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에 한 번 시낭송회가 열리는 곳, 인천광역시 남동구 구월동 모래내시장 옆 ‘리스팝 포엠’. 매달 마지막날 열리는데, 6월처럼 마지막날이 토요일이나 일요일이면 금요일에 열린다. 6월 28일 오전 11시, 이날은 ‘강인한’ 시인이 초대돼 시인의 시 열 편을 읽고, 시인이 들려주는 시 이야기를 들었다.
강인한(69, 본명 강동길) 시인은 196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대운동회의 만세소리>가 당선돼 등단했다. 1966년 첫 시집 <이상기후>를 펴낸 이후, <불꽃> <전라도 시인> <우리나라 날씨> <칼레의 시민들> <황홀한 물살> <푸른 심연> <입술> <강변북로> 등의 시집을 냈으며, 시선집 <어린 신에게>, 시비평집 <시를 찾는 그대에게>를 펴냈다. 다음은 시 열 편과, 시인이 들려준 시 이야기다.
<귓밥 파기>
나는 아내의 귓밥을 판다.
채광가(採鑛家)처럼 은근히
나는 아내의 귓구멍 속에서
도란거리는 첫사랑의 말씀을 캔다
더 멀리로는 나에 대한 애정(愛情)이 파묻혀 있는
어여쁜 구멍
아내의 처녀적 소문을
들여다보다가
슬며시 나는 그것들을 불어버린다.
아, 한숨에 꺼져버리는
고운 여인의 은(銀)부스러기 같은 추억(追憶).
“‘리스팝 포엠’이 시작되던 해에 세 번째로 시낭송회를 하고 이렇게 다시 왔습니다. <귓밥파기>는 등단하기 1년 전인 1966년에 발표됐습니다. 김광림 시인이 주재하여 만든 그 당시의 <현대시학>이라는 잡지에 신인 추천작으로 실렸던 작품입니다. 제가 만22세에 쓴 작품이고, '아내'라는 말은 실제가 아닌 미지의 동경의 세계였습니다. 이 시는 사실상 비공식적인 처녀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시는 어렵지 않게 썼습니다. 편안한 마음으로 흘러나오는 대로 써서, 대여섯 번 고쳤습니다. 표준어로는 '귀지'를 판다 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사투리 '귓밥'을 굳이 고집하고 싶었습니다. 단발머리에 가려진 귀가 하얗고 참 이뻤습니다. 당시 ‘어여쁜 구멍’이라는 표현을 하고 스스로 흡족해 했습니다. 소품이지만 스케일이 큰 신춘문예 당선작보다 더 좋아하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서울 지하철 스크린도어에도 적혀 있습니다.”
<대운동회의 만세소리>
Ⅰ
여기서는 세기의 어둠을 톱질하는 소리가 잘 들린다. 아주 잘 들린다.
Ⅱ
폭풍 더미의 사이렌이 병사들의 가슴을 후벼팔 때
땅굴 속 그는 수정 같은 설편(雪片)을 보았다.
겨울이 없는 땅에서, 그의 고향은 퍼얼펄 솟아오르고 있었다.
콘크리트의 균열진 음색으로 노래하라,
화약을 먹고 피는 꽃이여
귀기 서린 진홍의 꽃이여.
그때 그가 마지막 본 음울한 하늘에서는
문명한 새들이 날고 있었다. 새들은 비명보다 진한
폐허를 교미하고 있었다. 그것은 암벽을 녹이는 뜨겁고도 뜨거운 정염이었다.
Ⅲ
유년시절의 대운동회는 즐거웠다.
비취로 물든 건강한 하늘 아래에서 모자를 제껴 쓰고 말을 달렸다. 북소리 북소리,
땀 젖은 환호성을 펄럭이며 둥둥 두둥둥 울리는
북소리, 쇠북소리, 달리는 말굽소리 아편꽃이 흥건한 대지에 드넓은 만주의 호밀밭에
울려퍼지는 고구려의 고동소리.
Ⅳ
흥정을 마친 상선은 돌아오지 않고
남지나해 더운 몸부림이 잠을 쫓는다.
해안을 껌벅이는 새들의 붉은 눈빛이 머루알처럼 익어만 가고
아름드리 기둥을 향하여 벌떼처럼 아이들은 모여들었다.
