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 만들기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는 책장에서 책 한 권이 덧니처럼 비죽이 내밀어져 눈에 들어온다. 오래 전에 쓰여진 일기장이다. 책갈피에서 '내가 사랑하는 것들'이란 제목아래 촘촘하게 쓰여진 글이 툭하고 떨어진다. 무심히 잊혀졌던 세월들이 선명하게 살아온다. 싫은 것보다 좋은 것이 더 많아 참 다행스러운 것이 진정한 세상근심을 제대로 짐작 못했기에 만들어 낼 수 있던 목록이었구나 생각되었다.
아주 먼발치로 지나 간 스무 살 언저리를 되짚어본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하찮게 여겨지는 일에 그렇듯이 행복했는가 싶게 미루나무잎새에 부서지는 햇살을 참 좋아했다. 그 햇살을 비춰볼 수 있는 사금파리와 봄이면 실바람에 나붓대는 냉이 꽃 이파리를 어루만지며 산자락에 무리 지어 피고 지는 조팝나무 꽃을 마냥 볼 수 있던 봄날이 참 행복했다. 유난히 아끼던 만년필이 있었다. 아침이면 부치지 못하고 찢겨지는 편지들을 밤새워 쓸 수 있기에 더욱 그랬나보다.
쥬페의 '시인과 농부', 사라사태의 '집시의 달'을 늘 들을 수 있는 포터블 전축을 아꼈다. 넉넉지 못한 용돈을 쪼개어 LP음반을 사 가지고 나오던 명동의 레코드 가게와 정경화 명화 명훈 세 남매가 이뤄내는 화음을 듣던 시민회관과 음악다방 바로크에서 친구들을 더없이 사랑했다. 까만 바탕에 녹색 꽃무늬가 화려하던 공단 스카프가 돋보이던 찬 겨울도 좋아했다. 친구 J에게서 선물로 받은 끈이 긴 핸드백 속에 머릿속을 선명하게 깨워주는 이어령의 책들을 넣고 다녔다.
우울할 때 의식적으로 경쾌하게 소리를 내며 걷던 내 발걸음조차 사랑스러웠다. 그 시절에서 아주 먼발치로 지나 온 지금, 세월은 내 삶의 한 가운데 반세기라는 커다란 나무 한 그루를 심어놓았다. 몇 개인가 가늠하기조차 싫은 새순을 덧달아 간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숨가쁘게 지나쳐 가고 있는 시간들이 어느새 사랑하고 미워하며 부딪혀가노라니 마음 갈피를 바늘구멍처럼 좁혀놓았다. 크고 작은 편린들이 켜켜이 쌓여가고 있는 지금의 내게 사랑하는 것들의 목록을 작성해보라면 과연 무엇을 쓸 수 있을까?
조심스레 내 속을 헤집어서 사랑하는 것들의 목록을 짚어본다. 구두 뒤 굽에서 경쾌한 소리를 내며 빠르게 걷던 내 발걸음이 조금씩 느려진다. 더듬거리는 달팽이의 촉수처럼 조심스럽기 때문에 서두르지 않으려 한다. 미루나무 잎새에 부서지는 햇살이나 냉이 이파리를 만나면 반갑기는 여전하다. 까마득한 미루나무 꼭대기에 집을 짓고 사는 까치가 울타리 끄트머리 자귀나무에 내려와 반가운 사람의 기척을 미리 물어다 주는 내 집 뜰에 설 때마다 행복하다.
겨울이면 잠시 소멸하듯 잠을 자다가 봄이면 소생하는 자연의 순리를 마냥 바라볼 수 있게 놓여진 긴 의자도 내 행복의 목록에 든다. 그곳에서 박태기나무가 별처럼 생긴 분홍색의 꽃을 가지마다 총총하게 피워내며 봄날의 시간들을 재고있기 때문이다. 외출을 서두르며 집어드는 가방도 목록에 적어본다. 두툼한 사탕봉지를 넣어도 표시가 나지 않을 만큼의 가방이면 더욱 좋다. 커다란 가방 안에 온갖 잡동사니를 넣고 다니다가 만나게 되는 행복이 있다. 마을버스에서 고달픈 일상을 만날 때면 슬그머니 사탕 한 움큼을 건네며 정을 나눌 수 있기에 좋다.
현관을 나서면 제때 낌새를 채고 쪼르르 달려드는 하얀 개를 사랑한다. 십 여 년이 넘게 우리가족과 함께 서로 눈빛만 봐도 의사소통이 되고 있으니 짐승이기보다 가족의 일원이다. 어쩌다 여러 날 집을 비우게 될 때 두고 간 가족들의 안부에 꼭 더 하는 일 중에 개의 안부도 끼어있다. 집을 들며 나며 개의 등을 다독거리는 남편과 아이들을 사랑하는 목록에서 어찌 빠뜨릴 수 있으랴. 최우선 순위에 올라야 하는 절대적인 존재다.
LP레코드판은 서가의 맨 아래쪽을 차지하고 있지만 포터블 전축은 그 존재조차 잊혀진지 오래다. 만년필 대신에 컴퓨터 자판을 두드린다. 컴퓨터에서 음악을 들으며 달을 올려다 볼 수 있는 창문 밖 밤하늘이 참 좋다. 때로 실타래처럼 엉켜들어 제대로 풀리지 않는 글을 쓰느라 불면으로 뒤척일 때, 내 속에 가두어 진 채 미처 빠져나오지 못해 안간힘을 하는 속내를 끌어내려고 애를 쓴다. 이리저리 글 타래를 다스리며 긴 글을 쓰다가 문장의 말미를 탁 찍어 넘길 때의 성취감이라니, 그야 말로 행복한 순간이다. 진솔한 삶의 목록들을 남기고싶지만 만만치 않은 글 타래와의 씨름이다.
새벽달은 또 기울어간다.
첫댓글 파초님 글이 아주 좋습니다 요즘 보기드문 긴글을 읽으면서 공감이가는 글에 머리를 끄덕이며 읽었습니다. 스고하셨어요 파초님~!^^*
파초님은 수필친구의 원조이십니다.수필친구도 어언 반십년이 지났습니다. 꾸준히 찾아주시니 반갑고 감사할 따름입니다. 글목록만들기를 읽으면서 문장 한귀절 한귀절이 심금에 젖어들어 나를 잊고 말지요.새해에도 좋은 목록만이 쌓이기를 빕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