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동환(李東歡)
고려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1. 국역의 대본에 대하여
이 책은 17세기 우리 나라의 도학자(道學者)이자 정치가인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의 문집인 《갈암집(葛庵集)》을 국역한 것이다.
《갈암집》은 본집(本集) 29권, 별집(別集) 6권, 부록(附錄) 5권, 속집(續集) 4권 그리고 《계축추보(癸丑追補)》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국역서는 이를 완역하고, 유관 문헌인 《성유록(聖諭錄)》과 《기갑신계록(己甲辛癸錄)》까지 국역하여 첨보(添補)한 것이다.
《갈암집》은 1810년경에 처음으로 간행되었다. 그러나 저자 갈암이 숙종조(肅宗朝) 당쟁의 희생자로 명의죄인(名義罪人)이 되어 있었던 터라 당시 집권 세력에 의해 분서 훼판(焚書毁板)당하고 말았다. 그래서 이 초간본은 현재 전존되고 있는 것을 찾을 길이 없어 그 체제며 분량을 알 수가 없다. 다만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의 귀중본으로 분류되어 있는 목록 1권, 본집 19권, 별집 2권, 부록 2권으로 되어 있는 필사본 《갈암집》이 초간본의 저본(底本)이 아니었던가 추측해 볼 수 있을 따름이다.
두번째로 간행된 것은 1908년 갈암의 신원(伸寃) 문제가 최종적으로 결말이 나 관작과 시호가 회복되고 난 이듬해인 1909년이다. 이 중간본은 목록 외에 본집 29권, 별집 6권, 부록 5권의 체제로 되어 있다. 이 중간본이 간행되고 난 뒤, 1912년경으로 추정되는 시기에 속집 4권이 간행되었고, 1973년으로 추정되는 시기에 《계축추보》가 마지막으로 발간되었다.
그러니까 이 국역서의 대본은 1909년의 중간본과 그 이후의 속집 및 《계축추보》이고, 이 이외에 달리 이본(異本)이 있지 않다.
초간본에 대한 분서 훼판의 수난을 겪은 사실에 비추어 볼 때 《계축추보》까지의 현행 《갈암집》은 그 원고들이 비교적 잘 전존ㆍ인행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그 아들 밀암(密庵) 이재(李栽)가 갈암의 생전에서부터 부친의 원고를 잘 수습ㆍ정리해 왔고, 또 그 후손들이 그것을 비교적 잘 보존해 온 결과다.
그러나 애석한 것은 갈암의 특히 중요한 저작 중의 한 가지인 정설(政說) 8조 중 5조가 허물어져 없어지고 3조만 중간본에 올라 있다는 사실이다. 양적으로도 현행 중간본의 쪽으로 대략 15쪽이나 되지만 무엇보다 그 내용이 ‘민은(民隱)’에 대처하기 위한 ‘치도(治道)’라는 점에서 더욱 애석해 마지않을 일이다. 3조의 내용이나마 중간본에 올라 있어 여기에 의거하여 그 내용 전반의 성격을 알 수 있게 된 것은 불행 중 다행이라 하겠다.
이런 점에서 이 《갈암집》은 갈암의 사유(思惟)ㆍ정신(精神)의 궤적(軌跡)이 큰 결실(缺失) 없이 담겨 있는 책이라 할 만하다.
갈암에게는 문집 외에도 그 중형(仲兄)인 존재(存齋) 이휘일(李徽逸)과 함께 편(編)한 《홍범연의(洪範衍義)》를 위시하여 《어제주수도설발휘(御製舟水圖說發揮)》, 《돈전최어(惇典稡語)》, 《충절록(忠節錄)》, 《영모록(永慕錄)》, 《신편팔진도설(新編八陣圖說)》등의 편저서가 있다. - 이 중 일부는 그 현존이 확인되지 않는다. -
2. 갈암의 생애와 학파적(學派的) 위치
1) 생애
(1) 가계(家系)
갈암 이현일은 1627년(인조 5) 영해부(寧海府) 인량리(仁良里)에서 태어나서 1704년(숙종 30) 안동 임하현(臨河縣) 금양(錦陽)에서 돌아가니 향년이 78세였다. 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익승(翼昇)인데, 아호로는 갈암 외에 남악(南嶽)으로 불려지기도 했다.
갈암의 가계는 재령 이씨(載寧李氏) 영해파(寧海派)로서, 그는 영해 입향조(入鄕祖)인 현령 이애(李璦)의 현손으로, 참봉 이시명(李時明)의 셋째 아들이다. 이애는 세조ㆍ성종 연간의 경화(京華) 명환(名宦)의 한 사람이었던 이맹현(李孟賢)의 여섯째 아들로서 16세기 초 숙부 이중현(李仲賢)의 임지를 따라와 영해부의 대성(大姓) 진보 백씨(眞寶白氏)에게 장가들어 그 곳에 정착하게 된 사람이다.
영해부는 일정하게 발달한 평야를 가진 해읍(海邑)으로서 해륙 물산(海陸物産)이 풍부하여 자연 경제(自然經濟) 시대인 당시에서는 경제적 조건이 상대적으로 좋은 곳이었다. 여기에 북쪽으로 울진ㆍ삼척ㆍ강릉 지방, 남쪽으로 영덕ㆍ영일ㆍ경주 지방, 서쪽으로 청송ㆍ안동 지방으로 통하는, 동해안의 요지로서의 이점도 아울러 가지고 있었다. 이와 같은 지리적 여건은 곧 사회ㆍ문화적 수준의 상대적 선진(先進) 가능성이기도 하다. 고려 고종 이래 이 곳 토성(土姓)의 하나인 박씨(朴氏)의 성장과 중앙 정계 진출 - 위사공신(衛社功臣) 박송비(朴松庇), 좌복야(左僕射) 박득주(朴得珠), 전법판서(典法判書) 박원계(朴元桂) 등 -, 이곡(李穀)의 이 곳 김씨가(金氏家)에로의 혼취(婚娶), 그리고 불교 시대에 있어 나옹(懶翁)과 같은 명승(名僧)의 배출 같은 것이 그 가능 여건이 실현된 단적인 사례들이다. 특히 여말 이래로 이 곳의 사회ㆍ문화적 수준은 더욱 향상ㆍ확대되었고, 타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수다한 사족(士族) 가문의 공재(共在)는 사회ㆍ문화적 지위에 대한 선의의 경쟁 기풍을 빚어내어 갔다.