유년시절의 대운동회는 즐거웠다. 사탕엿보다 달고 맛난 고함에 묻혀
그는 눈부신 태양을 이마에 댄 채 팔을 벌렸다.
그 가늘고 세찬 팔뚝에 엉겨붙은 평화를 힘껏 포옹했다.
몸채만한 기둥은 기울어지기 시작하고, 조국은 조금씩 그렇게 균열이 지고 있었다.
그러나 유년시절의 대운동회는 즐거웠다.
고원을 치달리는 우람찬 승전고,
뽀얗게 날리는 햇빛가루를 몸에 칠하고 삼림처럼 무성한 고구려의 사내들 ......
Ⅴ
삼림처럼 무성한 우계(雨季)가
그의 우러른 눈망울에 어리우고
휴전 고지의 캐터필러 자욱마다 쑥꽃이 피었다 지고
엄청난 사연으로 초병은 울고 있었다.
짐승처럼 울고 있었다.
유성(流星)이 가만가만 어깨에 내려앉는 겨울 하이얀 눈구렁 속에서
조국은 떨고 있었다.
겨냥해야 할 진정한 적(敵)이 없는 지도 위에 엎드려
초병은 비운을 울고 있었다. 울고 있었다.
Ⅵ
무감각한 함성과 파도와 잘못 말려들어간 꿈속에서처럼
그는 비운의 상처를 끄을고 포복해 갔다.
이글대는 태양을 이마에 느끼고, 그가
드디어 곤두서 있는 기둥나무를 끌어안았을 때
내뻗은 두 손은 갑자기 가지를 쳤고, 그리하여
수많은 촉수를 지닌 벌레가 되어 그는
태양을 침몰시키고 있었다.
서서히 그 아름드리 기둥나무는
그의 치미는 힘에 의하여 굴복하였다.
둥둥 울려 퍼지는 함성은, 북소리는
이내 그의 뜨거운 맥박이 되어 기운차게 뛰놀았고, 유년시절의 대운동회는 즐거웠다.
그때 그는 보았던 것이다.
어두운 남지나의 적의에 찬 땅굴 속에서
꿈틀거리는 고향의, 꿈틀거리며 솟아오르는
하이얀 설편을 보았던 것이다. 유년시절의 대운동회, 쏟아지는 북소리보다 흰 고향의 눈을.
Ⅶ
끊임없이 들려오고 있었다.
끊임없이 해안선을 날며 불꽃 같은 새들은 교미를 하고
끊임없이 세기를 절단하는 톱질소리는 들려오고 있었다.
콘크리트의 균열진 음색으로 노래하라,
화약을 먹고 피는 꽃이여
귀기 서린 진홍의 꽃이여.
그 힘찬 고구려 사내의 포옹은 끈끈히 굳어버리고
비린내를 풍기며 그는 한 마리의 갑충이 되어 자빠지고 말았다.
톱질소리는 더 크게, 더 크게 들려오고 있었다.
폭풍 더미의 사이렌을 항상 불어대는
조국의 새하얗게 눈 덮인 군사분계선의 어느 초소에
유성이 가만가만 내려앉을 것이다. 잃어버린 기억의 고원에도
아름다운 겨울이 반짝일 것이다.
어디선가 병사는 조국을 어깨에 메고
비운을 겨냥할 것이다.
짐승처럼 몸부림칠 것이다.
Ⅷ
먼 데서도, 선택된 전쟁이 끝나가고 있는 아주 먼 데서도
세기의 어둠을 톱질하는 소리는 잘 들린다. 아주 잘 들린다.
대운동회도 저물고, 즐거웠던 유년시절의 대운동회도 이미 저물고
아이들의 만세소리만 스산하게 스산하게 파도에 씻기운다.
“196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입니다. 그 전 해에 <1965>로 동아일보에 당선됐다 취소된 건 지난번에 말씀드렸죠. 학생일 때 전북대 신문에 실렸는데, 그게 문제가 돼 당선 취소가 됐습니다. 그 후 1년 동안 권토중래, 절치부심해서 쓴 작품입니다. 그해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는 제가 당선됐고, 소설에는 최인호씨의 <견습환자>, 희곡에는 오태석씨의 <웨딩드레스>가 당선됐습니다.”
