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적으로 지금쯤입니다. 언 땅이 녹으면서 온갖 풀들이 머리를 들고, 나무는 나무대로 땅 속 깊숙한 곳에서 물을 자아올리면 우리들도 힘이 생기고 활기가 넘치게 됩니다. 송구를 벗기고, 찔레를 꺾어 먹으면 허기를 면할 수가 있으니까요. 우리는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피어도, 어른들 주먹보다 더 큰 철쭉이 골짜기를 메웠어도 그걸 보며 놀랄 줄을 몰랐답니다. 그건 허기를 채우는 것과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지요. 그 당시에는 먹는 것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었습니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누구나 바쁘게 산으로 들로 나간답니다. 갈아놓은 논에서 흙덩이 속에 숨어있는 올미를 주워 먹다가 논둑을 무너뜨리고 모매를 케어 먹던 일들이 한 편의 영화처럼 지금 내 눈 앞에 펼쳐지고 있답니다. 그래도 그 시절이 그리운 것은 먹을 것은 없어도 끈끈한 정이란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도시락을 양보하시는 선생님의 정이 있었고, 밥보다가는 감자 몇 알이 채워진 도시락을 보면서 바꾸어 먹자고 내미는 친구를 보듬어 줄줄 아는 따뜻한 그런 정이 있었고, 내 아이, 남의 아이를 가리지 않고 칭찬해 주고, 벌도 주는 어른들의 그런 정이 있었기 때문 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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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학년 때 교실-서편 왼쪽부터 6-1, 2, 3, 4반이었음. |
내가 국민학교(지금은 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지금의 교촌1리(향교 마을)에서 살았습니다. 집에서 학교까지는 2km 정도의 거리였습니다. 철없는 내가 점심시간에 점심을 먹으러 뛰어서 다녔던 일들이 지금 생각하면 꿈결만 같습니다. 솥뚜껑을 열어서 밥이 있으면 다행이지만 밥이 없으면 물만 마시고 그냥 돌아와야 했으니 차라리 학교에 있었으면 훨씬 경제적이었을 거라는 생각을 지금도 한답니다. 어쩌다가 도시락을 싸 가지고 학교에 갈 때는 어깨에 힘도 들어가고 발걸음이 매우 가벼웠답니다. 그런데 그런 날은 오전 수업으로 일찍 끝나서 허탈감에 젖기도 했으나 돌아오는 길에 따뜻한 무덤가에서 친구들과 나눠 먹는 도시락 맛이란 무엇과도 비교 할 수가 없었답니다.
1. 일학년은 좋았어요.
우리 할머니가 키가 너무 작고 너무 어려보이며 길이 너무 멀다고 아홉 살이 되던 해에 국민학교에 입학을 시켰습니다. 그때는 교실이 모자라서 1학년은 뒷 교사 동쪽 끝 교실이 우리 교실이었습니다. 그래요, 지금은 그 교실이 없어 졌지요. 하루는 우리 고모부님이 크레파스를 한 통을 사 주셨어요. 귀한 물건이지요. 학교 졸업할 때까지 크레파스 한 통을 못 산 친구들도 있었으니까요. 크레파스를 처음 가지고 간 날, 아침 조회를 마치고 오니 없어졌어요. 도둑을 맞은 거지요.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가슴이 떨린답니다. 2학기 때였어요. 학교에서 시험을 쳤지요. 아주 질이 나쁜 종이에 프린트된 시험지에는 그림이 그려져 있고, 그 그림의 이름을 쓰는 문제가 있었어요. 아무리 보아도 내 눈에는 그것이 그 당시에 즐겨 먹던 양배추였어요. 그래서 ‘간낭’이라고 썼지요.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은 호박이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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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권중희 교장선생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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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학교 앞에 가설극장이 있었어요. 지금의 파출 소 부근이지요. 학년말 종업식을 그곳에서 했는데 앞에는 5, 6학년 형들이 들어섰으니 우리 1학년은 뒤에서 장난을 칠 수밖에 없었지요. 그래도 마이크도 없이 부르는 ‘우등상을 받을 사람 1학년 서 효 석’이라는 말은 귓속에 쏙 들어오더라니 까요.