무과(武科)를 거쳐 함창ㆍ무안ㆍ울진 현령 및 경주 판관을 역임하다가 신병으로 가거(家居)하게 된 이애는 처음에는 경가(京家)로 돌아갈 계획이었으나 나중에는 그 곳에다 자손을 위한 기틀을 마련했는데, 경화(京華)의 안목ㆍ감각ㆍ의식에 통하고 있었던 이 이씨 가정은 그 곳의 위와 같은 지역적 특성 위에 경제력을 기반으로 하여 곧바로 그 지역의 명가(名家)로 성장해 갔다. 즉 이애의 아들 이은보(李殷輔)를 거쳐 그 아들 이함(李涵)에 이르러서는 마침내 문과(文科)에 오르게 되는 한편, 5남 2녀로 손세(孫勢)가 번성하고 그 곳 영해와 안동ㆍ예안의 사족 명가와 결인(結姻)하여 사회적 입지가 더욱 상승해 갔다. 그는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형제와도 인척간이었다. 그리고 여기에 짝하여 문화 역량도 두텁게 축적되어 갔다. 그 아호가 운악(雲嶽)인 이함이 다량의 서적을 수장한 ‘만권서루(萬卷書樓)’를 둔 사실이 이 시기 이씨 가문의 문화 역량과 그 역량 상승에의 의지를 잘 징표해 준다. 아울러 당시 이 이씨 가문이 영해 지역의 문화 역량을 선도(先導)해 가는 위치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이씨 가문 자체의 조건 위에 특히 이함의 셋째 아들, 즉 갈암의 부친인 석계(石溪) 이시명이 전취로는 예안의 광산 김씨(光山金氏) 근시재(近始齋) 김해(金垓)의 사위가 되었고, 후취로는 안동의 안동 장씨(安東張氏) 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의 사위가 된 것이 이씨 가문의 문화와 학문적 역량의 비약적 상승의 계기가 되었다. 여기에다 경당에게는 석계가 사위이기 이전에 그 제자였기도 했지만 경당의 학문 역량을 잠재적으로 전수해 가졌던 그 따님이 석계의 부인, 곧 갈암 형제의 모부인이 된 사실이 그 비약적 상승의 더욱 중요한 변수(變數)로 작용했다.
(2) 생평(生平)
갈암의 생평은 대개 다섯 시기로 나누어 보는 것이 그 이해를 보다 명확하게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첫째 시기는 출생~22세까지(1627~1648)다. 당시 교육의 기초 과정을 학습하고 학문의 기초 역량을 구축해 나갔다.
갈암에게는 외부(外傅)가 없었다. 원천적으로 외부를 둘 필요가 없었다. 모부인 장씨의 세심한 교회(敎誨)에 뒷받침 받으며 부친 석계와 중형 존재에게서 기초 과정을 수학하고 학문 역량을 길러 갔다. 9세에 《십구사략(十九史略)》, 12세에 《소학(小學)》, 13세에 《논어(論語)》를 수학했다. 11세에 석계에게 하도(河圖)ㆍ낙서(洛書)에 관해 질의하고, 12세에 천지를 표상하는 방원도(方圓圖)를 그리고, 13세에 태극에서 64괘까지의 생출(生出) 차례를 그리고 원회(元會)의 수에 관해 설명한 것 등의 사실은 이 소년기의 수학도 단순히 몽학(蒙學)으로만 한정지을 수 없는 면이 있음을 말해 준다. 뿐만 아니라 당시 대륙에서 진행되고 있는 명(明)ㆍ청(淸) 교체 과정의 정황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알고 있어서, 9세 때 형 존재가 그 포부를 물었더니 ‘원수(元帥)가 되어 오랑캐를 소탕하고 요동(遼東)을 수복하는 일’이라 답하고, 10세 때 남한산성이 포위당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창 앞에 매화나무 네 그루, 황혼 달을 향해 피었네. 이 꽃 아래에서 술을 마시고 싶었는데, 오랑캐 놈들이 성궐을 에워쌌다네.〔窓前四梅樹 開向黃昏月 欲飮花下酒 奴賊圍城闕〕”라고 시를 읊기도 했다. 그리고 14세 때에는 《손오병법(孫吳兵法)》ㆍ《무경(武經)》ㆍ《장감(將鑑)》등의 책들을 구해 읽고, 15, 6세 때에는 실제로 마을의 또래들을 모아 진법(陣法) 연습을 하기도 했다.
18세에 같은 지역의 명문 무안 박씨(務安朴氏) 집안의 규수, 곧 박의장(朴毅長)의 손녀를 부인으로 맞았다. 같은 해에 명(明) 숭정제(崇禎帝)의 순사(殉死) 소식을 듣고 통분으로 침식을 제대로 못했다. 그리고 이 해 세제(歲除)에 자경잠(自警箴) 5편, 즉 계태타(戒怠惰)ㆍ계희완(戒戲玩)ㆍ계부전(戒不專)ㆍ계언동(戒言動)ㆍ계긍대(戒矜大)를 지어 학문에의 자세를 가다듬었다.
20세에 어버이의 명으로 서울에 가서 응시, 대책(對策)으로 소과(小科)에 합격했으나 시제(試題)가 시휘(時諱)를 범했다 해서 파방(罷榜)되었다. 22세에 회시(會試)에 낙방하자 과거를 일단 단념했다. 그리고는 《주역(周易)》에 잠심하여 본의(本義)를 강구했다. 이 해 가을에 부친 석계를 배행하여 안동의 금계에 가서 외조 장경당의 제향에 참여하고, 장여헌(張旅軒)의 문인으로 당시 영남 사림의 영도자였던 학사(鶴沙) 김응조(金應祖)를 영주(榮州)의 본댁으로 방문하여 그 학덕을 체험했다.
둘째 시기는 23세~50세까지(1649~1676)다. 앞 시기에서의 다분히 과거에의 유의(留意)와는 달리, 42세 때에 서울에서의 과거에 응시한 적이 있기는 하나, 학문에 본격적으로 정진하며 현실 문제에 직접 참여하기도 하는 가운데에 자가(自家)의 지보(地步)를 이룩해 간 시기다. 주로 그의 형 존재 및 아우 항재(恒齋) 이숭일(李嵩逸)과 함께 산방(山房)ㆍ초당(草堂)으로 옮겨 다니며 학문을 강마(講磨)한 시기다. 갈암보다 8년 연장인 존재는 갈암에게 더할 수 없는 스승이었고, 바로 다음 아우로서 갈암보다 4년 연하인 항재는 또한 더할 수 없는 학반(學伴)이었다. 존재와 항재는 둘 다 학덕으로 명망이 높아 유일(遺逸)로 천거된 바 있다.