“월남 파병이 됐을 무렵 우리나라 GNP는 1인당 103달러였습니다. 지금은 2만 달러에 가깝나요? 그때 파병 군인 월급은 미화 200달러였고, 나라에서는 30~40달러만 주고 나머지는 국가경제를 살려야 한다는 명목으로 차압했습니다. 이 시는 병사 이야기를 상상으로 꾸민 작품입니다. 초등학교 다닐 때의 운동회 시절, 아득한 그 이전 고구려 시대, 좀 더 가까이는 휴전선에 있다가 파병된 현재의 병사… 세 가지 시간대를 교차시켜 썼습니다. 제딴에는 새롭다고 생각했습니다. 시론 수업을 가르치던 어느 시인이 “‘우리나라에 이중구조’로 씌어진 시가 드물다”고 했는데, 그 말을 듣고 나는 삼중구조로 써보자 생각했습니다. 요즘에야 이중구조의 시 작품은 흔합니다.”
“이 시 분량은 2백자 원고지 16장입니다. 초고를 쓴 다음 큰 시험지에다 손으로 쓰고, 두루마리처럼 이어놓고, 그 시를 훑어보면서 열 번 안팎으로 고칩니다. 최소 열 번에서 최고 스무 번까지 고치기도 합니다. ‘갑충’은 카프카가 쓴 <변신>에서 떠올렸습니다.”
<입술>
매미 울음소리
붉고 뜨거운 그물을 짠다
먼 하늘로 흘러가는 시간의 강물
저 푸른 강에서 첨벙거리며
물고기들은
성좌를 입에 물고 여기저기 뛰어오르는데
자꾸만 눈이 감긴다
내가 엎질러버린 기억의 어디쯤
흐르다 멈춘 것은
심장에 깊숙이 박힌
미늘,
그 분홍빛 입술이었다.
“2009년에 낸 시집 제목입니다. 이 시는 처음에는 버리다시피 했는데, 2~3년 뒤 시집을 낼 무렵 다시 손을 봤습니다. 여름철에 썼는데 매미소리가 지긋지긋하고 ‘시끄러웠습니다.’ 시원하지 않고 짜증스럽고 덥더군요. ‘붉고 뜨거운 그물을 짠다’고 쓰게 됐습니다. ‘미늘’이라는 단어는 ‘?’를 반대 방향으로 꺾어 올린 것 같은데, 그게 물고기를 놓아주지 않습니다.”
<마리안느 페이스풀*>
간절하면 이루어지나 봐요, 마리안느
미안해요 당신을 간밤 꿈속에서 만났어요
나랑 둘이서 피나콜라다를 마시기 위해
구석진 카페에 앉았는데
안타깝게도 어둠이 안개처럼 피어오르고 있었어요
그 어둑한 두 그림자가 졸아들어
촉촉한 슬픔의 촉을 올려 오늘 내 가슴 속 어딘가
키 작은 제라늄 꽃나무로 돋아나고 있어요
당신은 낯선 곳에 가서도 나무들의 이름을 불러주고
꽃들의 하염없이 작은 말을 귀기울여 들어주는
착한 여인, 깊은 눈빛 아름다운 여인
나는 당신의 발가벗은 몸에 장미 꽃다발을 바쳐요
장미꽃으로 앙증맞은 당신의 가슴을
장미꽃으로 간지럼을 기다리는 당신의 배를
장미꽃으로 당신의 허벅지를 다리를
가볍게 가볍게 두드려요
나를 보는 당신은 가을하늘 새털구름, 셀로판지 같은
웃음을 던져주고
마리안느, 당신의 깊은 눈동자 속에 장미꽃
장미꽃 한 잎의 꽃잎에 작은 물방울
물방울에 갇히고 마는 오토바이 한 대
지금 내 귓속에는 작은 새처럼
당신이 날아오는 안개 낀 새벽
오토바이의 길고 긴 폭음이 눈부신 금빛으로 붕붕거려요
이제 턱 밑에서부터 지퍼를 내가 열게요
신비로운 당신의 가슴골과
비밀스레 떨고 있는 아랫배까지 열어갈게요
검정 가죽슈트를 한숨에 열어서 당신의 흰 알맹이를
꺼낼 거여요
그리하여 내 입에 머금은 피나콜라다를
당신에게 부어주고 싶어요, 마리안느
예쁜 제라늄 화분에 물을 주듯이
성당의 성수대에 성수를 흘려 넣듯이
* 망디아르그의 소설 「오토바이」를 원작으로 한 영화에 알랭들롱과 함께 출연한 영국 가수, 배우.
