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청사
정확하게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신라명승으로 원효대사와 더불어 당대의 고승으로 높이 숭앙받는 의상대사가 창건한 것으로만 알려져 있다.
숙종 29년(1703년) 중수되어 적을 막고 지키어 나라를 청정히 보호하므로 그 이름을 ‘국청사’라 하였고 순조 26년에 다시 중건되어 국난 극복에 앞장 선 청정 호국도량으로 기여하였다.
국청사지에 의하면 금정산성 성내 사찰인 국청사와 인근의 해월사는 임진왜란 당시 산성을 방어한 호국사찰로서 승병들의 주둔지였다고 한다. 또한 ‘숙종 39년(1713년) 판결사 이정신(전 동래부사)의 건의에 따라 동래 양산 기장의 각 사찰에 승대(僧隊)를 조직하여 유사시 금정산성 방위를 맡게 했으며, 평상시에도 산성안에 있는 국청사 해월사의 승려 1백여명과 범어사 승려 3백명으로 수첩(守堞)하여...’라고 하여 당시의 금정산성 국청사에 대한 호국사찰로서의 위치를 알 수 있다.
1703년 금정산성을 축조한 직후에 중창한 국청사와 해월사는 산성 승군작대(僧軍作隊)의 승영으로 기능하였던 곳이었다. 그렇다고 볼 때 이 곳 국청사는 임란 당시 산성을 지키는 승병장이 거주하여 전략기지의 역할을 한 승군작대의 사령부가 있었다는 것이 분명해지며 당시 승병장이 사용했던 ‘금정산성승장인(金井山城僧長印)’이라는 철제인이 보존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뜻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국청사지에 있는 다음의 내용 또한 호국도량으로서의 국청사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국청사는 삼천대천 시방세계의 구국혼령과 성도 이름도 없이 법호와 법명만으로 국난 극복에 앞장섰던 고귀한 의성군들 여러 혼령들과 천도제를 정성껏 봉행해 왔다'
그러나 국청사와 운명을 함께 했던, 등성이 하나 넘어 자리한 해월사는 주춧돌 흔적만 남겨놓은 채 사라져 버려 현재는 그 터만 남아 있다.
국청사 안내석
국청사 일주문
국청사 삼층석탑
국청사 전경
국청사 대웅전
국청사 요사
국청사 요사
국청사 대웅전내 신중탱
국청사 대웅전내
국청사 대웅전내 지장탱
국청사 삼성각
국청사 대웅전 벽화
국청사 삼성각내
국청사 삼성각에서 바라다본 전경
국청사 찾아가는 길
국청사가 있는 산성마을은 부산 어느 곳에서 출발해도 된다. 초읍이나 화명동, 동래 온천장
그중에서도 온천장 식물원 입구와 북구 화명동이 가장 많이 이용되는 길로 알려져 있다.
식물원 입구를 지나 금정산을 향한 도로에 접어들면 색계를 떠나 무색계로 들어서는 듯 마음이 평온해진다. 넘실거리는 S자 도로에 몸을 실어 수십 분을 달리다 보면 시원하게 뻗은 나무들과 대잎 부딪치는 바람소리에 일상의 걱정 근심은 어느 듯 사라진다. 이 산성길에서의 드라이브가 끝날 무렵이면 금정산성 동문 옆을 지나게 되고 곧 산성고개에 다다르게 된다.
이 고개에서 첫째 만나는 마을이 관아가 있었다는 공해 마을이고 그 마을을 지나면 중리마을, 그다음 대밭이 많다하여 이름 붙여진 죽전마을이 있다.
바로 이 마을 끝 부산교육원으로 가는 길목의 오른쪽 입구에‘국청사’라는 이정표가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