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어느 장성과 그 가족의 ‘갑질논란’으로 여론이 들끓고 있다. 인간애의 심각한 결핍에서 오는 볼썽사나운 장면에 온 국민이 분노하고 있다. 이것이 21세기 대한민국의 현실이라는 것에 절망하는 사람도 적지 않기에 고전에 실린 옛사람들의 미담을 통해 ‘집단위안’이라도 얻으려는 심정으로 글을 쓴다.
장부는 전쟁에 나아가 말가죽에 시체를 싸서 돌아오는 일이 있을지언정 썩어빠진 유자는 될 수는 없다.……(군왕이 욕을 당하면) 신하 된 자의 의리는 마땅히 죽어야 함에 있는데, 대대로 충훈을 세워 임금의 은혜로 먹고사는 집안이라면 더할 나위가 없는 것이다 ……신하는 임금을 위해 죽고, 종은 주인을 위해 죽었으니, 그 의리는 매한가지이다.[丈夫當馬革褁尸 腐儒不可爲也……臣子義當死 况家世忠勳而食君之食者乎……臣死君 奴死主 其義則一] -채제공(蔡濟恭, 1720~1799), 『번암집(樊巖集)』 권52, 「충신 증훈련원정손공묘갈명(忠臣贈訓鍊院正孫公墓碣銘)」 |
1636년 병자호란 때 전직 군인으로서 근왕(勤王) 활동을 자처했다가 순국하여 정조 때 충신 정려를 받은 손종로(孫宗老, 1598~1637) 묘갈명의 한 대목이다. 손종로는 임진왜란이 막바지로 치닫던 1598년에 태어났고, 21세 되던 1618년 무과에 합격하여 무관의 길을 걸었다. 그가 청소년기를 보내던 17세기 초반은 왜란 이후 예학(禮學)이 발달하고 종법(宗法) 질서가 강조되었으며, ‘숭문비무(崇文卑武)’의 사회적 분위기도 점차 확산되던 시기였다.
채제공이 지은 ‘손종로 묘갈명’에 따르면, 그 역시도 소년기에는 문과나 학자를 꿈꾸며 문학에 힘썼다. 그것이 당시 양동마을의 일반적인 분위기이기도 했다. 손종로의 경우 6대조에서 고조에 이르는 3대(손사성(孫士晟) ㆍ손소(孫昭)ㆍ손중돈(孫仲墩))가 문과 출신으로 당상관 이상을 지내면서 집안의 기반을 닦아 후손들에게 물려주었으므로 사실상 ‘문신 집안의 수혜자’였고, 증조 ㆍ조부ㆍ부친도 비록 고관은 아니었지만 각기 별좌ㆍ부사직ㆍ판관을 지냈으니 벼슬의 매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런 흐름 위에서 명ㆍ청(明淸) 교체에 따른 외교ㆍ안보 및 국방상의 위협이 조선 조정의 최대 현안으로 대두되던 1618년 손종로는 ‘대장부는 말가죽에 시체를 싸서 돌아올지언정 부유(腐儒)가 될 수는 없다’는 처세관을 천명하고는 무과에 응시하여 군인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1631년(인조 9) 선전관에 발탁되었고, 이후 주부를 거쳐 1634년부터 남포 현감으로 재직하다 병자호란 직전에 해직되어 양동으로 돌아왔다. 손종로는 고향 양동에서 급보를 통해 병자호란 발발 사실을 인지하고, 이윽고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는 비보를 접하고는 근왕을 결심하게 된다.
손종로는 종[奴] 두 명과 고향 사람인 신상뢰(辛商賚)와 박홍원(朴弘遠)을 데리고 남한산성으로 갔으나 포위가 심해 들어가지 못하고 좌절도사 허완(許完)의 군영에 배속되어 쌍령(雙嶺) 전투에 참전하게 된다. 전세가 크게 불리하자 주위에서 피신하여 후일을 도모하자는 권유도 있었지만 그는 죽음을 각오하고 이를 뿌리쳤으며, 데리고 온 두 명의 종 가운데 한 사람을 양동 본가로 보내 자신의 죽음을 전하게 했다. 그런 다음 나머지 한 종인 억부(億夫)를 데리고 전장에 나아가 꼿꼿하게 선 채로 함께 죽음을 맞았는데, 이때가 1637년 1월 3일이었다.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한 두 노주(奴主)의 장렬한 죽음 앞에 만고의 지사들은 뜨거운 눈물을 떨구었다고 한다.