“지난 23일 낮 두시 반에 EBS에서 <태양은 가득히>라는 영화를 봤습니다. 그때 알랑 들롱이 25살이었습니다. 지금은 80대인데 건재합니다. 원작의 소설 <오토바이>는 '의식의 흐름' 수법을 쓴 것이었고, 그걸 토대로 망디아르그가 각색한 영화인데 우리나라에서 개봉할 때의 영화제목은 <그대 품에 다시 한번>이었지요. 소설도 그렇지만, 영화도 요즘의 19금에 해당합니다.”
<8번 출구로 가는 길-테오티우아칸>
막 도착한 행성열차에서 사람들이 내린다
이 골짜기는 별빛이 우박처럼 쏟아지는 곳
태양의 피라미드를 보며 낮에는 루드베키아가 피고
달의 피라미드를 보며 밤에는 달맞이꽃이 피고
한 떼의 환승객과 어깨를 부딪치며
엇갈리는 걸음으로 스쳐가야만 하는데
그렇게 사람의 운명이란 빗나가는 것일까
불타버린 도시 신의 도시에서 온 사내
그는 떠돌이 악사, 8번 출구 골짜기 그늘에 서서
펜플룻을 분다 그가 연주하는 악기에서 한 줄기
연기처럼 천 년의 하늘이 퍼덕이며 흘러나온다
그 밤의 신전 위에 잠자는 독수리 접은 날개가 고요하다
이 행성에서 건너편의 행성으로 가기 위해서는
계단에서 졸고 있는 저 불의 잠을 깨워서는 안 된다
우리가 죽으면
바람은 우리의 몸을 거두어 흙으로 만들고
사람의 죽은 몸은
언젠가는 다시 밤에 나무로 자라날 것이다
죽음의 거리를 건너가는 저 그림자, 그림자들
스크린도어 앞에 한 줄로 옥수수처럼 늘어선
이 사람들은 잠시 후 사라질 것이다
바람이 되어 8번 출구에서 시작하여
골짜기를 범람하는 펜플룻의 선율을 타고
아득히 꿈꾸는 섬을 향해 이제 막 떠난 행성열차에
그는 천 년 전 자신의 영혼을 실어 떠나보냈다
“사당역에는 출구가 14개 있고 환승역이라서 매우 복잡합니다. 어느 날 사람들이 환승하기 위해 줄을 질게 늘어선 걸 보면서 ‘기이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슨 SF영화 장면 같았습니다. 그곳에서는 가끔씩 공연이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멕시코사람 몇 명이 밴드로 노래도 하고 음반을 팔기도 합니다. ‘테오티우아칸’ 음악을 연주하더군요. ‘테오티우아칸’은 ‘신의 도시’ ‘인간이 신이 되는 곳’이란 뜻입니다. 그 음악을 듣는데 성스럽기도 하고, 하여튼 묘했습니다. 이 단어를 검색해봤더니 ‘고대 로마의 없어진 도시’더군요. 기원후 2세기경 번창했던 도시국가가 600년 지나서 침략을 받아 불타 없어졌습니다.… 한쪽은 ‘태양의 피라미드’, 또 한쪽은 ‘달의 피라미드’였습니다. 저는 멕시코 고원에서 피는 꽃을 ‘루드베키아’와 ‘달맞이꽃’으로 봤습니다. 이 음악을 두 시간 넘게 들으면서 초고를 썼습니다. 이 시는 음악에서 시작된 시입니다. SF장면을 떠올리며, 멕시코인은 ‘옥수수에서 인간이 태어났다’고 생각하는 것까지 떠올렸습니다. 말하자면 신비스러운 선율에 끌려서 쓴 시입니다.”
<강변북로>
내 가슴의 동쪽에서 서쪽으로
달이 지나갔다.
강물을 일으켜 붓을 세운
저 달의 운필은 한 생을 적시고도 남으리.
이따금 새들이 떼 지어 강을 물고 날다가
힘에 부치고 꽃노을에 눈이 부셔
떨구고 갈 때가 많았다.
그리고 밤이면
검은 강은 입을 다물고 흘렀다.
강물이 달아나지 못하게
밤새껏 가로등이 금빛 못을 총총히 박았는데
부하의 총에 죽은 깡마른 군인이, 일찍이
이 강변에서 미소 지으며 쌍안경으로 쳐다보았느니
색색의 비행운이 얼크러지는 고공의 에어쇼,
강 하나를 정복하는 건 한 나라를 손에 쥐는 일.
