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의 시스틴 성당에서는 300여 년 전부터 매주 금요일이면 알레그리의 명곡인 ‘미제레레 메이, 데우스(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가 연주되고 있답니다. 음악 자체도 아름답지만, 이 곡이 유명해진 이유는 교황청이 이 음악의 악보를 봉인했기 때문이라고 하네요. 교황청은 그 악보가 외부에 공개된다든가 시스틴 성당 밖에서 연주되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했습니다. 이 노래를 듣고서 악보를 만드는 사람이 있다면 파문당할 것이라는 경고까지 내렸지요.
그런데 1770년 용감하게도 그 아름다운 음률을 악보에 옮겨 적은 14세의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바로 음악계의 신동으로 통했던 모차르트였지요. 아버지를 따라 유럽 전역으로 연주 여행을 다녔던 모차르트는 로마 시스틴 성당에서 10분간 이 곡을 듣고서 큰 감명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고는 단번에 암기하여 파문을 당할 것이라는 경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숙소에 돌아와 9개 파트로 구성된 이 곡을 악보에 옮겨 적으며 말했답니다.
“이토록 아름다운 선율을 듣고도 연주할 수 있는 악보가 없다는 사실은 통탄할 일이다.”
그렇게 시작된 악보를 만다는 작업은 그의 실력이 유감없이 발휘되어 완벽하게 정리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악보는 즉시 출판되어 ‘미제레레 메이, 데우스(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는 이내 유럽 전역에서 연주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물론 교회에 순명하지 않은 것은 문제가 될 수도 있지만, 그 부분은 둘째로 치고 모차르트의 용기 있는 행동은 많은 이에게 굳이 바티칸을 찾지 않더라도 세계 곳곳에서 아름다운 선율을 감상할 기회를 가져다 준 셈이 되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사실 우리들은 많은 두려움 때문에 해야 할 것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두려움으로 인해서 시작할 수 있는 가능성조차 빼앗기는 경우가 얼마나 많았던 지요. 이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길. 그것은 바로 주님께 대한 강한 믿음밖에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 어떤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엎드려 절하며 말합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당시의 나병 환자는 일반 사람들과 함께 있을 수 없었습니다. 부정한 사람이라는 이유로 일반 사람들과 격리되어 살 수밖에 없었지요. 그래서 정상인들이 사는 곳에 가면, 돌에 맞아서 내침을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임을 기억한다면, 복음에 등장하는 나병환자가 얼마나 큰 용기를 가지고 예수님 앞에 나섰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으로 인해서 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곁에 있었습니다. 그 군중들을 뚫고서 예수님 앞까지 나간다는 것은 어쩌면 죽음을 불사한 커다란 용기가 없으면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 용기를 보신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우리도 내 안에 가지고 있는 두려움을 몰아내고 대신 그 자리에 용기 있는 믿음을 채워야 할 것입니다. 그때 내가 원하는 것을 주님으로부터 얻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내가 간직하고 있는 두려움은 무엇입니까?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두려움을 내 안에서 몰아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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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진 것
-김대선 신부-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를 치유해주십니다. 당시 나병은 매우 무서운 병이었고,
치유되기 어려운 병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큰 죄를 지은
사람들이 걸리는 병으로 인식되었습니다. 그리고 나병 환자들은 가족과
마을로부터 쫓겨나 따로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예수님의 치유는
병을 고쳐주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즉, 죄의 용서와 공동체로의
복귀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치유의 기적을 만들어낸 것은
예수님이 아니라 나병 환자입니다. 그의 겸손한 태도가 예수님으로 하여금
병을 치유하게끔 만들어준 것입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이 말씀 안에서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기적의 주체가 예수님이심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병이 치유되는 것이
자신이 용서 받을 만한 행동을 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이해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이 모두 예수님의
사랑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이해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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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 전봉순 수녀-
컴퓨터를 오랜 시간 사용하다가 오른쪽 새끼손가락에 이상이 생긴 적이 있었다. 처음에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집 근처 정형외과에 가서 주사를 맞고 괜찮아져서 다시 컴퓨터 작업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몇 달 후에 재발하여 주사를 맞고 깁스를 하고 약을 복용했지만 차도가 없었다. 새끼손가락 하나 때문에 내가 이렇게 고생을 해야 하나 생각하니 한심하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했다. 밤에도 손가락이 아파 잠을 설친 적이 많다 보니 점점 걱정이 되었다. 진통제를 먹으면 잠시 통증이 가라앉았지만 약 기운이 떨어지면 또다시 아팠다. 같은 의사를 계속 찾아가기가 미안해서 집 근처 개인 병원을 돌아가면서 약을 처방받았다.
발병한 지 2년이 지났는데도 손가락이 낫지 않았다. 심지어 어떤 의사는 “이 손가락은 수술할 수도 없고 완전히 낫지도 않을 겁니다.” 했다. 그 소리에 나는 겁이 나고 ‘정말 곤란한 병인가 보다.’ 하는 생각이 들어 큰 병원을 찾아갔다. 병원에서 MRI를 촬영하고 난 후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입원과 수술 날짜를 예약했다. 그런데 막상 입원을 하려고 병원에 들어섰다가 한참 망설인 끝에 입원 예약을 취소하고 돌아왔다. 당장 수술하는 것보다 다른 의사의 소견을 한 번 더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더 큰 병원을 찾아갔다. 여기서도 의사의 소견이 똑같다면 그때 가서 수술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병원 의사는 수술을 해도 손가락은 완치될 수 없으니 그냥 통증을 안고 살아야 한다고 했다. 나는 도대체 무슨 병이기에 그런 식으로 처방을 내리는지, 그것은 환자의 고통을 전혀 덜어주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하며 이유를 물었다. 담당 의사는 “그러면 수녀님, 점을 쳐보시든지….” 하고 말했다. 수녀보고 점이라니, 의사가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는가 싶어 내 귀를 의심하며 ‘점’이라고 했느냐고 되물었다. 그 순간 모욕감이 들어야 하는데 오히려 힘이 생겼다. 점을 쳐보라는 의사의 말을 확인하면서 나는 하느님께 매달려야 한다는 것을 직감한 것이다.
