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계사
화계사는 1522년(중종 17)에 신월 선사(信月禪師)가 창건한 절이다. 원래는 고려 때 법인 대사(法印大師) 탄문(坦文)이 화계사 인근에 보덕암(普德庵)을 세우고 오랫동안 법등을 이어왔는데, 신월 선사가 현재의 자리로 옮겨 짓고 절 이름을 화계사라고 하였다. 그래서 절 측에서는 보덕암을 화계사의 전신으로 여긴다.
화계사가 창건된 조선시대는 불교를 억압하고 유교를 장려하는 정책을 펴던 시기였다. 그런 까닭에 조선시대 500년을 우리나라 불교의 역사에서는 가장 어두웠던 시대로 꼽는데,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정책적으로는 불교를 탄압하였으나 실제로는 왕실에서까지 불교를 믿었다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서울 근교에는 화계사를 비롯해 도선사와 흥천사, 망월사 등 왕실 사람들이 드나들던 절이 꽤 많이 남아 있다.
화계사는 창건 때부터 왕실 가족이 참여하였다. 신월이 서평군(西平君) 이공(李公)의 도움을 받아 법당 3처(處)와 요사 50칸을 짓고 절 이름을 화계사(華溪寺)라 한 것이다. 그러나 채 100년도 지나지 않은 1618년에 화재로 전소되어 이듬해 3월 도월(道月)이 재건하였는데, 이때는 덕흥대원군 (德興大院君)가문에서 시주하였다. 덕흥대원군은 중종의 일곱째 아들로 선조의 생부이다. 그리고 1866년에 용선(龍船)과 범운(梵雲) 양 선사가 불전과 승방 건물들을 중수할 때 시주한 사람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다.
왕실의 비호 아래 절의 특색을 살리면서 착실히 발전해온 화계사는, 특히 흥선대원군의 원찰이라 불릴 정도로 흥선대원군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러한 인연으로 대원군은 절 중창을 위해 시주를 하였으며, 전각 곳곳에 자신의 글씨를 써놓기도 하였다. 1933년에는 한글학회 주관으로 이희승, 최현배 등 국문학자 9인이 화계사에 기거하면서 한글맞춤법 통일안을 집필한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
화계사 입구 국제선원
화계사 비림과 부도
화계사 대적광전
화계사 범종각
화계사 대적광전
화계사 화장루
화계사 천불오백성전
화계사 천불오백성전내
화계사 대웅전
서울특별시유형문화재 제65호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다포식 팔각지붕 건물로 1870년(고종 7) 용선(龍船)과 초암(草庵) 스님이 화주가 되어 중건한 것이다. 1870년에 환공야조(幻空冶兆) 스님이 지은 《화계사대웅보전중건기문(華溪寺大雄寶殿重建記文)》에 의하면 석수(石手) 30명, 목공(木工) 100명이 불과 수개월 만에 완성했다고 한다.
정면 3칸의 각 칸에는 사분합의 띠살문이 설치되어 있는데 모두 들어열개 형식으로 개폐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대웅전의 편액 글씨는 조선 후기의 명필인 몽인(夢人) 정학교(丁學敎)의 필체로 단정하며, 주련(柱聯)의 글씨는 중국 송나라 때 보제(普濟)스님이 집록한 어록체의 선종사(禪宗史) 사서인 『오등회원(五燈會元)』17권에 나오는 내용을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수제자인 신관호(申觀浩)가 쓴 것이다
안에는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양옆에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봉안하였는데,『삼존불신안연기서(三尊佛新安緣起序)』현판에 의하면 1973년 조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삼존상 뒤에 봉안된 아미타후불탱은 1875년(고종 12)에 화산(華山)스님에 의하여 조성된 것이고, 1969년 조성한 신중탱이 봉안되어 있다.
화계사 대웅전내
화계사 삼성각
화계사 삼성각내 독성탱
화계사 삼성각내 칠성탱
화계사 옥외 나한전
화계사 명부전
명부전내 지장보살상
명부전내 시왕상
명부전내 시왕상
화계사 대적광전내
화계사 전경
화계사 찾아가는 길
서울 시내에서 도봉로를 따라 방학동쪽으로 가다가 수유역을 지나 강북구청 앞에서 U턴하여 다시 수유4거리로 내려온다. 여기서 우회전하여 직진하면 화계사입구4거리가 나오고 다시 교차로를 지나 직진하면 한신대학원 앞 화계사입구이다. 이곳에서 곧장 직직하여 300m 정도가면 화계사에 닿는다.