그 더러운 허공을 아는지
슬몃슬몃 소름을 털며 나는 새떼들.
나는 그 강을 데려와 베란다 의자에 앉히고
술 한 잔 나누며
상한 비늘을 털어주고 싶었다.
“용산구 이촌동에 우리 내외, 큰딸 내외 네 식구가 함께 살고 있습니다. 베란다에서 보면 한강이 눈앞에 펼쳐지고 저 멀리 현충원, 그 너머 관악산. 왼쪽 가까이 동작대교, 오른쪽 멀리로 한강대교가 보입니다. 베란다 바로 아래로 서울 외곽 고속화도로 강변북로가 지나갑니다. 어느 날 동서가 찾아와서 “여기쯤 그 옛날 박정희 군사정권 때 국군의 날 행사를 하면 텐트 치고 에어쇼를 구경했던 한강 백사장이었다"고 말해주었습니다. 1970년 3월 17일 밤 11시에 검은색 승용차에서 정인숙이라는 젊은 여자가 피살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여자는 죽기 전 몇 시간 전에 클럽에서 여러 차례 같은 음악, <릴리스 미(날 좀 놓아주세요)>를 신청하여 춤을 추었다고 합니다. 억압의 시대인 군사독재와 더불어 비극적인 정 여인 사건 등을 생각하며 이 시를 썼습니다.”
<풀밭 위의 점심 식사>
여러분의 자랑스런 후일담이 되어드리려고
벌거벗고 앉아 있어요, 얌전한 고양이
부뚜막의 고양이가 되어
땅 속으로 땅 속으로 두더지가 한사코 땅을 파듯
저 멀리 흐르는 강물 소리엔
꿈의 운하를 파는 삽질 소리가 암암리에 섞여 있지요
내 곁에 한쪽 다리를 뻗고 느긋한 파트너는
토요일까지 죄를 짓고
주일날이면 교회에 가서 사함을 받지요, 그리고
풀잎에 맺힌 아침 이슬처럼 깨끗해지지요
나는 무릎 위에 손을 올리고
물려받을 주식에 대한 생각들을 인화하기 위해서
내 얼굴의 턱을 괴고 있어요
거리에서 떼쓰다가 불타 죽은
못된 불량배들에 대한 헛소문은 믿지 마세요
감취진 샅 사이로 향긋한 바람이 들락거리는 숲속
이 그늘이 참 좋아요
굴참나무 속에 섞인 한 그루 자작나무처럼
알몸으로 앉아 있어요, 강가에서 뒷물을 마친 친구가
건너편 남자의 짝이 되기 위해 돌아오고 있네요
방부제가 섞인 이 식빵과
농약이 스며 색깔 고운 과일들, 주기도문과 함께
벌거벗은 내 몸을 함께 들어보셔요
죽어도 우리들은 썩지 않을 거예요
썩지 않는 우리들의 사랑 먹고 마시어요
이 신선한 공기는 십년 만이지요 안 그런가요
그런데, 우리들의 풍경 밖에서
우리를 엿보는 당신은 누구인가요
내 허벅지 사이로 기어 들어와
배꼽 아래까지 깊숙이 치밀어 올리는 뜨거운 시선
도대체 도대체 보이지 않는 당신은 누구지요?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 에두아르 마네의 그림 <풀밭 위의 점심 식사>를 보고 쓴 시입니다. 4년 전에 우리나라 현실에 맞춰 썼습니다. 대운하, 촛불시위, 용산참사… 강이 흐르는 숲속에서 두 쌍의 남녀가 피크닉을 즐기는 정경을 뜨겁게 응시하는 그림 밖의 ‘구경꾼’은 국민들의 시선입니다. 우리들의 시선을 잊지 말라는 내용을 담았습니다.”
<당신의 연애는 몇 시인가요>
이른 아침 갓 구운 핑크의 냄새,
골목길에서 마주친 깜찍하고 상큼한 민트 향은
리본으로 치장한 케이크 상자처럼 궁금한 감정이에요.
초보에게 딱 맞는 체리핑크는
오전 열 시에 구워져 나오지요.
십대들이 많이 구매하지만 놀라지 마셔요, 때로는
삼사십대 아저씨가 뒷문으로 들어와 찾을 때도 있어요.
