들에게 두 가지의 질문을 해보겠습니다.
신약성경을 제외한 십계명이 삶의 법칙으로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충분하겠습니까?
오히려 십계명을 뺀 신약성경만으로 충분히 우리의 삶의 법칙이 되지 않겠습니까?
결코 불충분한 것으로 우려 삶의 법칙을 삼을 수는 없습니다.
십계명은 하나님의 영감을 통해 주어진 것들의 일부분임을 우리는 인정합니다.
그리고 율법은 우리가 살아 있는 한 큰 힘으로
우리를 지배하고 저주한다는 것도 알고 있습 니다.
죄인들이 오직 율법을 통해 생명을 얻으려 한다면,
율법이 그들을 어디로 데려가는지 우리는 보게 될 것입니다.
또,신자들이 오직 율법을 따라 행한다면,
그가 어떠한 사람이 될지 목도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진리의 영을 따라 사는 신자가
살인이나 절도 등의 죄를 범하지 않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그러나 자신을 모세의 법이 제시한 기준에 속박시키면서 사는 자는
진리의 영을 따라 사는 삶에 현저히 미치지 못한다는 것도 역시 확신하고 있습니다.
“율법”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자면, 훨씬 더 많은 내용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지면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모두 다루기는 어렵습니다.
독자들 스스로 이 글에 인용된 여러 말씀들을 찾아서 상고해보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바른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고,
모든 인간의 가르침과 영향에서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한 자가 되었고 거룩한 자 가 되었으며,
영원한 의를 얻었고, 모든 정죄에서 벗어나게되었습니다.
이렇게 높은 지위를 우리에게 허락하신 그리스도는
우리 삶의 목표이시며, 본이시고, 법(rule)이시며,
소망시고, 기쁨이시며, 힘이시고, 모든 것이 되십니다.
당신 앞에 소망이 있는데, 그것은 당신이 어디 있든지
주님과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것과 영원토록 그분을 닮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잃어버려진 죄인으로서 십자가 밑에서 용서와 평안을 발견했다면,
당신은 인정된 양자이므로 시내 산 밑으로 되돌려 보내지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율법의 무서운 저주로 인해 두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아버지께서는 가장 순수한,가장 깊은,
그리고 가장 풍성한 은혜로 그분의 품에 안으신 회개한 죄인들을
무쇠 같은 율법으로 다스리지 않으십니다. 오! 그것은 안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롬 5:1,2).
신지는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율법이 아닌 은혜로 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심판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영광을 기대하며 삽니다.
("안식일 율법 봉사 삶의 규례" C.H. 매킨토시 著, 전도출판사 刊)
첫댓글 아멘
감사.
부모가 자식을 교육할때 심부름을 시킬때 불가능 한것을 감당시켜 죽게 만드는 부모를 못 봤다면 절대 아는체도 마시오!! 바울의 말도 그뜻도 해석도 어쩌면 그리 훌륭들 하십니까? 하나님을 뭘로 보고 그리 속을 썩이는 것인가? 어쪄면 법을 피해 안지켜 보려고 거역하는 그 후손의 됨됨이를 보이는 것인가?십계명은 마치 어린 자식들에게 도덕책을 쥐어주신 부모의 사랑과도 같습니다. 그가 장성하면 유산도 사업도 가업도 승계 해 주고 대신 맡아 일 하며 관리 해 나갈수 있도록 어릴 때에 자식을 어른으로 키우는 초보교육인 것인데 4000년이 다 되도록 기초도 못 쌓고 통과하지 못하는 우를 대대로 범하고 반역을 하고 있는 모습인 것을