2. 이학년도 신났지요.
비가 왔어요. 정말로 많은 비가 내렸어요. 우산이 없으니 어쩌겠어요. 마다리 포대를 쓰고 학교를 갔습니다. 교실 앞에서 포대를 벗으니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됐지 뭐예요. 그 당시에는 거의가 그랬으니까 친구들이 놀리거나 흉보는 일은 없었지요. 포대자루를 잘 접어서 숨겼다가 집에 갈 때 우산처럼 또 사용해야 했어요. 잃어버리면 집에 가서 혼이 나지요. 귀한 것을 버리고 왔다고 말입니다. 그때는 학교에 올 때 6학년 형들과 같이 다녀야 했어요. 형들은 동생들을 귀여워했지요. 어느 날 등교하면서 우연히도 사과 이야기가 나왔지요. 나는 사과를 ‘사가’라고 쓰는 줄 알았는데 형들이 ‘사가’가 아니고 ‘사과’라고 써야 한다지 뭐예요. ‘좋은 것 한 가지를 배웠구나’ 라고 생각했는데 그날 시험에 그것이 나왔으니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지요. 시험 이야기 또 한 가지가 있는데요. 일년에 한 번 뿐인 일제고사 날이었어요. ‘흑판의 색깔을 쓰세요,’ 라는 문제가 나왔어요. 흑판이 뭔지를 몰랐어요. 집에서 일 할 때 쓰는 ‘흙판’일까? 생각을 많이 했지요. 감독을 하시던 선생님이 자꾸 칠판을 두드리시지 뭐예요. 아마 친구들 모두가 이 문제를 잘 풀지 못했던 모양이지요. 나는 그렇구나, 흑판은 칠판을 말하는구나 라고 생각하면서 ‘검은색’이라고 썼지요. 나중에 보니 2학년 가운데서 나 혼자만 100점이었고, 조회시간에 나 혼자만 상을 받았지요. 물론 기분이 좋았고, 집에 가서 어머니께 칭찬을 많이 들었어요.
3. 삼학년은 힘들었어요.
체육을 좋아하시는 미남 선생님이 담임이 되셨어요. 가을 운동회를 준비할 때였어요. 운동을 잘 하지 못하는 내가 덤부링 선수로 뽑혔으니 신이 날 수밖에 없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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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8회 졸업기념 사진 |
선수를 선발하는 날 선생님은 교실 벽에 물구나무서기를 시켰어요. 평소에 집에서는 잘 안 됐는데 그 날은 한번에 덜커덕 되더라니까요. 하늘을 날 것처럼 신이 났지요. 엉엉 울고도 싶었지요. 친구들이 모두 부러운 듯 쳐다봤으니까요. 그런데 운동회 때는 덤부링을 못했어요. 연습을 너무 열심히 하다가 다쳤으니까요. 그래서 운동회 날 또 울었어요. 아버지, 어머니가 보셨으면 참 좋았을 것을 생각하니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그래서 3학년 때는 체육이 ‘매우잘함’이었어요. 내가 체육에서 매우잘함을 받은 것은 3학년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어요.
4. 사학년은 열심히 했어요.