육질 좋은 선홍색의 연애는
오후 두시 이후에 뜨거운 오븐을 열고 나와요.
구릿빛 그을린 사내가 옆구리에 낀 서핑보드
질척거리는 파도 사이 생크림 같은 흰 거품은 덤이지요.
아무래도 못 잊는 블루,
그 중에서도 뒷맛이 아련해 다시 찾는 코발트블루는
땅거미 질 무렵 파도 사이 산책로에 숨었다가 뛰쳐나오기도 하지만요.
가장 멋들어진 연애는 한밤의 트라이앵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토라지는 삼각관계로 구워내
당신의 눈물에 찍어먹는 간간한 마늘빵 그 맛이지요.
“이 시는 웹진 <문장>에 발표했던 시입니다. 학생들 감상을 봤더니, 시인이 20대초반이냐고 하더군요. 전철역 가까운 골목의 ‘파리바게뜨’를 지나는데 까만 소칠판에 색분필로 빵 나오는 시간을 써놓은 걸 봤습니다. 빵 종류에 따라 나오는 시간이 다른 거죠. 그걸 보면서 세대별로 구분해서 사랑 이야기를 쓰고 싶었습니다. 첫째 연은, 소년 소녀의 사랑에 대한 동경을 나타냈습니다. 사랑인지 아닌지 모르는 궁금한 감정을 썼습니다. 2연은, 첫사랑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예전에는 10대 후반이면 첫사랑을 했는데, 요샌 30,40대에도 연애를 못해본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3연은 열정적인 연애를 그렸습니다. 4연은 갑자기 떠오르는 옛사랑의 추억을, 5연은 요새 나오는 막장드라마처럼 삼각관계로 그려지는 연애 이야기입니다. ‘재미있게’ 써봤습니다.”
<오페라의 유령>
노래의 날개 위에 극장이 떠있고
도취의 하늘이 거기 떠 있었다.
내 사랑의 깊이는 지옥보다 깊어서
오, 무서워라.
저 푸른 심연을 소라고둥처럼 내려가고
내려가면 거울의 방
소용돌이 속에 떴다 가라앉고
가라앉았다가 다시 떠오르는 섬이 있었다.
갈채는 거미줄이 되어
샹들리에를 휘감아 흔들더니
심장이 터질 듯 슬픈 날이었다.
우레처럼 떨어져 산산조각이 난 샹들리에
죽음의 오페라는 막을 올리고
나는 가면을 벗을 수 없었다.
눈부신 삶을 노래하는
디바*의 발치에 무릎을 꿇고
절망에 입맞춘 내 입술로 지옥의 사랑을
하소연해도 부질없을 뿐
이제 나의 노래는 어둠 속에
삐걱이는 층계와 벽 속에 숨어 있느니.
그대가 바라보는 거울 뒤에 숨어 있느니.
춤추며 노래하는 그대여
그대의 발길을 희미한 꿈결로 따라갈 뿐
그림자처럼 거미줄처럼.
“잘 알려진 <괴도 신사 뤼팽>은 모리스 르불랑의 소설입니다. 그와 동시대 작가로 가스통르루가 있었습니다. 그는 <노란 방의 비밀>도 썼지만, 연쇄 살인사건을 다룬 <오페라의 유령>도 썼습니다. 나중에 작가가 같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문학세계사와 문학동네에서 나온 것 등 두 가지 번역본이 있지요. 문학세계사에서 나온 것은 불어판 그대로 번역한 것이어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고, 문학동네 판은 미국 영어판인데 장황하게 전개된 것을 쳐내서 속도감 있게 읽힌다더군요. 소설의 내용은 애인 사이인 두 남녀가 주인공으로 오페라극장에서 벌어지는 기이한 연쇄 살인 사건을 해결하는 미스터리 소설입니다. 저는 시 쓸 때, 불어 번역본 소설을 먼저 봤는데 써놓고 나중에 영화를 보니 그 시각이 비슷했습니다. 발상의 관점이 같았던 거지요. <푸른 심연>을 3년 뒤 <오페라의 유령>으로 다시 바꿔 썼습니다.”
<브릭스달의 빙하>
설레는 오로라 때문일까요,
잠이 오지 않아요.
빙하를 보았지요. 푸른빛이 눈을 찔러요.
브릭스달의 빙하, 저 높은 이마를 가진 빙하도
이제 많이 늙었어요.