그 이후로 나는 더 이상 약을 복용하거나 병원을 찾아가지 않고 손가락이 아프다는 사실조차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다. 열쇠는 하느님께서 쥐고 계신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그냥 손을 좀 덜 사용하면서 지냈다. 그렇게 1년쯤 지났는데 손가락이 아프다는 사실조차 느끼지 못했다. 결국 나는 ‘주님께서 하고자 하시면….’이라고 할 정도의 믿음이 없어서 그토록 긴 시간을 불안해하면서 고생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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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양승국신부-
<바위를 치워버리는 순간>
예수님 시대 당시 나병환자들, 안 그래도 잘 낫지 않는 곤혹스런 나병에 걸려 죽을 고생들을 다 했었는데,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억울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당시 나병환자들은 인간사회로부터 철저하게도 배척당하고 있었습니다. 출애굽시절, 사막을 횡단하던 시절에도 나병에 걸린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천막 안에 들어오지도 못하고 밖에서 찬이슬을 맞으며 잠을 자야 했습니다. 가나안 땅에 정착한 후에는 더 혹독하게 다루어졌는데, 율법은 그들을 아예 도시 밖으로 추방시켰습니다.
더 혹독한 규정이 한 가지 있었는데, 나병환자들 앞으로 사람이 다가오면 큰 소리로 이렇게 외쳐야 했습니다.
“Tame tame!”
이 말을 번역하면 대충 이렇습니다.
“난 부정 탄 더러운 인간이니 가까이 오지 말아요!”
더 한 규정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당시 나병환자들은 죽은 사람으로 인식되었습니다. 나병으로 판명되면 성곽 밖으로 나가 살아야 했는데, 그가 추방되는 날은 장례식 날과도 같았습니다. 그날은 부부간의 인연, 부모 자식 간의 인연이 다하는 날로 간주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보통 사람들이 나병환자와 접촉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나병환자와 악수라도 하는 날이면, 실수로 나병환자에 손이라도 대는 날은 재수 옴 붙은 날이었습니다. 나병환자의 피부를 만지는 것은 시체를 만지는 것과 동일하게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정결예식이 요구되었습니다.
당시 나병환자들에게 있어 가장 억울한 일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나병에 걸려 죽을 고생하는 것만 해도 원통한데 당시 사람들은 나병에 걸린 사람을 천벌 받은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나병이 드러내는 여러 특성들을 고려해 나병을 죄의 결과, 죄의 상징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이런 저런 연유로 오랜 세월 끔찍한 고통을 감내해왔던 한 나병환자가 오늘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는 예수님을 보자마자 크게 외치는데, 그의 외침을 통해 우리는 제대로 된 기도, 기도 중의 기도, 기도의 진수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나병환자의 외침 안에는 우선 굳은 확신이 담겨져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열렬한 믿음도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뜨거운 희망과 앞뒤 가리지 않는 집요한 청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병환자의 외침 앞에 예수님께서는 깊은 감동을 받습니다. 그 결과 즉각적인 예수님의 응답이라는 결실을 맺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안에 정녕 필요한 것은 바로 뜨거움입니다. 오늘 우리 안에 진정 회복되어야 하는 것은 감동입니다. 열렬함입니다.
이런 자세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만듭니다. 불가능을 가능케 합니다. 기적 같은 치유가 선물로 주어지며 급격한 삶의 변화가 뒤 따릅니다. 인간적 놀리나 사고구조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특별한 현상도 체험하게 됩니다.
인간은 누구나 때가 되면 자기 안에 있는 ‘기도심(祈禱心)’을 깨닫게 되는가 봅니다.