음악을 잘 하시는 여선생님이 담임이 되셨네요. 예쁜 처녀 선생님은 그 당시 북문교회에서 생활하셨는데 때투성이인 우리가 찾아가도 그렇게 반가워하시면서 맞아 주셨지요. 그 때는 당번이 있었지요. 당번은 일요일 날도 학교를 가야 했어요. 화분에 물도 주고, 교실 청소도 간단히 하고, 화단에 풀도 뽑고 했지요. 선생님한테 잘 보이기 위해서 많이 노력했지요. 과수원 있는 친구하고 짝이 되면 풋사과도 몇 알 가져 와서 선생님께 드렸지요. 먹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으면서요. 무지하게 추운 겨울이었어요. 친구와 당번 활동을 위해 학교를 가는데 친구가 “우리 선생님한테 고구마 몇 개 갖다 드릴까?”라고 묻기에 “그럼 좋지”라고 했더니 고구마 다섯 개를 주머니에 넣었지요. 그 친구는 농사도 많이 짓는 부자였고, 그 당시엔 고구마가 귀했어요. 학교에 가는 길에 창고 옆 낙엽 쌓인 곳에 두 개를 숨겼지요. 지금의 연쇄점 부근이지요. 그 때는 철로를 넘어 다니던 시절이었어요. 학교가 끝나고 오는 길에 고구마를 찾았더니 고구마는 그대로 있는데 꽁꽁 얼었지 뭐예요. 이빨로 긁어서 두 개를 다 먹어 치웠는데 지금 생각하면 녹였으면 먹지도 못할 걸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5. 오학년 땐 선생님이었지요.
과목별로 선생님이 정해졌어요. 나는 산수(수학) 선생님이었어요. 지금도 생생하게 생각나는 것은 분수 공부를 하는 시간이었어요. 진분수, 가분수, 대분수를 공부하는데 친구들이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를 못하는 거예요. 내 목소리가 너무 컸던지 지나가던 6학년 형들이 무슨 일인가 싶어서 모두 창 너머로 교실을 들여다보는 거예요. 한편으로는 우쭐하기도 했지만 부끄럽기도 하고 창피하다는 생각도 했어요. 이 광경을 본 우리 동네 형이 그 때부터 나를 보고 선생님, 선생님 했는데 어른이 되어서 내가 선생이 된 건 그 때문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 때도 있어요. 그 당시에 우리 동네엔 공부를 아주 잘 하는 형이 있었어요. 그 때는 전과도 없고, 수련장도 없을 때여서 나에겐 그 형이 전과고 수련장이었어요. 아무리 귀찮게 해도 화내지 않던 그 형이 지금은 무엇을 하는지 생각이 나는군요. 아무튼 그 형이 낱말 뜻, 전체의 대강, 비슷한 말, 반대말을 가르쳐 주는데 그 다음날 국어 시간에는 내가 혼자서 북치고 장구 치고 다 했으니 얼마나 신났겠어요. 선생님도 칭찬을 많이 해 주셨지요.
6. 육학년 때는 무척 바빴지요.
한 사람이 화분 한 개 가꾸기 운동이 있었습니다. 학생들이 화분을 사 가지고 오면 선생님이 화분에 이름을 붙이고 꽃을 심었습니다. 내 화분에는 사루비아가 심겨 졌습니다. 다른 친구들은 모두 국화가 심겼는데 내 화분에만 사루비아 한 포기가 자리를 한 것입니다. 나는 신이 나서 친구들에게 자랑을 했습니다. 꽃이 피면 씨앗을 받아 이 예쁜 꽃을 분양 하겠노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 꽃은 여름 방학 때 물을 주지 않아서 죽고 말았습니다. 아직도 그 생각을 하면 가슴이 찡해집니다. 그 때도 과외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선생님께서 집으로 가지 말고 남으라고 하셨습니다. 앞에서는 과외를 하고 교실 뒷쪽에서 친구와 풍기면 지도를 그리고 색칠을 했습니다. 휠긋휠긋 돌아보는 친구들이 어색하기만 했습니다. 귓전으로 들어보면 다 아는 이야기를 친구들은 돈 내고 다시 공부한다는 생각을 하니 웃음이 나왔습니다. 변소 청소 당번이 되었습니다. 후관 교사 뒤쪽에 있는 변소를 두 사람이 청소를 합니다. 물걸레로 깨끗이 닦고 말린 후 양초를 칠하면 반들반들해집니다. 한번만 그렇게 해 놓으면 별로 손대지 않아도 변소는 깨끗합니다. 선생님께 칭찬도 많이 들었습니다. 더러 심술꾸러기들이 더러운 신발로 휘젓어 놓으면 다시 청소를 해야 합니다.