현직 관료도 아니고, 살고자 했다면 얼마든지 목숨을 건질 수도 있었지만 굳이 죽음을 택한 것은 살신을 통한 충의의 치열한 실천이었다. 이것은 대대로 국록을 먹은 양동의 손씨라면 나라가 어려울 때 그만한 결단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그의 선비 ㆍ관료적 처세관을 단적으로 증명하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그 신분이 비록 천할지라도 ‘충의(忠義)’의 동반자를 결코 소홀하게 다루지 않았던 양동사람들의 포용적 의식세계가 응축되어 있었다.
▶ 정충각은 1783년 정조의 명으로 손종로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충신비각이다.
비각 안의 정려비명은 이언적의 8세손 이정규(李鼎揆)가 지었다.
손종로의 5세손 손정구(孫鼎九)가 조정에 올린 ‘손종로행적’에 억부의 역할을 특서하지 않았다면 정조는 그 존재를 인지할 수 없었고, 예조 또한 억부의 정려를 건의할 수 없었을 것이다. 즉, 손종로에 대한 억부의 충을 단순히 주인과 노비 사이의 의리에 가두지 않고 이를 국가·사회적 가치로 현창하려 했다는 데 양동사람의 또 다른 특별함이 있었던 것이다. 그랬다. 양동 사람들은 손종로와 억부를 주인과 종으로 보지 않고 국난 앞에서 생사를 함께 했던 전우(戰友)로 여겼던 것이다.
1783년 정조는 손종로와 억부를 충신으로 공식 인정했고, 그 기림의 상징물로 정충각(旌忠閣)을 건립하였다. 부지는 양동사람은 물론이고 양동을 드나드는 외지 사람들이 반드시 거치는 곳으로 정해졌다. 이정규(李鼎揆)가 기꺼이 ‘정려비명’을 지어 ‘상전(上典)’과 ‘하전(下典)’의 충을 기림으로써 정충각은 양동마을을 대표하는 ‘충절’의 공간으로 상징화되어 갔다.
▶ 충노 억부 정려 : 손종로의 충신비각이 건립될 때 노주쌍충을 기려 함께 만들어졌다.
편액 : 忠奴億夫之閭 上之七年癸卯十月 日 命旌
충노억부지려 정조 즉위 7년 되는 계묘년(1783) 10월 모일에 정려하라고 명함.
무엇보다 이 두 사람이 행한 충은 살신에 바탕했으므로 생생한 교육의 현장이 되기에 충분했고, 주인과 나란히 선 충노의 정려에서는 신분을 초월하는 동포의식(同胞意識)이 배태되어 갔다. 이 점에서 정충각은 충절의 공간을 넘어 상하간 인정(認定)과 화합의 마당으로 확대되어 마을에 사는 반상(班常) 모두가 옷깃을 여미는 엄숙한 공간으로 자리잡혀 갔다.
손종로가 사지(死地)를 향해 떠날 때 더없이 힘이 되어 준 사람은 어머니 일직 손씨였다. 두 해 전에 큰아들을 잃은 터라 어머니에게 종로는 외아들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아들이었지만 어머니는 기쁜 마음으로 ‘그 조상에 그 후손이다. 너는 진실로 우리 집안의 아들답다’고 하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홍양호(洪良浩)는 ‘정려기’에서 손씨 부인을 ‘어진 어머니’로 칭송했지만, 그녀의 어짊은 특별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견위수명(見危授命)’이라는 난행(難行)의 가치를 아주 태연하면서도 담담한 자세로 아들에게 권유한 데 있었다. 이렇듯 강인하면서도 지혜로운 여성이 있었는가 하면, 약자를 향해 감히 행해서는 안 될 횡포를 감히 행한 분수를 모르는 여성이 지금 우리 주변에서 세상을 몹시 혼탁하게 만들고 있다.
신하는 나라와 임금을 위해 죽고, 종은 주인을 위해 죽었지만, 종의 충절까지도 국가 사회적으로 표창하려 한 양동마을 손씨 가문 사람들의 동포적 인간애는 저급하기 짝이 없는 오늘의 세태를 엄히 꾸짖는 고전의 경종(警鐘)에 다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