“나는 내가 이미 오래 전부터 마음 안에 기도를 담고 살아왔다는 것을 오늘에야 깨닫게 되었다. 나의 기도는 바위로 막아 놓은 샘과 같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예수님께서는 그 바위를 치워버리셨으며 그때부터 샘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 이후로 샘이 흐름을 멈춘 적이 없다.”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 마음 안에 놓여있는 큰 바위를 하나 치워버리셨습니다. 그 결과 나병환자는 자신 안에 이미 형성되어 있던, 그러나 막혀있던 기도의 물줄기가 다시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그 물줄기는 나병환자의 입에서부터 콸콸 터져 나왔습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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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케 하는 사랑-김찬선신부-산위에서 가르침을 끝내고 주님께서 군중과 함께 내려오실 때나병환자가 다가와 절하며 주님께 청합니다.그런데 그 태도와 말씨가 겸손하면서도 품위가 있습니다.“주님,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나환자로서 일생 소외와 천대를 받았을지도 모르는데 공손함을 잃지 않으면서도 치유의 간절함이 지나쳐 기품을 잃지 않습니다.고쳐달라고 애걸하지도고쳐달라고 떼를 쓰지도 않습니다. 단지주님의 능력에 대한 진실한 믿음을 고백하며주님의 뜻에 자기의 운명을 맡깁니다.“이렇게 계속 산다는 것은 죽느니만 못합니다.”“그러니 나를 고쳐주어야만 합니다.”“당신이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고 그래서 능력도 있으시고 사랑이시고 선하신 분이라면이런 나를 외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이런 식으로 자기의 현재 처지를 받아들이지 못하고하느님의 능력과 사랑과 선을 야비하게 들먹이며치유의 기적을 그는 강요하지 않습니다.저희 수도원에 구걸하러 오는 분들이 많습니다.어떤 분은 미안한 마음으로 청하고요청한 것을 어떤 이유로 저희가 드리지 않는다 해도 공순히 받아들입니다.이런 분에게는 저희의 사랑이 사랑으로 빛을 발하기에 기꺼이 드리고 싶고드려도 적게 드린 것 같아 미안합니다.그러나 어떤 분은 자기가 청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고,너희는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고너희들 역시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 사는 사람이며다른 사람이 돕는 것은 너희 배 채우라고 돕는 것이 아니라우리 같은 사람에게 나누라고 돕는 것이니너희가 우리를 돕는 것은 당연하다는 식으로 도움을 강요하고거절당하면 막 욕을 하고 갑니다.이렇게 사랑을 강요당하면 사랑이 빛을 잃기에도움을 줘도 찜찜하고 안 줘도 찜찜합니다.사랑을 사랑답게 할 수 있게 하는 사랑의 요청은 얼마나 품위 있는 겸손이고얼마나 품위 있는 사랑인지!오늘 복음의 나환자는 예수님을 예수님답게 한 사람이었습니다.그의 요청은 결코 불행한 자의 구걸이 아니라사랑에 불을 댕기는 부싯돌 겸손이요 사랑할 수 있도록 사랑을 반기는 겸손한 사랑이었습니다.남을 사랑하는 것도 훌륭한 사랑이지만남이 사랑할 수 있게 하는 사랑이 어쩌면 더 큰 사랑일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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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은 때로는 변화와 성장으로 이끌어 준다.
- 이상영 신부-
우리는 살아가면서 누구나 작건 크건 고통을 겪으면서 살아갑니다. 여러가지 육체적 질병으로 고생하기도 하고 정신적으로도 많은 고통과 아픔을 겪기도 합니다. 더욱 난감해지는 것은 왜 악인만이 아니라 선인도 고통을 겪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가끔은 주위의 착한 사람들이 더 크고 많은 고통을 받는 것을 볼 때 우리는 하느님이 정말 공평하시고 자비로운 분이신가 의심을 하기도 합니다.
2년전 태풍 루사가 제가 생활하던 수도원을 덮친 사건을 겪었습니다. 홍수와 산사태로 아끼는 책들이나 소중하게 여겼던 많은 물건들을 한꺼번에 잃어버렸습니다. 허리도 고장이 나고 몸도 많이 쇠약해졌습니다. 그때는 왜 하느님은 수도원도 구별 못하시고 수사도 못 알아보시는가 하고 투덜거리기도 했습니다.
그 일을 겪고나서 저는, 고통이란 무엇인가 집착하면 할수록 더 큰 고통을 느낀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가난한 사람이든 부자든 간에 돈에 너무 집착하면 그가 겪는 고통은 집착하지 않는 사람보다 더 크게 느낄 것입니다. 건강에 너무 집착하면 조그마한 병에도 다른 사람보다 더 큰 고통을 느낄 것입니다.
이러한 집착은 우리의 주관적인 의식, 혹은 고정관념이 굳을대로 굳어져서 형성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것이든 그것에 대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에 따라 달라보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문제가 되는것은 태풍도 아니요, 병도 아니요, 돈도 아니요, 건강도 아니요, 그에 대한 우리들의 고정관념일 것입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우리에게 주어지는 고통을 거부할 수만은 없을 것입니다. 고통을 억지로 피하거나 도망치려는 노력을 그치고, 고통을 겸손히 받아들이면서 고통에 대한 나의 고정관념이 어떠했는가를 먼저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지금 겪고 있는 나의 고통에 대해 하느님 탓이나 남의 탓으로 돌려 누군가를 원망하는 삶을 살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원망하며 살다보면 점점 더 나 자신이 이기적인 사람으로 변해갈 것이고 타인을 괴롭히면서 폭력적인 인생을 살게 될 것입니다. 더욱이 고통을 잊기 위해 술이나 갖가지 비정상적인 쾌락을 찾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인생은 다양한 면을 지니고 있습니다. 신맛, 단맛, 짠맛, 쓴맛, 매운맛 등등 다양한 맛이 있습니다. 그중에 어떤 맛도 좋다거나 나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여러가지 맛이 어울려 우리 인생을 풍요롭게 하는 것입니다. 만일 어느 한가지 맛만을 고집한다면 스스로의 인생을 불행하게 만들 뿐입니다. 인생의 참 맛을 깨닫지 못할 것입니다. 살맛나는 인생이란 획일적인 맛으로 이루어지는것이 아니라 여러가지 맛이 골고루 어우러져 이루어지는 인생인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 고통은 어떤 의미에서 필요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비록 내가 원치 않는 고통이지만 그 고통이 내 인생에 있어서 약이 될 수도 또 좋은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고통을 통해서 오히려 변화된 인생을 살 수도 있는 것입니다. 고통은 우리에게 항상 무엇인가를 가르쳐주며 변화와 성장으로 이끌어 준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고통을 겪으며 괴로워하고 신음하는 그 곳에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고통을 통해서 우리가 겸손함과 감사함을 배우고 자신의 참 모습과 인생의 풍요로움을 깨닫고 하느님께 대한 깊은 신뢰심을 가지고 고통을 극복할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 인생에 있어서 지금 겪고 있는 고통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너무 힘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고통을 피하고 싶은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하느님께서 힘과 용기를 주시도록 기도해야 겠습니다. 십자가의 고통을 피하지 않으시고 묵묵히 받아들인 예수님처럼 우리 또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고통이라면 그 어떤 고통이라도 기꺼이 감수해야 하겠습니다................◆
새벽을 열며
저는 지금 인천교구 사제연수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오랜만에 많은 신부님들과의 만남을 가질 수 있어서 얼마나 좋은 시간인지 모른답니다. 어제는 어떤 선배 신부님과 식사 후 산책을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지요. 그런데 그 신부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세요.
