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남터에서 순교한 세 분 성직자 순교 성인의 유해가 모셔져 있던 곳
삼성산은 1839년 기해박해 때 새남터에서 순교한 앵베르(Imbert, 范世亨, 1796~1839, 라우렌시오) 주교를 비롯하여 모방(Maubant, 羅伯多祿, 盧, 1803-1839, 베드로) 신부와 샤스탕(Chastan, 鄭牙各伯, 1803~1839, 야고보) 신부의 유해가 안장되었던 곳이다.
삼성산의 유래 또한 설이 구구하다. 보통 원효, 의상, 윤필의 세 고승이 신라 문무왕 17년(677년)에 조그마한 암자를 짓고 수도에 정진하던 곳이 삼막사의 기원이며, 아울러 삼성산의 산명도 이 세 고승을 승화시켜 삼성산(三聖山)이라 칭했다는 설이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다.
삼성산은 1901년에 위의 세 순교자의 유해가 발굴되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며, 1970년에 사적지로 조성되었다. 1836년 이래 조선에 들어와 활동하던 모방 신부와 제2대 조선교구장 앵베르 주교, 그리고 샤스탕 신부 등 3명의 프랑스 선교사들은 기해박해가 일어나면서 앵베르 주교가 8월10일에,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가 9월 6일에 각각 자수하여 포도청과 의금부에서 문초를 받은 후 1839년 9월 21일(음 8월 14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순교 후 선교사들의 시체는 20여 일간 새남터 모래사장에 버려져 있었는데, 그동안 신자들은 이들의 시신을 찾기 위해 여러 차례 노력하였고 몇 명의 신자들은 체포되기까지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 바오로 등 몇몇 신자들은 마침내 세 순교자의 시신을 거두어 노고산(마포구 노고산동)에 안장할 수 있었다. 이로부터 4년 뒤인 1843년에 그들의 유해는 박 바오로 등에 의해 다시 발굴되어 과천 땅이던 관악산의 한 줄기인 박씨 선산에 안장되었는데, 이곳이 곧 지금의 삼성산이다.
이때 신자들은 훗날을 위해 그 이장 연도와 세 순교자의 이름을 아직 마르지 않은 회 반죽에 글을 써서 자연스럽게 마르게 했던 것으로 보인다. 1886년경에 시복 판사를 맡았던 푸아넬 신부가 이 무덤을 확인하였고 1901년 10월 21일에는 제8대 조선교구장 뮈텔(Mutel, 閔德孝, 1854~1933, 아우구스티노) 주교가 지켜보는 가운데 유해가 발굴되어 용산 예수 성심 신학교로 옮겨졌으며, 같은 해 11월 2일에는 다시 명동 성당 지하 묘지로 옮겨지게 되었다.
명동 대성당 묘역 안에 남아 있던 성인 유해 일부를 다시 삼성산으로 가져와 무덤 안에 안치하였다. 이들 3명은 1857년에 모두 가경자로 선포된 데 이어 1925년에는 복자품에 올랐으며,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 칼날보다 서슬 푸른 (삼성산에서) <김영수> ▒
먼 먼 땅에서 뜨거운 꿈 품고
거칠고도 어둔 이 땅 찾아 와
빛을 내면서 빛으로 장히 사라진 이들
피로써 이룬 고백에는
늘 하늘 밝아 있는 것입니까
칼날보다 서슬 푸른 기도로
하늘 여는 일, 그 서늘한 그늘에서
빛나며 식지 않는 약속
가장 멀리로 떠나는 일이
가장 가까이로 돌아오는 일입니까
내가 어둔 골목에서도
하늘 잃지 않는 것은
내 아직도 약속 기억하고 있음입니까
흰 구름들이 일제히 푸른 숲에 내리며
맑게 익는 피의 향기에다 머리를 풀고
한낮에도 보이는
씻은 별 하나씩 그려내고 있습니다
■ 순교자
◆ 성 범 라우렌시오 앵베르(Imbert) 주교(1796∼1839)
한국 이름은 범세형(范世亨), 조선교구 제2대 교구장이며 주교로는 처음 한국 땅을 밟았다. 조선교구 초대 교구장인 소 브뤼기에르 주교가 입국도 못한 채 병사하자 제2대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되어 1837년 5월 주교 품을 받았으며 같은 해 말 조선 입국에 성공하였다. 그의 입국으로 조선 교구는 그보다 앞서 입국한 나 모방, 정 샤스탕 두 신부와 더불어 교구 설정 6년, 교회 설립 53년 만에 비로소 선교 체제를 갖추었으며, 1839년 초 신자 수는 9천 명을 넘게 되었다.