눈꺼풀이 무겁지만 잠이 올 것 같지 않아요.
내 나이 열일곱에 만난 당신
그때 만난 당신은 늠름한 청년이었지요.
이제 나도 마흔을 넘겼어요,
빙하의 푸른빛이 온통 내 눈으로 흘러드나 봐요.
어젯밤 우리들의 딸이
저희 반 남학생이랑 함께 지낸 걸 알아요.
빙하가 우레처럼 울고 난 뒤
피오르드로 한꺼번에 떨어지는 얼음 덩어리,
단숨에 벌어지고 쪼개지는 그게 우리네 삶인 걸요.
오늘 새벽 그 사내애를 만났어요. 화가 나서
따귀를 때리고 싶었지만, 당신의 서늘한 눈빛이 생각났어요.
저 빙하의 푸른빛이 산골짜기마다 넘쳐요.
이렇게 많은 푸른빛에 싸여서
나는 언젠가 눈이 멀 거예요.
당신이랑 작은 보트를 빌려 타고
피오르드에서 송어를 낚던 지난여름이 생각나요.
흥정도 없고 덤도 없는 세상.
이제 알아요. 나는 푸른빛에 둘러싸여서
머지않아 눈이 멀 거예요.
아름다운 브릭스달의 빙하도 언젠가는 폭포로
폭포 아래의 호수로 모두 다 풀어질 거예요.
내일 아침엔 노란 튤립 화분을 주방 창틀에 내놓겠어요.
아픔 반 기쁨 반, 딸애도 알게 되겠지요.
해가 없는 여섯 달, 해가 지지 않는 여섯 달
아이들은 알게 될 거예요.
블루베리는 보랏빛으로 익어가고
월귤 열매는 빨갛게 익어가는 것을.
“3년 전 삼각지에서 환승하러 지나는데 환승 통로에 걸린 사진을 봤습니다. 노르웨이 풍광 사진이었습니다. “야, 참 멋있다!” 서점에 가서 관광에 관한 책을 찾아봤습니다. <노르웨이>라는 책을 골랐는데, 싱가포르 국적을 가진 여자가 노르웨이에서 살면서 쓴 책이었습니다. 노르웨이 사람의 국민성, 풍습 등이 나와 있었습니다. 이 시는 그 책을 통해 노르웨이에서 유명한 해발 1000m 브릭스달의 빙하를 알게 되었고, 노르웨이의 풍광을 곁들여 허구로 써봤습니다. 이 시를 읽고 사람들은 노르웨이에 가봤냐고 물었습니다만, 안 가봤기 때문에 상상력을 동원해서 더 그럴싸하게 이 시를 쓸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브릭스달 현장에 가 봤더라면 아마 이런 시를 못 쓰고 말았을 겁니다. 브릭스달은 지명이고요, 한 중년 여인의 인생살이를 허구로 만들어봤습니다.”
“어떤 약을 장복하고 시력을 잃을 뻔한 적이 있습니다. 안과에 갔더니, 약의 영향일 거라면서 몇 개월 지나면 나아질 거라고 했습니다. 과연 의사 말대로 6개월 지나면서 회복됐습니다. 눈이 나빠질 때 시각에 이상이 심하게 느껴졌지요. 거리를 다니다 보면 남색이나 파란색이 눈에 띄게 많았고 그 색깔들이 가시처럼 눈을 찔렀습니다. 시력이 악화돼서 갑자기 색맹이 되고 색맹에서 실명으로까지 발전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경험을 시에 녹여 썼습니다.”
다음달 31일(수)의 <리스팝 포엠>에는 김수복 시인이 시 이야기를 들려준다. 김수복 시인은 <외박> <사람들 속에 하늘이 있다> <달을 따라 걷다> <우물의 눈동자> 등 시집을 여러 권 냈다.
* <인천in>에 실린 기사를 가져왔습니다. 김영숙 기자(김시언 시인)에게 감사합니다.
첫댓글 선생님!
그날 꼭 가서 좋은 말씀을 경청하고 싶었습니다.
갑자기 사정이 생겨 가서 뵙질 못했습니다.
저는 '빈손의 기억'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었거든요.
2011년 여름에 있었던 조정인 시인과의 만남에서 선생님을 뵌 적이 있습니다.
이 기사를 다 읽어보니 가본 듯 다가옵니다.
무더운 여름 폭력 잘 다스리시기 바랍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