깨닫지 못 하는가? 사람에게 주신 초보의 도 십계명의 관문도 못 통과 하고서 어찌 하나님을 만날수 있으리라 보는가? 정하신 사랑도 알지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는 기형적인 존재들이 어찌 그 다음으로 주실 하늘의 신령한 것들을 요구하며 탐 낼수 있단 말인가? 예수가 죽음으로 호소한 하나님의 그뜻을 듣고 보고 배우고 행하려 하지는 않고서 예수가 내죄와 미래와 후손의 죄까지도 다 해결 해줬다 하는가? 만일 해결했다 하더라도 여전히 기초도 사람의 됨됨이가 안된것이 여전 하거늘 어찌 의인인냥 구원을 다 가진냥 스스로에게 최면을 거는건가? 하나님께서 용납 할것 같은가? 하나님의 사랑의 매가 존재함은 아직 우리가 어리기 때문;;;
우리가 죽음을 통해서라도 하나님 앞에서 피 할수 없는 심판관문은 일차로 10개의 관문을 통과 할수 있는자 만 하나님앞에 기도 할 자격이 주어집니다. 의인의 기도를 들으신다 하나 죄가 너무도 더러운 죄를가진 죽을 죄인으로 어찌 기도가 가능 하겠으며 받아 주시겠는가? 그래서 먼저 십계명을 쫒아 씻고 버리고 사람의 본마음으로 회복시켜 천사같은 마음으로 돌이킨 후에 하늘의 경영도 지혜도 이치를따른 순리도 배울수있게 해주신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최선을 다해 선악간에서 선과 의를 따라 거듭나도록 힘써야 가능 한것을 이것들을 피해 가 보려고 아둥바둥 해온 패역한 길을 걷는 오늘날의 신앙 세태를 보시길 바랍니다
율법과 복음*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거부하였을 때 저들은 저희 신앙의 기초를 거부하였다. 이와 반면에 그리스도를 믿노라고 주장하면서도 하나님의 율법을 거부하는 오늘날의 그리스도교 세계도 역시 기만당한 유대인들이 범한 것과 꼭 같은 과오를 범하고 있다. 그리스도께 매달리고 저들의 소망의 중심이 그리스도라고 공언하면서도 도덕적인 율법과 예언들에 대하여 경멸하는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은 믿지 않은 유대인들보다 더 안전한 위치에 놓여있지 못하다. 저들은 무엇에 대하여 회개할는지 완전히 설명할 수 없으므로 저들은 죄인들에게 알아들을 만하게 회개를 호소할 수 없다. 죄들을 버리라고 권고를 받은 죄인은 무엇이 죄인
지 물어 볼 권리가 있다. 하나님의 율법을 존중하는 사람들은 죄는 불법이라고 대답할 수 있다. 이것을 확증하기 위하여 사도 바울은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롬 7:7)다고 말하였다.
오직 도덕적인 율법의 의무적인 요구들을 인정하는 사람들만이 대속(代贖)의 본질을 설명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과 인류 사이에 중재하셔서 당신의 율법에 대한 인간의 충성을 회복시킴으로 인간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오셨다. 율법에는 범죄자를 용서할 권한이 없다. 예수님께서만 홀로 죄인의 빚을 갚아 주실 수 있으시다. 예수님께서 회개한 죄인의 부채를 갚아 주셨다는 사실이, 계속해서 하나님의 율
법을 범해도 좋다는 승락을 한 것이 아니라 그 때부터 회개한 죄인은 율법에 순종하는 생애를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율법은 인간이 창조되기 이전에 존재하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담이 범죄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담이 범죄한 이후로도 율법의 원칙들은 추호도 변치 않았으며 타락한 상태 가운데 있는 인류에게 적응되도록 명확하게 재정되고 표현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늘 아버지와 의논하시는 가운데 희생 제물을 바치는 제도를 세우셨다. 사망이 즉각적으로 범죄자에게 이르게 하는 대신 하나님의 아들의 위대하고 완전하신 제물을 상징하는 희생 제물에게 사망이 옮겨지도록 하였다.