갈암은 기초 과정 수학 때부터 역학(易學), 특히 상수(象數)에 관심이 많았다. 이 시기에 들어와서도 26세에 채원정(蔡元定)의 《율려신서(律呂新書)》를 고구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 해에 중형 존재와 함께 《홍범연의(洪範衍義)》편찬을 계획, 조목(條目)을 설정했다. 이는 갈암 형제의 경세 의지(經世意志)를 보여 주는 사실이며 그들의 상수학에의 관심과도 무관하지 않을 터다.
26세에는 형 존재 및 아우 항재와 함께 퇴계(退溪)가 노닐던 청량산(淸涼山)에 노닐고, 27세에는 회재(晦齋)를 봉향하는 옥산서원(玉山書院)을 봉심(奉審)하고 경주의 고적들을 유관(遊觀)하였다. 선현(先賢)과 민족사의 유적(遺跡)에의 체험을 위해서였을 것이다.
27세에 부친 석계가 병자호란 이후 영해로부터 피지(避地)해 간 영해 서쪽 석보촌(石保村)으로부터 다시 더 깊은 산간지인 영양현(英陽縣) 수비(首比)로 피지해 가자 여기에 따라가 갈암초당(葛庵草堂)을 짓고 거주했다. 석계의 이 피지는 당시 효종의 북벌 계획 움직임과 무관하지 않았던 것 같다. 갈암은 부친을 따라 심협(深峽)으로 피지는 했을망정 항청복명(抗淸復明)에의 의지는 강렬했다. 32세에 홍정양간의유소후서(洪鄭兩諫議遺疏後敍)와 갈암기(葛庵記)를 써서 이러한 의지를 드러내 보이고, 38세에는 팔진도(八陣圖)를 고구하고, 41세에는 망명 길에 나섰다가 제주도에 표박한 명(明) 유민(遺民) 근 100명을 조정이 연경(燕京)으로 압송하려 하자 동지들과 창의(倡義)하여 궐문(闕門)에 나아가 그들에 대한 보호조처를 호소하려다 실패하기도 했다.
32세에 존재, 항재와 함께 도산서원(陶山書院)에서의 《퇴계집(退溪集)》강회(講會)에 참석하여 도산 동주(陶山洞主) 김렴(金)의 청에 의하여 《퇴계집》을 강설하여 발명(發明)한 바가 많았다. 40세에는 복제(服制) 시비에 관한 영남유소(嶺南儒疏)의 소본(疏本)인 변대왕대비위선왕복제소(辯大王大妃爲先王服制疏)를 지었다. 비록 택소(擇疏)는 되지 않았지만 목재(木齋) 홍여하(洪汝河)가 찬탄한 명소(名疏)다. 41세에는 당시 영남 사림을 주도하고 있던 선배격인 홍목재와 금옹(錦翁) 김학배(金學培)와 안동 금계의 경광서재(鏡光書齋)에서 회동했다. 이 시기 영남 사림에서의 갈암의 입지가 상승 일로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38세 무렵의 《주자대전(朱子大全)》의 탐독, 자기화(自己化)에 의한 학문 역량의 큰 진전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42세에 어버이의 명으로 서울에서의 과거에 응시하고 귀로에 당시 경기 남인(京畿南人)의 원로인 용주(龍洲) 조경(趙絅)을 포천으로 방문하였다. 이것이 영남 남인 갈암이 경기 남인 사회에 무게 있게 알려지게 되는 계기가 된 것 같다. 이 해에 갈암은 당시의 심각한 민생고를 해결하기 위한 방략(方略) 8가지를 논의한 정설(政說)을 저술했다.
46세에 중형 존재와 부인 박씨의 상(喪)을 당하고, 이듬해에는 김금옹을 곡(哭)하고, 그 이듬해에는 부친 석계의 상을 당하고, 또 홍목재를 곡했다. 홍목재와 김금옹의 사거(死去)는 영남 사림 내에서의 갈암의 입지를 강화시켜 그 구심점이 되게 했다.
셋째 시기는 51세~62세까지(1677~1688)다. 정치 현실에서의 자기 실현을 시험하면서 학문의 완성을 지향해 가던 시기다.
48세 때 현종이 서거하고 숙종이 즉위하면서 일어난 이른바 갑인예송(甲寅禮訟)에 따른 서인(西人)ㆍ남인(南人) 사이의 정권 교체는 갈암으로 하여금 유일(遺逸)로 천거되게 했으나 거상중이었으므로 실효는 없었다. 그래서 본격적인 출사는 51세에 명유(名儒)로 대접받아 장악원 주부(掌樂院主簿)로 초수(超授)되면서였다. 입도(入都)하자 경기 남인의 영도자 권대운(權大運)은 “그 사람됨이 옥 같다.”고 칭찬하고, 허목(許穆)은 왕에게 “근일에 이현일을 보니 참 유자〔眞儒者〕이더이다. 역학(易學)에 더욱 조예가 깊다고 하니 장래의 경연(經筵)에는 이 사람이 없어서는 안 되겠습니다.”라고 칭도했다. 그리고 갈암 자신도 사헌부 지평으로 임명되자, ‘정학(正學)을 밝혀 대본(大本)을 세울 것’, ‘기강을 진작시켜 풍속을 숙정(肅正)할 것’, ‘공도(公道)를 넓혀 왕법을 바로잡을 것’, ‘충간(忠諫)을 받아들여 막혀 가려진 것을 제거할 것’, ‘민정을 살펴서 실질적 혜택〔實惠〕을 베풀 것’ 등 다섯 가지 일을 진언하며 의욕적이었다. 그러나 이 출사는 그의 도학자적 명절관(名節觀)이 좌절당하고 무연(憮然)한 변만 당하고 끝났다. 즉 경기 남인 내의 이옥(李沃)의 동생 이발(李浡)과 유명천(柳命天)과의 사이에 일어난, 서로 사사로운 비밀을 폭로하는 내홍(內鬨)에 대해 갈암이 사헌부 지평으로서, 그들의 작태가 사대부의 체통을 손상하고 진신(搢紳)의 큰 수치가 되는 일이라 비판하며 모두 사판(仕版)에서 삭제하기를 주장하다 공박을 받고 결과적으로 체직(遞職)되고 말았다.
벼슬에서 물러나 있으면서 53세에 《어제주수도설발휘(御製舟水圖說發揮)》를 편찬해 바쳤다. 숙종이 즉위 초에 《예기(禮記)》에 나오는, 임금과 백성과의 관계를 물에 의해 뜨기도 하지만 물에 의해 뒤엎어지기도 하는 배와 그 물과의 관계로 비유한 것을 가지고 그림을 그리고 설(說)을 지은 것에 대해 유관 자료를 동원하여 부연한 것이다. 갈암의 경세에의 소망을 징표해 주는 일의 일단이다.