“나는 솔직히 네가 성지하고는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단다. 그래서 너와는 도저히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 성지에서 네가 어떻게 생활할지 참 걱정을 많이 했었지. 그런데 너와 갑곶성지를 보면서 내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단다. 그런 걸 보면 하느님께서만 그 뜻을 아시고, 적시적소에 사람들을 배치시키는 것 같아.”
생각해보니 저 역시 이 신부님과 같은 판단을 상당히 많이 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 사람은 저 일과 거리가 멀지. 저 사람은 이 일을 도저히 할 수 없어.’ 등등의 생각으로 그 사람이 할 수 있는 일도 내가 가로 막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얼마 전에 아주 놀라운 글을 하나 읽게 되었습니다. 그 글을 그대로 옮겨 봅니다.
“1천 5백여 개나 되는 작품을 남긴 영국의 유명한 화가 모세씨가 처음 붓을 잡은 것은 나이 80세의 일입니다.
죠지 버나드 쇼가 자신의 희곡이 처음 공연되는 것을 볼 수 있었던 것은 94세 때의 일입니다.
아몬드 발레라가 그토록 원하던 아일랜드의 대통령이 된 것은 92세 때의 일입니다.
벤자민 프랭클린은 80세가 되어서야 미국 헌법의 초안을 작성하였고, 그의 나이 83세가 되어서야 그 완성을 볼 수 있었습니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이들의 나이만 보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이라고, 사람들이 이제는 늦었다고 이야기 할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안 되는 일이 없는 법이지요. 이렇게 불가능해 보이는 나이를 통해서도 당신의 일은 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어떤 나병환자는 큰 소리로 예수님께 말합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이 나병환자의 외침이 저희의 가슴을 크게 울립니다. 나병환자는 ‘자기의 뜻’대로를 외치지 않지요. 대신 ‘주님의 뜻’대로를 외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하고자 하시면 자기의 병이 나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믿음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주님께서 하고자 하시면 안 되는 일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따라서 내 뜻에 의해서 모든 것이 바뀌기를 원하는 이기적인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대신 주님 뜻에 의해서 모든 것이 바뀌기를 원하는 겸손한 신앙인의 모습을 간직해야 합니다. 그때 우리들은 불가능해 보이는 일도 가능하다는 것을, 그래서 주님의 그 크신 힘을 체험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포기하지 맙시다. 주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면 다 가능합니다.
빠다킹신부
육신과 마음의 건강은 하나
-이봉하수사-
사람살이 안에서 약속만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나이를 떠나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지켜야 하는 것이 약속입니다. 그러나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는 말이 있듯 은밀하게 맺은 약속이라 하더라도 언젠가는 알려지게
마련입니다. 사람의 됨됨이를 보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약속 이행을 보면 알 수
있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러나 요즈음에는 양심에 따른 약속이라기보다 자기
이익과 편리에 따른 약속을 하고 더 나아가 권력이나 명예 돈을 위해 거래되고
있다는 현실이 서글플 뿐입니다. 우리의 신앙고백도 약속입니다. 사람과의 약속이
아닌 하느님과의 영원한 생명에 관한 약속입니다. 그분의 가르침과 뜻 안에서
살아가겠다는…. 나을 것 같지 않은 병에 걸린 이가 의사에게 진찰을 받으면
쉽게 고침을 받아 더 이상 병에 걸리지 않을 것 같은 마음으로 사람들에게 자랑을
하기 마련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 안에서 한센병을 고침 받은 이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한센병 때문에 하느님과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들로
취급받은 이들이 치유를 받았으니 그 마음은 어떠했겠습니까?
동네방네 돌아다니며 자랑을 했을 것입니다. 아니 몇 날 며칠 밥도 먹지 않고
기쁨의 춤을 추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치유의 조건으로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 약속은 당시뿐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해당됩니다.
그것은 사랑의 약속입니다. 영원히 변치 않을.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자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랐다.
