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문장가 이제현은 소상강의 아름다운 여덟 경치를 사패(詞牌)* 중 하나인 ‘무산일단운(巫山一段雲)’을 사용해 묘사했다. 위는 그중 다섯 번째 저물녘 눈 내리는 강가 마을의 풍경을 담은 「강천모설(江天暮雪)」이다. 소상강의 경치들은 송나라 때부터 시제(詩題)나 화제(畫題)가 되어 직접 가 보지 않은 사람들도 시를 짓거나 그림으로 그렸다. 이제현은 중국에 오래 있었지만, 소상강에 갔다는 기록은 없는 것으로 보아 아마 소상강의 경치를 다룬 시나 그림을 접하고 나름의 상상으로 이 작품을 지은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전단(前段)은 구름이 일그러질 정도로 거센 바람이 불고 차디찬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가운데 눈이 지붕 위에 소복이 쌓여 있는 광경을 묘사했다. 여기서 3구의 ‘篩寒洒白弄纖纖(사한쇄백농섬섬)’ 구절이 재미있다. ‘篩寒洒白’은 한기를 체로 걸러 흰 가루를 뿌린다는 의미이다. ‘纖纖’은 곱디고운 눈을 지칭하며, ‘弄’ 자가 붙어 고운 눈을 가지고 논다고 해석된다. 이제현은 눈 오는 모습을 어떤 존재가 한기를 체 쳐서 나온 흰 가루를 가지고 노는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발상 때문인지 다음 구절의 소금을 집집마다 쌓아 놓았다는 표현이 더욱 익살스럽게 느껴진다. 후단(後段)은 인적이 드문 어촌 마을의 풍경을 묘사했다. 저물녘 고깃배가 돌아오고 인적도 흩어져 주막도 문을 닫았다. 삼경의 시간, 어느새 눈은 그치고 눈 내린 마을 위로 시리도록 흰 달이 떴다. 이제현은 눈과 달빛이 공존하는 광경을 눈의 빛이 달빛을 질투하여 성근 주렴을 쳤다고 표현했다. 여기서 성근 주렴의 의미가 심장하다. 날씨도 추운데 문을 닫았으면 닫았지 왜 주렴을 걸었을까? 혹시 주점 처마에 주렁주렁 걸린 고드름이 성근 주렴 같아 보였던 것은 아닐까? 눈이 달의 흰빛을 질투해 ‘쳇’ 하면서 고드름 주렴을 냅다 걸어 버렸다고 생각하면 전단과 마찬가지로 익살스러운 분위기가 잘 살아나는 듯하다. 이제현은 어린아이와 같은 눈으로 눈 내리는 강가 마을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로 인해 탄생한 재치 있는 표현들은 소상강의 겨울을 떠올려 보는 데 재미를 더한다. 이 시에 대한 번역과 해석은 필자의 감상에서 나왔을 뿐 결코 정답이라고 할 수 없다. 옛사람의 생각과 감정을 오늘날 있는 그대로 느껴 보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600년이라는 시간적 거리를 넘어 시인이 시를 통해 그려 놓은 풍경과 그 내면을 상상하고 그려 보는 것, 이것이 또한 한시 감상의 묘미 중 하나가 아닐까. *사패(詞牌) : 사(詞)의 곡조명이자 사를 짓는 형식을 말한다. 각 사패마다 구(句) 수, 자(字) 수, 압운(押韻), 평측(平仄) 등이 고정되어 있다. ‘무산일단운(巫山一段雲)’은 곡조명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