54세에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이 일어나 또 정권이 바뀌었다. 57세에 응지 진언(應旨進言)이기는 하나 집권 세력의 적대(敵對) 인사로서 초야에 있으면서 당시 집권 세력의 부조리를 대담하게 비판하자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이 호역죄(護逆罪)로 논하기를 청하기까지 했다. 갈암의, 위무(威武)에 굴하지 않는 도학자로서의 드높은 자기 긍지(自己矜持)에 찬 주체성의 발현이다.
60세에 《홍범연의》가 완성되었다. 62세에 우담(愚潭) 정시한(丁時翰)의 내방을 받았다. 그리고 이 해에 유명한 율곡이씨논사단칠정서변(栗谷李氏論四端七情書辨)을 발표했다.
넷째 시기는 63세~67세까지(1689~1693)의 5년간으로서 갈암 생애에 있어 대전환의 시기다. 즉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그가 남인 정권의 산림(山林)으로 징소(徵召)되어 경세의 포부를 펼치고자 진력한 시기이다. 그가 산림으로 징소된 것은 당시 영남 사림의 영수(領袖)였던 그가 허목ㆍ윤휴(尹鑴) 사거(死去) 이후 그 지위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63세인 숙종 15년 2월에 성균관 사업(成均館司業)에 단망(單望)으로 제수되어 그 해에 사헌부 장령, 이조 참의, 성균관 좨주(成均館祭酒), 예조 참판, 사헌부 대사헌으로 쾌속 승진한 뒤 이듬해 64세에 이조 참판, 그리고 67세에 이조 판서에 올랐다.
그러나 이러한 표면적인 순조로움과 영광의 이면에는 고민과 갈등이 적지 않았다. 64세에 진대본급무소(陳大本急務疏), 65세에 진군덕시무육조소(進君德時務六條疏), 67세에 논진덕정속육재차(論進德正俗育才箚) 등과 같은 경세 방략(經世方略)을 체계적으로 피력한 무게 있는 소차(疏箚)를 위시하여 그때 그때마다 소차를 올리고 경연을 통해 건의를 했으나 실효 있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래서 입조(入朝)와 환향(還鄕)을 되풀이해 마지않았다. 여기에는 숙종의 표면적으로 융숭한 예우와는 다른 성의 부족, 집권 경기 남인들의 갈암에 대한 존봉(尊奉)의 이면에 움직이고 있는, 실권으로부터의 배제 책략이 그 주된 원인으로 작용했다. 이런 중에 갈암은 64세에 유형원(柳馨遠)의 《반계수록(磻溪隨錄)》의 서문을 써서 이 책이 가진 가치와 의의를 극구 칭양하고, 작자 반계가 그 경세 방략을 펴볼 기회도 가져 보지 못한 채 죽은 것을 몹시 애석해 했다.
다섯째 시기는 68세~78세까지(1694~1704)로 유배ㆍ강학ㆍ논변(論辯)ㆍ저술의 시기다.
68세인 숙종 20년 4월에 갑술환국(甲戌換局)이 일어나자 그 즉시 사헌부의 계청에 의해 갈암은 함경도의 홍원(洪原)으로 유배되었다가, 5월에 서울로 되잡혀 와서 신문을 받고 난 뒤 종성(鍾城)으로 이배(移配)되어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사태가 이렇게까지 된 것은 숙종 15년 재이(災異)로 인한 구언(求言)에 응한 상소에서 당시 폐비(廢妃)되어 사가(私家)에 내쳐져 있는 인현왕후(仁顯王后)를 별궁(別宮)에 거처케 하여 보호해야 한다는 내용의 소문(疏文)에 있는 몇 구절이 이 때에 와서 인현왕후를 모해(謀害) 하고자 한 것이라고 꼬투리 잡혀 마침내 ‘명의죄인(名義罪人)’으로 낙인이 찍혔기 때문이다. 상소 당시 숙종이 폐비를 두호(斗護)하는 어떠한 언론도 역률로 다스리겠다고 천명해 놓은 삼엄한 분위기였는데도 갈암이 과감하게 온당한 대우를 하도록 호소했던 것이다.
종성에서 3년 유배 생활을 하는 동안 그 곳 학자들과 도학서(道學書)를 강하는 한편으로 69세에 《수주관규록(愁州管窺錄)》, 70세에 독김천휴논이대유이기성정도설변(讀金天休論李大柔理氣性情圖說辨), 71세에 《돈전최어(惇典稡語)》, 권학사사범의의(權學士士範疑義) 등을 편술하였다. 특히 《수주관규록》은 주로 선배들의 도학에 관한 견해들의 문제점을 비판한 것으로 갈암 학문의 원숙한 경지를 보여 주고 있다.
71세 때는 5월에 호남의 광양(光陽)으로 이배되었다가, 72세 때 3월에 섬진강(蟾津江) 갈은리(葛隱里)로 옮겨가 있던 중 아우 항재 이숭일의 부음을 받았다. 73세 2월에 방귀전리(放歸田里)의 명이 있어 드디어 섬진강을 건너 진주 지경의 악양동(岳陽洞)으로 들어와 있었는데 대계(臺啓)가 방귀전리의 명을 환수(還收)할 것을 청하였다. 74세 2월에 대계가 완전 정지되어 3월 고향에 돌아오는 길에 함안ㆍ밀양의 종인(宗人)들과 회합하고 선산에 성묘한 뒤 4월에 안동 임하현의 금소역(琴詔驛)에 우거하게 되었다. 75세 5월에 완전 석방〔全釋〕의 명이 있었으나 대간(臺諫)의 계청으로 환수되고, 심지어는 극변(極邊)의 위리안치가 계청되기도 하다가 76세 3월에 비로소 계청이 정지되었다.
이렇게 이배(移配)와 대명(待命)의 불안한 상황 속에 이곳 저곳 옮겨 거주 하면서도 갈암은 학문 논변을 마지않았다. 그래서 진주 지경에 있던 73세에 율곡의 사칠이기설(四七理氣說)에 승복하고 있었던 신익황(申益愰)과의 논변이 시작되어 두어 해 동안 지속됐고, 안동의 금소역에 정착한 뒤인 75세에는 우담(愚潭) 정시한(丁時翰)과 사칠이기에 대한 약간의 견해차로 두어 해 동안을 논변했다. 그리고 74세 가을에는 고산(孤山) 이유장(李惟樟)의 내방을 받았다.