-강민구 목사-
◆사랑으로 맺어진 부부지만 상대방이 무엇을 원하는지 몰라서 서로의 사랑이 전해지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이는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물었던 사람처럼 자기중심적 태도가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사랑은 현재 나의 감정이나 생각에서 싹트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지금 원하는 그것으로부터 자라나는 씨앗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의 씨앗은 단지 생각이나 말의 차원에 머무르게 되면 잘 자라나지 않습니다. 누군가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을 주기로 마음먹고 행동으로 옮겨 실제적인 도움을 주어야 사랑이 자라서 열매를 맺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가르치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간절히 원했던 것들을 우리보다 잘 아셔서 구체적인 도움을 주시면서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랐던 수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나 학식있고 경험이 풍부한 지식인으로 받아들였다기보다 자신이 간절히 원하는 것을 실제적으로 가장 잘 도와주실 수 있는 분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사람들의 필요에 무관심하시고 오직 영적 지혜를 가르치시는 데만 몰두하셨다면 산에서 내려오지 않으셨을지도 모릅니다. 내려오셨다 하더라도 많은 군중이 주님을 따라다니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군중은 가장 자신을 이해하시고 사랑하시는 분,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분, 자신의 병을 고치심으로 몸과 마음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시는 분을 따라나서는 법이니까요.
예수님은 산에서 말씀으로 가르치시고 내려오시어 몸으로 가르치셨습니다. 도움을 받으러 온 나병환자의 몸을 어루만지시며 영혼의 상처까지 치유하셨습니다. 또한 이제는 그가 공동체의 한 구성원이 되어 다른 이들과의 사회적 관계 안에서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어떤 도움을 기대하고 있습니까? 그 도움을 실제로 받기 위해 주님 앞에 엎드려 간구하고 있습니까? 오직 주님 안에만 우리의 희망이 있습니다. ●
단순할수록 좋아하시는 주님
-양승국 신부-
저녁 무렵 밭에 파 모종을 심다가 잠깐 사이에 산모기 떼의 집중적인 습격을 받고 며칠째 고생하고 있습니다. 너무 간지러워 ‘박박’ 긁고 나면, 잠깐 동안은 시원하지만 그 다음부터가 문제입니다. 긁고 나면 상처가 남고, 그 상처가 도져서 곪고, 또 다른 상처를 유발합니다.
너무 가려워 온몸을 비틀면서 오늘 복음을 읽다보니 나병환자 치유에 관한 복음이군요. 나병환자들의 고통이 얼마나 컸겠는가, 많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격리 외에는 특별한 치료약이 없던 시절, 매일 소멸되어가는 자신의 신체를 눈으로 확인해야 했던, 그러나 아무런 방법도 없었던 나병환자들의 고통은 정녕 끔찍했을 것입니다.
육체적인 고통이야 그런대로 참을 만 했습니다. 나병에 따른 정신적 고통은 더욱 견딜 수 없었습니다.
나병이 어떤 병입니까? 요즘 정확히 밝혀진 대로 상황에 따라 누구나 걸릴 수 있는 병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시대, 이 병은 천형으로 봤습니다. 그리고 율법은 나병에 걸린 사람을 부정한 인간으로 규정했습니다. 그래서 나병환자가 발생하면 즉시 사회로부터 격리시켰던 것입니다.
출애굽 이후 이집트 사막을 횡단할 때도 나병환자들은 천막 밖에서 머물게 했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온 이후에도 그들은 성 밖에서 살아가야 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은 물론 인간사회로부터 철저하게 격리된 채 산짐승처럼 살아갔던 그들의 고통은 필설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고초를 겪어왔던 한 나병환자가 목숨을 걸고, 마지막 실낱같은 희망을 안고 예수님께 달려옵니다. 그의 눈에는 더 이상 다른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율법을 어기는 것도 무섭지 않습니다. 그에 따른 벌도 더 이상 문제되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시선도 두렵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자비만 믿고, 한번 새 삶을 살아보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님께 달려옵니다.
자비 지극한 예수님이셨기에, 측은지심으로 충만한 예수님이셨기에, 이런 나병환자를 그냥 지나치실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도 이 세상 살아가다보면 본의 아니게 인생의 막장 앞에 서게 됩니다. 삶의 막다른 골목에서 목 놓아 울게 됩니다. 육체의 병은 물론 심각한 영혼의 불치병에 걸려 허우적거리게 됩니다.
그 순간, 오늘 나병환자의 외침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크나큰 불운이나 실패, 건강악화 앞에서 낙담하고, 좌절하고, 고민하고, 그러다 스트레스 받아 삶을 포기하는 분들이 계시는가 하면 전혀 다른 분들도 만납니다.
한번 새 삶을 살아보겠다는 간절한 바람, 그래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겠다는 강력한 원의를 가지고 최선을 다합니다. 목숨을 걸고 기도합니다. 거기에 하느님의 자비가 더해지면서 기적 같은 일이 생기는 것입니다.
주님께 단순한 방법으로 다가가십시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격식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단순할수록, 어린이 같을수록, 솔직할수록 우리를 좋아하십니다.
육체의 질병뿐만 아니라 영혼의 질병-마음의 어둠과 슬픔과 나약함, 그리고 방종한 습관 등-을 뒤로 감추지 말고 주님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그분 앞에 무릎을 꿇으십시오. 그리고 외치십시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십니다. 주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변화시켜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삶
- 이기양 신부-
복 음 : 마태 8,1-4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나병 환자들은 옆에서 쳐다보기에도 어려울 정도로 흉측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겉모습만 흉측할 뿐만 아니라 마음 또한 병이 들어서 사람들이나 사회를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많지요. 사람들 역시 나병 환자가 근처에 오는 것조차 꺼려하여 내쫓기가 일쑤였습니다. 이렇게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영적으로 따돌림을 당하고 내몰림을 당하여 철저히 소외된 사람들이 나병 환자들이지요.
바로 이 나병 환자를 오늘 예수님께서는 단 한 말씀으로 낫게 하십니다.