백성들의 죄는 제사를 거행하는 제사장 곧 백성들을 위한 중보자에게 상징적으로 옮겨지게 된다. 제사장 자신이 죄를 위한 희생 제물이 될 수 없으며 그 자신이 죄인이기 때문에 자기의 생명으로 대속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제사장은 스스로 죽음을 맛보는 대신에 흠없는 어린 양을 죽였다. 죄의 벌이 무죄한 짐승에게 옮겨졌고 그 짐승은 즉시로 죄인을 대신하는 제물이 되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하신 희생을 상징하였다. 이 희생 제물의 피를 통하여 인간은 세상의 죄를 대속하실 그리스도의 피를 바라보았다.
구약 당시에 예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속하시고 시내산에 왔을 때 성소를 만들라고 하셨다.[출 25:8]
성소 안에는 하나님의 율법[십계명]이 있었으며 피[동물의 피]가 항상 흘렀다.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심으로 지상성소시대가 지나고[마 27:51] 예수께서는 하늘성소로 들어가셨다[히 8:1-5; 9:7, 12; 히 10:19, 20]. 하늘 성소에는 율법[십계명의 원본]이 있으며[계 11:19; 히 9;1-4] 피[그리스도의 피]가 흐르고 있다. 예수님은 율법이시며 복음이시다. 율법은 우리에게 죄를 드러내고 그리스도께 대한 우리의 필요를 느끼게 한다.
율법이 저주를 받아야 하고 율법이 죄라면 왜 다윗은
"복 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시 1:1, 2]라고 했겠는가? 저주받기 위하여 그렇게 했는가? 저주 받을 것은 율법을 범한 죄인에게 있지 죄를 드러내어 그리스도께 대한 필요를 느끼게 하는 율법에 있는가?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름 범하는 자마다 누구에게 속하는가? 죄는 율법을 범하는 것이라...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요일 3:4, 8]. "사람이 귀를 돌이키고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잠28:9 09:55
위의 설명을 보면 은혜는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기 때문에
마치 율법이 저주할 법처럼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이다.
저주 받을 것은 율법이 아니라 율법을 범한 인간이다.
하나님은 죄는 미워하시나 죄인은 사랑하시기 때문에
죄를 위한 화목제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공의와 자비를 모두 만족시키셨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을 있게 말지니라... "
십계명의 율법 속에는 하나님이 임재해 계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 속에 계시다. 시내산에서 율법을 선포하신
하나님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셨기 때문이다.
우리 주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시내산에서 열가지 계명을 선포하시고 "내가 율법"을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마 5:17, 18]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가장 큰 문제가 되는 계명은 넷째 계명이다. 예수님께서는 창조주로서 창조의 기념일인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고 말씀하시고 "제 칠 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출 20:8-11]고 말씀하셨다.
우리 주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거룩하게 하신 "그 날"을 누가 첫째날 일요일로 변경시켰는가? 이것은 우리주 하나님 예수그리스도의 대적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보라.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마 15:9, 10]. 하나님의 율법은 도덕적 거울로서 완전하고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며[시 19:7; 롬 7:12] 하나님의 율법을 폐하고 변경시키므로 이 세상은 무법천지가 되었다.
지상에서 하나님의 사업이 마칠 때에 하나님의 율법의 기치는 다시 한 번 높이 들릴 것이다. 거짓 종교가 성행하고 죄악이 넘쳐 흐를 것이며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고 갈바리의 십자가가 보이지 않게 될 것이다. 죽음의 장막 같은 어두움이 세상을 덮을 것이며 유행의 세력이 진리를 대적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넘어뜨리려는 음모가 꼬리를 물고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최대의 위기의 때에 엘리야의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도구로 사용하셔서 침묵시킬 수 없는 기별을 전하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임명하신 사람들이 교회와 세상의 연합을 담대히 탄핵할 것이다. 그들은 사람이 만든 제도에서 돌아서서 참 안식일을 준수하도록 남녀들에게 열렬히 호소할 것이다. 그들은 모든 민족에게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으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계 14:7-10)고 선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