특히 금소에 정착한 이후로는 후학들과의 강학에 더욱 주력하고, 《서애선생연보(西厓先生年譜)》의 산정(刪定), 《퇴도선생언행통록(退陶先生言行通錄)》을 편찬하기 위한 그 편목(篇目)의 설정, 《존주록(尊周錄)》의 편성에 힘을 써서 유림(儒林)의 중요 문헌을 정비했다. 어쩌면 자신의 죽음이 임박해 옴을 예감하고서 한 일일 법도 하다.
운명하기 두어 달쯤 앞서 갈암은 거처의 벽에다 다음과 같은 시 한 수를 썼다. “덧없는 인간 세상, 어느덧 팔십 년이 흘렀네. 평생토록 한 일이 무엇이더냐, 하늘에 부끄럽지 않고자 하였을 뿐.〔草草人間世 居然八十年 生平何所事 要不愧皇天〕”
사후에도 전석(全釋)ㆍ복관(復官)의 명이 몇 차례 번복되다가 융희 2년(1908)에야 관작이 회복되고 시호가 내려졌다.
2) 학파적 위치
식산(息山) 이만부(李萬敷)는 갈암의 영남 유림 내 지위가 성장할 즈음의 퇴계학파의 내부 분파를 다음과 같이 기록한 적이 있다.
식산의 이 기록에 의하면 남명학파(南冥學派)가 해체된 뒤의 17세기 영남학파는 안동ㆍ상주의 서애 계열, 성주 이하의 한강 계열, 안동의 학봉 계열, 그리고 예안의 월천 계열로 압축된다. 갈암은 이 네 계열 중 학봉 계열에 속하고, 따라서 갈암의 학통(學統)이 ‘퇴계 이황 - 학봉 김성일 - 경당 장흥효 - (석계 이시명) - 갈암 이현일’로 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갈암의 학파적 위치는 이 학봉 학통에 한정되어 파악될 수 없다.
여기에서 우리는 ‘학통’과 ‘학파’의 개념을 분명히 구별할 필요가 있다. 학파는 다른 학문적 집단과의 횡적 관계에서 학문적 성향의 변별성에 의해 규정되는 개념이고, 학통은 다른 학문적 개체와의 종적 관계에서 학문적 성향의 공질성(共質性)에 의해 규정되는 개념이다. 이 논리에 입각하면 위의 네 계열은 어디까지나 통틀어 퇴계학파이고, 이 학파 안의 네 개의 학통일 뿐이라는 말이다. 퇴계의 학문ㆍ사상의 계승에 있어 위의 네 학통들 사이에는 서로를 하나의 학파로 변별시켜 줄 만큼 학문적으로 일정하게 배타적인 고유성이 인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요컨대 갈암의 학파적 위치는 학봉 학통적 위치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학통을 초월하는 위상에 놓여 있다는 말이다. 그것은 다음 두 가지 점에서다.
첫째, 갈암은 퇴계 이후 퇴계의 학문ㆍ사상을 적극적으로 계승하여 정련(精鍊)하고 발전시켜 같은 학파 선배들이 일찍이 이룩하지 못한 업적을 이룩한 최초의 학자라는 점이다. 사실 갈암이 출현하기 이전과 이후 퇴계학파의 학파적 실질에 있어서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학문적 생산성과 학파적 정체성에 있어 이전이 상대적으로 소극적이었다면 갈암은 매우 적극적이었다. 사실 퇴계학파는 갈암의 업적과 활동에 힘입어 그 학파적 고유성이 확고하게 수립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물론 그가 퇴계의 주리론(主理論)을 역시 퇴계의 이기호발(理氣互發)과 사칠분대(四七分對)의 논리틀에 입각하여 그 강화의 명제(命題)를 철저히 관철시킨 결과에 주로 의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퇴계 계승의 업적은 심성론에만 그치지 않는다. 그의 경세의 비전도 변화된 시대 여건에 대응한, 퇴계의 그것으로부터의 연변(演變)ㆍ발전의 형태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퇴계학파 내에서의 그의 인적(人的) 관계의 총회성(總會性)이다. 퇴계학파도 그 제 1 대 제자들 사이에 이미 간극이 발생한 경우가 있었지만 그 재전ㆍ삼전 제자 세대로 내려가면서 분화가 보다 확실해지고 계파간의 우위(優位) 경쟁도 진행되어 갔다. 그래서 갈암의 시대에 이르러 이미 후일 병호시비(屛虎是非)로 발전될 조짐이 잉태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갈암은 계파를 넘어 학파의 사림(士林)을 광범위하게 결집(結集)하여 학파의 구심점이 되고 영수(領袖)로 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에는 물론 그의 외조 장경당이 학봉뿐 아니라 서애ㆍ한강과도 일정한 사제 관계였다는, 상대적으로 유리한 조건이 없지는 않았으나, 앞에서 본 한강ㆍ여헌 계열의 김응조, 서애 계열의 홍여하 등과의 관계를 미루어 단적으로 알 수 있듯이 역시 그 자신의 역량에 의해서다.
그의 이 학파적 위치의 성립에는 그 자신의 문도 또한 340여 명의 성세(盛勢)였다는 사실도 물론 무관할 수 없다.
퇴계학파 = 영남학파에서의 갈암의 학파적 위치의 이러한 성취는 마침내 학봉 학통이 학파의 주류의 위상을 점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퇴계 = 영남학파는 학통들의 경쟁적 공존에 의한 다양태(多樣態)의 발전보다는 주리사유(主理思惟)의 정밀화와 그 신념의 관철 과정을 역사 위에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갈암에 의한 퇴계학파의 학파적 고유성의 확고화는 한편으로는 퇴계의, 학문ㆍ사상사적 위상의 상대화(相對化)라는 역작용을 낳았다. 여기에는 물론 학문외적이지만 학문과 밀접히 연계되어 있었던 당쟁의 작용이 적지 않았지만, 퇴계학파로서는 실(失)이 아닐 수 없다.
아울러 언급할 것은 갈암이 속한 학통의 전개에 있어서 중요하게 유의되어야 할 두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다. 앞의 그의 생평에서 이미 언급된 바 있는 그의 중형인 존재 이휘일과 모부인인 장씨 부인이 그들이다. 사실 갈암의 학문의 생육(生育)은 존재라는 요람, 그리고 장씨 부인이라는 잠재 태반(潛在胎盤)이 있고서야 그렇게 출중할 수 있었다. 물론 장씨 부인의 경우 현재적(顯在的)인 지적(知的) 활동을 통해 갈암에게 영향을 주었으리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지적으로 일정한 온축이 있었을 뿐 아니라 그 부친 경당을 통해 퇴계의 심학(心學)을 체득하였던 터여서 갈암의 퇴계학 계승에 유력한 매개로 작용했던 것은 의심없는 사실이다.