㰡’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㰡“(마태 8,2)
이렇게 간청하는 나병환자에게 예수님께서는 손을 대시며 말씀하십니다.
㰡’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㰡“(마태 8,3)
그러자 대뜸 나병이 깨끗이 나았으며 예수님은 그 나병 환자에게 이런 당부를 하십니다.
㰡’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㰡“(마태 8,4)
오늘 복음을 잘 보면 병의 치유 과정은 대단히 짧고, 치유가 된 이후에 나병 환자가 해야 할 일에 대한 당부의 말씀이 오히려 복잡하고 긴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치유 기적보다는 그 후에 하신 당부의 말씀에 초점을 맞추어 묵상을 하고자 합니다. 과연 예수님께서는 어떤 의도로 이런 당부들을 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첫 번째로 예수님께서는 나병 환자에게 치유된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단단히 함구령을 내리십니다. 그런데 이 함구령은 사실 별로 소용이 없었지요. 오늘 복음의 시작에서 전하듯이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자 많은 군중이 예수님의 뒤를 따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노출된 이 광경을 새삼스럽게 비밀에 부치라는 예수님의 의도는 과연 무엇일까요? 여기에서 뿐만 아니라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런 저런 기적을 행하시고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말씀을 자주하고 계십니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오해하게 될 것을 염려하신 것입니다. 참 메시아이심을 드러내실 때가 아직 아니라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참 메시아이심이 드러나는 때는 죽음에서 살아나실 때, 바로 부활 사건이 이루어질 때입니다. 그때까지 사람들은 예수님에 관하여 무수히 많은 추측을 할 뿐이지요. 예수님께서 5천 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을 행하셨을 때도 사람들의 관심은 세상 적인 가치에만 머물러 있었고, 이렇게 세상적인 가치로 예수님을 바라보며 환호하는 사람들을 꿰뚫어 보신 예수님께서는 썩어 없어질 빵에만 관심을 두지 말라고 거듭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빵만을 보려고 하지 말고 그것을 통해 하느님을 만나게 될 것을 바라신 것이지요.
두 번째로 예수님께서는 사제에게 가서 치유된 몸을 보이고 모세가 정해준 대로 예물을 드리라고 당부하십니다. 레위기 13-14장에는 나병 환자가 완쾌되었을 때, 또 하느님께로부터 은총을 받았을 때 해야 하는 규정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히 나병 환자가 완쾌되었을 때는 사제에게 가서 치유되었다는 것을 확실하게 공증 받아야 다시 사회로 돌아올 수가 있었습니다. 이 때 나병 환자는 반드시 속죄 예물과 면죄 예물을 바쳐야 했습니다. 이렇게 해야 다시 정결한 자가 되어 공동체 안으로 들어올 수가 있었던 것이지요.
예수님의 이 당부 말씀을 묵상하면 저절로 루카 복음 17장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던 길에 예수님께서는 나병 환자 열 사람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면서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를 드린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었지요. 예수님께서는
한탄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㰡’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㰡“(루카 17,17)
받은 은혜에 감사할 줄 모르면 더 큰 은혜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감사가 바로 신앙의 기초이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날 미시간주를 관광하던 유람선이 사고로 뒤집혀서 많은 사람들이 물에 빠져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물에 빠진 사람들 중에는 수영 선수가 한 사람 있었습니다. 그는 사력을 다해서 사람들을 구하기 시작하여 혼자 무려 23명이나 되는 사람들의 목숨을 구하였습니다. 사건 후에 미국의 전 매스컴에서는 이 수영 선수의 이름이 대서특필되고 사람들은 그의 놀라운 의협심에 감동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수십 년이 지난 어느 주일에 한 교회 목사님이 이 수영 선수의 이웃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예로 들어 설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마침 그 자리에는 60대가 된 예전의 그 수영 선수가 앉아 있었고 그를 알아본 교회 신자 한 사람이 목사님께 그 사실을 알려주었습니다. 목사님은 반갑게 인사를 나눈 후 그 수영 선수에게 물었습니다.
㰡’그 사건 이후에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무엇이었습니까?㰡“
그러자 예전의 수영 선수는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하였습니다.
㰡’제가 구해준 23명중 그 어느 누구 하나 저를 찾아와 고맙다고 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군요.㰡“
안타까운 일입니다.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자격 또한 없는 것입니다. 우리 본당에는 감사 드리는 삶을 살아가는 많은 신자 분들이 있습니다. 매주 주보에 실리는 감사헌금 난을 보면 많은 분들이 하느님의 은혜에 감사 드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관심 있게 살펴보면 감사 드리는 사람이 또 감사를 드린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낯선 이름이 올라오는 경우는 참 드물고 같은 이름들이 번갈아 올라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감사 드리면 또 감사 드릴 일이 생기는 것이지요. 감사는 축복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나는 얼마나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며 살아왔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 처지에 맞게 감사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마지못해서 인색하게 드리는 감사는 참된 감사가 아니라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서거나 내 위안을 위해서 하는 눈속임일 뿐입니다. 가난해서, 받은 것이 없어서 감사할 일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것은 교만한 마음이지요. 누구나 어떤 처지에서나 다 감사할 수 있습니다.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과부의 보잘 것 없는 헌금을 보시고 그 누구보다도 많이 봉헌했노라고 기뻐하셨지요. 그 후에 그 과부에게는 얼마나 많은 축복이 쏟아졌겠습니까? 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감사는 축복의 근원입니다.