그는 또한 한국인 성직자 양성에도 뜻을 두어 정하상 등 네 명의 열심한 신자들을 뽑아 사제로 키우고자 하였으나 때마침 불어 닥친 박해로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났을 때 자신의 거처가 알려지게 되자 교우들에게 화가 미칠 것을 염려하여 스스로 포졸들에게 잡히는 몸이 되었다. 나, 정 두 신부에게도 인편으로 자수할 것을 권유하여 다같이 1839년 9월 21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았다. 이 때 그의 나이는 43세였으며 조선에 입국한 지 불과 2년 만이었다.
◆ 성 나 베드로 모방(Maubant) 신부(1804∼1839)
한국 이름은 나 백다록(羅伯多祿), 서양인으로는 최초로 조선에 입국하여 순교한 신부로 1836년 1월 입국하여 서울 정하상의 집에 머물며 제2대 교구장인 범 주교를 도와 경기 충청 등 지방까지 선교하였다. 그는 한국인 성직자 양성에 마음을 두고 1836년 2월에 최양업을, 3월에는 최방제를, 7월에는 김대건을 서울로 불러 직접 라틴어를 가르치고 성직자가 되는 데 필요한 덕행을 쌓게 하다가, 때마침 귀국하는 중국인 유방제 신부와 함께 이들을 비밀리에 마카오로 유학 보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고 성직자가 3명이나 입국한 사실이 당국에 알려지게 되자 범 주교에 이어 자수하였다. 1839년 9월, 홍주에서 정(샤스탕) 신부와 함께 서울로 압송되어 모진 형벌을 받은 끝에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그의 나이는 35세, 한국에 입국한 지 3년 9개월 만이었다.
◆ 성 정 야고보 샤스탕(Chastan) 신부(1804∼1839)
한국 이름은 정 아각백(鄭牙各伯), 두 번째로 조선에 입국한 서양인 선교사이다. 1827년 1월 파리외방전교회 사제가 된 정 샤스탕 신부는 1836년 12월 조선 입국에 성공하여 곧 한국말을 배우는 한편 나 신부와 함께 각 지방에 퍼져 있는 교우들을 찾아 성사를 거행하였다. 당시의 서양인 성직자들은 상제 옷으로 변장하고 험한 산길을 헤매야 했고, 소금에 절인 야채 따위로 주린 배를 채워야 했으며, 밤새도록 고해성사를 주고 미사를 드린 다음 날 새벽에는 또 다른 마을로 길을 재촉해야만 했다.
그들은 이러한 고난을 감수해 가며 오직 복음 전파에만 힘썼던 것이다. 1839년에 일어난 기해박해는 이 땅을 수많은 천주교인들의 피로 물들였고 정 신부도 범 주교, 나 신부와 함께 그 해 9월 새남터에서 순교의 월계관을 쓰게 되었다. 그의 나이는 35세, 이 땅에 들어온 지 2년 9개월 만이었다.
○ 성 범 라우렌시오 앵베르, 성 나 베드로 모방, 성 정 야고보 샤스탕과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 성 범 라우렌시오 앵베르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우리 나라의 모든 주교들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
○ 성 나 베드로 모방과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우리 나라의 모든 외국인 성직자들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
○ 성 정 야고보 샤스탕과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우리 나라의 모든 성직자들의 정결과 순명정신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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