3. 갈암집 성립의 역사 공간(歷史空間)과 그 내용 성향
인간의 사위(事爲)치고 역사의 제약(制約)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이 어디에 있을까마는 특히 언어 행위(言語行爲)에 의해 이루어지는 저작물은 그 제약을 받는 정도가 보다 높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저작물이 성립되어 나온 역사 공간의 정황과의 조응(照應)에서야 그 저작물은 자기 속을 보다 밝게 드러내 보인다. 특히 행간에 숨겨져 있는 것까지 간취(看取)하고자 할 때에 이 조응은 가위 필수적이다.
《갈암집》이 성립되어 나온 역사 공간, 즉 갈암이 재세했던 17세기 역사 공간은 임진ㆍ병자 양란 이후 왕조의 중세적(中世的) 체제 전반이 동요ㆍ이완(弛緩)되어 가는 추세와 이 추세를 거슬러 체제를 다시 안정ㆍ수렴(收斂)시키고자 하는 작위(作爲), 즉 변화와 지속의 두 지향이 서로 역방향을 취해 길항(拮抗)하는 모순의 공간이었다. 좀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이루어져 지속되던 것이 갖기 마련인 관성(慣性)에다 안정ㆍ수렴을 위한 작위의 힘이 보태져 변화의 힘보다는 아직은 지속의 힘이 더 도도한 그러한 길항의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갈암집》의 내용 및 그 성향도 대체로 여기에 대응되고 있다. 다만 여기서 말하는 변화와 지속의 두 지향에 대해 가치론적인 속단을 개입시키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 변화라고 해서 모두가 다 그대로 가치를 가지는 것은 아니며, 지속이라고 해서 모두 다 역리(逆理)는 아니기 때문이다.
갈암은 일차적으로는 도학자다. 그러므로 그의 문집 내용 중에서 비중이 가장 큰 부분은 역시 도학 관련 문자일 수밖에 없다. 특히 퇴계의 주리적(主理的) 사단칠정(四端七情)ㆍ이기(理氣)ㆍ인심도심(人心道心)에 관한 이론을 퇴계의 논리틀에 입각하여 강화ㆍ심화시킨 것이 《갈암집》의 핵심적 내용 및 성향이다. 그의 주리 논리는 도학적 문제에 관한 직접적 내용에 대해서만 운용되는 데에 그치지 않는다. 예학(禮學)은 말할 것도 없고 정치ㆍ사회 등에 관한 문제의 논의에서도 보이지 않는 가운데에 하나의 원리로 작동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퇴계의 주리론에 이미 그러한 성향이 함축되어 있었거니와 이(理)의 능동성이 강화된 갈암에게서의 주리론은 세계에 대한 인식 논리(認識論理)로서의 성격이 더욱 감퇴(減退)되는 반면에 세계에 대응하는 신념 논리(信念論理)로서의 성격이 더욱 강화되었다. 즉 천리(天理)라는 도덕 원리의, 무위 정적(無爲靜寂)한 초월적 임재(臨在)보다는 즉현실적(卽現實的) 유위 능동력(有爲能動力)에 대한 신념이다.
그러니까 갈암은 당시 체제의 동요ㆍ이완 현상, 그리고 이러한 현상의 근원의 성격을 갖는, 호청(胡淸)의 군림과 그 아래에서의 지배계급 내부의 쟁투ㆍ부조리 등의 역사 상황을 원천적으로 도덕 원리의 무력화로 인한 소치로 인식하고, 이(理) 능동성 강화에 기초하여 현실에서의 도덕 원리의 유위적 작동(有爲的作動)을 진작(振作)시킴으로써 당시의 역사 상황에 대응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신념은 자연히 율곡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이 이를 무력한 피동적(被動的) 존재로 인식케 하여 도덕 원리의 무력화를 조장할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고 보아 배척하게 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문헌으로서의 《갈암집》의 최대 특성은 퇴계 주리론의 17세기 상황적 체질 강화의 구현장(具現場)이라고 할 수 있다.
갈암은 도학자로서의 자기 정체성에 못지않는 비중으로 경세가(經世家)로서의 정체성을 아울러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갈암집》의 내용 중에는 소(疏)ㆍ차(箚)ㆍ경연강의(經筵講義)ㆍ설(說) 등의 형식을 통해 경세 방략ㆍ시무책(時務策) 등을 피력(披瀝)해 놓은 것이 많다.
경세가로서의 갈암은 분명히 도학적 경세가다. 그래서 그의 경세론 중에는 인주 일심(人主一心)이 만화(萬化)의 근원이라는 등 전통적인 도학적 경세 논리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전통적인 도학적 경세 논리의 중심 주제인 도덕적 이상주의의 실현 비전이 보다 더 즉현실화(卽現實化)의 지평(地平)으로 나아간 자취가 뚜렷하다. 주리론이 비현실적 성향을 갖는다는 종래의 통념 - 이 통념은 주로 속류(俗類) 유물론(唯物論)에 바탕하여 형성된 것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 과는 다르다.
그의 경세론의 이러한 성향은 그가 42세경, 당시 심각한 민생고를 목격하고 그 해결 방략을 제시한 정설(政說)에 특히 선명하게 표출되어 있다. 유감스럽게도 8가지 방략〔治道八事〕중 3가지만 남아 전하지만, 사창제(社倉制) 강화를 주내용으로 한 실혜론(實惠論), 전부부정(田賦不正)을 해결하기 위한 균전론(均田論), 군제(軍制)의 불합리를 개혁하기 위한 군제론을 통해 보건대 그의 경세론의 즉현실적 지평의 최선단(最先端)은 바로 실학파의 경세치용계(經世致用系)의 그것이다. 그의 이 경세론이 유형원의 《반계수록》과 같은 시기에 제시된 점을 우리는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호란(胡亂)을 당한 지 오래지 않은 시기라 어쩌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겠지만, 갈암이 그의 경세관에서 무(武)를 문(文)과 대등하게 인식하고, 그 시무책에서는 국방 문제에 매우 중점을 두고 있는 점도 이 즉현실성의 발현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리고 소ㆍ차 중에 피력된 경세의 방략 또는 방안 가운데에는 외양(外樣)으로는 도학적 입장의 일반적 논리를 보이지만 당시의 현실 문맥(現實文脈)이 행간에 은장(隱藏)되어 있는 경우 또한 적지 않다. 이를테면 공도(公道)를 넓혀 왕법(王法)을 바로 세우라는 명제 같은 경우 도학 경세의 일반론이면서 실은 당시 정치 상황과 관련하여 매우 강한 현실성을 함축하고 있다. 즉 경화(京華)의 훈척(勳戚)ㆍ벌열(閥閱)의 농단(壟斷)으로 권력 체제의 변방으로 밀려나 있었던 정치 세력들의 입장을 함축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제 《갈암집》의 내용 및 그 성향을 제약한, 17세기 역사 상황의 보다 구체적 국면과 관련하여 논의를 진전시켜 보자.