이 시대에 하느님의 능력과 축복이 드러나지 못하는 이유는 감사보다는 불평과 불만을 그리고 부족함만을 늘 애타게 하느님께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주신 것에 감사 드리고, 작은 양이라도 기꺼이 내 것을 나눌 때 축복은 지속이 될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나병 환자를 고쳐 주시고 치유 이후의 나아갈 길을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십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사제에게 가서 보인 후 예물을 올려 하느님께 감사 드릴 것을 알려 주셨지요. 그것이 은총이 지속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나병 환자는 치유를 받았을 뿐 아니라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감사하며 살아가십시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은 감사할 줄 아는 삶입니다. 감사하며 살 때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은총이 얼마나 풍요로운지를 더욱 체험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깨끗함은 사랑의 기본조건이다.
-박상대신부-
산상설교의 대단원을 마치신 예수께서 하산(下山)하신다.
산상설교의 청중이었던 제자들과 군중 모두 벅찬 가슴을 억누르며 가르침의 정신과 뜻을 따라 살기로
결심했으리라 믿는다.
예수께서는 산상설교의 가르침에서 보이신 율법학자들을 능가하는 권위(7,29)를
이제 행동으로 보이실 것이다.
가르침의 놀라운 권위를 인정한 군중과 제자들은 이제 실제로 구원을 가져오는
예수님 행위의 증인들이 될 것이다.
이에 마태오는 복음서 8-9장에 10가지 이적사화를 집성해 놓았다.
마태오는 10가지 이적사화 중간 중간에 유다인의 멸망예고(8,11-12), 예수추종의 자세(8,18-22),
세리 마태오의 소명과 식사공동체(9,9-13), 그리고 단식논쟁(9,14-17)을 곁들여
기적만이 능사가 아님을 보여준다.
이는 자칫 기적을 통한 열광주의나 기적만능주의에 빠질 수도 있을 제자들과 군중을 경계하기 위함이다.
산에서 내려오신 예수님의 첫 번째 기적은 나병환자를 치유하신 것이다.
나병환자의 치유는 소경, 절름발이, 귀머거리의 치유와 죽은 사람의 소생,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의 복음수용과 함께 근본적인 메시아 사명(이사 29,18-19; 35,5-6; 61,1)을
성취시키는 표징에 속한다.
왜 그럴까 ?
우선 소경, 절름발이, 귀머거리에 대한 메시아 사명의 성취는 "다시 봄, 다시 걸음, 다시 들음"이라는
구원의 첫 단계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나병환자의 치유는 "부정함"을 씻고 "정함"을 베풀어줌으로써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세를
마련하는 것이다. 누구든지 마음의 깨끗함과 거룩함이 없이는 복음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죽은 사람의 소생은 부활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이는 죽음으로부터 생명을 창조하는
메시아의 궁극적인 사명에 속하는 것이다.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이 우선적으로 겨냥된 이유는 진복선언의 첫 번째 진복자가
가난한 사람들이고, 이들이 하느님나라를 차지할 것(5,3)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은 복음이 가장 선호하는 제1의 청중이며,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계획이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 나병환자의 치유는 이해되어야 한다.
마태오는 마르코의 원전(마르 1,40-45)을 옮기면서 이야기의 규모를 상당히 줄여버렸다.
허나 핵심적인 내용은 같다.
"주님, 주님은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2절)
예수 앞에 절을 하며 무릎을 꿇은 나병환자의 애달픈 간청이다.
이는 가족과 사회와 종교로부터, 나아가 하느님에게서까지 버림받은 소외된 자의
마지막 절규요 마지막 희망인 것이다.
예수께서 그에게 손을 대시며 "그렇게 해주마. 깨끗하게 되어라" 하고 말씀하시자
대뜸 나병이 깨끗이 나았다.(3절)
예수님의 손길은 나병환자의 부정(不淨)함을 정(淨)함으로 바꾸어 놓았다.
예수께서는 일어난 일에 대하여 엄중한 함구령을 내리셨다.
다만 율법이 정한대로(레위 14,2-32) 곧장 사제에게 가서 몸을 보이고 공적으로 인정을 받은 후
예물을 드림으로써 "깨끗하게 되었음"을 증명하라고 하셨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미루어 볼 때 사실상 이런 증명은 필요 없다.
그러나 치유 받은 자의 공적인 사회복귀를 위해 필요한 절차임을 마태오가 알려주는 것이다.
아무튼 예수님의 손길 하나가 절망에 빠진 자에게 희망을, 소외 된 자에게
화친(和親)을 다시 선물했다.
그런데 희망과 화친의 조건이 깨끗함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깨끗함이 없이는 사랑도 희망도 화목도 헛된 기대와 시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병환자 한 사람이>(마태 8,1-4)
-유광수신부-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자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랐다. 그 때에 나병 환자 한 사람이 다가와 예수님께 엎드려 절하며,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하고 말하였다.
5장에서 시작된 산상 설교를 마치신 후 이제 다시 산에서 내려오시자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랐다. 그 중에 나병환자 한 사람이 다가와 예수님께 엎드려 절하며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였다.
마태오 복음은 5장에서 7장까지 한 묶음로 산상설교에 대한 가르침을 전하고 있다. 그리고 이 가르침을 마친 후 즉시 8장에서는 여러 병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그 중에는 나병 환자, 중풍병자, 열병으로 드러누워 있는 병자 등 많은 병자들을 치유시켜 주시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왜 이런 병자들을 산상설교에 이어서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는가?
