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경희 개인전
일상에 있는 초월
그의 작품을 가로지르는 소재가 관찰자 입장에서는 재미있다.
일반적으로 작가가 일상에서 보는 것, 듣는 것, 느끼는 것을 설화적인 태도를 취하거나 철학적인 주제,
미학적인 주제를 취하지 않고 ‘그냥’ 평범한 물건들, 풍경들을 보여준다.
글 | 강태성(미술비평, 서울여대)
[2010. 6. 2 - 6. 8 갤러리이즈]
[갤러리이즈] 서울시 종로구 관훈동 10-5 인사동길 9-1 T.02-736-66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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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버스 위에 붉은 색, 노란 색 또는 푸른색이 시원스럽게 칠해져 있어 화가의 몸짓이 관람객의 머리에 떠오른다. 여기에 생동감 있게 선과 형태들이 표현되어 있다. 그의 작품에서 편안함과 안락을 주는 의자는 개인적인 평안을 전달한다. 화면에서 푸른 색에 흰 빛이 올려지고, 가볍고 경쾌한 터치로 색과 면들을 휘저어 놓는다. 다른 하나는 노란색과 붉은 색이 겹쳐진 배경에 캔버스 불루나 연두색이 자유롭게 섞여 있어 화가의 제스처가 드러나 형태의 외곽선을 개방시킨다. 이러한 개방성은 모든 작품에서 나타난다. 작가는 형태를 열면서, 때로는 그 위에 붓이나 나이프로 상처를 입히거나 겹치는 형태를 통해, 부정의 요소를 제시한다.
푸른시선 100x100cm acrylic on canvas
생명Ⅱ 80x80cm acrylic on canvas
작가는 단순하게 형태를 부정하는 것으로 그만두지 않고 긍정으로 승화시킨다. 그것이 표면에서 다채로운 벽면과, 색으로 칠해진 면들, 정물로 승화된다. 그래서 즐거움의 긍정과 부정이 함께 하는 것이다. 때에 따라 다채로운 표현 속에서 작가는 엑센트를 준다. 이 강조는 때로는 소극적으로 <그림자>처럼 나타나기도 하며, 작품 <Utopia> 처럼, 비교적 크게 하얀 집으로 대조적으로 아름답게 제시하기도 한다. 이 강조하는 조형은 활동력과 생명력을 강조한다. 이렇듯 그의 작품을 관통하는 것은 바로 ‘생명력’이다. 물론, 예술의 전당의 물 분수 <댄싱>에서처럼, 경쾌한 생명력을 물 분수의 움직임에서 찾아낸다. 이 그림에서 보여지는 제스처와 율동은 경쾌한 리듬감을 연출한다. 여기서 리듬은 생명의 잉태와 같다는 앙리 메쇼닉의 말을 떠올린다. 또한 그는 리듬을 인간이 살 수 있는 제일 중요한 ‘심장박동’에 비유하기도 한다. 바로 작가의 움직임, 긍정(칠하기), 부정(긁어내기), 또 다른 형태 만들기와 형태를 넘어서기 등의 운동도 리듬으로 보고 있다.
생명Ⅲ 80x80cm acrylic on canvas
아카데미 화실
빛Ⅰ 72.7x60.6cm acrylic on canvas
그의 작품을 가로지르는 소재가 관찰자 입장에서는 재미있다. 일반적으로 작가가 일상에서 보는 것, 듣는 것, 느끼는 것을 설화적인 태도를 취하거나 철학적인 주제, 미학적인 주제를 취하지 않고 ‘그냥’ 평범한 물건들, 풍경들을 보여준다. 즉, 단순한 풍경으로 한 대상으로부터 시작된 소박한 느낌을 전해준다. 이 소박함에서 작가는 희망과 즐거움을 이야기하며, 기쁨과 소망을 말하고 있다. 우리는 일상에서 얼마나 행복과 안식을 잊고 있었는지 작품을 통해 반성하게 한다. 작가는 특별한 철학이나 개념을 찾기 보다는 일상에서 소박한 물건을 보여주며 일상의 생명력을 부여한다.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이 형이상학적이거나 영적인 것, 초월적인 것은 분명 아닐 것이다. 작가는 초월적인 세계를 오히려 넘어가는 가벼운 소재를 좋아한다. 일출에서도, 작은 시골마을에서도, 우연히 지난 길가에서도 이러한 기쁨이 도처에 존재하는 것을 알려준다. 이러한 일상의 이야기는 큰 이야기의 핵심적인 단편(epitome)을 구성하는 요소이다. 그의 일상적인(일화적인) 작품은 예로 우리가 이야기에서 아주 적합한 말을 고른 것처럼 (bon mot), 그림으로 적합한 장면을 포착하여 긍정의 감정을 실어놓는다. 긍정은 일반적으로 부정을 기초로 한 그것이다.
흐름Ⅰ 72.7x60.6cm acrylic on canvas
생명Ⅰ 80x80cm acrylic on canvas
흐름Ⅰ 72.7x60.6cm acrylic on canvas
이론을 전공하는 관찰자 입장에서 볼 때, 작가는 일화적인 것이 하나의 역사의 기초가 된다고 지적했던 노발리스의 문장이 생각난다. 그의 작은 행복과 일상은 거대한 담론을 형성하게 하는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며, 또한 겹침이나 영토확장을 통해서 이뤄내는 형상들은 현재의 담론인 ‘차연’(differance)의 의미를 보여준다. 이 차연은 사물과 마음을, 주관과 객관의 차이를 연장시켜 관련 갖게 한다. 그의 작품은 진정 죽음에서 삶으로, 어둠에서 밝음으로 또한 불행에서 행복으로 이끄는 큰 힘을 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