이 시대를 가장 무겁게 제약한 모순은 남한산성의 치욕 및 청(淸)과의 은비(隱祕) 속의 잠재적, 그리고 힘겨운 대치(對峙)일 터다. 이 ‘대치’는 물론 다분히 우리 민족만의 주관 의식, 주관 자세에서의 상황이다. 앞의 갈암의 생평에서 이미 드러난 바이지만 갈암의 의식에도 항청복명(抗淸復明)이 무겁게 과제화(課題化)되어 일생 동안 제약을 가했다. 그의 유년기의 항청복명 포부와 작고하기 1년 전의 《존주록(尊周錄)》편차를 연결해 보면 그의 문집의 성립에 일관되게 가해진 중요한 제약의 하나가 무엇이었던가가 자명해진다. 여기에다 아호의 ‘갈(葛)’ 자에 ‘흥복한실(興復漢室)’을 도모한 제갈량(諸葛亮)을 함축해 넣고, 해배(解配)되어 돌아온 그에게 일가들이 베푼 위로연 석상에서 출사표(出師表)를 노래한 사실을 고려하면 항청복명에 대한 그의 생애의 집념의 정도를 짐작하기에 어렵지 않다. 무(武)와 군략(軍略) 문제에 열성적이었던 것도 모두 이 집념의 표출이다.
그의 북벌론(北伐論)은 청 나라 내부 사정을 지나치게 자가(自家) 희망적으로 이해하는 면은 있으나, 어떠한 정략성(政略性)이 없음은 분명하다. 사실 갈암은 북벌론을 정략화할 수 있는 정치적 위치에 있지도 않았다. 요컨대 자신이 인간의 보편가치로 믿는 의리(義理)에 대한 강한 신념이 그 기본 동기다. 이런 점에서 그의 북벌론은 그의 주리론 강화의 명제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다음으로는 당쟁(黨爭) 모순이다. 이 점 역시 그의 생평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그의 문집의 성립에 가해진 비중 있는 제약 조건의 하나다. 무엇보다 그 자신의 드높은 영광도, 참담한 치욕도 모두 당쟁에 관련되어 있지 않았던가. 그 시대 많은 지식인들이 그러했듯이 말이다.
그런데 당쟁 당사자들의 의식에는 대개는 당쟁이 당쟁으로서가 아니라 선(善)ㆍ의(義)ㆍ군자(君子)의 악(惡)ㆍ불의(不義)ㆍ소인(小人)에 대한 투쟁으로 의식되었으므로, 문집과 같은, 주로 자기의 주관적 생각이 표출되는 저작의 내용 성향이 자연히 그런 방향에서 제약됨은 말할 것도 없다. 갈암의 경우도 물론 여기에서 예외는 아니다. 그의 유명한 율곡이씨논사단칠정서변(栗谷李氏論四端七情書辨)은 자신의 주관 의식에서는 물론 진리ㆍ진실의 천명이다. 그러나 당시의 당쟁적 여건과 결코 무관할 수 없다. 사칠ㆍ이기 문제에 대한 그의 논의 곳곳에는 실은 이미 이데올로기 투쟁적 성향이 농후하게 발현되어 있다.
앞의 그의 생평에서 논급한 바 있지만 당쟁 모순과 관련하여 그의 문집에 은미(隱微)하거나 우회적인 통로로써나 무시할 수 없는 영향을 가한 것은 경기 남인과 그와의 정치적 관계다. 첫 출사(出仕) 때에 같은 당인(黨人)들의 비열성(鄙劣性)에 분개했다가 그의 순직성(純直性)만 상처받고, 두번째 출사에서는 그를 산림(山林)으로 앉힘으로써 영남 남인을 정치적 지원세력으로 이끌어들이면서 정작 정치 실권으로부터는 그를 따돌리려는, 권대운(權大運)ㆍ목내선(睦來善) 등의 경기 남인들과 갈등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그 관계의 내면 실상이다. 그의 선거제(選擧制) 개혁, 향약(鄕約) 실천 등의 경세 방략이 좌절된 것도 경기 남인들의 다분히 의도적인 무성의 내지는 저지 때문인 듯하다.
다음으로는 명분론(名分論)의 날로 더해 가는 발달이다. 명분론은 원래 사회적 동물로서의 인간의 사회적 조직이 요구하는 질서 부지(扶持)의 근거다. 그러나 이것이 인간성을 압제(壓制)하는 데 이르면 질서 혼란이라는 모순에 대응하기 위한 논리로서의 명분론이 도리어 새로운 모순으로 전이(轉移)된다. 17세기 역사 공간에는 이러한 추세가 강하게 흐르고 있었다. 주로 임진ㆍ병자 양란 이후 신분제의 동요ㆍ이완과 여기에 추동(推動)된 체제 전반의 동요ㆍ이완 조짐에 지배층적 입장에서 대응하고자 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것이다.
이 명분론 발달의 실체적 구현이 바로 이 시기 예학(禮學)ㆍ예설(禮說)의 호한(浩瀚)한 산출이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이 시기에 이르러서의 도학의 이데올로기적 공고화(鞏固化) 과정의 한 표현에 다름 아니다. 갈암의 문집에도 적잖이 들어 있는 예학 관련 논의들도 역사적 입장에서는 일단은 이러한 시각으로써의 이해 대상이다.
그러나 시각을 달리해서 관조(觀照)해 보면 인간 삶의 존재론적(存在論的) 내포(內包)의 풍부화 추구라는 적극적 의의가 인정될 수 있는 내용이기도 하다. 인간의 사위(事爲)를 보다 명료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역사적 시각(視角)을 유효하게 운용할 것이 요구되나 끝내 여기서만 머물면 사위의 역사성의 궁극에 담겨 있는 천인지제(天人之際)의 이치를 놓치게 될 수 있다. 이렇게 역사적 시각으로서의 이해를 넘어 있는 지평을 전망하고자 하는 시각이 필요한 것은 《갈암집》의 내용에서 비단 이 예설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4. 갈암집의 내용
책의 첫 부분에 있는 205수의 시(詩)는 형제ㆍ지구(知舊)ㆍ문인(門人)들과의 창수(唱酬), 기행ㆍ영회(詠懷)의 작품들이 비교적 많은 편인데, 전반적으로 관념적 진술성(陳述性)이 농후하다.