우리들이 6학년 때는 학교에서 돼지를 길렀습니다. 언제나 당번은 두 사람입니다. 당번이 되면 돼지가 먹을 구정물을 구하러 장터를 돌아다녀야합니다. 구정물이 넘쳐도 소리를 지르는 집이 있는가 하면 학생들이 수고한다면서 들어와서 가져가라는 아주머니도 있어서 고맙다는 말의 의미를 알게 해 주었습니다. 어물전에서 구정물을 가져 올 때는 새우젓을 먹으면 돼지가 죽는다고 해서 그 깊은 구정물통에 짧은 팔을 넣어서 휘휘 젖으며 새우젓을 찾던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떠오릅니다. 냄새가 난다는 것도 모르고, 더럽다는 생각도 못 하면서 오직 돼지에게 먹일 생각으로만 가득했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최선을 다하는 습관이 아마도 내가 6학년 때 길들여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요즘도 선생님을 뵈오면 감사하고 고맙다는 생각이 됩니다.
누구나 그랬습니다만 어려운 시절이었습니다. 어린 시절에 전쟁이란 것을 보았고, 나쁜 사람과 좋은 사람의 가치를 알았습니다. 장난도 많이 치면서 자랐지요. 요즘 같으면 큰일 날 일이지만 그 때는 장난으로 인정해 주었으니까요. 먹을 것이 없어서 걱정이었지 다른 고민은 없었던 시절입니다. 나는 딱지치기와 구슬치기를 좋아 했습니다. 우리 집에는 각종 딱지들이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어느 날 집에 왔더니 아끼고 아끼던 각쪼가리 네모 딱지가 없어졌습니다. 알고 보니 할머니께서 불쏘시개로 쓰신 것입니다. 엉엉 소리 내어 울다가 할머니에게 혼이 나기도 했습니다. 구슬도 많았습니다. 유리구슬 보다는 쇠구슬이 더 많았습니다. 쇠구슬도 대ㆍ중ㆍ소로 나누어야 합니다. 그래서 배는 고파도 마음은 늘 부자였습니다. 그 때는 썰매보다는 스케이트가 한 수 위였습니다. 스케이트라고는 해도 요즘과는 비교가 안 되는 것이지만 그 당시엔 그것이 모든 것은 지배할 수 있었습니다. 내게는 그런 스케이트가 7개나 있었는데 얼음판에 나갈 때는 골라서 세 개만 가지고 간답니다. 두 개는 친구들에게 빌어 주는데 친구들은 서로 빌리겠다고 난리가 나지요. 내 말을 잘 듣지 않으면 국물도 없다는 것을 친구들은 잘 알고 있었답니다.
그 당시에는 풍기에 서점이 없었습니다. 문방구점은 있었는데 우리들이 읽을 책은 없었습니다. 다행하게도 친구 중에 책이 많은 친구가 있었답니다. 학교가 끝나고 집에 갈 때 나는 그 친구의 가방을 들어야 했습니다. 그 친구 집에서 놀다가 올 때는 책을 빌어서 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엄마 찾아 삼만리’ 라는 만화는 전 7권으로 되어 있었는데 읽으면서 많이 울었답니다. ‘괴도 루팡’이나 ‘황금 박쥐’ 같은 책도 그 때 그 친구한테서 빌어서 읽은 책입니다. 아직도 기억이 생생한 걸 보면 책은 어릴 때 많이 읽어 두어야 하는 모양입니다. 지금은 책이 넘쳐나고 읽기 싫어서 걱정입니다만 그 때는 책이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선생님들이 초등학교 시절에 독서를 많이 해야 한다고 권장하시나 봐요.
첫댓글 엄마찾아 삼만리는 김종래 작? 라이파이는 신화백? 핫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