왜냐하면 그 병자들의 모습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럼 우리가 이런 병에서 치유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치유방법은 바로 앞에서 예수님이 산 위에서 가르쳐주신 산상설교의 내용을 사는 것이다.
진복팔단은 바로 우리가 이런 병에서 치유될 수 있는 방법이다. 진복팔단은 새로운 인생관, 가치관이다. 지금까지 살았던 인생관과는 전혀 다른 삶의 방법이다. 과거의 우리의 삶은 우리를 점점 병들어 가게 하는 삶이었고 결국 죽음으로 다가가게 하는 인생관이었다면 진복팔단은 지금까지 살았던 삶의 방식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인생관으로서 병든 우리를 치유시켜 줄 수 있는 방법이다.
진복팔단은 더 이상 우리가 병들지 않고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복팔단의 정신을 가르쳐 주면서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이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고 말씀하셨고 끝으로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분명 진복팔단은 정말로 우리가 행복해질 수 있는 새로운 가르침이며 나병이나 중풍병등 모든 병들을 치유시켜 주실 수 있는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우리는 이 가르침을 통해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대로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완전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처음에 "우리의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들자!"(창세 1,26)고 하셨던 하느님을 닮은 모습으로 회복되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완전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죄로 이그러진 흉칙한 모습에서 "보시니 참 좋았다."라고 하느님 자신도 감탄하셨던 본래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우리가 완전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죄로 병든 우리의 모습이 건강한 모습으로 회복되는 것이다. 우리가 완전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 또 집짐승과 모든 들짐승과 땅 위를 기어 다니는 모든 길짐승을 다스리게 하자!"고 하셨던 대로 본래의 자리와 사명으로 복권시키시는 것을 말한다.
완전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잃어버렸던 하느님을 다시 되찾는 것이요, 잃어버렸던 행복을 되찾는 것이다. 그 방법이 바로 진복팔단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즉 잃었던 행복을 되찾는 방법이다. 따라서 우리가 하루 하루 진복팔단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이 완전한 사람이 되어 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럼 오늘 예수님께 다가온 나병 환자는 어떤 병자인가?
그 당시 나병환자란 오늘날 불치의 병에 걸린 에이즈 환자 또는 암 환자와 같은 병이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치료 방법이 없는 병으로서 오직 죽음을 기다리고 살 수 밖에 없는 아주 불행하고 불쌍한 사람이다. 나병은 하느님한테 죄를 지어 그 대가로 주어진 병이기 때문에 부정한 사람이라고 공개적으로 알려진 사람이다. 따라서 다른 사람이 그 사람의 몸에 다으면 부정한 사람이 되고 또 나병 자체가 전염병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의 접촉을 금하였다.
그래서 나병 환자는 늘 가족과 친척과 이웃 사람들로부터 격리된 외딴 곳에서 홀로 살아야 했다. 몸은 썩어가서 냄새나고 형체가 뭉그러지고 떨어져 나가 보기 흉한 모습으로 변해 간다. 마치 죽은 시체의 모습이다. 즉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 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나병 환자라고 선포되면 "당신은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이오!"라는 말과 같은 말이다. 죽음만을 기다리는 사람, 죽음이라는 공포에 떨고, 죽어가고 있음으로 자기 눈으로 확인되고 있는 비참한 자신의 모습 그러면서도 어떤 치유 방법이 없이 절망 속에서 외롭고 고통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 사람이다.
오늘 날 이 나병 환자는 누구인가?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이다. 우리도 모두 이미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이다. 언제 죽을 지 날자만 정해져 있지 않을 뿐 언젠가는 반드시 죽어야 하는 죽음의 병에 걸린 사람들이다. 하루 하루 우리의 삶은 죽음을 행해 가고 있다. 그렇지만 그 누구도 이 죽음의 행진을 막지 못한다. 너도 죽을 것이고 나도 죽을 것이다. 오늘은 내 차례 내일은 네 차례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이 나병에서 치유될 수는 없을까? 어떻게 하면 죽음을 향해가고 있는 이 행진을 멈추고 생명의 길로 가게 할 수 있을 까?
그 길이 바로 진복팔단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삶이다. 진복팔단만이 우리를 살릴 수 있고 죽음의 행진을 멈추게 할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이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제 우리가 멸망의 길에서 생명으로 이끄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완덕을 추구하는 길이며 그 자세는 오늘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다가 와 엎드려 절하며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애원하듯이 겸손한 마음으로 그리고 애원하는 자세로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님께 다가 가야 한다. 우리보다도 더 우리를 깨끗하게 해주시어 죽음에서 살리고자 하시는 분이 예수님이시다.
오늘도 예수님은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깨끗하게 되는 길이 바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멸망으로 이끄는 넓은 길에서 돌아서서 생명으로 이끄는 좁은문인 진복팔단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이 죽음의 행진을 멈추고 생명으로 나아가는 삶이다.
산 위에서 가르쳐 주신 산상설교를 통해서 죽음에서 생명으로 나아가는 방법을 알아 드는이는 참으로 복된 이들이다. 그리고 그것을 주님, 주님!하고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행하는 이들은 더욱 복된 이들이다.
진복팔단의 정신을 통해서 우리에게 손을 내밀어 만지고자 하시는 예수님을 통해서 죽음의 병인 나병에서 치유 받는 이가 바로 오늘 우리 자신이기를 바란다.
첫댓글 오늘도 변함없이 말씀을 올려 주심에 감사 드립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