소ㆍ차ㆍ헌의(獻議) 등이 138편이나 되는데, 정치ㆍ사회ㆍ경제ㆍ국방ㆍ외교ㆍ예제(禮制) 등 치국(治國)에 관련되는 문제 전반에 두루 걸쳐 의견을 개진한 것이다. 의논대왕대비복제소(擬論大王大妃服制疏)는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제에 관한 송시열(宋時烈)의 예설뿐 아니라 윤휴(尹鑴)ㆍ윤선도(尹善道) 같은 남인 예설의 미흡한 곳까지 비판한, 영남 유소(領南儒疏)의 소본(疏本)의 하나로 지어진 것이다. 사면지평겸진오조소(辭免持平兼陳五條疏)는 첫 출사 때 올린 것으로 그 5조의 면목은 앞의 그의 생평에 이미 제시된 바 있다. 사공조참의잉진소회소(辭工曹參議仍陳所懷疏)와 인재이언사소(因災異言事疏)는 폐출되어 있는 인현왕후(仁顯王后)의 보호를 호소한 소다. 후자에 들어 있는 “폐비 민씨가 후비의 법도를 따르지 아니하여 스스로 하늘〔남편〕에게서 끊어졌다.〔廢妃閔氏 不循壼儀 自絶于天〕”, “방위를 베풀어 금호(禁護)를 삼가히 해야 한다.〔爲設防衛 謹其糾禁〕”는 구절들이 갑술환국 직후 민비를 모해하고자 하는 의도가 들어 있다는 방향으로 해석되어 명의죄인(名義罪人)으로 낙인찍혀 9년의 유배 생활을 하고, 사후 200여 년 동안 복관(復官)과 이의 환수를 4ㆍ5차례나 되풀이하는 수난을 겪었다. 진군덕시무육조소(進君德時務六條疏)는 임금이 힘쓸 진덕(進德)ㆍ입지(立志)ㆍ통변(通變)ㆍ택임(擇任)ㆍ육재(育材)ㆍ석시(惜時) 등 6가지 일을 진달한 것이다. 경연강의(經筵講義)에서는 주로 《주역(周易)》ㆍ《대학연의(大學衍義)》등이 강의되었다.
문집 중 분량이 특히 많은 360여 편의 서(書)는 150인 가량의 사우(師友)ㆍ문인(門人)ㆍ자손들에게 준 편지로, 예설(禮說)ㆍ심성설(心性說)ㆍ시사(時事)ㆍ사사(私事) 등이 주내용을 이루고 있다. 권두경(權斗經)ㆍ황수일(黃壽一)ㆍ정만양(鄭萬陽) 등과 왕복한 예설, 정시한(丁時翰)ㆍ이동완(李東完)ㆍ신익황(申益愰)ㆍ아우 이숭일(李崇逸) 등과 왕복한 심성설이 특히 두드러진다.
잡저(雜著) 중의 율곡이씨논사단칠정서변(栗谷李氏論四端七情書辨)은 서인(西人) 집권하의 62세 때 저술한 것으로, 율곡이 우계(牛溪) 성혼(成渾)과 사단 칠정 문제에 대해 왕복한 서간의 내용 중 19조목을 뽑아 내어 비판한 것이 그 내용이다. 본문에 앞서 후생 율곡이 선배 퇴계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비판한 사실을 묵과할 수 없고, 율곡의 설이 기호 지방에 성행하는 것이 우려되어 저술한다는 동기가 서술되어 있다. 율곡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ㆍ칠정사단설(七情四端說) 등을 반박하고, 퇴계의 이기호발설을 지지하면서 이유동정설(理有動靜說)ㆍ이기이물설(理氣二物說)을 주장한 것이 그 내용의 핵심이다.
《수주관규록(愁州管窺錄)》은 69세 때 유배지 종성에서 저작한 것으로 장여헌ㆍ유서애ㆍ조남명 등 우리 나라 선배 학자 6인의 도학설의 불합당한 곳, 신안 진씨(新安陳氏)ㆍ경재 호씨(敬齋胡氏) 등 중국 학자 6인의 주자(朱子)와의 차이점에 대해 비판한 것이 그 내용이다. 둔암유공수록서(遁庵柳公隨錄序)는 유형원의 《반계수록(磻溪隨錄)》의 서문으로 유형원의 ‘경세유용지학(經世有用之學)’에 대해 찬탄하고 이러한 경세 방략을 품고 있었던 유형원이 세상에 쓰이지 못한 채 죽은 데 대해 애석해한 것이 그 내용이다. 별집(別集)의 정설(政說)에 대해서는 위에서 논급한 바와 같다.
부록에는 갈암의 연보, 행장, 가전(家傳), 제문, 만장(輓章)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 국역서에 추가된 속집(續集)과 《계축추보(癸丑追補)》는 갈암의 저작과 부록에 들어갈 글들로서 중간본에 빠진 것들을 모은 것이다. 그리고 《성유록(聖諭錄)》은 갈암의 소ㆍ차ㆍ계(啓)에 대한 숙종의 비답(批答)ㆍ전지(傳旨) 등을 모은 것이고, 《기갑신계록(己甲辛癸錄)》은 일명 《백의편(白衣篇)》으로, 기사환국 이후 갈암이 올린 문제의 인현왕후 보호 건의소로부터 갑술환국 이후 1723년경까지 갈암의 신원(伸寃) 운동에 관한 기록을 모은 것이다.
5. 맺음말
《갈암집》은 특히 다음의 두 가지 측면에서 중요하다.
그 첫째는, 퇴계에서부터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에 이르는 퇴계 - 영남 주리론의 발전 과정의 중요한 단계로서 17세기 영남 주리론의 진경(進境)이 집약되어 있는 저작이다. 특히 기호 지방 율곡학파의 이 시기 학설의 전개와의 대응에서 그 사상사적 의의가 더욱 제고(提高)된다.
둘째는, 갈암의 주리론은 17세기적 역사 상황의 산물이다. 《갈암집》은 바로 이 주리론으로서의 상황에의 대응 논리가 피력되어 있는 곳이다. 특히 그의 경세 방략과 시무책 등이 그것이다. 따라서 《갈암집》은 이 17세기 영남 도학파의 경세론이 그 시기에 출현하기 시작하는 실학파의 경세론과 어떤 관계에 서며 어떤 의의를 갖는가가 탐색될 수 있는 잠재성을 가진 최상의 문헌이다.
1999년 12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